2017.04.09 17:32

<일반의지 2.0>과 엔하계 위키, 그리고 친목사회


일반의지 2.0 - 8점
아즈마 히로키 지음, 안천 옮김/현실문화


단 해명부터 해두자. 나는 아즈마 히로키의 논의 그 자체에 대해서는 좋아한다. 그가 정리한 내용의 흐름, 그러니까 자신의 주장을 이끌어 내는 방식에 대해서는 좋아한다. 하지만 그가 주장하는 바는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자세히 살펴보고 있다보니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전에도 아즈마 히로키의 논의에 대해 크게 비판했는데, 이번에도 비판할 수 밖에 없다. 미리 양해를 구해둔다.

   엔하계 위키 이야기를 하기 위해 아즈마 히로키의 <일반의지 2.0>부터 다루고자 하는 이유는, <일반의지 2.0>이라는 개념이 가장 현실적으로 실현되고 있는 장소가 바로 한국 남성들이 주도하는 커뮤니티, 그리고 그 안에서의 커뮤니케이션 방식과 닮았기 때문이다. <일반의지 2.0>은 한국 사회의 무친목사회의 개념이 정확하게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그리고 그 방식이 왜 틀렸는지를 쉽게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좋은 도구다. 즉, <일반의지 2.0>을 통해 아즈마 히로키가 다룬 제안은 한국 사회와 엔하계 위키라는 -'다른' 것을 넘어 '틀렸다'고 판단하고 말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를 정도로 명확한 - 반례에 마주친다.

문제 1 : 일반의지의 조작가능성

<일반의지 2.0>의 한국어판이 출간되고(2012. 7. 10) 정확하게 다섯달이 지난 2012년 12월 11일부터, 한국 국민들은 당장 '일반의지'(General Will)의 무용성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당시 서울의 모 오피스텔에 머물러 있던 故 김하영 회사 직원(지금은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故라는 표기를 썼다)은 대선에 대입하기 위해 댓글을 달고 있던 중 갑자기 저녁에 들이친 민주통합당 의원들과 경찰들에 의해 적발당했다. 그러나 김씨는 자신이 소속된 심리정보국의 지시를 받고 해당 사실을 은폐했고, 대선이 치뤄진 이후 지속적으로 이뤄진 검찰과 대안언론 뉴스타파, JTBC의 조사가 있고 나서야 사실이 밝혀졌다.

   김씨를 포함한 여러 국정원 요원, 그리고 외부 조력자들은 국정원 상부의 지시에 따라 내부 비용으로 박근혜를 지지하고 문재인 당시 후보를 비난하는 댓글을 트위터와 뽐뿌, 보배드림, 일베 등의 SNS와 커뮤니티 게시판에 다중계정을 통해 다량으로 올렸으며, 이러한 사실이 빅데이터 회사들에 의해 밝혀지자 즉각적으로 해당 내용을 삭제하는 등 증거조작도 서슴지 않았다(물론 명품타임라인 윤정훈 목사의 십자가 알바단과 같이 당시 새누리당 내부에서 일어난 조작 움직임이나, 사이버군의 군기문란과는 별개의 움직임이었다). 즉 현재 박근혜 대통령은 당시 이명박 정부의 행정부와 입법부 일부가 결합해 만들어 낸 일방향적인 의견 조작에 의해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을 밝혀내는 즉시 박근혜 대통령은 수사에 임한 윤석렬 검사를 좌천시키고, 채동욱 전 검찰총장은 사적 사건을 드러내 결국 퇴임시켰다. 그리고 박근혜는 퇴임하지 않았다.

   이후 박근혜 대통령은 줄곧 여론의 조작을 지속적으로 꾀하고, 자신의 사익을 추구했다. 박근혜 정부는 최순실과 전 김기춘 비서실장의 조언에 의해 2014년부터 문화계, 스포츠계 등 각종 정부지원금 사업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의 목록인 블랙리스트를 만들었으며, 이에 반발하는 유진룡 전 장관을 해임해, 심사결과와 무관하게 이들을 지원결과에서 제거하고, 이를 통해 '종북좌파'의 돈줄을 끊었다. 동시에 박근혜 정부는 이명박 정부에 이어 이른바 '종북좌파'로 불리는 환경운동연합, 참여연대 등의 사회단체에는 지원을 끊고, 반대로 아무런 사회공헌 없이 박근혜 정권에 유익한 목소리를 내놓은 어버이연합, 미디어워치 등의 여론조작 기관에는 전경련 등을 통해 재정을 우회지원했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의도적으로 만든 것이다.

   그 결과 최순실의 국정농단은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의 생성 및 정부와 기업에서의 예산 뜯어내기로 이어졌고, 결국 이러한 사실들이 폭로되면서 작년 12월 9월에서야 박근혜는 탄핵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이라는 이승만의 자유당이나 일본 자유민주당을 연상케 하는 아연실색한 이름으로 당명을 바꾸고, 이미 보도된 바와 같이 행정부의 수반인 황교안 대행은 자유총연맹에 돈을 지원하면서 3월 1일에 100만명의 시민을 반대집회에 동원하도록 지시해 이러한 공론장 왜곡을 꾀하고 있다.

