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선 찬송가〉, 투박하지만 힘 있는

 

〈쫓겨나는 이들과 함께하는 현장예배〉(’19.5)

 

옥바라지선교센터(2019), 〈옥선 찬송가〉.

 

1. 이 글에서 설명하고자 하는 〈옥선 찬송가〉가 왜, 어떻게 생겨났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옥바라지 선교센터가 어떤 곳인지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필요하다. 옥바라지 선교센터는 옥바라지 철거 사태 중에 개신교 신학생들에 의해 생겨났다. 예장통합부터 감리회, 성결회까지, 폭이 넓은 스펙트럼의 '선지동산'에 있는 청년들이 2016년 5월, 서울시 서대문구에 있는 구본장 여관에서 강제철거를 막기 위해 모였고, 그 때부터 기도회를 드리기 시작하며 모임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 모임은 현재도 계속해서 매달 현장예배 등을 드리며, 지금은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 궁중족발 사건 ]의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그동안의 기도회에서 사용하는 찬송을 발전시기키 위해 그동안 부르던 노래와 함께 새로 창작한 곡들을 모은 찬양이 이번의 옥선 찬송가다.

 

2. 옥선 찬송가가 우선 내용상에서 가지는 의미는 복합적이다. 우선 그동안의 소위 '민중찬양'과의 주제적인 측면에서는 연속성을 가지지만, 동시에 이를 나타내는 방식은 기존의 민중찬양과 단절적이다. 이러한 단절을 확실히 느낄 수 있는 찬양들이 〈허공〉과 〈승리의 종〉인데, 이 '찬양들'의 가사들은 기존의 민중찬양들이 철저히 복음주의적인 단어만을 사용했던 것들에서 더 나아가, '운동권'적인 단어를 사용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다음의 가사가 그렇다.

새노래를 지어서 함께 부르자 구원의 쟁취
멈추지 않고 복음의 길 걸어가자
제왕은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자 올리신다
부한 사람은 빈 손으로 이곳을 떠나 보낸다
힘껏 싸워 온 친구와 함께 누리자 평화의 점거
꿈꿔 왔던 뒤집힌 세상 다가왔다
영원한 문들아 이제 활짝 열려라 고개를 들고
민중의 용사 영광의 왕 들어가신다 - 〈승리의 종〉 2절 중

 

이 찬양을 처음 접한 헌신된 그리스도인은 이런 가사들에 100% 당혹할 것이다. '진리'와 '비진리'가 믹스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이 노래의 경우 '새 노래로 노래하라'(시 33:3)나 마리아의 노래 일부(눅 1:52-53), '문들아 머리들어라'(시 24:7~) 등의 성경 말씀을 그대로 사용하면서도, 그 사이 사이에 '쟁취'나 '점거', '뒤집힌 세상', '민중의 용사' 등의 '운동권'에서나 쓰일법한 '불경한' 단어가 아무렇지 않게 섞여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기존의 민중찬양들이 시도하지 않았던 보다 '투쟁적'인 단어를 '찬양' 속에 넣어 부르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 '변화'의 원인은 두 가지로 설명이 가능하다. 첫째로 민주화와 촛불혁명으로 인한 재민주화를 통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표현의 범위가 확보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는 '독재정권'에 비해, 보다 더 가까이에서 맛보는, 그들이 투쟁들에서 마주친 '권력'과의 관계일 것이다. 이러한 수십년 동안의 변화를 그리스도인들이 체감할 수 있도록 담아낸 새로운 찬양들을 - 우선 내용이 교회 공동체에 끼칠 영향을 차치하고서라도 - 맛볼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일지 모르겠다.

 

3. 그러나 가사의 내용을 넘어서는 찬양 전반적인 내용으로 들어서면 〈옥선 찬송가〉에 내가 내리고 싶은 평가는 달라진다. 우선 〈옥선 찬송가〉에 수록되어 있는 곡들이, 제목이 지향하고 있는 '찬송가' - 다시 말해 '회중찬송'과 부합하는지에 대한 지적을 하고 싶다. 다시 말해, 〈옥선 찬송가〉에 담긴 상당수의 찬송들이 다수가 부르기 위한 곡이 아니라, 개인 한 명의 체험을 위해 나누기 위한 것에 좀 더 집중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하나님을 위한 수직적 찬양만을 찬송가로 인정해야 한다는 [ KJVism 등의 근본 침례회 ] 내지 개혁주의 세력의 주장을 인정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보다 더 많은 이들에게 이 곡들이 불리고 싶다면, 일상적인 찬양이나 찬송가와 연결될 수 있는 찬양들이 좀 더 들어갔었으면 하는 바람이 남아 있다(동시에 이것이 ○○○교회 찬양들과의 차이이기도 하다).

 

   둘째로, 전례 송가에 대해서 아쉬움이 있다. 전례에 기반한 찬송을 현대에 맞춰서 작곡한다고 했는데 21세기 632장과 같이 제대로 구현이 되지 않은 아쉬움이 남아있다. 아래 부분은 상처가 되실까봐 숨겨놨으니 마음이 약하신 분은 그냥 넘어가 주시기를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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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키리에 1번은 처음에 들었을 때부터 Kyrie, Christe, Kyrie eleison으로 부르는 것 뿐만이 아니라 [크-리스-테]로 부르는 것도 그렇다고 생각했던 노래다(구체적인 대안은 [ 여기 ] 에 올려놨다). 이쪽 부분에서 내가 예배 찬송으로 부족함이 없다고 볼 수 있는 찬양은 〈키리에〉 3번, 〈알렐루야〉 2번, 〈성찬〉 1번 정도 인것 같다. 참고로 〈하나님의 어린양〉의 경우에는 원래 의미를 담은 가사 또한 사용하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선 찬송가〉가 가지고 있는 그 투박함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싶다. 특히 〈옥선 찬송가〉가 옥바라지 선교센터라는 지난 3년의 '예배공동체'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던 찬양이라는 점이 던지는 점은 한국교회 찬양운동에 끼치는 바가 적지 않다. 최근 한국의 찬양사역들이 십자가 이론에 몰입해 극도로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다. 극우화된 교단들 눈치에 주제도, 쓸 수 있는 범위도 제한 된 채 '그 찬양이 그 찬양' 같은, 표현만 다른 새 찬양들만 쏟아져 나오는 추세다. 그 틈새를 비집고 나온 이 새로운 노래들은, 늘 언급되되, 실현되기는 힘들던 신앙적 야성이 무엇인지 깨우쳐 주는 계기가 되리라 확신한다.

 

  아울러 옥바라지 선교센터 홈페이지에 올라온 [ 김영명 목사님의 '편집 후기' ] 에서와 같이, 이 찬양들이 그동안 우리 고백에 포함되었어야 했으나, 쉬이 입에 오르기 힘들던 '흩어져 있는 찬양'들의 시점이 되기를 바란다. 이미 하나님께서 옥선이나 ○○○교회를 포함해 새로운 찬양들을 우리에게 주셨고, 그 찬양들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성품에 맞닿아 있을 터이다. 더 나아가, 그런 찬양들을 통해 한국교회가 마주쳐야 할 미래에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들이 끊이지 않기를 소망한다.

 

5. 아울러, '포크송 가수 황푸하'의 팬들도 이 '앨범'을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190509 완료)

 

[ 옥선 찬송가 듣기/다운 ]

 

〈서브컬처론 강의록〉, 서브컬처와 일본을 보는 또 다른 렌즈


1. 〈젊은 독자를 위한 서브컬처론 강의록〉(이하 강의록〉)을 알게 된 계기는 K교수님의 트위터에서였다. 내가 웹컬처라고 부르는 서브컬처에 대해서 알다시피 강의라는 형태로 아직까지 자리잡은 문헌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제로년대의 상상력〉으로 유명한 우노 츠네히로씨가 직접 강의록을 발표했다는 것도, 출판사가 아사히신문이라는 점도 신선해서 곧바로 4월에 일본어 원본을 구매해서 읽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일본어 세로읽기가 나에게 아직 익숙해지지 않아, 다른 책들에 비해서 읽는 속도가 상당히 느려졌었고, 그래서 전체 페이지가 380p가 넘는 상태에서 200p 정도 반선을 겨우 넘어서 10장 정도를 어째어째 보고 있다… 싶었을 때 갑자기 12월에 한국어판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어버렸다. 그것도 워크라이프에 의해서. 

