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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lkabout/시사

왜 안티 김연아는 안되는가? - 다름과 틀림에 대하여 (1)


1. 최근 며칠 새 안티 김연아 카페가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쁘고 잘생긴, 거기다가 대한민국의 스포츠 수준을 한발짜욱 높여주'신' 김연아 선수를 안티하는 게 도대체 말이 되냐는 입장이었다. 거기다가 더 웃긴건 그 사건이 터지고 나서 인터넷에 널리 퍼진 이후 안티카페 쪽에서 장난질이라고 하며 카페를 폐쇄시키는 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자료는 네이버 블로그에서 가져왔습니다.)

 2. 그런데 이러한 사건이 올해 초에 한 번 더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올해 1월 화제가 되었던 헤타리아. 애니메이션 제작이 결정되고 나자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애니메이션 매니아가 이 애니메이션의 폐지를 인터넷 상에서 [ 강력히 요구 ]한 결과,[각주:1]이 글 하나 ]로 충분히 설명된다.'> 결과적으로 헤타리아 방영이 전면 중단되는 '쾌거'를 이루어 냈다.[각주:2] 물론 일본의 이러한 어이없는 애니메이션이 정상적이지 않은 것이라는 데에는 나도 의견을 같이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내가 주목하고 싶은 점은 '낚시용' 헤타리아 '팬 카페'가 생긴 이후 발견되는 즉시, 많은 사람들의 항의가 이어졌고, 결국 이 카페는 며칠을 남겨두지 못하고 카페를 정리했다는 사실이다. 이 순서는 위에 서술했던 안티 연아 카페와 한발짜욱 다르지 않고 똑같다.

 3. 지금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헤타리아 팬카페나 김연아 안티 카페의 시시비비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특성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작년부터 내가 인식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른' 것에 대해서 전혀 참지 못한다!

 4. <추악한 중국인>의 작가 보양은 중국인의 특성을 '장독'이라는 한마디로 압축했다. 그리고 중국인을 위하여 중국인을 깠다. 그가 한 말 중에 이러한 말이 있다. '중국인들은 중국인 스스로를 돕지 않는다.' 그러면서 그는 중국인들이 다른 중국인을 만나면 그들을 위하는 것처럼 살면서, 정작 자신과 조금만 다르면 인연을 끊고,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을 도와주려고 하면 역시 관계를 끊어버리는 악습 하나를 지적했다. 또한 한가지를 더 들자면, 수천년 동안의 문화가 유가 이후 하나도 변하지 못하고, 말로만 '인의예지신'을 강조하면서 실제로 그 삶에서 그러한 말의 능력이 나타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지적하였다.

 5. 이 <추악한 중국인>을 번역한 보양의 지인인듯한 한국인은 번역자 서문에 이러한 말을 붙였다. "이제 이 질문이 한국인에게 향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책을 읽다보면 전혀 우리의 사정과는 맞지 않은 이야기인듯 해 왜 번역자가 그러한 이야기를 했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한국보다 더 심한 중국의 사정에 '웃음'을 터트릴 것이다.[각주:3] 하지만 이 책이 1970~80년대 경에 씌여진 책과 강연을 모은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그 사이에 중국에는 20년동안 매우 큰 경제발전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번역자의 말이 정말 사실로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6. 우리나라에 왕따가 이슈가 되었던 90년대 후반부터 00년대 초반을 기억해보자. 청소년들이 아이들을 괴롭히는 장면이 한동안 문제가 되었고, 결국은 학교 차원에서 이를 미봉할 책을 마련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흐릿흐릿하게 지나갔다. 그 때 언론은 한창 일본의 이지메와 우리를 비교했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이지메, 또는 왕따의 특징이 무엇인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고, 거기에서 '남이 나와 다르지 않다'는 것에 대한 위안감을 얻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경험이 그 이전에 없었는가? 공개적으로 그 이전에 문제화되지 않았을 뿐이지, 학교에 의한 폭력은 지금도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것도 '학생 교육'이라는 명목하에 아직도 공개적으로. 그것이야 말로 '학생은 이래야 한다'라는 틀 아래...[각주:4]

7. 이데올로기는 단지 사회주의, 공산주의에만 부연되는 말이 아니다. 이데올로기 자체가 사회화를 통하여 형성된 모든 이념이니 자본주의, 민주주의, 민족주의에도 적용되는 말인 것이다. 이것이 대한민국을 현재 휩쓸고 있는 수렁의 실체이다. 우리는 공산주의라는 '유령'의 실체에 열중한 나머지, 그 사이에 숨겨져 있는 민족주의, 군국주의의 유령에 대하여 대비하지 못했다. 물론 군국주의가 우리에게 도와준 것이 없다고 하면 말이 안된다. 하지만 일본 군국주의의 혜택보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끼친 폐혜는 실로 거대하다. 50년 역사로도 아직 멀어 100년 이후로도 해결되기 어려운 이 깊고 깊은 문제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일본의 중심 인간론인 '일인(一人,いちにん)'을 새겨놓았다.