   그렇다면, 애초에 공론장이 정부에 의해 조작될 수 있는데, 일반의지가 정상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아즈마 히로키는 <일반의지 2.0>에서 이러한 공론장이 트위터 등의 SNS에 의해 오롯이 존재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애초에 원래의 데이터베이스의 조작 및 개입 가능성이 농후하고, 그러한 의견들을 나머지 개인의 의견과 분리해 볼 수 있는 방법론이 없는 한, SNS를 통한 일반의지의 형성은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당장 아즈마 히로키가 의지하는 댓글의 결과물 자체가 한국에서는 정부나 정당이 운영하는 댓글부대, 망○지, 장○ 냉면 등의 사이비 집단, 박사모를 포함한 '적극적 의사표현집단'들에 의해 왜곡될 가능성이 높고, 그런 사례가 한국에서 수도 없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상기하고자 한다.

이게 나라냐? (출처 : 연합뉴스)


   이러한 의문을 품을 수 밖에 없게 하는 또 다른 곳이 북괴일 것이다. 북괴는 자신들이 민주주의 국가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소위 민주주의적 투표를 한다. 하지만 실제로 투표로 발표되는 결과는 98%, 99% 이상의 찬성결과다. 즉 해외에 나가 투표할 수 없는 사람을 제외한 숫자 전부가 로동당이 제시한 단일후보에 찬성투표를 한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나오는 슬로건이 '모두 다 찬성투표하자!'다. 그런 투표를 통해서 '일반의지'가 형성되었으므로 김정일 김정은의 독재체제가 합법적으로 형성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객관적으로 보면 불가능하다.

   이와 같이, 실제의 일반의지와 다른 가시적인 '일반의지'가 정부나 다른 조직에 의해 형성될 가능성이 농후하고, 그러한 의지가 실제 통치기반을 지지해주는 것처럼 보일 가능성이 많다. 따라서 기존 일반의지와 다르게 나오로록 유도된 '일반의지'에 대해 다른 이름을 붙여 루소와 아즈마가 주장하고자 하는 일반의지와 구분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는 일단 의사일반의지(Pseudo General Will)라는 이름을 붙여보자.

   박근혜 정권이나 북괴정권이 만들어낸 '일반의지'를 구분해서 원래 일반의지와 구별해 본다면, 이해는 간단해진다. 박근혜 정권이 강변하거나, 유지하거나, 실제 국민의 뜻이라고 대변한 의사일반의지는 대한민국 국민의 일반의지와 충돌하거나, 상반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다면 의사일반의지에 의해 생성된 정책 결과나, 아즈마 히로키가 그토록 비판한 '숙의민주주의'에 의해 생성된 결과나 동일하게 일반적으로 편향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일반의지 2.0>이 제시한 개념은 일반의지에 의사일반의지가 결합된 왜곡된 결과를 낳을 수 밖에 없는것으로서, 오히려 일반 절차에 비해 더 많은 빈도로 왜곡된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인데, 이 개념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다.

문제 2: 구성원의 자격

<일반의지 2.0>에 따르면, 일반의지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항상 개인간의 의견 토론이나 의견 조정, 정당이나 결사와 같이 개인의 자발적인 의견을 훼손할 수 있는 내용(아즈마, 2012:52)은 배제되어야 하며, 정부는 일반의지를 즉각적으로 수집할 수 있도록 구성해(p. 39), 개인의지를 합친 결과물인 전체의지를 제대로 분석해 백터값을 제대로 계산해내고(pp. 46-7), 그 결과물인, '항상 옳고 공공의 이익을 향하고 있는'(p. 44. 루소의 말에서 재인용) 일반의지를 즉각적으로 실행해낼 수 있는 '중간단체'(p. 39)로서만 기능해야 한다.

   그런데 일반의지의 구현을 위해서 루소가 또 하나 더 강조한 것이 있다. 루소는 '공동선'을 이루기 위해 동질한 집단의 연합인 사회를 구성하기 위한(오근창, 2013:74) 필수적인 수단이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봤다. 첫째로 시민이 '공공선'을 인지하기 위해서 입법자가 입법 전에 '사회적 정신'을 양성시켜 공동체에 들어오거나 그 안에서 태어난 인간이 공동체의 일반의지를 준수하도록 만드는 것이다(:77). 둘째로, 이를 위해, 공동체를 애국심, 또는 '사회성의 감정'에 기반해 사랑하도록 만들기 위한(:79) 문화자본-사회자본을 구성하기 위해, 시민종교를 지정하고, 모든 공동체가 같은 종교 아래에서 '조국'을 사랑하도록 제안한다(:80).

   그렇다면 공동체의 일반의지는 항상 타당하다는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는, 공동체에 새로 들어오거나 공동체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공동체의 일반의지를 드러내기에 적절한 인성이나 품성을 갖추지 않았을 때, 이를 교정하거나, 그들을 공동체나 공동체의 의사결정과정에서 내쫓아내면 된다는 결론이 쉽게 도출된다. 간단히 말해 일반의지는 일반적으로 동질적이거나 일원화된 사회에서라야 정상적으로 작동된다는 의미기도 하다. 세계화의 여파로 다원화, 다문화로 구성되어가고 있는 현재의 사회에는 적절하지 않은 방식인 셈이기도 하다.

