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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lkabout/시사

기본소득에 대한 나의 입장 - 기본소득 선언에 연명하지 않는 이유



[ 기본소득 남구선언 함께해요!! - 우공이산의 신화 ]
[ 기본소득 블로그선언 - 모두 무장을 하고 ]

 기본소득을 알고 있고, 대한민국의 기본소득네트워크연합 카페에 가입도 했으며, 기본소득에 대해서 무지할 수 없는 사람으로서 두개의 선언에 선언할 기회가 있었다. 한 번은 기본소득 (인천) 남구선언이었고, 나머지 한 번은 기본소득 블로그선언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 두개의 선언에 서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기본소득을 싫어해서 기본소득 선언에 연명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나는 다른 의미에서 기본소득을 지지하고 있었고, 그리고 그 의미가 양 선언이 가지고 있었던 의미와 동일하지 않았기 때문에 연명하지 않았다. 사실 남구선언의 경우는 거기에 일종의 귀차니즘이 들어가 있었던 것도 있었고.. 랄까 어쨌든 600명 채웠으니 나 하나쯤 없어도 될 선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두 개의 선언에 연명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나의 입장을 분명히 하고, 앞으로도 이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번 기회에 그리스도인인 내가 어떻게 기본소득을 이해하고 있고, 받아들이고 있는지 분명히 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


 율법의 말씀, 성령의 대안

 사실 기본소득을 온전한 빈부격차의 대안으로 삼기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신 15:11)
 물론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이 화자가 아니라 모세가 화자이기는 하지만, 이 말씀은 중요한 관점을 하나 알려준다. 우리 옛날 속담에 '가난한 이 구제는 나랏님도 못한다'고 하였듯이, 빈자가 힘들게 살아가는 이러한 상황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이 불가피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세는 이에 대한 대안으로 구제를 제시한다. 그리고 이를 지킬 것을 이스라엘인들에게 명령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이러한 법을 제대로 지켰던 사람이 얼마나 될까. 유대인도, 기독교인들도, 서로의 소득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지, 소득을 주어서 구제하는 것을 위해 노력한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그것은 율법이었기 때문에 강제되기는 했지만, 결국 가난한 사람이 계속 가난한 이 현상이 해결되는 데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물론 19세기 말부터 미국에서 기부가 활발해지기는 했지만, 그것은 미국 내에서만 이루어진 행동이었고, 지금 현재의 상황에서 기부만으로 모든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해진다.

 그러나 성령님이 오셨들 때 일어난 현상들은 다르다. 사도행전 2장 앞에는 성령을 받고나서 방언을 말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사도행전은 성령과 함께 발생한 현상을 다음과 같이 기재하고 있다.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 2: 41~7)
 여기에서 중요하게 보아야 할 점은 말씀을 통한 부흥과 함께 기존의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점이다. 특히 서로 가운데 물건을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고, 같이 성전에 모이고, 서로 먹으며 나누었다는 점이다. 물론 완벽한 우리가 생각하는 완전 평등의 세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기존의 사고 파는 경제체계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러한 경제체제가 가시적으로는 정착하지 못하고 실패했지만, 결론적으로 나눌 수 있는 체계가 시작된다면, 이러한 문제들이 해결될 가능성을 논할 수 있게 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나는 기본소득에 찬성한다.
 그런데 나는 왜 이를 지지하는 선언에 서명하지 않았을까? 그럼 선언들을 하나씩 보면서 내가 어디에서 기본선언 소득에 관한 선언들과 생각을 달리해보는지 서술해 보도록 하겠다.


 남구선언 - 남구 주민을 위한 선언인가?

 1. 남구선언의 첫 두 단락에는 동의한다. 문제가 있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해결책을 요구로 하고, 따라서 그 선언에 대해서 기본소득이 해결책 중에 하나가 될 수 있음은 동의한다. 그러나 선언은 두번째 단락의 마지막에서부터 기본소득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시작점임을 강조한다. 물론 시작점으로 작용해야 한다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는다. 문제는 기본소득이 거의 유일무이하며, 주요한 시작 포인트라고 이 선언이 강조하는데 있다.

