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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visible Traits

[번역] 강력한 연결들

 

이 글은 영국 자폐 당사자 컨퍼런스인 어트스케이프(Autscape)에서 [ AMASE(에딘버러 자폐상호도움협회) ] 의 리더인 소니 할렛(Sonny Hallett)씨가 [ 발표한 것을 미디움에 올린 것 ] 을 저작자로부터 허가를 받아 번역한 것입니다. 번역에 한계점이 있을 수 있으니 지적해주시면 반영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어트스케이프 2019
강력한 연결들(Intense Connections)

소니 할렛(Sonny Hallett) ([ @scrappapertiger ])

 

이 포스트는 2019년 8월, 어트스케이프에서 발표(talk)로 전달되었습니다.

 

오늘 이야기를 한 가지 실험을 상상하는 것으로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은 연구자로서 전달 게임(Game of telephone) 실험을 조직합니다. 여러 명의 비자폐인들을 모아서(recruit) 한 줄로 세운 다음에, 해당 줄(chain)의 첫 사람에게 짧은 이야기를 말해 줍니다*. 그들은 한사람씩 들은 이야기를 가능한 한 자세하게 해당 줄의 다음 사람에게 전달해 주고, 그렇게 계속해서 마지막 사람까지 이야기를 전달해 줍니다. 해당 줄의 마지막 사람이 그 사람이 들은 내용을 당신에게 다시 전달해 줍니다. 

 

* KBS 〈가족오락관〉 고요 속의 외침을 헤드폰 없이 진행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역자 주

 

 

이제 같은 수의 자폐 당사자*를 모아서 동일한 실험을 합시다.

 

그리고 같은 수의 자폐 당사자와 비자폐인으로 구성된 복합 그룹을 모아서, 그들을 교대로 두고, 다시 똑같은 실험을 합니다.

 

* 자폐 당사자: 이 글에서는 '자폐'라는 단어가 가진 부정적인 뉘앙스에도 불구하고, Autistic을 제대로 번역할 한국어 단어가 없고, 음차하는 것 또한 마땅치 않아 'the Autistic(s)'의 번역어로 '자폐 당사자'를 채택한다.  한국어 어중으로부터 혹시라도 더 좋은 대안이 나온다면 해당 단어를 채택할 용의가 언제라도 있음을 밝힌다(역자 주).

 

상상을 이어 가고 계신가요(Still with me)? 네. 이제 결과를 내 봅시다. 각각의 줄에서 실험이 진행되는 동안 가장 많은 이야기 내 정보를 잃은 줄이 어디인지 살펴봅시다. 비자폐, 모든 자폐, 복합. 당신은 이들 중에 누가 가장 많은 정보를 잃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이 실험은 [ 최근 ], 에딘버러대의 [ 캐서린 크럼턴 ](Catherine Crompton)과 [ 수 플래처 왓슨 ](Sue Fletcher-Watson)에 의해 진행되었으며,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출처: Crompton, C.J. & Fletcher-Watson, S. (2019), Efficiency and interaction during information transfer between autistic and neurotypical people, International Society for Autism Research (Poster).

 

보시는 대로, 통계적으로 차이가 유의하지 않은(insignificant) 다른 두 줄과 대조적으로, 혼합된 줄이 가장 유의한(significant) 양의 정보를 잃었습니다.

 

같은 연구의 일부로서, 캐서린은 이전에 만난 적이 없는 자폐, 비자폐와 혼합된 사람들로 구성된 집단들이 몇 가지 주제에 대해 짧은 대화를 가지는 장면을 촬영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비디오 시청자들에게 해당 집단들이 어떻게 친해지는지에 대해 평가를 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출처: Cropton & Fletcher-Watson(2019).

“우리는 몇몇 [실험] 참여자들에게 몇 분 동안 또 다른 참여자들의 대화 동영상을 보여줬습니다. 해당 영상들은 비디오 속의 두 사람이 서로 얼마나 잘 친해지는지(get on), 그리고 얼마나 그들의 편안하게 보였는지 평가하는 다른 참가자들에 의해 시청되었습니다. 평가자들은 비자폐인들이 대화를 할 때나 자폐 당사자와 비자폐인으로 구성된 사람들에 비해 두 자폐 당사자들이 서로 잘 친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관찰자들은 두 명의 신경상태(neurology)에 대해 알지 못했지만, 자폐인 두 명이 가장 잘 대화를 잘하며, 그다음이 비당사자들이며, 마지막이 혼합된 사람들이라고 지속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저는 온라인으로 이 연구의 다른 재미있는 부분들을 읽을 것을 권장합니다. 다만 현재 시점에서는 이 연구의 참여자 수가 꽤 적으며, 특히 비디오 행동 분야에서는 더 적다는 점 또한 경고(caveat)해 두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가 어트스케이프에서 겪은 것처럼, 특히 우리 대부분이 다른 자폐 당사자들과 경험할지도 모르는 관계의 정도를 감안하면 이 결과는 꽤 놀라운 일도 아닐 것입니다.