   그런 의미에서, 개인적으로는 빠르게 움직여주신 워크라이프에 대해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읽히지 않던 책이 갑자기 읽어지는 경험을 하고 나니 번역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덕분에 '이 책을 전부 읽고 나서 책평을 올리자'는 생각을 이룰 수 있었다. (웃음)

2.  그럼 본론으로 넘어가자. 강의록은  쿄토세이카대학(京都精華大学)에서 우노 츠네히로 강사가 강의한 내용을 하나의 글로 정리한 것으로, 만가-아니메의 변천을 중심으로 일본 사회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다시 말해, 일본사회의 변화상을 만가-아니메 창작자들이 어떻게 담아냈는지를 설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맨 마지막의 아이돌의 변천사까지 하나의 '서브컬처'라는 개념으로 설명해 나가는 내용으로 2016년 강의를 한 것을 전사로 정리해서 2018년에 출간한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목이 어쨌던간에 강의록〉이기 때문에, 학교에서 접근하는 것처럼 다소 어렵게 접근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 있기는 한데, 가볍고, 읽기 쉽다. 물론 책에 빠져 있는 작품의 실제 동영상이나 사진을 확인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유튜브 등의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보면 되는 일이다. 마침  [ 워크라이프에서도 책과 병행해 볼 수 있는 보충자료를 인터넷으로 올렸다 ].  일관적으로 만가-아니메의 발전상을 담어왔기 때문에, 머리 속에 일관된 서브컬처에 대한 관점을 세우기에도 좋은 책이다.

3. 하지만 이 책에서 가장 아쉬운 점이,  바로 그 '관점', 다시 말해강의록〉의 기본 논제다. 우선 '서브컬처의 변천'이 일본 사회의 변천과 함께 해 왔다는 주장은, 대우 원칙에 따라 일본사회가 아니었다면 서브컬처가 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을 당연히 승인하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옳은가? 한국사회는 서브컬처를 통해 사회의 큰 영향력을 받았다. 1990년대의 공영방송 TV들을 통한 아니메 세레는 그 시대 한국사회의 사고방식을 바꿔놓았다. 서브컬처의 활성화는 한국 사회의 근간을 바꾸었다. '키덜트 문화'가 서브컬처와 대중문화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오랫동안 인싸의 공간이었던 홍대에 서브컬처 공간이 늘어나고 있고(이글을 쓰고 있던 차에 마침 애니메이트가 홍대점 진출을 발표했다), 동인음악이 인디음악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현재의 오락실을 지탱해 주는 것도 일본에서 수입된 리듬게임이다. 아예 요즘에는 아이돌 문화가 서브컬처를 따라하면서 생명력을 유지할 정도로(단적으로 러브라이브!가 없었다면 현재의 아이돌 지하철 광고 붐도 없었다), 서브컬처는 한국사회에서 때로는 지속적으로 비판받으면서도 가장 국민들 가운데 잠재된 문화자본이 되었다. 

   한국만일까? 미국도 만가-아니메 문화가 너무 많이 퍼져서 그게 미국 만화-SF 흐름와 함께 하나의 대중문화가 되고 있다. 그 정도가 심해서 〈일본미국〉(Kelts, 2006)이라는 책이 나왔을 정도다. 더 나아가 대만은? 중국은? 필리핀은? 태국은? … 넓은 관점에서 보면 그들 모두가 일본 '서브컬처'의 영향을 받았고, 그 영향력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 서브컬처의 변화는 일본이라는 사회만을 설명하기에 적당한 것일까? 세계화(Globalization) 시대의 전지구를 설명할 수 있는 도구로 자리잡지 않을까? 그렇다면 적군파 사건이니 우경화니 하는 일본의 과거 역사가 사실은 일본발 서브컬처니 팝컬처니 하는 것을 전부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도구가 아니냐는 것이다. 안지원(Ahn, 2002)의 주장대로, "일본 애니메이션은 전세계적 상황이 [만들어 낸] 문화적 생성물로 여겨질 필요가 있다"(Japanese animation needs to be considered as a cultural product of global conditions, :11).

   그렇기 때문에, 강의록〉이 다루고 있는 기본적인 전제 자체가 맞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재검증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전제 자체를 분리해 놓고 생각하면, 책이 다루고 있는 기본적인 구조와 논리, 그리고 그 논리를 들기 위해 설명하고 있는 사례들은 바람직하고, 그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 살펴보면 일본 '서브컬처'의 흐름 자체를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 자체가 '서브컬처'의 이해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4.  다만 기본적으로 후반부의 내용에는 아쉬움이 든다. 특히 일상계를 에바에서 시작된, 일련의 현실로부터의 도피만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현실에 대한 개입, 또는 비판을 시도하는 새로운 일상계 흐름이 있다는 것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여기에 대해서는 [ 〈너의 이름은.〉리뷰 ] 또한 도움이 될 것이다) . 또한 이 책은 일본 아이돌을 '서브컬처'의 영역에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올바른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 아이돌들의 경우에는 우노님도 책에서 단언했듯이 서브컬처의 영역 속에서 다루기는 힘들다고 지적하고 있고, 나로서도 분명하게 서브컬처와 분리되어 있는 대중문화의 영역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 독자가 명시된 근거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는 과정을 통해, 웹컬처 속에 아이돌 문화를 포함하는 것이 옳다는 오해독을 할 가능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책이 분명하게 일본의 '서브컬처'를 바탕으로 일본 국민들이 일본이라는 국가를 읽어가기 위한 방법으로 제시된 내용을 담은 강의와 책이라는 점은 주지해야 할 것이다.

5. 나는 키안님이  [ 강의록〉을 아즈마 히로키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의 대체제로 사용하자 ]는 주장에도 동의하고 동감한다. 아즈마의 논리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의 글이나 논문을 통해서도 이미 밝혔지만, 간단히 정리하자면, 그의 주장 속에 비민주, 비인격적 엘리트주의가 담겨있다는 것이 문제다. 특히 아즈마가 〈일반의지 2.0〉에서  동물성을 갖춘채 국가에 의해 감시당하고, 사육당하는 사람을 '축제'적 '미래'로 제시한 것은(아즈마 히로키, 2012:254-256) 인류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동일본대지진을 통해 '파괴된 꿈'이라고 말하는 것에도 불쾌감을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강의록〉이 그 대체제로 활용되어야 할 때가 왔다. 그러나 이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조만간 기회가 주어진다면, 웹컬처에 대한 강의를 진행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내용을 가지고 내가 생각하는 웹컬처론은 무엇인가… 를 나눌 수 있기를 기원한다. 그렇지 않더라도 이 책의 논의가 멈추지 않고, 새로운 논의의 시점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그런 계기를 주신, 대체제를 주신 우노 츠네히로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우노 츠네히로의 작품을 계속 번역해 나가고 있는 워크라이프에도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참고문헌
아즈마 히로키(2012), 일반의지 2.0, 현실문화.
Ahn, Jiwon(2002), Animated Subjects: On the circulation of Japanese Animation as Global Cultural Products, Spectator, 22(1), pp. 10-22.
Kelts, Roland(2006), Japanamerica, Palgrave Macmillan.


젊은 독자를 위한 서브컬처론 강의록 - 10점
우노 츠네히로 지음, 주재명 외 옮김/워크라이프

송영이 사라진〈송영의 삼위일체론〉


1. 소영광송을 좋아하고 한국에서 소영광송이 격하된 상황을 비판적으로 여겼기에, 영광송을 배경으로 한 삼위일체론이 나온다는 것에 대해 긍정적인 관심을 가졌다. 많은 공부를 하신 목사님이 쓰신 책이라는 점도 기대감을 높였다. 그러나 기대도 잠시, 책을 받아 읽어보며 그 기대가 실망감으로 다가온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2. 실망감 중의 가장 큰 이유는 해당 논의가 철저히 장로회 신학적 차원에서만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예정론을 거부하는 알미니안 신학을 우리 믿음의 근간으로 삼는 감리회인으로서, 칼뱅으로 시작해서 근본주의자들만의 논의로만 구성된 삼위일체론을 살펴보는 것은 실망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논의가 감사하게도 교회들을 포괄한 차원에서 전개됨으로서 균형을 갖추고자 노력했음에는 감사한 말씀을 드린다.