현재는 당연하게 여기는 여성 투표, 아무렇게나 이뤄진 결과가 아니다.(Voice of America, PD)


   어쨌거나, 유일종교 형성을 위한 타종교 탄압이나 민주주의 탄압(은 이미 심각한 인권침해라는 사실이 자명하지만)을 통해 이런 절차를 충실히 거쳐 국민의 일반의지를 파악할 수 있는 단계에 도착한다고 치자. 그렇게 형성된 일반의지는 유지될 수 있는가. '집단'의 일관성이 항상 유지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집단의 일관성은 언제나 도전받으며, 더군다나 역사의 진행에 따른 결과물은 집단의 의사결정 참여권과 중요한 역할을 가진 사람의 수가 시간이 지날 수록 늘어나는 일관적인 현상을 보여왔다. 이미 인류는 흑인과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받기 위해 많은 피와 시간을 소비했고, 그 결과 현대 사회는 여성이나 흑인들의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이들의 일반의지와 기존의 '일반의지'가 충돌할 때, 단순히 이들이 합쳐진다는 것만으로, 올바른 '일반의지'가 측정될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은 우리가 이미 경험하고 있다. 핫한 이슈들을 제외하고 나서더라도, 우리는 장애인이나 노인이 일반 남성들과 동일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러한 상황을 느끼고, 살아나가고 있다. 심지어 개방된 믿음-사랑 공동체라는 개신교 교회라도, 가톨릭 교회라도, 어느 상가라도, 모든 공동체에서 발언권의 정도가 동일한 곳은 아무 곳도 없다. 어디선가는 자신의 발언의 권한이 깎여져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다. '적법한' 모든 사람들이(여기에서 어린이나 범죄자는 일단 빼 주도록 하자) 자신의 배경에 의해 발언권이나 의결권을 제한당한다면, 그리고 누군가에 의해서 언제라도 그 의결권이 제한당할 우려가 있다면, 그 사람들이 빠져 있는 상태에서 이뤄지는 정치행위는 정당한가. 여기에 하나 더해, 최근 다문화 사회 문제로 발생하는, 공동체 속으로 들어오는 외국인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문제 3: 파당이 없더라도, 차이는 존재한다

셋째로 살펴봐야 할 점은, 루소가 '일반의지'의 활성화 요건의 하나로, 파당이나 사전담론 구성의 금지, 더 정확하게는 '시민 상호간에 어떤 소통도 없는 상태'(오근창, 2013:72, 사회계약론 :371-372에서 재인용)를 명시했다는 점이다. 이 주장을 그대로 실현하기 위해 파당이나 사전담론 구성을 금지한 가장 효율적인 사례가, 조지 오웰의 <1984>의 국가 IngSoc이 나타내는 공통의 비판 대상과 강력한 숙청이나, 그 곳의 현실판인 북괴에서 나타내는 상호비판과 수용소 제도라는 사실만을 살펴도 분명한 바, '부분적 사회'(Partial society, ibid.)를 없애기 위한 노력은 결국 인간 본성과 인권에 대한 침범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할 수 밖에 없다. 즉 일반의지가 생기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전적 조건은, 사실 이성적 판단을 빌미로 한 비인간성이다.

   그렇지 않고, 이성적 판단이나 대화가 존재한다면, 과연 그 안에서 어떤 결과가 발생하는가. 루소가 비판하는 특수의지가 자연적으로 생겨난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아즈마 히로키가 희망을 걸고 의지하는 트위터 등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가 한국에서 어떻게 발전되었는지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물론 라운지를 갖췄던 플레이톡이라는 반례를 여기에서 무시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관리자에 의한 종국을 생각하면, 이렇게 형성된 일반의지가 언제라도 파괴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2009년 트위터 붐이 시작된 이후 2011년까지, 트위터는 하나의 공론장으로 인식됐다. 생각해 보면 이런 결과는 플레이톡 사건 이후 사용자들이 트위터로 나오면서 강화되기까지 했다. 그 당시를 떠올려보면 모르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쉽게 만날 수 있거나 친해질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모든 사람들이 이 공산을 소통의 공간으로 생각하고 대화를 이어 나갔으니, 당연히 사회적 공론장의 기능을 충분히 소화할 수 있을 줄로 생각했다. 하지만 201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이런 모습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 확실한 증거가 이찬진 전 한글과컴퓨터 사장이 개발한 서비스 twtkr과 다양한 당 활동을 트위터를 통해 제공했던 twtmt의 몰락이다. 여기까지만 읽고 보면 트위터라는 공론장이 특수의지를 배척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고, 일반의지를 형성해주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미 2010년도부터 일반적 공론장보다는 더욱 세부화된 특수공론장의 존재가 그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그것이 보여주는 것이 TL계다. 타임라인이라는 단어를 차지한 TL계, 또는 '애니프사'로 불리는 주로 10-20대 남성들의 그룹이 2010년도 초부터 생겨나기 시작했다(참고로 이들의 타임라인을 수집해 볼 목적으로 @e1if를 저자가 만든 시점이 2010년 6월이다). 물론 그 당시 기존 트위터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있었지만, 이들이 동시 시점에 트위터에서 나눴던 담론의 내용은 기존의 한국 트위터 사용자들과는 달리, 주로 만화-애니메이션 동호문화나 리듬게임 등의 내용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타임라인 내용은 기존의 담론과 다른 특수의지의 발현일 수 밖에 없었다. 이 시기에 생겨난 기타 당들도 별도의 해시태그를 달고 트위터 안에서 결과적으로 또래별 움직임과 같이 분리된 집단을 형성했다는 점에 유의하자.