 

아마도 최소한 여러분 중 다수가, 저처럼, 다른 자폐 당사자들 곁에 있기를 원하기 때문에 (그렇길 바랍니다!) 이(Autistic) 공간에 와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중 다수는 이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알고, 우리 중 다수가 계속해서 긴 시간 동안 말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자폐 연구에서 드러나는 사례는 아직까지 매우 드뭅니다. [실제로] 자폐 아동들의 부모들이 다른 자폐 당사자들로부터 아이를 떼어내기 위해 이렇게 충고하던 일이 오래된 일도 아닙니다. “이상한 방식들을 일으키는 방식을 배우면 어쩌려고? 자신의 특별한 관심사를 함께 대화하기 시작하면 어쩌고? 그들이 친구가 되어서 ‘이상한’ 것들과 연결되면서 ‘더 자폐’스러워지면 어떻게 하려고?” 심지어 요즈음도,  저는 불행하게도 모든 자폐 당사자들이 서로를 싫어하고, 자폐 당사자들의 동료 지원에는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는 자폐 전문가들을 가끔씩 만나 왔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저는 이런 종류의 연구가 드디어 일어났다는 것은 멋진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자폐계 사람들(Autistic folks)로부터의 반응 중 일부가, 꽤 분명히 이런 식이었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잘 했으, 그리고 독도는 우리 땅(water is wet)!” 하지만 저는 실제로는 이 결과 중 일부가 우리 중 다수에게는 직관적으로 분명할지도 모른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자폐 당사자로서 그 결과들과 이와 관련된 아이디어들과,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보다 더 깊이 생각하기 시작함으로써 그 결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많은 가치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는 앞으로 이 분야에서 보다 더 심층적인 연구를 [일으키는데]도 영향을 끼치겠지요. 저는 우리의 서로에 대한 연결들 모두가 쉽거나, 뛰어난 라포로 채워져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캐서린의 결과를 시작 지점으로 정한다면,  우리는 우리 가운데에서 가끔씩 소통이 잘 작동되지 않는 이유와, 몇몇 사람들이 자폐판에서 배제감이나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에 대해서도 더 생각해 보기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캐서린의 결과 중에서 가장 흥미롭고 또 다른 생각을 일으킨 것 하나가, 혼합 페어와 비장애 페어와 대조적으로 드러난, 서로 대화하는 자폐 당사자들 사이에서 관찰된 강력한 라포(유대)였습니다. 그리고 이 결과가 우리가 가끔씩 형성하는, 내 삶 속에서 형성해 온 강력한 연결들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내가 자라면서, 내가 자폐 당사자라는 사람을 깨닫기 매우 오래전에, 나에게는 별로 친구가 없었습니다. 우리 [가족]이 많이 여행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내가 더 어렸을 때에는 대부분을 학교 운동장 구석에 앉아서 흥미로운 돌과 곤충들을 살펴보기도 하고, 내가 부르는 노래가 심포니가 되는 것을 즐겼기 때문입니다*. 

 

* 당사자가 노래를 부르면, 머릿속에서 노래가 자동 반주되는 현상을 말한다(역자 주).

 

나이가 더 들어 고등학교에 [가서], 나는 친구를 만들고자 했지만, 그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확인했고, 다른 아이들로부터 꽤 많이 왕따당하(bullied)고 거절당했습니다. 그때도, 지금도 언제나 그렇지만, 저는 특정 개인들과만 매우 강력한 친교나 연결을 형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일은 내가 성인이 되고 나서도 시간이 지나도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 가끔씩 그들은 친구가 되어주기도 하고, 가끔씩은 멘토, 가끔씩은 로맨틱한 파트너, 가끔씩은 매우 끈질긴 대화를 나누는 그냥 지나가는 지인이 되지만 — 언제나 그들이 나를 압도하도록 만들었던 것이 연결의 강도였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 곁에 있는 것에 흥미가 전혀 없어서 그냥 지나치거나, 최소한 그 일이 매우 어렵고 혼란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발견했었겠지만, 이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을 정말로 사랑하게 되었으며, 그들에게 관심을 돌리고, 이해받는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러한 사람들이 내 주변에 있는 다른 모든 이들과 대조적으로 너무나도 쉽게 나를 이해해준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이 강도(intensity)에 대해 걱정하고, 나에게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 그룹 속에서 사귀게 된 내가 아는 모든 다른 사람들이, 몇몇의 가까운 친구들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으며, 그들은 덜 들러붙고, 집착하지 않으며… 강력한 것 같았습니다. 여기에 더해, 예를 들어서 개의 품종을 모두 배우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을 원하는 것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 많이 집중해야 한다는 것에 화가 났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누군가로부터 온 것인데, 좀 더 설명하자면, 이건 내 아버지가 *개와 다른 동물들만을 찍기 위한* 나의 첫 번째 카메라를 가족의 친구들의 사진을 찍기 위해 사용함으로써 '망쳐버'(tainted)렸기 때문에 거대한 멜트다운을 느껴야 했던 아이로서의 [발언입니다].) 