3. 책에서 우려스러운 점도 있다. 목사님이 13장에서 쓰신 삼위일체론이 보편교회들의 기존 신앙고백과도 충돌할 소지가 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조는 성자 예수님을 다루는 부분에서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 그분은 하나님에게서 나신 참 하나님이시며, / 빛에서 나신 빛이시요, / 성부와 같은 분으로, / 낳음과 지음 받은 분이 아닙니다."(WCC 총회 번역, 2013)라고 증언하고 있다. 다른 번역들도 이 부분을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으로서 /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라고 번역하고 있다. 즉 니케아 신조에 따르면, 성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창세 전 한 번 나시어, 목사님의 주장과 달리(p. 193-194) 영원히 창조 받지 않으셨고, 앞으로도 영원히 창조받지 않으시는 것이 아닐까? 

  성령론에 대해서도 우리 서방교회는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filioque) 나오신다는 것에 대해 어떠한 의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 하지만 목사님의 삼위일체론은 동방교회 신학을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성령의 발출을 성부에게만 돌리고' 있다(p.190). 분명히 이 책에서는 필리오꿰 논쟁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지만(p. 241),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우리의 입장에서 설명하고 받아들여야 할 지에 대해서는 고민이 있었으면 하는 지점이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18장~에필로그로 이어지는 주장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삼위일체의 역사하심(경륜적 삼위일체)를 통해 모든 만물이 다양한 속에서 하나가 되고(plena in unum),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로 나아가, 다시 하나님의 통치 안에 거하는 삶이 우리의 목표이고 그것을 사회 안에, 이 땅에도 구현되고자 노력하는 것 또한 우리의 목표에 속한다고 당연하게 고백할 수 있다.

5. 그러나 제목에서 중요하게 언급되었을 법한 소영광송은 세번 언급되는데 불과했고, 가톨릭 버전(이제와 항상 영원히)으로 언급되어 아쉬움이 남는다. 기본적인 삼위일체론의 역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논의인 만큼, 앞으로 어디에선가 우리의 고백들(주기도문, 사도신경, 소영광송, 대영광송,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을 바탕으로 삼위일체론에 접근하는 책이 나왔으면 하는 아쉬움을 가져본다.

6.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송영의 삼위일체론 - 10점
이동영 지음/새물결플러스


뉴로트라이브 : 필요했던, 그러나 양가감정을 자아내는


이 책을 보고 나서 든 감상을, 나는 '양가감정'으로 줄여 소개하고자 한다. 거두절미하고, 책이 담은 내용은 그 뜻이 높고 깊은데, 책이 담긴 방식에 있어서는 아쉬움, 또는 고정관념이나 잘못된 용어 사용에 따른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여기서 책 리뷰를 끝낼 수는 없으니,  어째서 이런 판단을 내렸는지 좀 더 자세하게 소개하려고 한다. 


자폐성 장애에 대한 신뢰할만한 팩트북
   뉴로트라이브NeuroTribes. 직역하면 신경종족이나 신경부족이라고 읽히는 것이 마땅한데, 역시나 '신경부족'으로 번역하면 뭔가 자폐성 당사자들이 '신경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뜻이 될 것 같기도하고, 왜 자폐 장애와 '신경'이 관련되어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도 많아 그런 선택을 한 것 같다(참고로 자폐 장애가 내뇌 신경의 문제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미 신경의학이나 정신의학계적 연구를 통해 확증되어 있다). 어쨌던 이 책의 제목은 새롭게 만든 단어이기는 하지만, 신경적인 차이를 가진 사람인 자폐 당사자라는 콘셉트를 한번에 잡아낼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뉴로트라이브라는 단어는 한국어권에서도 '자폐'라는 단어를 대체할 수 있는 단어 후보군 중 하나로 편입될 것 같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자폐성 장애에 대한 숨겨진 역사나 자폐와 관련된 이슈들을 편견없이 잘 잡아냈다는 점에 있다. 물론 최근 20년간의 자폐성 장애에 대한 급속한 변화에 대해서 충분한 분량이 할애되지 않았지만, 헨리 캐번디시Henry Cavendish, 폴 디랙Paul Dirac, 휴고 건즈백 Hugo Gernsback이라는 사례는 자폐에 대한 인식을 전환하는 놀라운 발견이다. 아마 자폐 전문가들도 잘 몰랐을 인물들을 통해 자폐성 장애가 단순히 과거의 인식처럼 소아기에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발전과 함께 존재했던 장애임을 드러낸다.

   이어 이 책은(지금은 욕설이 되어 버린) 아스퍼거님의 발견과 카너의 발견이 각각 어떻게 이루어졌고, 아스퍼거의 발견이 어떻게 카너에 의해 사장 및 은폐되었는지를 설명하면서도, 카너의 개인사를 설명하며 이러한 결정을 카너가 내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한다. ABA에 대해서도 '유일하게 자폐를 개선할 수 있는 과학적인 방법'이라는 미국 연방 차원의 설명 대신, 개발자 로바스씨가 심리학 실험이라는 명목 아래 자폐 당사자들과 일반인들에게 진행했던 고문 수준의 실험 과정을 설명하며 상황 자체를 객관화한다. 그리고 자폐-백신논란이 왜 갑자기 떠올랐는지에 대해서부터 ( 나도 책을 읽고 나서야 알았다! )  최근의 [ 자폐인권운동 ]까지, 자폐성 장애와 관련된 전반적인 이슈를 설명하고 있으니 일종의 자폐연구 개론서로도 손색이 없다 ( 아마 이 책을 교과서 어투로 개조하고 몇가지 사진을 붙이고 제목을 바꾸면, 대학교 강의 교재로도 적절할 것이다 ) . 이 책에 있는 팩트들을 리프위키와 위키백과에 적용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뛰어난 책이었다. 

   재미있는 점은 이 책을 통해 자폐와 웹컬처의 연결고리가 분명하게 드러났다는 점이다. 책의 중앙에 위치한 6장 〈무선통신의 왕자〉는 과학소설SF: Science Fiction 과 무선통신HAM 문화, 그리고 프로그래머 문화의 발전에 자폐성 장애 당사자들이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이러한 변화와 변천은 멀리 떨어진 만화-애니계에서도 큰 차이로 느껴지지 않아서, 소위 '오타쿠'로 대변되는 만화-애니 동호인의 상당수가 자폐성 장애와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중요한 지적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어쨌던 간에 그 연결고리가 될, 일본 SF계의 당사자 중 자폐성 장애 당사자가 얼마나 있는지는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 일본-만화 애니계의 부스트에 큰 도움이 된, 점점 이 땅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일본 SF운동의 초기 참여자들에 대해 자세하게 연구할 연구자가 일본에서는 아직 없다는 점이 아쉽다 ( 참고로 내가 손대기에는 매우 어려운 지점이다 ).  어쨌던 이 책을 통해 앞으로 자폐성 장애와 만화-애니계문화 사이의 관계 또한 밝혀졌으면 하는 부분이 있다 ( 물론 구미권에서도 연구가 별도로 이뤄져야 할 것이다 ).

