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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컬처/만화-애니

<세카이계란 무엇인가> - 좋지만 논란성이 많을, 웹컬처 역사서



1. <세카이계란 무엇인가>가 작년에 국내에서 번역출판되었다는 사실은 접했지만, 최근에 들어서 웹컬처 비평계에서 <너의 이름은>과 세카이계의 유사성이 지적되면서 책의 내용을 읽게 되었다.

2. <세카이계가 무엇인가>는 의외로 세카이계의 개념에 대해 논의하는 연구서라기보다는, 세카이계라는 개념을 빌어 '오타쿠'문화, 특히 소위 '3세대 오덕'의 역사 전개 과정을 정립한 역사서에 가깝다는 것이 내 인상이다. 특히 오카다 토시오의 <오타쿠학 입문>(한국어판 <오타쿠>)에서 설명한 오타쿠와 현재의 '오타쿠' 문화와의 차이가 적지 않아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의외로 그 사이의 변화를 가장 납득가능하게 설명한 논고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3. 본격적으로 몇가지 점에서 책의 논의에 대한 입장을 남기고자 한다. 우선 기존의 애니메이션의 팬들은 애니메이션을 메타서사적 관점에서 바라봤지만, <에반게리온>기점으로 캐릭터에 집중하는 일련의 팬들이 생겨나 일반화됐고, 그 추진력에 의해 기존의 오타쿠 문화에서 현재의 '오덕' 문화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기존의 오타쿠가 끼치는 역할이 적어지게 되었다는 논의 전반에 대해서는 동감하고, 기존의 만화-애니 동호 논의에 있어서 간과되기 쉬웠던 부분에 대한 지적이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또한 '세카이계'의 핵심 부분으로 '세계 설정',즉 '세계관'의 부재를 지적하고 있는 점(p. 91-92)에도 매우 동감한다. 다만 이러한 세계관의 부재가 가져다 준 영향력은 이 책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부연설명을 하도록 한다. 톨킨의 방대한 판타지, 그의 세계관에서 출몰한 D&D(Dungeon and Dragon)를 시점으로 하는 TRPG, 그리고 SF가 1960-70년대 일본에 수입된다. 이 시기의 일본 만화-애니메이션도 설정, 즉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하기에 집중하면서 일본 내에서 충분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출판했다. 이어 미국에서 수입된 소설들의 이야기하기 방식이나 세계관을 바탕으로 생겨난 일본인 SF/판타지 작가들의 스토리텔링도 세계관을 충분히 구축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1986년도에 TR 리플레이로 시작돼 1988년 출간된 판타지 소설 <로도스도 전기>다. 이런 흐름은 1996년 4월부터 발간돼 1999년 2월 1쿨 애니메이션으로 등장한 <성계의 문장> 시리즈까지 이어진다. 물론 한국에서도 1990년대 후반 이영도-전민희 작가님들에 의해 이러한 흐름이 충실하게 소개된다. 

   이러한 상황이 1995년 <에바>로 깨지기 시작했다는 것이 이 책의 중심 주장이다. 따라서 <에바>는, 일본 장르문학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즉 2000년대 전까지 판타지/SF 소설이 장르문학의 중심을 차지했다면, 2000년대 이후에는 알 수 없는 사이에 그 자리를 라이트노벨이 점거하게 된다. 이러한 점은 1994년 로도스도 전기의 후속작 <표류전기 크리스타니아>로 시작된 (ASCII) 미디어웍스 (현 카도가와) 전격문고가 현재는 라이트노벨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문고가 되어 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이 가능할 것이라고 보인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전격문고를 포함한 다양한 문고들의 매체 발간 현황에 대한 정확한 추가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어쨌던, 장르문학의 선호도를 '세계관 기반 스토리'에서 '캐릭터 기반 스토리'로 변형시킨 일본의 웹컬처 지각변동에 <에바>가 어떤 의미에서든지 큰 영향력을 끼쳤다는 점은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4. 그러나 세부 텍스트로 들어가보면 저자의 논조에는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우선 다음 인용문을 살펴보자.