 

이제 당신은 제가 말하려는 내용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중요한(significant) 몇몇의 사람들이, 자신이 자폐 당사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가, 또는 이미 알고 있던가, 아니면 최소한 자신의 신경상태에 대해 관심을 가져온 것으로 드러났으며, 모두가 자폐 경험(=특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들과 연관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물론 그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고 당연히 이야기해야겠죠. 저는 제가 위안을 받고 원하고 대화를 듣고 싶었던 몇몇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봤지만, 이들은 분명히 더 많은 상호적 이해를 갖춘 이들이었다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연결들은 왜 그렇게나 강력할 수 있었을까요? 제가 언급했듯이, 상당히 단절되거나 절교당하는 것 자체, 그리고 강력한 집중력을 향한 일반적 경향이 그 이유가 될 수 있었겠지만, 저에게 있어서는, 저의 마음에 드는(gets) 누군가와 또한 만난다는 것, 그리고 또한 그들로부터 놀랍게도 당황하지 않아도 되는(un-baffling), 저의 대부분의 생활 속에서 사라진듯하게 드문 그 느낌을 찾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낯선 나라에서 꽤 오랫동안 살다가, 내 모국어를 말할 수 있는 다른 사람들과 만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 물론 저는 그 지역의 언어도 말할 수 있겠지만, 저를 더 진정성 있게, 온전하게 표현하려면 저에게는 모어가 필요합니다. 마침내 제가 함께 그것을 할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난다(having)는 것은 따라서 매우, 매우 환영할 일이죠. 그 [관계]는 드물기(rarity) 때문에 강하며, 동시에 제가 믿기로는, 저를 좋아해 주고, 동시에 저를 이해해주는 사람들에게는 사랑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번이 제 네 번째 어트스케이프가 됩니다. 저는 첫 번째 참여 때부터 많은, 최근에 확인된(recently-identified) 자폐계 사람들이 함께 자신의 경험을 대화하고 나누는 것을 포함해, 자페와 관련된 내용들을 조금씩, 꽤 [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최근 몇 년 동안, 저는 모든 종류의 다른 것들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인지와 연결 과정을 겪는 것을 많이 봐 왔습니다. 저의 첫번째 어트스케이프는 친화적인 공간 속에서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시점이었으며, 저는  밤을 새우면서까지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을 실제로 즐길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저의 첫 번째 어트스케이프는 다른 이와의 강력한 연결이라는 이러한 개인적이던 일(incident)이 내가 이전에 정말로 경험해본 적이 없던 무엇인가 — 진짜 존재가 [겪는] 더 넓은 감각으로 번역될 수 있다는 것을 정말로 깨닫기 시작한 지점이었습니다. 

 

[ 대미언 밀턴 ](Damian Milton)은 2013년 어트스케이프에서 우리에게 ‘이중 공감 문제’(double empathy problem) 개념을 제안했습니다. 그는 이 개념을 다음과 같이 [ 설명합니다 ].:

 