   한국사회에서 이 책을 보면서 뜨금하거나 마음이 어려울 부분도 있다. 자폐성 장애와 성소수자의 연관성이 나오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야 지금은 성소수자 문제가 개신교에 의해 한국 사회의 핫한 이슈가 되었고, 장애와 성소수자 문제가 전혀 다른 문제처럼 취급되고 있지만, 7장에 긴 분량을 들여 소개되고 있는 부분은 자폐성 장애를 '교정'하고자 하는 손길과 성소수자를 '교정'하고자 하는 손길(:413-417)이 사실은 동일한 의도와 효과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을 열어준다. 즉 한 사람도 측은하게 여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한국 교회를 포함한 소위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을 반증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 실제로 자폐성 장애인의 한국교회에서의 위치는 '존재하기를 원하지 않는, 혹은 외곽에 있는' 대상일 뿐이다) . 또한 자폐사에 이름을 남긴 자폐성 당사자 중 상당수가 유대인 배경을 가지고 있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한편 아쉬운 점도 있다. 이 책의 원작은 2015년 아스퍼거 증후군 삭제로 가장 큰 논란이 된 규정인 DSM-5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관련 파동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 오히려 DSM-5의 초안에 ASAN 당사자들을 통해 자폐 당사자들의 참여가 보장되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597). DSM-5의 변화는 ICD-11 개정에도 그대로 적용돼 ICD에도 아스퍼거 증후군의 삭제를 가져왔고, 2022년부터는 이에 따라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DSM-5의 변화에 대한 설명 부재는 곧바로 또 다른 문제로 이어진다. 이 책에는 경계선 장애 및 장애 진단에서 제외된 자폐 당사자들을 어떻게 여길 것인지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 않고있다. 경계선 당사자들의 수가 적은 것도 아닌데, 셀프진단이나 진단포기를 해야 하는 당사자들이 왜 논의에서 제외되었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등록장애인 또한 마음이론과 체계화 이론을 창안해 자폐 이해에 큰 도움을 준 배론코언Simon Baron-cohen이 이 책에 한 글자도 나오지 않는다. 매우 이상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폐성 장애인에 대한 팩트를 분명하게 제시한 이 책의 공로는 칭찬받아야 마땅하며, 이 책이 자폐 장애계와 함께 소위 '서브컬처' 계에도 꽤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뛰어난 미시사 연구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신경다양성의 시대에 아직까지 '자폐증'이라니 
  그런데 이 책의 번역은 필자에게 씁쓸함을 남긴다. 이 책을 보는데 있어서 내가 느낀 가장 큰 어려움은 620p에 달하는 본문이 아니라, 중간에 나오는 내가 알고 있는 개념과 다른 번역들이었다. 물론 과학소설을 탐독했을 분이라면 다들 알고 있을 '랄프'라는 공식 번역 ( 원제:〈랄프 124C41+〉, 한국어본은 '27세기의 발명왕'으로 검색하면 나온다 ) 을 '랠프'로 오기했다던가 하는 덕후스러운 지적은 내려놓자 ( 오타도 몇 곳 있었는데, 방대한 분량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나올 수 밖에 없다는 점은 출판계 언저리에 있는 입장에서 이해한다 ). 그러나 이 책을 통틀어 가장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자폐에 대한 최신 언어적 이해와 다르게 '자폐증'이라는 단어를 남발한다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번역이 이뤄질 수 밖에 없는 배경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역자 선생님은 의사 면허를 가지고 계시고, 의학계에서 아직까지 자폐증이라는 단어가 쓰이고 있는 점을 무시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근 행정부나 자폐학계, 장애계 모두가 이 단어를 '자폐성 장애'나 '자폐 스펙트럼 장애' 등으로 사용하고 있는 점을 감안했을 때, 그리고 자폐가 치료될 수 있는 병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런 표현은 자폐다양성이나 자폐 장애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추구하는 이 책의 취지와 맞지 않다. 다음 판에서는 '자폐 장애' 등으로 수정되기를 바란다. 자조Self-advocacy도 장애계나 우리 쪽에서는 이미 정착된 단어이지만, '자기 권리옹호'로 오역되었다 ( 아, 맞아. 사랑협회가 그렇게 썼지 ). 그나마 NeuroTypical을 '신경전형적'이라고 하지 않고 '신경정상적'으로 번역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 :567. 참고로 저 번역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 

   뉴로트라이브에 대한 표지의 텍스트 처리도 아쉬운 점이다. 특히 책등 부분의 제목 띄어쓰기는 '뉴로/트라이브'가 아니라 '뉴로트/라이브'라고 되어 있다. 잘못 읽었다가는 뉴○○이○로 오해하기 딱 좋다. 책등 부분만이라도 제대로 처리했다면 오해의 소지가 적지 않았을까 싶다. 

'슬픈 대한' : 한국은 아직 멀었다
  돌아가서, 이 책이 11장부터 담아내고 있는 자폐에 대한 세계적인 추세에 한국은 얼마나 따라오고 있는가? 놀랍게도 한국은 선진국을 내다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이러한 추세와 무관한 삶을 살아오고 있다. 9월 12일 발표된 발달장애인 평생케어 종합대책은 자폐성 장애에 대한 정부의 무지 정도가 심하다는 것을 전세계에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고기능성 자폐와 미등록 자폐 당사자에 대한 정책은 눈씻고 찾아볼 수 없다. 실제로 해외 자폐 당사자들에게 해당 대책을 보여줬더니, 매우 문제가 많다very problematic는 반응이 돌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발달장애인 포용정책을 표방하겠다며 16일 프랑스 국빈 순방일정에 자폐 감수성이 매우 떨어지는 프랑스의 자폐 당사자 대상 특수학교를 굳이 다녀왔다니 여러 의미에서 기가 막힐 지경이다.

   생각해보니 국내에서 자폐성 장애 당사자들에 의한 자조운동이 생기는데도 5년이 걸렸고, 미등록 자페성 당사자들도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게 얼마 되지 않는다. 해외와 달리 자폐성 장애 자조운동이라는 개념 자체가 발달장애인법 제정과 함께 지적장애인들에 의해 수입되는 방식으로 들어왔고, 자폐성 장애 운동이 이와 별개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지도 얼마 지나지 않았다. 해외에서는 자폐성 장애인을 위한 법률이 있고 지자체에서도 관련 정책을 입안하며, 자폐 당사자들을 위한 지원을 팍팍 해주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모습을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아니 그러한 추세를 따라가겠다는 의지 자체가 없다.

   8월 21일, 미국에서 '스펙트럼 여성'이라는 책이 출간됐다. 여성 전문가를 포함해 자폐성 장애를 가진 여성 작가들이 직접 쓴 글들에는 자폐를 가진 여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자신이 느낀 내용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이 국내에 수입되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국내 자폐 여성 당사자도 존재하지만 그들의 존재를 찾아보기가 힘든 상황에서,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시점에 이 책이 나왔다는 것을 감지덕지해야 하는 대한민국의 상황을 보니 한국은 아직 멀었다. 자폐성 장애인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한국 사회는 아직 신기루 속에 있다. (181017)

뉴로트라이브 - 10점
스티브 실버만 지음, 강병철 옮김/알마







Spectrum Women: Walking to the Beat of Autism (Paperback) - 10점
COOK BARB/Jessica Kingsley



追謝於魯會燦

追謝於魯會燦

速波卽告星之墜,
悲又痛心吾亢俯.
鲁王名培依亡黨,
論理道換感性商.
民主士續攫魚網,
其景如北傀之行.
本人民裁判在北,
現在南又於搖國.

高又不屈意受讚,
寸之語快人之感.
以現義不畏獄苦,
面民生不冒勞苦.
魯公不在民政殘,
共民黨不聽其判.
親文呼不笑公前,
國如國成於牽建.

戊戌七月綠史書.


〈너의 이름은.〉 - 가만히 있기를 거부함으로, 세카이계를 떠나다 ②

(ⓒ2016 『君の名は。』製作委員会)


오픈 엔딩, 그리고 재생산

다음으로 신경쓰이는 부분은 한국에서 진행한 GV에서 '엔딩에 대해 pixiv를 참조하라'고 발언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발언이다. 마침 [ 해당 메가토크를 촬영한 영상 ]이 있으니, 공식적으로 발언을 인용하고자 한다.

Q. (38:06) 어, 정말 영화 정말 잘 봤습니다. 제가 그, 개봉날 국내 인사에 있었던 그 영화, 그 때 봤었는데요, 사실 그 날 봤을 때 아무 마음의 준비[가] 없어서, 딱 보고나서 대개 해피엔딩이 있지만, 뭔가 마음이 대개 씁쓸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오늘 다시 한 번 봤을 때, 마음의 준비가 있어서, 그 해피엔딩[이] 조금 더, 조금 더 해피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있지만, 그래도 전에 그 무대인사하셨을 때, 그 아마도 나중에 3년 후에 다른 작품 하실 때, 어 '미츠하[하]고 타키, 어 한 장면이 나올 수도 있다'고 하셨는데요, (울먹거리며) 제가 정말 그 지금, 대개, 그 두 사람의 미래가 너무 궁금해서, 조금만 이야기해 주실 수 있는 지 … 감사하겠습니다.

