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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모두를 받아들이는 교회를 위하여



  아직 미국에서 인종차별이 사라지지 않기 전, 오래전의 일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던 어느 흑인 자매가 있었습니다. 그 자매는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했고, 그래서 매주 주일에 교회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교회는 백인들을 위한 교회들과 흑인들을 위한 교회가 따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자매는, 집을 떠나 도시에 가게 되었습니다. 주일이 되어 교회에 가고 싶은데, 그 곳은 백인들이 사는 곳이라 백인 교회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그러한 구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예배를 드리기 위해 일찍 가서 백인 교회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자리에 앉았죠.
  그런데 역시나, 백인 교회에 흑인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나서, 주위의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사람들은 그녀에게 여기서 예배를 드릴 수 없으니, 여기서 나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거부했죠. 그럼 어디에 가서 예배를 드리라는 말일까? 그녀는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그 주위에 예배당은 이 곳 한 곳 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백인교회 사람들은 완강했습니다. 백인교회 사람들은 결국은 그녀를 끌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예배당 문을 굳게 닫았습니다.
  자매는 절망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왜 제게는 예배를 드릴 자리가 없느냐고 물었죠. 그 때 예수님이 그 자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거기 들어가서 있을 자리가 없구나."

(이 이야기를 정확하게 들은 적이 없어서 다시 paraphrase해서 이야기를 다시 적었습니다.)


1. 우리가 가끔씩 설교에서 듣게 되는 이 예화는 우리가 얼마나 사람들을 배척하는지, 또는 배척하지 않노라 하면서도 그러한 마음이 내면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는지 우리를 깨우쳐 줍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이미 성경을 통하여 지적되어 있습니다. 멀리는 모세오경에서부터 계속해서 가난한 자를 경시하지 말라고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이러한 정신을 강조하고 있는 곳은 바로 야고보서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2장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에 대해 조목조목 짚어주고 있습니다.

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2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4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6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7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8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9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야고보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면서 아예 2절부터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과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의 예를 들어서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예 9절에는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람을 차별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는 사실은, 사람을 차별하고, 구분하고, 분리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잘 보여줍니다. (물론 거룩하게 되는 것이 문제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2.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불리는 교회는 어떨까요? 우리야 말로 사람들을 배척하는데는 가장 큰 죄를 지운 단체가 아닌가 합니다. 십자군전쟁만 해도 그렇습니다. 십자군 전쟁은 당시 가톨릭이 이슬람교와 유대인들, 그리고 정교회 사람들을 배척하고 자신들의 힘으로 성지를 재건하고, 그래서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재건하겠다는 강한 의지에 의해 일어난 상황입니다. 그리고 그 피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결국은 기독교의 역사에 씻을 수 없는 강한 상처를 남겨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상황은 현재까지 이어져, 결국은 기독교 Vs. 이슬람의 싸움이 되었습니다. 이걸 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도 서로가 서로를 배척하는 모습을, 그리고 서로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모습을 너무 많이 보게 됩니다. 가톨릭과 개신교 등의 문제를 넘어서서, 당장 교계 신문을 둘러봐도 안타까운 사연들이 들려옵니다. 때로는 잘못된 것을 자기 편이라고 감싸주고, 때로는 옳은 것도 자기 편이 아니라고 배척하는 이 모습, 그리스도인들이 닮아야 할 모양이나 모습과는 전혀 다릅니다.

 일례를 들어보려고 해도 너무 많습니다. 최근 감리교 감독회장 사태, (예장 ○○에 의한) 이재철 목사님과 양화진 100주년기념교회 논란, 이단시비, 큰믿음교회 관련 문제, 신사도주의 정죄 문제, 용산사태,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상반된 평가, 그 외에도 얼마든지 예를 들어볼 수 있곘습니다. 그러나 이 글은 그러한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이야기하려는 글이 아니라, 그러한 문제를 최대한 줄이려는 글이기 때문에(그리고 나중에도 얼마든지 논할 수 있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논의를 피하는 방향으로 가는것이 옳을 듯 합니다.

