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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콘텐츠/소리들

시편이여, 다시 오라 - 자캐오나무 3집 Psalmus Responsorius(화답시편)



발매일 : 2010. 4. 19.  발매처 : 성바오로


주의 : 이 글은 철저히 개신교인의 입장에서 작성되었으며, 따라서 이글을 보시는 가톨릭 신자 여러분들의 양해가 있으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보통의 개신교인이 가톨릭 성가를 듣는것은 거의 힘든 일이 아니지 않은가 싶다. 솔직히 개신교 안에서도 새로운 찬양이 쏟아지고 있는 판에 어떻게 가톨릭 성가를 챙기겠는가. 솔직히 쏟아지는 예수전도단, 옹기장이, 어노인팅, 마커스의 찬양만 체크하고 다녀도 1년에 모든 회중찬송에서 흡수할 수 없는 분량의 찬양이 쏟아진다. 이러니 어떻게 다른 찬양들을 체크할 수 있을까.

 하지만 오늘 나는 가톨릭 찬양을 소개하고자 한다. 정직한 음반 구매를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면서 도시락을 자주 이용하는데, 도시락에서 CCM 카데고리에 올라오는 찬양의 90%이 개신교 찬양이기는 하나 나머지 10%는 가톨릭 찬송이다. 그 카데고리에 새로 들어온 음반을 찾다가 우연히 발견한 음악을 듣기 시작했는데, 계속해서 들어지는게 아닌가. 기존 개신교의 찬양들이 짧아도 3분, 길면 10분을 가는데 여기 노래는 길어봤자 5분이고 짧으면 2분도 안되는 곡도 있다. 그런데 그것이 다른 곡이 아니라 시편을 가지고 만든 곡들이다.

시편은 기독교의 발생 초기부터 많은 신앙의 선조들에 의해 불리운 믿음의 노래이다.



 생각해 보면 시편의 말씀들은 그동안 많이 암송되고 묵상되어왔다. 그리고 개신교에서도 시편 23편만을 가지고 하나의 음반을 만들었었고, 정종원 목사님의 시편 150편 같은 기쁜 찬양들도 많이 있다. 하지만 현대 많은 개신교인들의 찬양과 예배애서 시편의 가치는 낮아져가고 있다. 그러나 가톨릭은 그렇지 않다. 가톨릭의 경우 독서와 독서 사이에 반드시 시편을 하나 찬송하게 되어 있는데, 따라서 예배를 한 번씩 드리게 될 때 마다 시편과 항상 접하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개혁을 일으킨 음악도 시편가였고, 시편가가 개신교의 형성에 있어서 가장 큰 역할을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시편가가 불리는 곳마다 개신교의 진리가 선포되었고, 따라서 당시 구교국가의 주류로 자리 잡고 있던 프랑스에서는 이웃 제노바에서 시편가 책을 수입한다든지, 리옹에서 개신교 시편가를 출판한다든지 하는 것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을 정도이다[각주:1]. 따라서 개신교의 시편가는 모든 개신교인들을 묶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게 그 문제의 프랑스어 시편가의 일부.



 이와 같이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이 불렀던 시편가는 영미 장로교에서는 찬송가를 통해 아직도 남아있는데, 우리 한국 개신교의 경우는 19세기 말부터 이미 우리 스타일의 찬송가집이 형성되기 시작해 1930년대 신편찬송가에서는 완전히 정착된 이유로, 일부 시편에서 나온 찬송을 찬송가에서 부르는 것을 제외하고는 1) (새찬송가 기준으로 시편이 반밖에 편성되어 있는) 교독문으로 그 위치를 대신하거나, 2) 아니면 예배에서 시편과 상관이 없는 찬송만 부르다가 끝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자캐오나무, 아니 우리 개신교 기준으로는 삭개오나무의 음반은 신선하다. 우선 교회력의 순서에 맞추어 미사에 나오는 시편을 그대로 재료로 삼아서 그 내용을 가지고 찬양으로 만들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기는 했지만 전례시편 문제 때문에[각주:2] 이걸 그대로 새로운 노래로 만들기가 힘들어서 (아마) 가톨릭 성경에 맞춘 것도 있고, 그냥 후렴만 가지고 간 것도 있다. 하지만 시편을 재발견하고 현대적인 감각에서 새로운 찬양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나로서도 높은 평가를 하고 싶다. 어느 정도였냐면, 음반을 한번 듣고 나서 계속해서 돌려서 듣고, 곧바로 구매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렇게 텍스트가 있으면 한 글자도 틀리지 말고 부르는게 미사의 화답송이다. 출처는 전례독서 2010년 4월 4일.


  그런 의미에서 나는 개신교 찬양사역자들이 이 노래들을 꼭 들어보기를 추천한다. 우리 안에 알게 모르게 저평가되고 있었던 시편의 의미를 다시 발견하는 음반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우리가 가진 시편의 노래들을 잘 활용해서 시편을 자주 부르고, 그 가운데 계셨고 계시며 계실 하나님을 묵상하고, 되새기고자 하는 움직임이 회복되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그래서 '부흥이여 다시오라'라고 외친 'Again 1907' 처럼 시편이 다시 개신교인의 삶 가운데 회복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다.


  1. 미야시타 시로, <책의 도시 리옹>, 한길사, 2004 [본문으로]
  2. 2008년 한국 가톨릭 추계주교회의에서 전례시편이 새로 제정되어 2009년 부활절부터 사용되었다. 이 시편은 화답송에 쓰기 위해 새로 번역한 것으로서, 전문은 공개하지 않고 미사문에만 사용되고 있다. [본문으로]
  • 2012.02.17 21:54

    비밀댓글입니다

    • Favicon of https://ellif.tistory.com BlogIcon Ellif 2012.02.23 19:07 신고

      찬미예수님.
      댓글에 감사드립니다.
      참고로 저는 지금 다음 전례음악 카페에 가입되어 있고 그쪽을 공부한 적이 있어서 관심을 가지고 있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톨릭으로 전향할 의사는 전혀 없지만 말이죠.
      저는 기독교 일치가 주님 오시기 전까지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는 지체들이 보다 협력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나갔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쪽에 계시는 신부님들께도 부족한 이 글을 봐서 감사하다고 말씀을 전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p.s 굳이 비밀로 댓글을 다실 필요도 없는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