즉, <에반게리온> 이전 시기 오타쿠들의 작품 수용 태도는 이야기로부터 세계관을 읽어내는 '이야기 소비'를 비롯해 오카타 토시오가 말한 암호를 읽어내는 태도 같은, 지극히 기형적인 형태로 변해 있었다. 때문에 <별의 목소리>나 <최종병기 그녀> <이리야> 같은 소박한 이야기로의 회귀, 또는 평범하게 '이야기를 즐긴다' '등장인물에 감정을 입한다'는 작품 수용태도가 오히려 기이한 것으로 인식된 것이다. (p. 99.)

   저자가 아즈마 히로키씨와 일정 부분의 관점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인용문은 저자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이지만, 전술한 장르문학 사정까지 고려해 살펴볼 때, 이 주장에는 분명한 오류가 있다고 생각된다. 굳이 <왕립우주군: 오네아미스의 날개>를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이야기와 그 세계관에 주목하는 활동은 만화-애니메이션만이 아니라 이미 그 모태가 되는 장르문학 차원에서도 흔한 일이었고, 그것이 영상 분야에서는 영상에 대한 철저한 탐구로 나타났을 뿐이다. 오타쿠의 세계관 기반 활동이 기형적인 형태였다면, 그 당시의 일본의 판타지/SF 작가와 독자들, 그리고 TRPG 플레이어들 또한 '기형적인 형태'의 스토리 소비를 하고 있었단 말인가. 

   <에반게리온> 이전의 '이야기 기반'의 작품,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스토리에서 캐릭터에 대한 이입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여성 동인계의 동인활동이 그 주요 반례가 되리라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 2002년 <반지의 제왕> 영화 개봉의 결과로 한국에서는 한국반지연맹과 (특히) 절대반지동맹을 중심으로 한 '캐릭터 몰입'이 나타나고, 이에 따라 코믹월드 등의 만화 동인지 판매회에 반지의 제왕 동인지가 대거 등장했다. 이야기 기반의 작품의 캐릭터들이 데이터베이스화된 '캐릭터'로서 읽히는 현상이 일본에서 세카이계가 한창 꽃피울 시점에 이뤄지고 있었다는 점은, 이 책이 가진 논지의 한계점을 보여주고 있다.

5. 그리고 세카이계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판적인 관점을 가지고 세카이계와 거리를 두는 것은 좋지만, '세카이계 만가-아니메를 통해 시청자들의 취향이 크게 변하기 시작했다'는 논문의 가설을 바탕으로 만화-애니메이션 소비자의 성향을 단일화해서 표현하는 환원주의적 입장 또한 분명한 한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특히 이 책에서 현실 반영에 소홀했다는 느낌을 받기 쉬운 것이 다음과 같은 일방적인 서술이다.

그러나 로봇 애니메이션에서, 미소년 게임에서, 미스터리에서 돌연 주저리주저리 독백을 시작합니다! 라는 건 처음의 몇 작품은 재미있을지 몰라도, 유사한 작품을 몇 편씩이나 보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을 것이다.<에반게리온>은 충격적인 작품이었지만, 역시 사람들은 미소녀에 모에하고, 로봇에 불타오르고, 트릭에 놀라기 위해 콘텐츠를 소비한다. (pp. 184-5.)

   물론 저자는 본격적으로 논의를 펼쳐나가기 이전 이 책이 '남성 오타쿠 중심'으로 서술되고 있다(p. 27.)고 설명해 여성향 콘텐츠가 빠진 이유에 대한 양해를 시도하고 있지만, 이러한 주장이 논의 전반을 정당화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고 보니 이 책에서 의도적으로 서술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정말 몰랐기 때문에 서술하지 않았(을 리는 <케이온!> 때문에라도 없다고 생각하지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ARIA>를 시점으로 한 치유계와 일상계가 전혀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는 점도 이러한 무리한 환원주의적 주장을 논리적으로 펼치기 위한 꼼수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들 또한 여성이 아닌 남성 아니메 팬들을 중심으로 소비되고 있으므로, 이 연구서의 분명한 한계로 지적하고자 한다.