 3. 몇 개월 전 교회 카페에서 인터넷을 보다, 이명박 정부가 내린 결정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비판 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그 글을 읽고 나서 곧바로 어떤 분이 (직분은 잘 모르겠습니만) 저에게 '어떻게 그런 말씀을 교회 카페에 올리십니까?' 라면서 조심하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그 글을 보고 어이가 없었고, 그 때 사과는 드렸지만 할 말은 하고 넘어가야겠다는 심정으로 이 글을 남깁니다.

 물론 교회는 정부를 이유없이 비방하거나 공박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을 포용해야 합니다. 자신과 다른 생각과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틀렸다고 누가 말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사람 1단원 3과 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십자가의 사랑을 정말 경험한 사람은 누구도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하지 않고, 남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자기 죄를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십자가의 능력을 깨달은 사람이며 체험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욕심을 마음에 담은 채 남의 욕심을 비난합니다. 우리는 거짓을 품은 채 남의 거짓을 참지 못합니다. 우리 자신도 이기적이면서, 이기적인 사람을 정죄합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능력으로 거듭나게 되면 가장 먼저 이것부터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남에 대하여 할 말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남을 정죄할 자격이 없습니다. 남의 죄악과 허물이 보이는 것이 문제라면, 그 전에 내가 그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는 죄를 저지르는지 고민해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정말 우리의 죄를 돌이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죠.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마 7: 1 ~ 5)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비판하는 것을 꺼려야 함과 동시에, 남을 받아들일 줄 아는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 있어서 큰 과제 중 하나 입니다. 아마 이 조건이 우리의 믿음 - 불신앙과도 연계되어 있을 것으로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4. 그런데 잠깐 생각해봐야 할 것 중 하나로, 그런데 사회 정의는 어떻게 봐야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면, 사회의 잘못에도 눈을 감아야 하는 것일까요? 교회를 누군가가 해하고자 하는데도 그대로 받아줘야 하는 것일까요? 또는, 666이 그리스도인을 탄압해도 봐 줘야 하는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러나 이 부분들이 (즉 판단과 정의 사이가) 우리가 잘 판별해야 할 문제중 하나이기도 한데, 그것은 우리가 사회 정의에 대해서 합의된 우리의 담론들이나 믿음을 가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분명히 우리는 감리교 사회 신경등의 형태로 우리의 믿음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믿어야 할지에 대해 공식적으로는 믿음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구체적인 상황으로 다가올 때, 우리는 그 믿음대로 행동하지 못합니다. 실례로 감리교 본부에서는 대운하 사업과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고 있는데, 동일한 김리교 교회들에서는 이를 찬성하고 지지하는 반대의 현상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위기의 때가 닥쳐왔을 때, 우리는 무엇을 믿는다고 정직하게 말할 수 있을까요.

 5. 돌아가서, 제가 이명박 대통령을 까는 것을 교회에서 금기시하는 것에 대해서 우려하는 이유는, 이명박 대통령을 신뢰하는 믿음이 마치 하나님을 믿는 믿음 같이 되어가는 듯 하는듯 해서 입니다. 사회 통념이 다르다고 새신자에 대한 마음을 닫아버린다면, 우리가 누구를 그리스도깨로 불러올 수 있겠습니까. 하나 안 맞는다고 그걸 주입시키고 그들에게서 우리를 단절시킨다면, 우리가 얻을 열매 또한 '사회에서의 단절' 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사람들을 불러모아야 할 시간에, 교회에서 사람을 내치고 있습니다. 말로는 청소년을 다음세대를 위하여 사역해야 한다고 하지만, '시간 없는' 그들을 이해해주기는 커녕 마치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의 라이프스타일밖에 없는 것처럼 '협박'합니다. 물론 예배도 중요하고, 헌금도 중요하고, 새벽기도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더더욱 본질보다 비본질이 중요한 것처럼 호도될 수는 없습니다.

 6. 그렇다면, 우리 교회들이 회개할 때입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이유(요 17:16)로 세상에 존재하기를 거부한다면, 우리가 존재할 곳은 어느 곳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 이전에 세상에 존재하고 있습니다(요 17:11). 부정한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복음과 진리 앞에 앞서, 우리가 바리새인들이 되어서 천국 문을 막고 있는 것은 아닌지(마 23:13),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적용하는 것을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우리를 개혁합시다. 그래서 모두에게 교회 문을 열어 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