8. 우리나라 만화의 선두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신 이원복 교수의 <먼나라 이웃나라>의 진가는 일본편과 한국편에서 나온다. 그는 왜 일본이 일본일 수 밖에 없는지, 한국이 한국일 수 밖에 없는지 <먼나라 이웃나라>를 통해서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 중에서 일본의 중요한 개념 중에 '와(和)'와 '폐(めいわく)'가 있다. 일본은 섬나라이다. 어짜피 좁은 섬나라에서 사람들끼리 싸우게 된다면 중국이나 한국이라는 대국에 곧바로 나라를 빼앗겨버리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결국 일본인들은 피해를 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서로가 살아남는 법은 다른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는 법 밖에는 없다.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는 남에게 불편하게 보이는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남에게 불편하게 보이는 행동이란 무엇인가? 각자의 사정에 따라 다르지만 이를 일반화하면 결국은 다른 사람과 달라서는 안된다는 것 아닌가? 따라서 각자에게 필요한 '일인'의 기준이 제정되고(一人前,いちにんまえ)[각주:5], 그 기준을 넘어가는 사람은 '와'를 침범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일본의 경우가 보여준 가장 큰 사례가 '오타쿠(お宅)'다. 정말 그 분야에 대해서 1인자일 수 있을 정도의 지식과 정보를 소유한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이 타이틀은, 밖으로 나갈 수 없어 자신의 안으로 깊게 파고 들어갈 수 밖에 없는 일본인들의 성격에서 나오는 것이다.

9. 영어에서도 'different'와 'wrong'을 똑같게 쓰지 않고, 분명히 구분해서 쓰는데, 우리나라처럼 '다르다'와 '틀리다'를 혼용해 써서 교과서에서까지 계속 강조해서 말하는 나라를 찾아보기 쉽지 않다. 하지만 조사해본다면, 100년전에도 '다름'과 '틀림'이 동일한 개념으로 취급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왜 이런 말사용이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일본어를 조사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ちがう(違う)라는 단어가 바로 '다르다'와 '틀리다'라는 개념을 하나로 통합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ちが의 한자인 '違'의 우리말 독음은 '어길 위'다. 다른 것은 무언가 정상적인 것을 '어긴 것'이라는 의미가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심지어 일본어 사전에서 '다르다'의 다른 표기로는 ことなる(異なる)라는 말까지 있다. 물론 저 이자의 독음은 '다를 이'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말에도 이상(異常 : 다를 이, 항상 상)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정상'으로 여겨지지 않음은 곧 파악할 수 있다.

10. 하긴야 우리나라에서 It's different라는 말이 친근하게 쓰여질 정도로 이제는 '다름'과 '틀림'의 개념이 많이 보정되었음에는 감사하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우리는 '다름'이 '틀림'이라는 일제적 발상이자 구시대적, 군국주의적 발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 자신도 대한민국 내의 공동체주의에 일면 동의하면서도 반면 찬성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라는 명제 하에 '다름'을 제거하고, 동일한, 다르지 않은 '우리'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우리 안의 잔혹성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것은 선교단체같이 '진정한 나의 가치'를 발견해 주고자 하는 단체들에게서도 여지 없이 발견된다.

11. 김연아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많이 헝클어져서 결국 앞으로 할 이야기들의 세부까지 다루게 되었다. 일단 여기서 이야기를 정리하자. 나는, 다른것을 포용해주고, 다른 것을 '틀리지 않다'라고 인정해 주는 것이 우리 대한민국의 미래 과제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일본의 사상 엔진을 달고 조금씩 바꿔오며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일본의 '일인'이나 '와'의 개념은 아직 벗어버리지 못했다. 다른 사람을 인정해주는 것을 못해줘서 20세기만 해도 삼일독립운동, 419 혁명, 518 광주 민주화운동, 6월 항쟁 등 수많은 피를 뿌려야 했고, 듣도 보도 못한 지역감정이 생겼고, 아직도 정부와 국민간의 불신이 극도에 이르게 되었다. 틀린것을 다르다는 말로 덮어서는 안되지만, 다른 것을 틀리다고 폄하하거나 배척해서는 더더욱 안된다. 대한민국인에게 '포용'과 '다름을 인정함'은 정말 불가능한가?

이건 1탄일 뿐입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시리즈로 쓰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건 저 혼자 글 써서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다른 분들의 공감대가 있어야 합니다.
글을 읽으신 여러분들의 다른 의견이나 제안 부탁드립니다.




  1. '한국 [본문으로]
  2. 세부 팩트는 한국어 위키백과의 [[헤타리아 Axis powers]]를 참조하라. 글고보니 제목이 길다. 이건 [[에노시마 전철 에노시마 전철선]]같은 이유일테지. [본문으로]
  3. 실제로 나는 책의 몇페이지를 읽다가 너무 웃음이 나와 그 페이지를 읽지 못하고 넘겨야만 했다. 나에게 있어서 웃음 치료가 필요할 때 그 페이지를 보는게 더 효과가 있을지도 모른다. [본문으로]
  4. 여기에 대하여 여러가지 자료를 첨부하려고 했으나, 글이 학생인권 성토장으로 변할 것 같아서 생략하도록 하겠다. [본문으로]
  5. 상응하는 한국어 단어 '일인분'도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결국은 '한 사람의 몪을 나눔'이라는 것이고, 이는 결론적으로 '분수'라는 말까지 이어지지 않던가.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