   이 글이 한국 트위터사를 쓰려는 목적이 아니므로 짧게 더 언급하자면, 이후 2013~4년부터 그 대척점에 여성 코스어를 포함한 여성 만화-애니메이션 동호인들, 대중문화 팬덤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 또한 자신들의 선호에 따라 자신들의 친구가 될 사람들을 선택했으며, 특히 기존 TL러들이 구축해 사용하던 봇 기능을 캐릭터를 이입시키는 새로운 방식으로 전환했다(이 과정에서 수동봇 기능에 대한 남TL-여TL간 설전이 있기도 했다). 그 결과 이들 또한 트위터에서 새로은 비가시적인 사용자그룹으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모습이 한국에서만 발생한 특수사례일까? 그렇지 않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일본의 코스어나 철도동호인들도 이미 나름대로의 비가시적 유저 그룹을 형성하고 있고, 이들의 대화 내용 또한 일반인들의 그것과는 분리되어 있다.

여TL과 남TL 모두를 정치 장(field)에 끌고 들어온 김용익 전 의원의 공로를 무시할 수 없다. (출처:twitter.com)


   그렇다면 이 사례를 다시 우리가 검토할 주장에 비추어 살펴보도록 하자. 아즈마의 <일반의지 2.0>의 가능성은, SNS, 특히 트위터의 '비분할된 하나의 공론장'을 형성하고, 이를 통해 '모두'의 '일반의지'를 즉각적으로 수렴할 수 있다는 기능을 바탕으로 제안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 트위터만 해도 하나의 '공개되어 있는 언어별 언론에 의한 공론장'은 나이와 성별, 문화자본이나 사회자본, 정치적 성향, 종교 등의 비가시적인 구성요소들에 의해 잘게 조개져 있다. 이런 상태에서 단순히 트위터를 일반의지를 형성할 수 있는 통로로 보기에는 큰 무리가 있다. 당장 트위터만 해도 공개적인 라운지가 아닌 사용자에 의한 폴로잉에 의해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그 과정에서 네트워크 바깥의 정보를 공식적으로 수집하는 데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점들이 더욱 심화된 장소가 페이스북이나 카카오스토리 등의 폐쇄적인 SNS다. 많은 소셜미디어 업계인들은 카카오스토리를 주로 20대 후반 ~ 30대 어머니들의 소통 공간으로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카카오스토리를 젊은 주부들에게 마케팅하기 위한 공간으로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 한켠에는 코스어들이나 만화-애니메이션 동호인 등이 상당수 있다. 이들의 소통 내용 또한 젊은 주부의 그것과 전혀 다르고, 더군다나 이들의 네트워크들은 결과적으로 몇몇의 소수 링크를 제외하면 메인스트림과 분리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들 SNS에서는 <일반의지>가 여러 개가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가? 일반의지가 전체 담론을 수용하는 공론장 개념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이들 네트워크에서는 특수의지들만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해 준다.

   또한 SNS와 같이 자발적인 서비스에서는 한국 국민이나 일본 국민과 같이 일정 사회 구성원의 일반의지를 수집하고자 하는 시도에도 무리가 있다. 우선 폴로잉이나 이를 차단하는 것은 사용자의 자유이므로 하나의 계정이 모든 계정을 폴로잉하는 것을 수락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즉, 일반의지 구성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또한 같은 언어권에 있고 타자의 언어를 이해하고 표출하기에 큰 어려움이 없지만, 집단의지를 구성하기에 적정하지 않은 구성원들이 해당 일반의지 구성을 위한 단계에 끼어들 수 있다. 또한 인터넷 사용이 어려운 어르신, 신체 장애인(정신/발달장애의 문제는 여기서 잠시 미뤄두도록 하자) 등의 정보취약계층은 당연히 SNS에서 다른 일반인과 동일한 만큼의 의사표현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SNS를 포함한 네트워킹 서비스는 특수의지들을 더욱 극명히 드러내는 역할을 할 뿐, 특수의지들 속에서 일반의지를 드러내는데 기여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반론 : 통계학적 관점에서?