6. 이전 특정 논고에서 아즈마 히로키에 대한 비판을 통해 분명히 설명한 바가 있지만, 따라서 '이야기 소비'와 '데이터베이스 소비'라는 단순한 이항을 세우고, 해당 '상품'들의 소비자의 성향의 변화를 통해 소비자의 적극성이 사라진, '소비즘'에 근거한 후기 오타쿠들의 활동이 현재 소위 '오타쿠' 문화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들은 결코 텍스트에 대해 적극적인 반응을 일으킬 수 없이 해당 텍스트만을 소비한다는 '가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한 이 책의 전반적인 논지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현재의 상황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대안은 "기존의 '세계관 기반 이야기'에 기반한 일본의 이야기 시장 전반이<에반게리온>을 시점으로 '캐릭터 기반 이야기'로 변경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세계관 기반 이야기'들은 시류 내지 시장을 구성하는 독자들에 의해 때로는 큰 비판을 받으면서, 적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가정이다. 

7. 결과적으로 '세카이계'를 통해 시작된 '캐릭터 기반 이야기하기'의 우위가 앞으로도 지속될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들 수 밖에 없다. 그 사례로서 주목하고 싶은 것이, 이 책의 문고판 발매 이후 2014년 4분기부터 2015년 1분기까지 TVA로 방영된 판타지 소설 <새벽의 연화>다. 2009년부터 쓰여진 이 소설은, 현재 주류 아니메인 '캐릭터 기반 아니메'와는 달리 기존 판타지 소설의 작법을 그대로 따라갔으나, 캐릭터적 접근이 강해 일본과 한국에서 많은 팬덤을 가지고 있다. <Rail Wars : 일본국유철도공안대>도 그렇다. 일본국유철도 JNR이 해체되지 않고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는 가설 아래 라이트 노벨에서 시작해 2014년 3분기에 아니메화된 이 작품은, 캐릭터성보다는 세계관에 더욱 기반을 두고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한국 판타지나 웹소설 또한 점차 캐릭터에 대한 집중보다는 이야기나 세계관을 충실히 하고 있는 작품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그동안 비판을 받으면서도 소비되고 창작되고 있는 양판소 시대를 벗어날 새로운 동력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관 기반 이야기'가 언제까지라도 소수로 자리잡고, 캐릭터 기반 이야기가 지속될 것이라는 듯한 이 책이 주는 인상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거리를 두고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8. 마지막으로 이 책의 한국어판에 대해서 잠깐 코멘트한다면, 이 책에서 페이지수를 안쪽에 두고, 제목과 하위제목도 세로로 세운 디자인 자체는 매우 뛰어난 시도라고 생각되며, 필자로서도 앞으로도 출판하게 될 작품에 응용하고 싶은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실제 책에서 봤을 때의 위치가 애매애매하다. 0.5mm-1mm 정도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시각적으로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느낀다. 또한 일상계와 치유계는 한국어로 표기하면서, 세카이계는 '세계계'라고 부를 수 없으며, 일본어로 굳이 음역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추후의 논의사항으로 남겨두고자 한다.

(2017. 2.7 : 본문 2차개정)


세카이계란 무엇인가 - 10점
마에지마 사토시 지음, 주재명.김현아 옮김/워크라이프

참고문헌

빠른 글의 작성을 위해, 한국어 번역본의 서지사항만을 기재하기로 한다.
마에지마 사토시(2016), 세카이계란 무엇인가, 워크라이프.
아리스가와 아리스(2014), 말레이 철도의 비밀, 북홀릭.
오카다 토시오(2001), 오타쿠, 현실과 미래사.
히카와 레이코(2004), 토쿄에서 판타지를 읽다, 청어람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