“간단히 말하자면, 이중 공감 문제 이론은 매우 다른 세계에서의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상호작용하게 될 때, 그들이 서로 공감하기 위해 노력(struggle)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저는 따라서 전 세계에서 매우 동일한 경험을 하는 사람들 또한 서로 쉽게 공감(empathize)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일반신경성을 갖춘(neurotypical)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여기에 매우 익숙해져 있습니다. 따라서 몇몇 사람이 아직까지도 자폐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공감 능력이 없다고(not empathetic) 믿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지 [궁금할 정도죠!] — 당신 주변의 사람들 대다수가 당신의 경험, 감정, 감각 등에 대해 대부분 공감해 준다면, 다른 이들의 내부 상태에 대한 추측들도 대부분의 경우 꽤 정확할 것입니다  어쨌든, 그들은 당신들과 비슷하지만, 그것이 당신을 뛰어나게 공감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할 필요가 되지는 않습니다. 다수와 비슷하지 않은 우리 중의 사람들도 많은 시간 동안 잘못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덜 공감적이라거나, 다른 인간들을 이해할 능력이 덜하다는 것을 나타내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리와 같은 사람들이나 그들로 구성된 커뮤니티(communities)를 가끔씩 구성할 때 이러한 강력한 연결들이 [주는]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우리 자신이 그대로 괜찮으며(OK), 우리를 둘러싼 사람들이 복제하고, 연결시키고 대화하며 [만들어 내는] 우리의 세계에 대한 경험들 또한 실제적(real)이며 괜찮다는 인정(validation)의 감정을 만드는 데 있습니다. 자폐 당사자로서, 우리 중 다수가 우리 삶 전체 속에서 반복적으로 우리 경험에 대한 불인정(invalidation)을 경험해 왔는데, 이는 그 경험들이 [일반신경인들에게] 이해되지 않거나, 주류 서사* 속에 들어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 주류 서사(Dominant narrative) : 사회의 다수자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이야기. 이 글에서는 모든 Narrative를 '서사'로 번역한다. 다만 후반부에 나오는 '서사'의 경우 '삶의 이야기'로 치환해 읽어도 좋겠다.

 

모두가 너무 자주 이 무효화를 내면화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습니다. 사소한 예를 든다면, 꽤 긴 기간 동안, 저는 제가 시끄러운 환경 속에서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것이 제가 열심히 노력하는 것을 시도하지 않았거나, 다른 사람들이 충분히 적절하게 들기에 적절한지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아 발생한 개인적인 실패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자폐 당사들에게서 감각과 다중채널 처리에 대한 어려움이 실재적인 것이며, 이것이 저에 의한 것이 아니므로 나쁘거나 틀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우고 알게 되고 나서야 [이런 무효화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자폐에 대한 의료화되고 결여에 기반한 주류서사는 여기에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저는 놀랍게 창의적인(imaginative) 미술작품을 만들면서도, 자신이 자폐인이기 때문에 상상력(imagination)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고 믿고 있는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진단받았을 때. 저는 우리에게 [있는 것으로] 제안된 사회소통과 상호작용의 '결여'(deficits)를 어느 정도 표면적인 가치로 받아들였습니다. 이 진단은  더 이상 나를 비난하지 않아도 되지만, 동시에 온전한 인간이 되는 것을 포기함으로써 나 자신에게서 물러나도록(resign)하는  저의 사회적인 노력을 승인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어트스케이프를 방문한 이후 몇 달이 지나, 저라는 사람이 이전에 상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사람 같아 보인다는 점을 발견했을 때의 저의 기쁨을 상상해 보십시오! 저는 단지 몇 년 전과 비교해 봤을 때, 요즈음 내가 다른 인간들 속에 있는 것 같다는 것에 관심을 가지는 것에 꽤 놀랄 때가 아직도 있습니다.

 

이러한 인정은 동시에 우리의 정체성, 선호, 우리 경험(특성)의 진실에 대한 자신감과 함께, 가장 중요한, 자조와 자기옹호에 사용되는 단어들에 대한 자신감을 성장시켜 줍니다. 예를 들자면, 저는 소란스러운 환경 속에서 들을 수 없다는 것이 특성(Thing)이며,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 자체를 배워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또한 다음과 같이 설명하기 위해 요구하는 방법 또한 배워야 했습니다.: “저기요, 저는 저렇게 배경소음이 심각한 곳에서는 대화를 진행할 수 없요. 좀 더 조용한 곳으로 가요.”

 

저는 문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분명하게 하는 것이 조용히 버둥거리(struggling)거나, 포기하거나, “저는 자폐 당사자입니다”라고 말해서 다른 사람들이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기를 바라는 것보다, 더 많이 효율적일 수 있다는 것을, 동일한 일을 경험해본 다른 이들과, 시간이 지나면서 [겪는] 시행착오를 통해 배웠습니다. 내가 실제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이것을 잘 설명하거나 요청할지에 대한 방법은, 지역사회에서 크라우드소싱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자폐 당사자인지 확인하는 것 자체로는, 특히 우리가 몇 년 동안 우리가 잘못됐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가진 건강한(healthy) 대처 전략을 개발할 기회를 가지지 않고 있을 때(너무나도 자주, 우리는 우리의 건강한 전략이 나쁘다는 말을 듣습니다), 정확하게 어떤 일들이 어려운 것인지 왜 확인해야 하는 것인지, 어떤 전략이나 변화가 도움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인사이트를 자동적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제가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나누기 위해, 우리 주변에 있는 같은 마음 상태를 가졌거나(like-minded), 비슷한 삶의 경험을 가진 사람들의 도움으로만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기발견, 재구성, 자기이해의 과정입니다.