그러나 다음과 같은 반론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아즈키 히로마는 루소가 벡터 개념을 이용해 의견을 수학적으로 도출할 수 있는 상태를 예측했으며, <일반의지>가 수학적인 존재이자 사물적인 존재로서 존재한다고 봤다(아즈마 히로키, 2013:). 즉 일반의지의 구성은 자신의 내용만을 피력할 수 있는 충분한 물리적 조치가 이뤄진다면 충분히 성립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주장하는 집단들의 차이가 실제로 파당으로는 나타나지 않은 상태이므로, 이들의 차이는 일반의지를 나타내는 데 무리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충분히 이러한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통계학에 따르면 모집단의 수가 많아질 수록, 실제 결과와의 오차는 크게 줄어든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의 일반의지가 구축될 수 없는 상황에 있다고 하더라도,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모아 구축한 일반의지라면 실제 일반의지와의 차이가 적지 않겠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답하고 싶다. 우선 SNS가 구축한 모집단이 한국인이나 일본인 등의 국민 일반을 대표하는 집단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하물며 1000명짜리 설문조사라도 국가 국민의 인구 구성비율에 맞춰 최대한 가깝게 구성해서 설문을 진행한다. 심지어 모든 사람이 응답할 수 없는 모집단인 RDD(무작위 전화방식)로 전화를 걸더라도 전화를 받은 설문 대상자가 미리 설정된 해당 나이대나 연령대에 배정된 사람 수를 넘어선다면 그 사람에게서는 설문을 받지 않는다. 그런 물리적인 모집단 구축이 SNS에서는 가능할까? SNS에서는 계정 뒤에 있는 사람의 개인정보를 셀러브리티가 아닌 이상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들다. 나이나 연령도, 라이프스타일도 글재주와 문화자본이 있다면야 넷카마(ネカマ) 같이 쉽게 속일 수 있다. 그렇다면 트위터라는 모집단에서 추출한 사람들이 실제 한국 국민이나 일본 국민의 일반의지와 유사한 결과에서 얼마나 큰 오차범위를 가질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아마 생각보다 더 많은 오차가 발생할 가능성을 더욱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마땅하리라.

   따라서 우리는 인터넷 상에서 형성되는 의견이 완전한 인간이나 해당 국가, 사회 구성원의 전체 의지를 항상 대변할 수 없고, 한 사람이 다수의 내용에서 습득할 수 있는 내용은 그 사람이 속해 있는 네트워크에 따라 달라지므로, 이 네트워크에서 습득한 <일반의지>는 사실 국가-지역 공동체, 또는 어중의 일부로 구성된 '파당'에서만 모을 수 있는 내용을 모은, 이른바 유사일반의지에 가까울 수 밖에 없다는 추론을 도출할 수 있다. 이 추론의 이론적 정합성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다른 분들이 논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제 유사일반의지가 '파당'속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엔하계 위키 사례를 통해 살펴보도록 하자.

무엇이 일어났는가

티셔츠 한장의 힘. (출처: tumblbug.com)


나 같은 ‘한남충’ ‘개저씨’의 눈으로 봐도 너무들 한다. 이제야 메갈리안의 행태가 이해가 될 정도다. 듣자 하니 이들이 자기와 견해가 다른 웹툰 작가들의 살생부까지 만들어 돌렸단다. 그 살생부에 아직 자리가 남아 있으면 내 이름도 넣어주기 바란다. 메갈리안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 빌어먹을 상황은 나로 하여금 그 비열한 자들의 집단을 향해 이렇게 외치게 만든다. “나도 메갈리안이다.”
- 진중권(2016년 7월 27일), 매일신문, '나도 메갈리안이다'

진중권 교수가 이렇게까지 말하게 한 '집단'은 사회 집단이 아니었다. 그들은 서로 얼굴도 모르고, 그곳에서 만나는 다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활동을 하는지에 대한 관심도 없다. 그러나 이들은 사회에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한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소비자'의 힘으로 이를 밀어붙였다. 나중에는 해외에도 존재하지 않는 '성평등주의'라는 개인연구의 결과물이 실존하는 학술 개념인 것처럼 문서를 작성하고, 모두가 실존하는 개념으로 인식하도록 하는 위키얼리티(Wikiality : 위키에 글을 올려 '현실'을 수정하고자 하는 반달리즘) 행위를 저지르기까지 했다. 바로 익명의 나무위키 편집자들이다. 어쩌다 집단지성 위키 편집자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폭력을 가하는데까지 이르게 됐나.

   이 사건은 클로저스의 신 캐릭 '티나'에서 목소리 성우로 활동하게 된 김자연 성우(이후 '김자연'이라고 칭한다)가 2016년 7월 '메갈리안4'를 위한 텀블벅 펀딩 결과물인 'Girls do not need a prince' 티셔츠를 찍은 사진을 올린 작은 행동에서 시작됐다. 당시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남성들의 부당한 분노가 형성된 상황에서, 이 '작은 행동'에 분개한, '남성옹호론'을 가진 편집자들은 이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목록을 근거를 붙여 나무위키에 목록으로 남겼다. 그 자체로는 일상생활 사회에서 영향을 끼칠 수 없을 법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지속적으로 트위터나 페이스북으로 김자연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목록화한 결과는 처참했다. 이 리스트에 올려진 상당수가 계약 해지를 당하고, 작가나 제작자들에게는 환불 사례가 이어지는 등 물질적인 손해가 이어졌다. 

   문제는 이러한 물리적인 피해가 단순히 만화-애니메이션 문화 뿐만이 아니라, TRPG 같이 논리적으로는 관계가 없어보이는 문화구성원, 심지어 시사iN이라는 공식적인 언론 매체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물론 소비자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콘텐츠 구매를 취소하거나 거절하는 등의 다양한 소비자 권리를 행사할 능력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의지와 반한다는 이유로 타인의 표현의 자유를 훼손할 정도까지 압박을 주는, 폭력을 행사할 규모의 '권리행사'는 곧 정당하지 않은 폭력이 되기 마련이다. 또한 이러한 폭력은 다른 사람에 대한 차별 행위이기도 하다. 장애인에게 동일한 수준의 차별이 이어졌다면 곧바로 장애인차별법에 의해 처벌받았을 분명한 차별행위였다.