 2. 그리고 두번째로, 기본소득을 실현하기 위해서 남구선언의 모든 선언자가 (기본소득의 필요성과 정당성에 공감하는 우리는 … 이를 지역사회의 요구가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연구하고 있다. 우리는 … 다양한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구체적인 제도화 노력까지 기울여왔다) 이에 대해서 연구해온 것처럼 호도되어 보일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그럼 기본소득에 대해서 연구를 하지 않은 나 같은 사람도 이 서명에 한번 연명한다면 갑자기 기본소득의 전문 연구자가 되는건가? 약간 신중한 초안을 작성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3. 또한 권위에 대한 오류가 보이고 있다. 브라질 차원의 법이 현재의 우리 현실과 거의 무관한 상태에 있음에 불구하고 이것을 국가 차원에서 이끌어냈으니 이것이 서울로, 다시 인천 남구로 이끌어져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사실 연관이 없지 않은가? 남구에 필요한 것은 우선 이러한 표면적인 선언을 통해 남구 주민들이 모르는 사이에 '기본소득이 이래서 좋습니다'라는 체면, 또는 주장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기본소득이 무엇인지 남구 주민에게 알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면에서 남구선언은 주장만 하고 그것을 위한 행동, 또는 행동의 가능성 어느 쪽도 제시하고 있지 못하다.


블로그 선언 - 반대를 위한 반대

1. 블로그 선언은 첫 단락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다. 도시와 공기업까지 상업화된 상황을 제시하는건 좋은데, 정작 그 다음은 '모든 개인의 주거권, 사회권, 참정권은 물론이고 목숨 그 자체마저도 손익률에 기준해 평가되는 지금, 모든 도시민 역시 성장연합의 상업적 소유품일 뿐이다.' 라는 위협적인 단정이 나를 위협하는 듯하다. '넌 지금 위기 시대에 살고있어!' 그리고 계속해서 현실, 또는 '과장된' 현실을 내놓는다 : '생계를 잇지 못해 죽어가는 사람들이 쌓여가는데도 지배자들은 우리에게 더 양보할 것을 요구한다. 파업하지 말고, 투쟁하지 말고, 노동조합조차 만들지 말고, 눈을 낮추고, 일하라고 외친다. 그러나 우리에겐 일할 자리도 없다. … 이제 우리에게 어떠한 공공재도, 어떠한 자연적 유산도 허락하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빅브라더, 또는 666의 전조를 보고 있다. 하지만 부정적 인식에 대한 부정적인 말의 되풀이는 결국 부정적인 상황을 확산시킬 뿐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2. 그리고 우리의 가치는 깎여나가고 저하된다: ' 모두가 빈민, 부자유한 자, 그리고 노동자였다. 상처를 주는 역할도, 상처를 받는 역할도 부자유한 자들의 몫이다. 부자유한 우리는 점점 더 악하고, 신경질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본질적 모습이 아니다. 사회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모습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에 책임을 돌린다. 하지만 그렇게 강변하기 전에, 사회가 우리를 통해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가진 자가 '우리'안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이 선언이 근본적으로 우리의 책임을 '그들'에게 돌리기 위한 것이라면, 이건 우리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자만밖에 되지 않는다. 또는, 우리가 우리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3. 물론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는 다시 치루어야 할 대가가 너무 많다. 그리고 우리는 그 대가지불을 하고 있거나, 유예하고 있거나 둘 중 하나의 위치 사이에 있다. 문제는 그러한 대가를 치루기 위해 누군가는 투쟁을 요구당한다는 데에 있다. 20대의 많은 이들이 투쟁을 하기보다는 투쟁을 멈추고 싶고 돈을 벌고자 하는 생각을 하는 이유 중 하나가 너무 많은 일을 어려서부터 요구당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많은 일에 대한 요구를 줄여나가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개선방안 하나 없이, 단지 이 선언은 현실에 대한 판단을 곧바로 쏟아내버리고, 그리고 나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 하니 기본소득을 도입하라고 말한다. 그런데 제목부터 포함해서, 선언문에는 '기본소득'이라는 단어가 단지 다섯번 밖에 들어가 있지 않다. 이 선언이 투쟁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선언인지, 아니면 투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선언인지부터, 생각해보아야 할 부분이다.


결론

 결론적으로, 단지 있는자에게서 빼앗기 위한 기본소득이라면 반대한다. 그렇다면 노키아가 존재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회사가 존재할 필요도 없다. 기본소득은 모두가 공존하기 위한 기본소득이어야지, 싸우기 위한, 빼앗기 위한 어떤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양 선언의 논조나 방식에는 분명한 문제가 존재하고, 그래서 나는 선언할 수 없었다.

 앞으로 기본소득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모두를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나오는 선언부터 긍정과 화합의 이미지가 아니라, 단지 탈취, 싸움만을 주장하는데 모두가 어떻게 기본소득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다음 번에는 이러한 부분들이 정리되어 나온 기본소득 선언들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