 

그래서 이 인정감과 소속감이 매우, 매우 중요합니다. 제가 자라면서, 저는 영국과 중국 사이를 많이 오가게 됐으며, 중국인 2세로서, 저는 저에게 일어나는 소외감과 단절감이 저처럼 섞여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것과 같지 않을 것이라고 언제나 가정하고, 그렇게 효율적으로 말해 왔습니다. 제가 16세쯤 되었을 쯤의 여름에, 청소년 글쓰기 대회의 본선에 올랐습니다. 저는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수상자 중 한 명이 자신의 작품을 읽는 것[을 들었는데, 그 글은 반이 영국이고 반이 동아시아인인 자신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우리가 아마도 마법 같은 연결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면서, 즉각 그를 만나고 싶어 졌었습니다. 

 

음, 긴 이야기를 줄여 보자면 그런 [연결]은 없었습니다. 저는 매우 어색하고 이상한 느낌을 받았으며, 그는 자기 친구들에게 돌아가기 위해 가능한 한 빠르게 저로부터 멀어졌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저는 저와 비슷하게 어렸을 때 많은 위치 이동(peripatetic)과, 이전(displacement)과 민족성과 같은 문화적 경험을 한 많은 사람들을 만났으며, 우리는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반면, 이러한 연결들이 전체적인 이야기를 파악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많은 경우에, — 심지어 저의 AQ 점수가 매우 높기는 하지만, 더 많은 자폐 당사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파악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는 점에서 — 제가 놀랍게도 평균치에 있어 왔기 때문에, 제가 제 자폐 정체성을 가지고 여기에 계속 있어온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를 줄이자면, 제 인생 처음으로, 제가 주류 서사에 들어맞는다는 경험을 한 것입니다. 저는 이전에 누구도 이해해주지 못하리라고 생각한 저의 경험 측면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고, 많은 다른 자폐 당사자들에게 거기에 따른 반응을 들을 수 있습니다. 저는 소음차단 헤드폰의 사용, 지시사항(instructions) 적기, 자극 활동을 조용히 하는 방법 찾기 등의 전략 등을 시도해 볼 수 있었고, 이러한 전략들은 자주 작동했습니다. 충격적으로(shockingly) 평균적이 되는 것에 대한 매우 신뢰할 만한 부스터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드러났죠.

 

슬프게도 ‘신경상태’(Neurology)라고 표시된 상자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고양이 옆에서 ‘자폐 정체성’이라고 표시된 상자 속에 숨어 있는 고양이의 그림 .

하지만 [우리에게] 쉽게 들어맞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걸까요? 이러한 서사들이 우리 커뮤니티 안에서의 주요 서사를 더욱 많이 반영하지 않기 때문일까요? 저는 뭔가 공통된 자폐 경험의 일부가 된다고 '가정하'는 것이 그들에게 동감(chime)되지 않아서, 커뮤니티 속의 일부라던가 다른 자폐 당사자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에 질문을 던지면서, [그런 감정을] 덜 느끼는, 자신의 진단이나 자기발견(self-identification)을 처음 마주한 많은 자폐 당사자를 만나왔습니다. 가끔씩 이런 상황이 그들의 경험이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동일하다는 것을 아직 이해하지 못해서 때문이기는 하고, 가끔씩은 단순히 이런 일을 경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이런 것이 그들이 자폐 당사자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멜트다운을 경험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주류적인 설명과 곧바로 들어맞는 방식의 경험을 하거나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 강력한 연결과 소속감에 있는 몇 가지 함정(pitfalls)을 마주합니다. 커뮤니티와 정체성은 배제적이지 말아야 하지만,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다수가 우리 삶을 통해 많은 불인정을 경험해 왔겠지만, 특히 우리가 소속되어 있다고 마침내 느낄 수 있던 커뮤니티에서 다시 우리의 경험이 불인정(invalidation) 당하는 것은 꽤 좌절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저는 우리의 자폐 정체성을 발전시키고 서로를 이어나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가 아는 것에 잘 들어맞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이들의 차별화된 경험들을 불인정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폐 인구(Autistic population)는 극단적으로 다양하며, 우리 중 다수가 어느 박스 중 하나에도 정확하게 맞아 들어가지 않는 일에 뛰어납니다. 이 현상의 이유는 개인 간의 일반적인 다양성부터 시작해서, 삶의 경험, 문화적 배경, 우리의 다른 상호교차적 정체성까지 많고 다양합니다.