   이런 결과는 현재까지 나무위키에서 일으킨 가장 큰 지적 사기 사건인 성평등주의 사건이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성평등주의 날조사건은 김자연 성우 사이버 폭력 사건이 진정되어 가던 2016년 8월 2일, 한 나무위키 편집자가 성평등주의라는 문서를 작성한 것으로 시작된다. 이 문서에 대해서는 대학원생 연구자나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했으나, 이러한 문제제기는 어김없이 막혀졌다. 결국 이 사건은 한 페미위키 사용자가 반대근거를 정당하게 제시하고 나서야 날조사건으로 정리되었으나, 해당 문제를 제기한 사용자는 괴씸죄로 차단되기에 이른다.

   우리는 이들의 모습을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서도 본다. 박근혜 대통령을 찬성하는 시위를 하는 사람들이 세월호 뱃지를 단 사람이나, 자신들의 입장을 보도해 온 MBC를 제외한 언론기자들에게 적대감을 보내는 일은 이제 익숙할 지경이다. 심지어 우리는 2017년 3월 10일 탄핵 가결과 함께 지지자들이 기자들의 카메라를 빼앗아 가고, 육중한 철사다리로 그들을 타격하며, 심지어 (기존의 '좌빨' 시위자들도 감히 시도하지 않았던 결과인) 경찰차를 빼앗아 폴리스라인을 파괴하고, 그 사이로 쳐들어가는 '폭동'을 목격했다. 이들의 모습과 엔하위키 사용자, 또는 '남성 누리꾼'들의 폭력성은 단지 자신의 주장을 실현하기 위한 폭력이 결과적으로 성공해 효력을 끼쳤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만 다를 뿐이지 사실 큰 차이가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2017:01:06 23:45:40

(출처: nocutilbe.com)


의사일반의지의 작동방식 : 동일성, 억압/폭력, 배제/학습-체념

   의사일반의지가 어떻게 엔하계 위키에서 형성돼 자리잡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나무위키나 엔하위키의 토론장 안에서 흘러가는 모습들을 찾아보면 금새 이해할 수 있다. 우선 그룹 안에서 헤게모니를 잡은 사람들이 자신의 헤게모니와 반대되는 사람들이 제시하는 의견을 무시하거나 지속적으로 반박한다. 이 단계에서 이들은 인신공격을 일삼고, 절대로 자신의 주장과 반대되는 것이 사실이거나, 자신의 주장과 반대되는 사실이 존재할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즉 자신의 주장의 근거와 반대되는 신뢰할 수 있는 증거들이 존재하더라도 그들 근거의 가치를 얕잡고 무조건적으로 부정한다. 물론 그러한 것들을 부정할 수 밖에 없는 합리적인 반례가 등장하면 해당 내용을 일반적인 것이 아닌 '일부'의 사례라고 몰아세운다. 그리고는 자신의 논리가 코너로 몰리더라도 자신을 구원해줄 다른 사용자가 등장해 주리라고 믿는다. 물론 그 믿음에 따라 엔하계 위키에서는 다른 사용자가 금새 등장한다. 

   다른 사용자들과 함께 합세하면 이성적 논의에 대한 이성을 가장한 '유사감성'적이거나 반이성적인 주장의 표면적 신뢰성은 배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용자가 해당 주장을 지속적으로 반박하면 이제 할 일은 그 사람을 다양한 죄명을 붙여 차단을 신청하는 일이다. 차단이 받아들여지면 그 사람이 다른 공동체의 사람들에게 반박을 지속할 수 없으므로, 합리적인 주장을 차단하는데 있어서 매우 효과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 이후에 계속해서 의견을 피력하려는 경우에는 영구차단을 통해 해당 담론장에서 추방해버리면 된다. 물론 자신이 '밀려서' 처벌받는 경우더라도, 자신의 잘못을 '그런 의도가 없었다'고 해명하면 그만이다. 이것이 심지어 한국어 위키백과를 포함한 대부분의 집단지성 위키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는 흐름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의사일반의지의 실현과정을 보다 학술적 개념으로 다듬어 볼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 기호학이나 응용인문학, 사회학과의 이론과 도식들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도식을 제안해보고자 한다.물론 본 글의 특성상 개인의 아이디어에 기반한 가설일 뿐이니 대안 제시와 반론은 언제라도 환영한다.

   첫째로 '동일성'단계다. 의사일반의지는, 애초에 내가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다수가 될 때 형성된다. 삼인성호라는 말이 있다. 세 사람이 같은 말을 하기만 해도 없던 사실이 생겨난다는 말인데, 이를 다른 관점에서 보면, 다른 사람들이 주장하는 내용에 동감하는 사람이 많아질 수록 해당 주장의 힘이 강해진다고 해석할 수 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어떤 주장이 많은 사람들의 동감을 얻는 과정이 주장의 진위나 이성적 합리성과 무관하게, 동일성을 구성하기 위해 필요한 능력인 일부의 공감화(Empathizing)와 다수의 체계화(Systemizing: Baron-Cohen, 2008, 2009) - 즉 체계화 주도적인 인지-의사판단에 따라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박근헤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믿는 것은,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만들어 공당의 의사결정까지 영향을 끼친 그 사람들이 믿는 그 것은, 팩트가 아닌 체계화된 지식이다. 

