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웹컬처/만화-애니

'인간과 애니메이션' 유감





   꽤 시간이 지나기는 했지만, 언급할 필요가 있어서 지난 3월 24일(월)부터 26일(수)까지 EBS에서 매일 밤 열시에 방송된 3부작 다큐멘터리 '인간과 애니메이션'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인간과 애니메이션'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장점은 지금까지의 애니메이션 담론에 대해서 한 번에 정확하게 정리했다는 점이다. 1부에서는 애니메이션이 어떻게 시작되어서 지금까지 어떻게 흘러왔는지, 현재 발전상은 어떻게 되었는지를 애니메이션 강국인 미국과 일본의 주요 제작사를 모두 인터뷰해 정리해 두었으며, 미국 양대 산맥인 드림웍스와 디즈니-픽사, 일본의  지브리 스튜디오가 이 목록에 포함되었다. 그리고 2부에서는 애니메이션의 제작과정을 최근 큰 화제가 된 <겨울왕국>과 곧 개봉할 <천재 강아지 미스터 피바디>를 중심으로 살피고, 그 외에 주목할만한 애니메이션 흐름들을 살펴두었다. 이를 이어 3부에서는 이에 반해 국내 애니메이션의 현실을 과거부터 현재까지, 그리고 다양한 국내 제작사들의 2000년대 이후 작품(<원더풀 데이즈>, <소중한 날의 꿈>, <사이비> 등)을 사실상 전부 다루어두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정리해 두었다.


   또한 이러한 다큐멘터리 제작과정은 너무나 디테일해서 결과적으로 국내에서만 이 다큐멘터리가 활용되고 말기에는 안타깝다고 할 정도로 뛰어나다. EBS팀은 주요 애니메이터들과의 인터뷰 이외에도 <겨울왕국>의 음반 실제 제작과정 동영상을 받아오고, 해당 시점에서는 아직 개봉되지 않은 <천재 강아지 미스터 피바디>를 선공개하는 것을 허가 받은데다가, 심지어 제작과정에 대한 실제적인 커멘터리까지 따오는 등 상당히 많은 노력의 산물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3부에서는 1부와 2부의 애니메이션을 제작한 청년 애니메이터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들을 보이지 않게 떠밀어주는 배려까지 보인다.


    한가지 더 칭찬해야 할 점은, 어느정도 팬들에게는 익숙하지만 일반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은 개념까지  전부 세부적으로 설명했기 때문에 애니메이션에 대해서 비교적 객관적인 시점을 가지고, 일반인들이 애니메이션 지식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한, 벽을 허물어트린 공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결과 EBS의 <문자> <한반도의 공룡> 등의 주요 다큐멘터리 리스트에 이 다큐멘터리를 추가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명작이 나왔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스튜디오 애니멀 역작 <고스트 메신저> 의 제작장면 



   그런데 이 다큐멘터리 시리즈에는 가장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 일본의 대중 애니메이션과 그 애니메이션을 사랑하는 국내의 애니메이션 팬덤 흐름을 일부러 다큐멘터리의 내용에서 빼 놓았다는 것이다. '인간과 애니메이션'은 1부에서 토에이(동영)의 <철완 아톰>으로 시작되는 일본 초기 애니메이션의 모습을 담았으나 그 이후 자연스럽게 등장한 <플랜더스의 개>로 대표되는 1970-80년대 만화 기반 애니메이션의 출몰, 이후 1994년 가이낙스의 <신세기 에반게리온>으로 새로이 시작된 현재의 최신 애니메이션 흐름, 더군다나 국내에서 1990년대 어린이 · 청소년 층을 대상으로 큰 인기를 끌었던 <마법기사 레이어스> <에스카플로네> <세일러 문> <천사소녀 네티>(상기 한국어판 제목) 일본 애니메이션 붐에 대한 내용은 언급조차도 없었고, 이 흐름에서 삐져 나온 신카이 마코토 감독만 지브리 스튜디오와 연계해 취급하면서 일본 애니메이션의 대표 감독으로 설정해 두었다. 하지만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류'내지 '파'를 창조한 감독이라고 보는 것이 옳지, 결코 일본 애니메이션의 주류로 평가될 수 없다. 물론 <초시공요새 마크로스>감독의 인터뷰가 들어가기는 했지만 일반적인 언급에만 거쳐 일본 애니메이션의 주류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하는 한계점이 있다.


   그나마 3부에서 국내 유일 일본 대중식 애니메이션인 <고스트 메신저>의 제작사 스튜디오 애니멀을 언급이라도 한 것은 다행이었다. 그들을 지지하는 팬층이 있다는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 둔 시청자라면 뭔가 저런걸 지지하는 층이라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봤을 테니까. 하지만 1부와 2부만을 시청한 애니메이션과 무관한 시청자라면 현재 애니메이션은 미국에서 만든 창작 애니메이션이나 작가 정신을 담은, 아름다운 일본식 애니메이션만 있는 줄 알 것이다.


   또 제작진 측에 묻고 싶은 질문이 하나 더 있다. EBS는 왜 굳이 해외로만 나갔는가? 특히 2부 초반에서 국내의 많은 만화 팬덤과 외부 행사를 차치하고 해외의 컨벤션과 코스어들의 영상을 찍어온 이유가 궁금하다. 아니 이 질문을 이렇게 바꾸어보자. 국내 애니메이션 팬덤 행사를 촬영하면 안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국내 청소년과 청년들의 문화로 비치는 것과 해외 대중들의 문화로 비치는 것의 이미지 차이가 크기 때문에?


   물론 제작진측에서는 한국 애니메이션 문화와 산업은 현재 일본 대중 만화-애니메이션 산업에 대한 인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을 것이고, 이러한 부분을 다루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그런 애니메이션을 '왜색' '퇴폐적'이라고 비판하는 YWCA 등의 시민단체나 어르신 층의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아니면 행정부 측의 눈치를 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결과 현실을 왜곡하고 검열한 결과물이 나왔다는 것은 슬픈 사실이 아닐 수 밖에 없다. 더군다나 이러한 결정이 제작 의사결정의 상부 단위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점은 EBS 다큐멘터리팀이 이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게 된 동기이자 진정성을 의심하게 하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더군다나 일반적인 애니메이션 전반을 다루지 못한 아쉬움은 결국 이 애니메이션이 국외 수출용으로 활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잘라 내고야 말았다.


   EBS는 그동안 다큐프라임과 EBS 국제 다큐멘터리 페스티벌(EIDF)을 통해 좋은 다큐멘터리를 지속적으로 제작, 발표해 왔다. 하지만 이번 '인간과 애니메이션'은 지금까지 EBS가 쌓아온 객관성과 공신력을 뒤엎은 유감스러운 결과라고 생각한다. 차후 EBS가 제작하는 다큐멘터리들이 이러한 유의 실수를 다시 범하지 않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