 

왼쪽부터 : 자폐정체성, 신경상태, 인종, (한 줄 걸러) 젠더, 계급 (번역)

재미있게도, 제가 어트스케이프에서 위화감을 느끼고, 좌절스러운 가정들을 하게 된 몇가지 방식 중 하나가 제 민족과 문화적 배경이었습니다. 첫번째인가 두번째의 어트스케이프가 끝날 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한 방 속에서 제가 유일한 비백인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문화 또한 저의 자폐 관련 서사와 제가 들어 온 많은 다른이들의 자폐와 관련된 서사(autistic narratives)를 다르게 만드는 여러 방식을 불러 일으킬 수 있습니다. 문자적으로 제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많은 여행을 했고, 새로운 장소에 여행하는 것은 저에게 큰(huge) 문제가 되지 않았었습니다. 저의 영어 글쓰기는 꽤 정돈되어 있지만, 이것은 더 많이 정교해야 하는 한자 글쓰기를 몇년 동안 반복해 온 결과입니다([심지어] 학급에서 가장 나쁜 한자쓰기 실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모든 중국 초등학생이 학교에서 받는 '극적 억양'(Dramatic intonation) 수업을 하지 않은 곳에서 대화를 할 때 어떻게 해야 덜 표현적인 형태가 될지 궁금하기 도했었습니다. [이 수업은] 일부는 문화 교육의 일환으로, 그리고 중국어가 단음절 소리를 내기 때문에 [이뤄지며], 우리는 고대 중국 시를 특별히 과장된 억양으로 크게 암송하도록 교육받았습니다.

 

당연히, 이러한 자폐적인 전형성이 규칙이 아니라는 점은 대부분이 알고 계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자폐 당사자들은 새로운 곳으로 여행하기를 즐겨하고, 우리 중 다수가 손글씨를 휘갈겨 쓰지 않으며, 우리 중 다수가 분명한 표정을 가지고 대화하며, 우리 중 다수는 이들과 반대로 행동합니다. — 그리고 이것 중 어느 것도 우리를 덜 당사자(autistic)처럼 만드는 것은 없습니다. 사람들 속에서 넓은 경향성을 가지면서도 개인적인 변량(variation)을 가지는 것이 모순된 일은 아닙니다.

 

제가 인지한 문화적 차이는, 또한 우연하게 얼마나 자주 다른 이들이 저의 차이를 변명했는지(explained away) [보여줍니다]. 작년에 어트스케이프에서 이뤄진, 연결 및 이동성 문제가, 성장하면서 사람들이 자신의 자폐 속성(trait)을 확인하는데서 관심을 돌리거나 이를 중단하도록 하는지 설명하는 나트(Nat)의 발표와 많이 비슷하게, 나 또한 선생들로부터 사물들을 정리하고자 하는 경향성이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살아온 것의 영향일 것이라고 이야기를 들었으며, 몇몇 수업에서의 저의 조용한 모습은 아시아 아이들이 조용하다는 생각(idea)(다른 수업에서 제가 시끄러웠던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죠)과 결합되었습니다. 저는 또 눈맞춤이 무례한 것 처럼 읽힐 수 있기 때문에, 아시아 문화에서는 자폐 당사자들에게 별로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추측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올해 봄에 베이징의 중국인 자폐 자조그룹을 만났을 때, 그들이 첫번째로 물은 질문은 이랬습니다. “컨퍼런스나 모임에서 사람들이 당신이 눈을 맞춰서 그들에게 관심을 주도록 기대받거나, 당신의 관심을 끌려고 노력할 때 어떻게 대처하시나요?” 모두가 눈맞춤이 중국 내 많은 자폐 당사자들이 직면하는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놀란 것처럼 보이는 모습을 보였습니다(참고로, 최근에 저의 눈맞춤 부족을 지적했던 사람이 비자폐 동아시아 남성이었습니다).

 

방 속의 유일한 비백인이 된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저는 다른 문화나 인종적 배경, 다른 계급적 배경, 그리고 LGBTQ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더 많은 사람들을 포합하기 위한 방법에 대해 노력해 오고 있는 많은 자폐 커뮤니티의 일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러한 교차하는 정체성들을 온전히 포함하고자 하는 도전이 매우 중요하고, 매우 가치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이들(people)이 (커뮤니티의) 주류서사가 그들의 정체성의 다른 부분과 맞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커뮤니티와 정체성에서 배제되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이 현상은 부분적으로는, 우리가 여성 속의 자폐, 자폐와 젠더 불일치 등과 같은 자폐의 다른 전시(presentation)에 대해 너무나도 많이 말하는 것을 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배제감을 느끼지 않는 우리들 중의 그들 속에서도, 우리의 강력한 연결들을 통해 느낄지도 모르는 과도한 식별(over-identification)이 [그 식별 속에] 우리를 맞추기 위해, 우리 속에 있는 다른 중요한 부분들을 지우거나 무시하도록 이끌 수 있습니다.