   또한 함께, 인간의 기본적인 능력이자, 의사소통, 친목의 기본 조건인 공감화가 한편으로 공감의 정도를 높여 다른 사람들을 환대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는 반면, 다른 편에서는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를 두기 위한 고맥락적(high-contextual) 상황을 만들어내기 위한 요소가 될수 있다는 점에 유의하고 싶다. 특히 고맥락성은 커뮤니케이션 주체가 다른 사람과 같은 경험이나 기억을 지니고 있을 것을 가정하고 있다. 즉 같은 경험을 많이 쌓은 사람들과의 관계가 발전할수록, 맥락이 쌓여나가고, 이것은 또다시 다른 사회자본이나 문화자본으로 발전한다. 문화자본의 차이가 사회 계급의 형성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브루디외가 사회학적 연구를 통해 증명해 낸 바이기도 하다.

   둘째로 '억압/폭력' 단계다. 구체적으로 억압 단계는 사람의 인지 구성 단계에서, 폭력은 해당 인지 결과에 의한 행동적 단계에서 발생하는 상호작용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 같다. 이 단계에서 해당 의사일반의지에 소속되었다고 여기는 구성원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자신의 인지 체계나 세계관, 또는 독특한 주장을 받아들이도록 비명시적이거나 명시적인 방식을 통해 설득하며, 일정기간이 지나도 설득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구성원들이 책임을 느끼게 될 경우에는, 그 정도가 심해지면 아예 물리적/심리적 억압이나, 체벌이나 집단 따돌림을 가하기 시작한다. 

   특히 억압을 받은 대상이 해당 의사일반의지를 가진 사람들 사이와 큰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거나, 그들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는 경우에는 그 공동체에 친화될 것을 요청받는 정도가 더욱 심해지게 된다. 이러한 것을 이용해 사람들을 억누르는 구체적인 사례가 소위 이단-사이비 종교나, 강제 네트워크 마케팅 업체들이다. 특히 특정 종교는 이를 매우 극대화해 활용하고 있다. 이 종교집단은 교회나 일상생활 주변의 섭외 대상자들과 관계를 형성하고, 이를 통해 결과적으로 그 종교공동체에 소속되기에 필요한 세뇌 교육과정을 교육받도록 유도하고 있는데, 이 현상은 해당 섭외대상자가 직접적으로 억압과 폭력을 느끼지는 않지만, 실제로는 집단의 힘으로 해당 대상자의 생활에 폭력을 가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러한 주장은 최병철 교수의 최신작 <타자의 추방>과 곁들여 읽을 때 보다 더 구체적이 된다. 이 책에서 최 교수는 하이데거를 인용해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가 사라지도록 강요하는 존재인 세인das Man을 소개하고, 주체가 다른 타자가 아닌 세인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지적한다(최병철, 2017:46). 특히 전제적 통치사회와 달리, 현재의 사회는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상대적 평균치와 자신과의 비교를 끊임없이 유도한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과의 동일성을 유지해야 하기 위한 '자기정체성'의 범위는 시장이나 국가가 용인할 수 있을 정도의 '시스템과 일치하는 차이'만이 허용된다는 것이다(:35). 여기에서의 '시스템'은 또한 자신이 용인할 수 없는 차이에 대해서는 그 '의지'를 지키기 위해 가차없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의사일반의지와 호환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배제/학습-체념' 단계다. 이 단계에서의 반응은 해당 대상자의 반응에 따라 두가지로 나뉜다.

   첫째로, 어떠한 설득을 해도 듣지 않는 사람들은 배제시켜버린다. 물론 그 방식은 왕따에서부터 공동체로부터의 추방, 더 나아가 사형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이미 이 단계에서 해당 의사일반의지 속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은 '추방자'들의 인권이나 존재를 고려하지 않으며, 그들을 무시하는 것이 '일반의지'의 성취를 이루는데 오히려 도움이 될 뿐만이 아니라, '추방자'들에게도 다시 생각할 기회를 주는 올바른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마저 있다. 물론 배제된 대상자 또한 일반의지 바깥으로 나오도록 내부 구성원들을 추동할 수 있지만, 동시에 그들에게 관심을 두는 것을 중단하는 것을 대안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한편, 양심의 자유보다는 눈 앞의 위협이나 생사의 갈림길 앞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하는 경우가 있다. 즉 그들의 주장이 거짓말임을 알면서도 그들의 주장을 학습하고 '받아들이는 척' 하는 것이다. 이 경우 이들은 거짓말로 해당 의사일반의지를 갖춘 집단 속에서 살아나가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결국 거짓말을 할 수 없어서 시간이 지나면 탈출 방법을 모색해 결국은 그 곳을 벗어나는 경우도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제반 사정으로 마음과 몸에 상처를 입고 그 곳의 주장에 알맞게 살아나갈 수 밖에 없는 경우가 더 많다. 결국 이들은 거짓의 왕국 속에서, 거짓말을 하며, 가끔씩 머리 속으로 진실을 되뇌이는 수밖에 없다. 거짓이 사실로 입증되지 않는 것을 보면서도 계속해서 그 거짓 속에 머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나가며

더 길어졌다가는 이 글의 원 목적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글이 너무 길어질테니, 이쯤에서 정리해 보도록 하자.