A. (39:01) いや、そうですね。 二人の未来は、その、日本の同人誌、とか書いて******ますね。(관객 웃음) (同人誌とですね、二次ソースで,その、ファンが書いて*みたく漫画です。) あの、pixivでいう、サイトがありますね、pixiv。 その日本のサイトなんですけど、pixivに行けば、その漫画を*楽しめます。(폭소) あの、『君の名は。』のラストシーンで、二人が普通の本当***,普通の男性と女性として出会ったシーンなんです。 え、超能力もないし。え、お互いのこと、なんとなく知っている気がするけど、でも初対面のはわけですね。ですから、一回では、あれは、みなさん自身のわけです。あそこから先を見ていたたき、観客の方々が其々の物語りだと思います。あの、ですのでね。あの、面倒くさいんじゃないんですけれど、(웃음) みなさんが其々にイメージじていたたけば、と思います。

이야, 그렇네요. 두 사람의 미래는, 그, 일본어 동인지 등에 써져 **** 있습니다. (동인지라는 건, 이차 소스로 팬들이 그려서 보여주는 만화입니다.) 그, 픽시브라고 하는, 사이트가 있어요, 픽시브. 그런 일본 사이트가 있습니다만, 픽시브에 가면 그런 만화를 즐길 수 있습니다. 이 
〈너의 이름은.〉의 마지막 신에서, 두 사람은 평범한 ***, 평범한 남성과 여성으로서 만났다는 [상황의] 신입니다. 초능력도 없고요. 서로에 대해서는 무엇인가 알고 있는 느낌이 들지만, 그렇지만 첫 대면인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그것은, 여러분 자신의 역할입니다. 저쪽(pixiv)에서 먼저 본 것이고요, 관객 여러분들이 각자의 이야기[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귀찮은 것은 아니긴 합니다만, 여러분들이 각각의 이미지를 만들어주셨으면, 하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질문과 답변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의외로 생각보다 깊다. 그냥 웃고 넘길 일이 아니다. 여기서 질의자와 답변자인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입장 차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질의자는 이 질문에서 신카이 마코토를 〈너의 이름은.〉의 이야기에 대한 유일한 권한을 소유한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질의자는 신카이 감독이 가지고 있는 비밀을 드러내줌으로서 알지 못하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감성적으로 해소해 주기를 요청하고 있다. 그러나 신카이 감독은 그 권한을 갑작스럽게 최종적으로 관객에게 넘긴다. 여기까지는 일단 괜찮아 보인다. '이야기 이후의 해석은 관객의 자유입니다'라면서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기를 요청하는 것은 다른 창작자들도 종종 보이는 행동이다. 그러나 신카이 감독이 픽시브를 지정하는 상황에서부터 기존의 관행은 완전히 깨진다.

   이 대화에서 신카이 감독이 지정한 pixiv는 다양한 동인 창작 사이트 중에서 가장 생각하기 쉬운 대표명사 역할을 한다. 그리고 동인이나 코스어 등의 만화-애니메이션 동호인들은 자신이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위해 텍스트를 깨뜨리고, 텍스트의 벽에서 캐릭터를 구해와 자신이 가진 미디어를 통해 새롭게 배치하는데 익숙한 사람들, 다시 말해 디지털 리터러시에 능숙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신카이 감독은 이렇게 선언하는 셈이다. "이제 이 이야기의 전개를 그들에게 맡길 수 있다. 그들이 만들어주는 각각의 이야기가 이 영화의 세계관을 넓게 만들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다르다. 수많은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현상은, 저작물의 해체다. 즉 다시 말해 상상을 통해 생겨나는 새로운 이미지는 기존 이미지가 구축해 온 동일적인 세계관을 파괴해 나간다. 기존의 의미가 새로운 의미와 결합하면서 기존 텍스트가 전혀 의도한 적이 없던 부수효과(side effect)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래의 창작물을 보도록 하자.

(@1011_production 인용)


    이 그림은 한 눈에 봐도 알 수 있듯이, 〈너의 이름은.〉의 미래를 상상한 그림이긴 하다. 그러나 이 그림이 가지고 있는 함축은 신카이 감독이 구축해온 〈너의 이름은.〉 세계관과 차이가 많다. 우선 미츠하와 동생 요츠바는 한국어를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 미츠하와 요츠바는 한국어로 대화하고 있으며, ○스타그램에 한국식 태그를 능숙하게 붙이기도 한다. 당연히 세계관과 맞지 않는다. 다음으로, 스트로베리 블라썸 푸라푸치노는 정확하게 한국 스타벅스를 시점으로 2016년에 도입된 것으로, 일본 내 정식 명칭은 '사쿠라 블라썸 & 스트로베리 프라푸치노'다. 일단 오리지널 기간 상으로는 시점이 맞기는 하다. 그러나 세계관 상으로 해당 시점이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우선 그림의 내재된 이야기를 통해 판단해 볼 때, 이 창작물에서 암시하는 (아마도 타키와의) 재회가 이뤄지는 것은 2021년의 시점이다. 해당 시점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 엄밀히 말해 2021년 일본 스타벅스 사쿠라 프로모션 기간에 해당 프라푸치노가 발매될 지 알 수 없다. 더군다나 이 그림을 창작한 창작자가 만든 재생산물들과 같이 놓고 판단하면 사정이 더 복잡해진다. 해당 창작자는 해당 인스타그램이 미츠하가 아직 고등학생으로 있던 2013년에 토쿄에서 해당 사진을 저작한 것으로 설정한 것으로 보이는데, 미츠하는 작품 속에서 2013년경 타키와 스쳐 만난적이 있을 뿐, 구체적으로 많은 시간을 들여 만난 사실은 없다. 결국 이 재생산된 그림은 〈너의 이름은.〉의 세계관과 들어맞지 않거나, 세계관을 파괴하는 작품에 속한다.

   이외에도 그림러들에 의해 생산된 다양한 〈너의 이름은.〉의 재생산물들이 신카이 감독이 언급한 픽시브 이외의 다양한 사이트에 올라와 있다. 그런데 해당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사진들에는 타키와 미츠하가 만나 대화하는 것을 통해 이토모리 유성 사건 이후 벌어진 일을 깨닫고 다시 기억을 되찾는다는 해석을 바탕으로 그려진 작품들이 꽤 많다. 즉 타키와 미츠하가 첫 대면일 뿐이고, 과거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위치를 되찾을 가능성이 적다고 암시하는 신카이 감독의 해석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는 해석이다.

   그런데 신카이 감독은 이러한 시도들을 긍정한다. 자신이 미래를 정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그들의 이야기들을 찾고 탐색할 것을 권한다. 저자는 여기에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로 신카이 감독이 소위 디지털 리터러시를 포함해 관객이 적극적으로 텍스트를 재해석,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작품의 세계관이나 저작권 질서를 벗어난 2차창작 또한 긍정가능한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해석이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동인 전통, 즉 작품 바깥의 이야기를 만화나 글, 코스프레 연기 등의 형태로 만들어내는 콘텐츠 수용자들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이 지난 수십여 년 동안 정착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일본은 최근 TPP 협상 과정에서 강력한 저작권 규정을 도입하는데 동의하면서도, 동인지 등의 2차창작물에 대해서는 저작권 단속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조치를 취하게 됐다. 물론 현재 동인지와 코스옷 시장 규모가 한 해에 1300억 엔이 넘고 있는(야노경제연구소, 2017) 문화 시장으로 정착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지만, 재생산 문화 또한 문화콘텐츠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활동이고, 이 또한 일본의 국부 증강에 기여하고 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라는 점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둘째로, 신카이 감독은 자신의 창작이 완료된 이후 자신을 다른 해석자와 다른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같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바르트가 이야기하듯이 '저자의 죽음'이나 창작자의 무기력함을 의미하는 행동은 아니다. 정확히 이야기해서, 그는 그가 마친 이야기를 굳이 이어가려고 하지 않고, 끝난 이야기는 끝난 이야기대로 관객의 보다 더 적극적인 해석에 맡기고, 자신은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나간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든 작가를 쥐어짜서라도 이야기를 늘리는 일본 만가-라노베-아니메 업계의 통상적인 전법은 쓸모가 없어진다. 이것이 신카이 감독이 아니메계에서 스튜디오 지브리의 후예로 오해되는 이유이기도 하다(물론 두 창작자 사이에 직접적인 연계성이 없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한 설명이다). 

  정리해보자. 신카이 감독은 오픈 엔딩을 만들고 관객들에게 재생산을 권장한다. 그가 저작권자의 입장이 아닌 창작자의 입장 속에 강하게 서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던 간에, 〈너의 이름은.〉을 통한 신카이 감독의 인식은 일본 저작권 산업 관계자의 입장 변화 또한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아직 일본 저작권 관계자, 특히 회사들의 2차저작권 인식은 매우 심각한 수준에 있으며, 자유로운 사용자의 재생산을 막는 쪽에 치중해 있다고 볼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를 시점으로 일본의 문화콘텐츠 회사들도 인식개선을 통해 2차창작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을 가지기를 기대해 본다.

정리 : 신카이 감독이 세카이계를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너의 이름은.〉에서 신카이 감독이 이 작품을 통해 세카이계와의 분리를 확실히 선언했다고 볼 수 있는 이유를 찾아보고, 이 작품에 대한 평가를 해보려고 한다.