 

과거에 저는 모든 면에서 그들과 정확하게 동일할 필요가 있다고 자주 생각했던, 너무나도 드물게, 너무나 쉽게 연결되고 대화할 수 있었던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저는 누군가에 의해 그 귀중한 연결을 잃어버리거나 [연결이] 파괴되었을 경우에, 제가 가진 선호들과 차이들이 무엇일지 감히 온전히 탐색해 보지 못했었습니다. 제가 이곳 영국(UK)에서 많은 다른 자폐 당사자들을 알게 되었을 때조차, 내가 나의 문화 정체성을 탐사해볼 수 있겠다고 생각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제가 그렇지 않는 한 자주 잘 연결되어 있어서 연관될 수 있는 다른 이들과 관련된 무엇 때문이 아니라, [제 정체성]이 다른 사람들의 서사와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대화하면서(relate) 가장 강력하게 연결되었던 제 주변 사람들은 주로 백인, 논바이너리로, 일반적으로 젠더 관행에 불응하고 있거나, 남성 자폐 당사자이거나, 신경상태와 관련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저의 젠더 정체성을 탐색하기 시작할 수 있다고 느끼는 동안, 저는 저의 문화적 배경을 꽤 오랫동안 느껴야 했습니다. 이것도 더해야겠네요. 이런 상태가 누군가가 저에게 제가 틀렸다고 이야기하거나, 혼혈 당사자로서 덜 소속감을 느꼈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변화가 매우 놀랍게도 평범한 것에 안도가 되었지만, 가끔씩 우리가 실제로는 전혀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심지어 어트스케이프에 온 지 지난 3년 동안을 살펴보면, 저는 트랜스와 논바이어리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크게 포함되는 변화를 보아 왔습니다. 자신의 젠더 정체성이나 전시에 대해 질문해 보는 것을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사람들이나, 그런 안전함을 느낄 수 없었던 사람들이, 단순히 안전한 자폐 공간 속에 있다고 느끼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그들이 수용된 분류화가 의문시되고 젠더에 대한 생각들이 상대적으로 정상화되는 안전한 퀴어 공간 속에 있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할 권한을 받아 왔습니다(empowered). 탐험 가능한 안전공간은 호기심과 도전정신(experiment)을 가질 수 있고, 그 다름의 경험들에 대해서 두려움이나 판단, 배제 없이 대화할 수 있다는 감정을 의미합니다.

 

문제의 또 다른 부분은 가정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저의 문화적 배경에 대해 가정할 때, 사람들이 저의 젠더정체성이나 신경상태에 대해 가정할 때와 같이, 저는 화를 내거나, 좌절하거나, 방어적이 되거나, 혹은 불인정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invalidated). 예를 들어, 이 곳에 있는 몇몇 사람들이 이야기할 수 있는 내용은 사람들이 당신이 자폐라는 것을 알았을 때, 상황을 파악하는 것을 덜 잘하거나, [다른 사람을] 의존해야 한다고 사람들이 추측하는 것일 겁니다. 자폐 당사자가 된다는 것, 논바이너리가 된다는 것 —  이들 모두가 저의 정체성 중 다양한 일부를 부르는 유용한 이름이며, 연결을 위한 시작점이 될 수 있지만, 그들은 또한 제가 아닌 사람들에게 실제적으로 저와 비슷한 것과 상대적으로 적은 관련 밖에 없는, 나라고 할 수 없는 사람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사실을 찾아내려면, 당신이 직접 [저에게] 질문하시는 게 좋을 것 같고요, 저 또한 대답하고자 합니다.

 

많은 다양한 서사들을 아우르는(embracing) 것은 단지 포함(inclusion)과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과 다른 인류들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풍부하게 하는 것과도 연관돼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공개적으로 젠더 정체성에 대해 대화함으로써 자신의 젠더 정체성을 더 잘 탐색할 수 있었던 사람들과 같이, 우리는 모든 종류의 다양한 상호교차하는 정체성으로부터 나오는 다양한 서사들을 격려하면서 가치를 부여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양하지만, 동시에 너무 많이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패턴들을 찾아내는 것에는 매우 뛰어나지만 박스 속에 들어가는 일을 잘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우리 중 많은 이가 우리의 서사들이 들리지 않는 것 같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 그래서 우리는 특별히 커뮤니티로서 잘 조직될(well-equipped) 수 있고, 무엇이 맞지 않을 것 같은지 이해하고 있으며, 공통성을 유추해내고, 다름을 찾아내면서, 경험의 놀라운 다양성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다미안은 여러 작품에서 자폐와 자폐 당사자들이 너무나 자주 시간 순서에 따른 논리적인 서사를 강요받거나, 외부로부터 정의되기보다는, 지속적으로 진화하는 개인 서사이자, 경험의 조각들로부터 자아를 재생성하는 의식적인 행동인 개인의 “자폐 문화 기술지(aut-ethnography)”를 구축하는 데 있어서 개인의 정체성이 가진 가치에 대해 여러 작품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자폐 당사자로서, 저의 정체성 감각은 완전히 논리적(coherent)이지도 않지만, 유동적 정체성인 것도 아닙니다. 저에게 있어서, 자아의 기억들과 감각들은 조각으로서 경험되며, 패턴을 만들기 위해 힘들여(painstakingly) 구축되고 건축된 것입니다. 이러한 패턴들은 이동 가능하며, 이미 패턴들은 누군가가 그 패턴들을 보기 위해 시도할 때마다 움직이며 대체됩니다”.