   한병철은 다른 사람과 동일하게 되도록 끊임없이 요구하는 것이 과거에는 정부와 같이 명시적인 획일성을 지시하는 외부 폭력에 의한 압력이었다면, 지금은 보이지 않는 힘인, 다른 사람과 동일하게 되는 데에서 발생하는 긍정성 - 그리고 그가 명시하지는 않지만, 이익일 것이다 - 이라고 지적한다(한병철, 2012:12, 16-17). 문제는 그 긍정성이 결과적으로 무한한 상대평가를 불러 일으키고 그럼으로서 '개인들에게 부담을 주고 개인들을 망가뜨리'게 된다는 점에 있다(한병철, 2017:53), 황푸하(2016)가 말하듯이, '우리'가 '실패에 동참하'고, '비참한 패배'를 느끼도록 하는 존재는 다른 사람이 아닌, 자아 그 자체다. 하지만, 그 자아의 정념서사 프로그램을 가동시키는 것은 '같은 것을 지속시키'ㅁ으로서 '체계적인 폭력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한병철, 2017:47), 의사일반의지다. 아니, 의사일반의지를 일반의지처럼 느끼게 만드는 폭력이다.

   예수와 스데반이 죽으면서 공통적으로 말한 말이 '저들이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올바른 말이다. 의사일반의지 속에 있는 사람들은 결국 그 사실이나 세계관, 사고구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가능성을 거의 차단당한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그 의사일반의지가 생성하는 서사구조 체계속에서 자신들의 서사구조 체계에 합당한 왜곡된 '팩트'만을 수신하고, 그 팩트들이 구성한 의사구조-앎 속에서 살아간다. 한번 형성된 세계관, 그리고 패러다임은 그 패러다임을 대체할 의지를 제공할만큼 큰 반대 자극이 없는 한, 결과적으로는 그 발동에 실패하게 된다. 그리고 폭력은 결국 희생양을 찾고, 의사일반의지 속의 사람들은 계속해서 불필요한 높은 기준에 시달리면서, 언젠가 나도 그들 속에서 희생양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가운데 살아가야만 한다.

   그렇다면, 무한의 정념서사구조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해당 서사구조에의 동참을 취소하고 새로운 서사구조로 이행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까지 인터넷 일각에서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는 친목에 대한 재가치평가가 필요하다. 친목이라는 말이 인터넷 상에서 보통 여러명이서 소규모로만 모이는 것을 가르키는 개념인 것과는 반대로, 실제의 친목은 '서로 뜻이 맞고 정다'ㅂ도록(우리말샘, CC BY-SA 2.0) 친해지는 행위를 의미한다. 레비나스는 환대를 강조하면서, 환대에 필요한 기본적인 자질이 자아에 대한 부인이라고 지적한다. 자신의 주장만을 반복할 때, 폭력은 오히려 정당화된다.

   그러므로 친목, 또는 화목은 '자아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행위를 통해 달성된다. 서로 다른 사람이라도 뜻을 맞추거나, 그 사이에서 최소한의 합의를 찾아나가기 위해서는, 당연히 자신의 의지를 어느 정도 내려놓아야 한다. 한병철은 <타자의 추방>에서 결과적인 대안으로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제안한다. '성평등주의가 올바른 방향이며, 현재의 잘못된 페미니즘은 개정되어야 한다'는 나무위키 구성원들의 주장, '박근혜 탄핵은 무효이며, 이에 찬동하지 않는 사람들은 종북세력으로서 대한민국을 멸망시킬 것이다'는 박사모의 주장, 기타 신흥종교 집단들의 터무니없는 주장들을 멈추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이 다른 이야기들을 듣고, 그 이야기들에 반응해 보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반응에의 초대는 누군가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깊고 높은 벽을 넘어 '아니라'는 목소리, 즉 '고귀한 저항'(황푸하, 2016)을 시작할 때,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다. (170214-0405)

참고문헌 

자크 데리다(2016), 아듀 레비나스, 문학과지성사.
아즈마 히로키(2012), 일반의지 2.0, 현실문화.
오근창(2013), 일반의지의 두 조건은 상충하는가? - 루소와 '자유롭도록 강제됨'의 역설, 철학사상, 47. pp. 67-98.
진중권(2016), 나도 메갈리안이다, 매일신문. 2016. 7. 27.
한병철(2012), 피로사회, 문학과지성사.
한병철(2017), 타자의 추방, 문학과지성사.
황푸하(2016), 우리는 오늘도, 젠트리피케이션.  
Simon Baron-Cohen(2008). "Autism, hypersystemizing, and truth" (PDF). Quarterly Journal of Experimental Psychology. 61(1), 64-75. doi:10.1080/1747021070150874
Simon Baron-Cohen(2009). "Autism: The Empathizing–Systemizing (E-S) Theory". Annals of the New York Academy of Sciences, 1156, 68-80. doi:10.1111/j.1749-6632.2009.04467.x



신고
Trackback : 0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