   이와 관련해 세카이계에 대해 정리한 〈세카이계란 무엇인가〉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마에지마(2016:115)는 세카이계를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영향을 받아 1990년대 후반부터 제로연대에 만들어진, … 오타쿠 문화와 친화성이 높은 요소나 장르 코드를 작품 내에 도입한, 젊은이(특히 남성)의 자의식을 묘사한 작품군'으로 표현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니시오 이신의 작품이나 최종병기 그녀〈너의 목소리〉가 해당 계열의 작품으로 여겨지지만, 이러한 관점들을 비판해 나가며 마에지마씨는 어떻게 세카이계라는 '하나의 거대한 유령'이 일본 아니메계 전체를 뒤집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 설명해 나간다. (개인적으로는 신카이 감독의 처녀작인 〈너의 목소리〉가 세카이계의 주요 작품으로 인지되는 데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점에서 비판적인 입장이지만, 어쨌던 이러한 분석 틀을 받아들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 놓칠 수 없는 지적이 있다. 첫째로 에바 이후 세카이계의 형성과정에 대한 언급이다. 마에지마는 에반게리온 이후의 아니메, 더 나아가 아니메 수용자층으로 여겨졌던 '오타쿠'의 변화가 코베 대지진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라고 언급한다. 마에지마는 1994년 당시를 '한신 아와지 대지진과 옴진리교 사건[으로] …대도시가 괴멸적으로 파괴되었고, 토쿄가 큰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그 날이나 그 다음 날에도 일상은 계속되었다.'고 회상하면서, 설명하고 있던 최종병기 그녀〉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정치적, 군사적 리얼리티를 완전히 배제함으로서 오히려 10대, 20대가 피부로 체감할 수 있는 리얼리티를 획득'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ibid.,:76). 즉 비현실과 현실이 공존하던 한신 아와지 대지진 당시의 사회를 1년 후 에바가 포착해 애니메이션 형태로 내보내 당시 일본 구성원들이 가지고 있는 비현실적인 상황 속에서의 자아적 문제와 공명하면서 사회적 기반을 바탕으로 히트를 치는 데 성공했고(Ibid.,:79), 이후 그 포착의 결과가 다른 작품들로 퍼져나갔다는 설명이다.

   둘째로 사실 이 당시 전개되고 있던 남성향의 주요 장르인 '모에'와 '세카이계'가 사실은 동일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지적이다(ibid.,:101-102). 여기에서 마에지마는 1994년 대변혁과 에바 이후로 '애니메이션 이야기 바깥'에 몰입해 있던 과거의 오타쿠들과 달리, '작품을 자신의 내면으로 끌어당기'는(ibid.,) 다시 말해, 콘텐츠 속으로 들어가 콘텐츠의 등장인물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거대한 흐름이 생겼다는 점을 상기한다. 다시 말해, 현실에서 동떨어지는 경험을 그 당시의 사람들이 많이 했기 때문에, 그 충격을 어떻게라도 이겨나가고 있었고, 그 중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작품의 서사를 통해 현실을 이겨나가고자 하는 노력을 이어갔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카이 마코토가 〈너의 이름은.〉을 만들게 된 동기는 세카이계에서 만연하고 있던 자의식적인 서술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신카이 마코토가 한국에서 했던 또다른 발언을 재조명하고 싶다.

(11:46)今回の映画は、 その日本の東宝と、大きな映画会社と一生にあったので、「商業的な要請からハッピーエンド作なさった」んじゃないか、という心配されることがありますね。あの、でも、実際はそうではないんです。あの脚本は何度も何度も書き直して生きましたが、そこに悲しいエンディングは一度もありませんでした。そうですね。2011年に日本で大きな地震が起きた、ですね。あの時から、日本社会、僕を含めて、あの日本人は少し変わってしまったと思います。東京を含めて、え、自分の街が、もしかしたら明日、いつか、なくなってしまうかもしれない。そういう気持ちを常に、その気持が常に、心の中にあり得るなったんですね。そういう時に、映画を作るのであれば、そのときに映画を見てもらうものであれば、諦めずに、何かを諦める、何かをお消える話がなくて、いつまでも諦めずに、何かを元に戻す、強く、生きることをつかむような映画が必要なんじゃないかと思いました。(13:21)

이번 영화에는, 일본의 토-호-라고, 큰 영화회사와 함께 한 것이어서, '상업적으로 요구를 받아 해피엔딩을 만들게 됐다'는 것은 아닐까, 라고 걱정해주시는 분들이 있으시네요. 그래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각본은 여러 번 계속해서 다시 쓰여져 왔습니다만, 그 [변화과정]에 슬픈 엔딩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렇네요. 2011년에 일본에서 큰 지진이 일어났네요. 그 때부터, 일본사회[와] -저를 포함한- 일본인은 조금씩 변할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을 포함해, 자신의 마을이, 어쩌면 내일, 언제라도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런 마음이 항상, 마음 속에 남게 됐다는 것이네요. 이런 때에, 영화를 만드는 것이라면, 이런 때에 영화를 봐주신다는 것이라면, 포기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포기하[거나], 무엇인가를 지운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언제까지나 포기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원래대로 돌려서, 강하게, 살아나가는 것을 감싸나가는 듯한 영화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위의 서술, 그리고 세월호 관련 서술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신카이 감독이 〈너의 이름은.〉의 이야기와 주제의식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붙잡은 것은 동일본 대지진과 세월호 참사라는, 있을 수는 없었고 있어서도 안되는 참사였다. 다시 말해, 동일본 대지진에서는 두려운 현실에 대한 공감과 대처의지를, 그리고 세월호에서는 현실을 극복하지 못하도록 막는 장애에 대한 도전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한편, 앞서 마에지마씨가 세카이계의 형성에 코-베 대지진이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점을 서술한 바 있다. 그런데 코-베 대지진의 충격이 그것을 겪은 일본 국민들의 내면을 담고, 그 속으로 들어가도록 하는 작품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면, 동일본대지진을 겪으면서 피해를 겪은 일본인들이 내면 세계 바깥에서 이뤄지는 일들에 교감하는 결과를 일으켰다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다시 말해 코-베 대지진의 충격으로 세카이계가 시작됐다면, 동일본대지진의 충격은 세카이계를 넘어선 새로운 시도들을 불러일으켰다고 읽어볼 수 있을 것 같다.

   더 나아가, 신카이 감독이 밝힌 동일본대지진에 의한 관점의 변경은, 사실은 세카이계라는 세계관을 떠나, 다른 사람들과 공감하고 저항하는 방법을 찾아나가기 위한 하나의 노력이 되지 않나 하는 생각 또한 가져볼 수 있다. 초기작으로 호평을 받은 〈너의 목소리〉와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에서 빠져 있지 않고 등장하는 장소가 바로 정부기관이다. 물론 이러한 전통이 남성향 SF계 아니메에서 포괄적으로 나타났던 현상이기도 하다. 지브리라는 가시적인 반례를 제외하면, 대다수의 일본의 남성향 아니메는 오랫동안 정부와 군이라는 '나와 먼 곳'에 대한 이야기를 펴내며 정부에 대한 환상이나 비판을 담아왔다. 그러나 동시에, 정부 기관 자체는 보통의 '내'가 접근할 수 없는, '나'와 멀리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신카이 감독은 정부 기관이라는 것에서 눈을 돌려 일상의 삶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너의 이름은.〉을 시점으로 신카이 마코토의 시선은 지방정부라는, '내'가 접근할 수 있고 대화할 수 있는 존재로 초점이 옮겨진다. 다시 말해, 지방정부가 나의 삶에 어떠한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대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두 가지 관점을 같이 종합해 보면, 신카이 감독의 작품들은 멀리 있는 곳에서 가까이 있는 곳으로 초점이 옮겨왔다고 볼 수 있다. 시선이 멀리 있기에 보지 못하는 주변의 사례가 시간이 지나옴에 따라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로 변화한다. 내가 닿을 수 없는 중앙의 계서적(hierarchic) 움직임에서 내가 닿을 수 있는 로컬리티의 움직임 속으로. 이런 변화가 서서히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면, 신카이 감독이 2000년대 이후 형성된 치유계-일상계 애니메이션의 흐름과 접촉, 집중하면서 자신의 서사에 변화를 일으켰다고 가정할 수 있을 것 같다(물론 개인의 속마음을 알 수는 없으므로 가설에 불과하다).

   물론 이러한 변화의 근본에 위험이라는 요소가 있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사실 이 영화의 메인 이벤트가 되고 있는 운성충돌이라는 재앙은 동일본 대지진의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라는 재앙의 변주에 가깝다.신카이 감독이 위에서 말했듯이, 언제라도 생명을 잃는 자연재해가 나타날 수 있고, 그 자연재해의 적절한 대처가 국가(세월호)와 자본(토쿄전력)에 의해 저지될 수 있다는 위험성이 이러한 심리적인 변화에 근본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보는 것이 편할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 자체는 세계관의 변화의 방아쇠가 되었을 뿐, 그 변화의 명확한 동력인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다. 