- 다미안 밀턴(Damian Milton, 2017)

자폐 발전, 트라우마와 개성(Personhood): 신자유주의적 개인이라는 프레임을 넘어

 

 

저는 우리들의 다른 부분들에게서 인사이트를 얻게 되면. 이러한 인사이트들이 우리가 누구이고, 우리가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이동하고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커뮤니티로서, 개인으로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우리 자신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글쎄요, 저는 우리가 이 연결의 강도를 염두에 두고, 단지 우리와 비슷한 소리를 즉각적으로 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의도적(이나 의도적)으로 — 특히 아직까지 자신의 자폐 정체성이 꽤 새로우며, 자신의 자아이해(self-understanding)에 확신이 덜한 — 다른 자폐 당사자의 경험을 무효화하거나 과소평가하지 않도록 신경을(sensitive) 쓸 것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사람들이 소속감을 간절히 바라면서 공통점을 찾고자 할 때, [자신의] 경험이나 선호가 [그들에게는] 너무나 쉽게 판결이나 선제조건같이 다가올(came across)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파티를 좋아한다고 나눠준(sharing) 사람에게 “음… 나는 자폐 당사자여서 파티가 싫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서 그러한 소외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왜 우리의 경험이 다를 수 있는지에 대해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말은 대화를 중단시켜 끝내버리거나 싸움으로 이어질 수 있는 계기를 주기도 합니다. 왜 그들이 파티를 좋아하는지에 대해 민감하게 호기심을 가지면([이렇게] 물어보는 거죠, “어어? 파티의 어떤 점이 좋아?”) 그들이 저와 [만나는 것을] 즐거워(enjoy)할 가능성을 만드는데 인사이트를 줄 수 있기도 하고, 아니면 귀여운 개가 들어오거나, 특별한 관심사를 괴짜스럽게(nerdily) 대화하거나, 작품(art)을 만든 다음에 멋진 식사를 해서, 제가 가고 싶어 지는 그들의 파티들에 대해서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르죠. — 아니면 그들이 사회적 상황을 경험하고 다루는 방식이 매우 다른 것일 수도 있고, 그걸로 괜찮아요!

 

“오오, 이런 파티를 이야기하는 거였구나!”(번역)

 

무엇보다도, 저는 다른 이들의 관점과 경험을 근본적인(radical) 수용감과 신뢰감을 가지고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특정한 사람들이 자페 커뮤니티에 연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자폐 경험이 그들에게 실제로 들어맞는다는 것, 그들이 자기 진단을 했거나 궁금하거나 진단을 받았다는 것 — 에 대해 모두가 언제나 맞다고 하지는 않지만, 판단하는 것 또한 정말로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그 대신 그들이 우리의 다른 정체성에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적극적으로 들어주며, 우리의 많은 다양한 경험들에 대해 받아들이고 공손하게 호기심을 보이면서, 우리는 드러나지 않아 온(underrepresented) 다른 집단들을 더 잘 포함하면서, 우리에 대해 더욱 깊이 배워나가고, 자폐 당사자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배워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첫머리에 제가 서술한 캐서린의 연구가 현실을 재현한다면(representative), 우리 중의 다수가 다른 자폐 당사자들과의 연결이, 일반적으로 보다 직관적이고, [그 속에서] 보다 더 효율적으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 우리는 이 연결을 분리하기보다 학습하는 데 사용할 수 있으며, 그 연결이 일어나고 있지 않을 때, 우리는 그 이유를 이해하고자 노력함으로써 더 많이 배울 수 있습니다. 다른이들의 다양한 차이들에 대해 듣는 것은 자폐 당사자로서 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다른 정체성들의 교차지점 속에 있는 사람으로서, 우리 모두가 더욱 진정한 우리가 되는 것을 도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강력한 연결들이 파괴되거나 배제할 가능성을 줄이고, 연결을 더욱 가치 있고 포용적으로 만들면서 이 연결들을 더욱 깊게 만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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