결론 :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이야기를 맺을 때가 왔다. 지금까지 〈너의 이름은.〉을 명확하게는 개인적인 관점에서 여러가지 키워드를 가지고 분석해 봤다. 이외에도 〈너의 이름은.〉을 해석할 수 있는 다양한 연구 방법론이 있고, 실제로 해당 방법론들을 사용해 적용한 연구들이 2017년 한해 국내에서 다수 발표 된 바가 있다(전윤경, 2017; 양원석 외, 2017 등). 그러나 〈너의 이름은.〉를 기존의 세카이계 논의틀로 읽을 수 없으며, 오히려 〈너의 이름은.〉은 신카이 감독의 의 탈세카이계 움직임을 잘 드러내주고 있으며, 이러한 변화를 영화 전반적인 내용을 통해 엿볼 수 있었다는 것이 필자의 결론이다.

   〈너의 이름은.〉은 그동안의 애니메이션이 현실과 떨어져 수용자를 작품 안으로 파고들도록 만들어온 현상을 벗어나고자 한 일상계 아니메와 콘텐츠관광이라는 영향을 받아들인, 현실을 반영하는 애니메이션이자, 현실참여적인 의사를 나타낸 작품이다. 물론 이러한 의사의 표현에는 일본 정부나 제작자 등의 다양한 권력을 통한 간섭이 있었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간섭을 잘 묶어내 제작자가 여러 통로를 통해 현실반영적 의견을 나타낼 수 있을 정도로 수용자, 미디어 환경이 변해준 것이 〈너의 이름은.〉의 성공 비결이지 않았겠느냐고 생각해 본다.

   아울러 한국사회가 〈너의 이름은.〉에 대해 뜨거운 반응을 보인 이유도 한국사회가 신카이 감독이 제기하고 있는 사회적인 문제들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너의 이름은.〉이 2017년 촛불혁명 시기에 굳이 한국 사회에서 300만 명을 훌쩍 뛰어넘는 히트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렇기에 〈너의 이름은.〉의 성공은 단순한 '히트'가 아니라, 사회적 변혁을 바라고 있던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데 성공한 것에서 가능한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피조물의 해방을 바라는(롬 8:21) 갈망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계 22:20) (170203 시작, 180214 완료)


참고문헌
마에지마 사토시(2016), 세카이계란 무엇인가 - 에반게리온 이후 오타쿠문화의 역사, 워크라이프. 원전: 前島賢(2014), セカイ系とは何か, 星海社.
윤민석(2016), 이게 나라냐ㅅㅂ. 디지탈레코드, 2016. 11. 24. 
이케가미 아키라(2001), 일본어를 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에게, 디자인하우스. 원전: 池上彰(2000), 日本語の'大疑問', 講談社.
야노경제연구소(2017), '오타쿠' 시장에 관한 조사를 실시(2017년), 2017. 12. 15. 
양원석, 권희주(2017), 신카이 마코토의 ‘세카이계' 연구 『너의 이름은』을 중심으로, 일본연구(고려대 글로벌일본연구원), 28호. p. 238-258.
전윤경(2017), 질 들뢰즈의 ‘되기’의 사유로 본 <너의 이름은> -‘몸 바꾸기’의 의미를 중심으로-, 문화콘텐츠연구(건국대 글로컬문화전략연구소),11호. p. 7-44.


〈너의 이름은.〉 - 가만히 있기를 거부함으로, 세카이계를 떠나다 ①


(ⓒ2016 『君の名は。』製作委員会)


국내 일본 아니메 상영기록 경신. 예스24 주간 베스트셀러 1위 차지. 최근 몇년 동안 상영된 수많은 일본 애니메이션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높은 성적이다. 그리고 이 영화가 끼친 사회적 영향에 대해서는 좀 더 시간을 두며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이 글에서는 이 영화의 내부적인 면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다른 관객들과 달리, 영화를 보면서 인상에 남은 두가지 점이 있었다. 첫째로, 〈너의 이름은.〉과 가장 비슷한 엔딩이 나온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둘째로 엔딩 크레딧에서 유난히도 크게 표시된 일본 문부과학성 예술문화진흥기금 마크. 이외에도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한국에서 '엔딩에 대해서는 pixiv에서 찾아보라'고 한 말 또한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세 가지를 소재로 지금부터의 이야기를 풀어나고자 한다. 개인적으로는 스포일러의 존재를 크게 신경쓰고 있지 않으므로, 이 글에서는 영화 안이나 다른 작품에서의 이야기를 직접 언급하고 있음에 유의하기 바란다. 

<운명에의 거부> - 그리고 "가만히 있으라"

   첫째로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세계를 멸망하고자 하는 스즈미야 하루히의 움직임을 쿈이 막음으로서 현실을 존속시킨다는 애니메이션 엔딩은, 〈너의 이름은.〉과 참 비슷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극중에서 일어난 움직임은 다르다. 쿈의 '구원'은 철저히 다른 사람들에 의한 도움을 받아서 이루어진다. 미래에서 온 미쿠루가 힌트를 주고, 유키가 접속해서 상기시켜줘서야 쿈은 스즈미야 하루히에 의한 세계파괴라는 문제를 해결한다. 하지만 〈너의 이름은.〉에서는 그러한 찾기가 자발적으로 일어난다. 타키는 이토모리가 사라져 미츠하가 사라진 '1차 현실'을 돌파하기 위해, 스스로 이토모리를 연구하고, 미츠하의 모습으로 있을 때 방문했던 '저승'으로 이동해 다시 미츠하가 되어 현실을 바꾸는, 과거로의 자격시련을 차례차례로 통과한다. 행동자의 적극성이 부여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토모리(糸森)에 대형 유성이 충돌하고, 그 와중에 더 많은 분들이 희생될 위험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더 많은 분들이 살아남게 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유성이 떨어지지 않는 지점인 이토모리고등학교로 향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미츠하와 친구들이 일으킨 사건이 이 작품의 클라이맥스에 위치한 일련의 변전소 폭파를 통한 '저항'이다. 미츠하는 이를 통해 미래에서의 요청에 응답하고, 미래에 일어날 일을 타츠키와 미츠하라는 관계를 대가로 치환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변전소 폭파와 가짜 방송 그 자체는 범죄행동이다. 그러나 이러한 범죄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더 많은 사람이 죽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와 달리 사건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미츠하의 아버지인 정장과 정의 직원들은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당연히 이러한 범죄행위를 차단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들은 미츠하 패거리를 한 명씩 한 명씩 잡아간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이토모리의 주민들이 살아나는가, 살아나지 않는가'를 생각하면 이들의 '작은' 범죄행위는 오히려 큰 재앙을 막기 위한 구출활동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미츠하는 저항하고, 결과적으로 아버지를 설득했기기에 마을을 살렸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때로는 미친것 같아 보이더라도 저항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사실을, 신카이 감독은 아마 그런 사실을 거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해당 사실을 보여주고자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에 대해 참고할만한 언급이 있다. 신카이 감독은 그의 2차 방한 중 이뤄진 SBS 나이트라인(SBS, 2017)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분명히 세월호와의 연계성을 인정하고 있다.

한국에 대해서는, 2014년, 마침 그 영화를 만들고 있을 때, 제가 크게 인상을 받았던 것이, 세월호 사고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 때에, 제가, 그 보도를 보고, 정말로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이, 침몰하는 배 안에서 "움직이지 말고 그 장소에서, 대기해 주세요"라는 안내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이, 정말로 아팠네요. '그 방송을 듣고 그 앞에 머물렀던 사람들이 있었다, 실제다'라는 것이어서, '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고 만 걸까'라고 [반응했습니다]. 역시 그 일은, 그렇게 될수 밖에 없었다고 제 안에서 남아 있어서… (저자 번역)

韓国といえば、2014年、ちょうどこの映画を作っているときに、僕がすごく印象ーに残っているのは、セウォル号の事故があったと思うんですね。あのときに、僕が、あの報道見ていって、とっても大きいなショックを受けているのは、沈む船の中で、『動かずにその場で、待機してぐださい』というアナウンスがあったと聞いたんですね。それが、とっても痛ましいこと、だしい、「その放送聞いてその前にとどまった人たちがいった、実際だ」ということなので、「え、どうしてこのことが起きてしまうんだろう」と、あの、やっぱりそのことは、そのできことはずと自分の中で残っていって…

(ⓒ2017 SBS)


   많은 분들이 아시겠다시피, 세월호 참사는 촛불혁명과 함께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이 정부의 정책을 인지하는 방식을 뒤흔들었다. 특히 2014년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이후 가장 이슈가 되었던 키워드가 '가만히 있으라'다. '가만히 있으라'는 분명히 탈출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서도 정부나 권력자가 명령했을 때 그것을 지키는 것을 통해 자신에게 손해가 올 수 있다는, 오래된 두려움을 구체화했다. 그런 의미에서 사건 이후 용혜원씨에 의해 '가만히 있으라' 행진이 발생한 것이나, 신카이 감독이 이코모리 사건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을 담은 것은 우연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권력들에 의해 부당하게 살해된 세월호에서 희생된 304명에 대한 적극적인 반응이라고 할 것이다.

   그래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이 작품은 한국의 지난 몇년동안 '혼이 비정상'이었던 역사와, 그리고 그 역사를 바꿔낸 저항과 맞물려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준다. 과연 저항은 어디까지 합법적으로 허용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결과적으로 사람을 살리는 활동까지 처벌하는 법률은 항상 올바르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우리는(그리고 최소한 나는) 한비자의 법치 이야기를 들으면서 왠지 모를 분노의 감정을 느낀다. 법률로 정해진 일이더라도 법률이 잘못됐다면 저항해 해당 법률을 폐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도덕과 사상들을 읽으며 롤스가 이야기한 기회의 균형이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동시에 로크의 저항권에 동감을 느낀다.

   우리는 국사를 읽으면서도 분노를 느낀다. 임진왜란 이후 세법이 흐트러지면서 나타난 결과인 무거운 세금은 법률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었고, 수많은 양민이 고통받았지만 교정된 일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동학 혁명에 대해, 아암도 소작항쟁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4·19 / 5·18 민주항쟁에 자부심을 느낀다. 그리고 그 저항의 결과물 중 하나로서 나타난 것이 이번 촛불혁명이다. 신카이 감독의 이번 작품이 한국에서 큰 영향을 불러일으킨 동력에는, 이러한 저항에 대한 정당성을 이 영화가 부여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이게 나라냐〉에 맞춰 추운 한겨울에 광화문 길을 걸었던 우리의 기억은, 〈너의 이름은.〉과 함께 조화돼 그 당시 일어나고 있던 카이로스적 변화를 순응하고 긍정하게 만든다.

   그러나 현재의 한국과 일본 법률 체계는 선의의 의도를 가지고 있고, 자신을 지켜야 해 어떤 행동을 위반했다고 하더라도 타이트한 법률의 조항을 위반했다면 그 사람을 교도소에 들어가도록 만든다. 실제로 엔딩에서 미츠하가 멀쩡하게 회사를 다니는 일은 제대로 따져보면 현대 일본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을법한 일이다. 일본의 정상적 시스템 아래서라면 미츠하와 동료들의 법률 위반은 이미 법률에 의해 처벌받아, 미츠하와 동료들은 교도소 생활을 거치고 나와서 정상적인 회사 채용이 거절받는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을 터이다.

   그러므로 신카이 감독이 나타낸 이야기의 반대선상에는 노조 혐오와 기업 자유 옹호, 그리고 법치를 통한 국격상승(?)을 강조한 한국의 극우정당들이 있다. 이들이 옹호하는 구 체계는 기업의 극대 이득 창출, 탈법적 노조 파괴, 최저임금 인상 반대, 친기업적 용어 왜곡 등 '개·돼지'들을 육성하고 가짜 민주주의를 활성화시키기 위한 것들로 가득차 있었으며, 외부 환경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표면적 변화만을 부르짖으며 대기업만을 위한 성장을 꾀했다. 그들은 그 결과로 그들이 위한다고 주장하는 국민들의 삶이 철저히 망가지든, 원전이 터져서 사람이 죽든, 급격한 원수 유입으로 지진이 나 수많은 사람이 다치든지에 대해서는 상관해오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들의 저항을 좌빨·용공·공산주의로 몰아가 분쇄하는 것이 대한민국을 살리기 위한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선전하고 있다. 일본도 많은 부분 비슷할 것이다. 이에 대해 '이것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한국과 일본의 많은 관객이 적극적으로 수신했다는 것은, 다시 말해, 이 모순적인 망국병에 대해 사람들이 더이상 '쇼하지 마라, 속지 않는다'(윤민석, 2016)라는 반응을 내보낼 수 있는 일련의 공통적인 문화자본을 수신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문화자본이 발출(發出)되었느냐, 그렇지 않냐의 차이만이 존재할 뿐이다.

'언령신앙'과 '무스비' 

그런데, 왜 이런 위험한(?) 작품을 일본 정부는 굳이 문제삼지 않는걸까? 게다가 유난히 까다로운 법률 및 규칙 파악에 빠른 일본 행정부가 단순히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네임 밸류나, 대기업의 지원을 받아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작품을 그냥 긍정적으로 파악할 리가 없다. 앞서 소개했듯이 이 작품은 '문부과학성 예술문화진흥기금'을 받아 제작됐다. 정부가 봤을 때도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근거에는 정부 정책, 특히 일본 문화를 발산하는데 긍정적인 요소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필자는 그 요소가 이 작품에 강하게 투영되어 있는 일본의 전통 문화라고 본다.

   첫번째 요소는 언령(言靈)신앙이다. 말에 힘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신도 신앙에서 유래된 이 신앙은 사람이 내뱉는 말을 통해 미래의 일을 좌우한다는 믿음을 나태나고 있다(이케가미 아키라, 2001). 또한 동시에, 그 속에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나타난 바가 있듯이, 이름을 바꾸는 행동이 사람의 존재나 의미 등을 바꾼다는 - 한국에서와 동일한 - 믿음 또한 깃들어 있다. 〈너의 이름은.〉에서도 이름의 존재가 결과적으로는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된다. 타키와 미츠하는 서로의 이름을 안다는 것을 전제로 다시 만날 수 있었으나, 두번째 만남을 통해 서로의 이름을 잊는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이름값'이 재앙의 결과를 바꾸는 대가로서 지불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두 사람의 이름을 둘러싼 인식 변화의 근거는 분명히 일본 전통 문화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두번째 요소는 애초의 이야기의 배경이 된 신사의 신화다. 이번 이야기에서 극중의 바탕이 된 것은 이토모리 산의 성역에 보존되어 있던 한 가지 옛 기록, 즉 과거에 운석이 도달했던 이토모리에 다시 동일하게 운석이 도달한다는 신화였고, 그 신화는 분명히 애니메이션에서 두번에 걸쳐서 재현되었다. 그리고 이야기 진행에 도움이 되었던 입으로 만든 술도, 해당 신사의 전통에 따라 미츠하의 몸으로 타키가 술을 만들고, 죽은 미츠하에게 돌아가기 위해 타키가 금기를 깨고 신사에 들어가 술을 마신다는 이야기 요소로 이어진다. 

   물론 작중의 이야기는 전부 픽션이지만, 신화의 재현이 이뤄진다는 이야기를 통해 일본의 정신을 떠받들고 있는 신도의 신뢰성이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물론 최근의 전형적인 TVA들에서 새해맞이 신사참배(初詣)가 자주 나오는 것을 보면 분명히 신사나 신도가 권위를 내세우는 것을 벗어나 일상생활의 일부분으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신사와 신도가 미디어를 통해 신뢰할만한 지혜로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 여러번 노출될 때, 일본국민 뿐만이 아니라, 애니메이션을 시청하는 (우리나라를 포함한) 해외의 사람들에게도 (역사적 사실과 무관하게) 일본문화를 친숙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물론 이로 인해 이어지는 역사왜곡의 가능성은 언제나 대비해야 할 것이다).

   셋째 요소로는 무스비(結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무스비 또한 이 애니에서 의외로 여러번 나오는 서사장치 중 하나다. 특히 신카이 감독은 結び가 '이어짐'과 '매듭', '끝맺음'이라는 서로 다른 의미를 활용해 극중에서의 타키와 미츠하의 관계를 시각화한다. 애니메이션 중간에 나오는 타키와 미츠하의 첫 만남은, 미츠하가 타키에게 긴 머리줄을 전달해주는 장면으로 상징된다. 타키가 받은 매듭은, 미츠하와 타키와의 상호신체교환이 일어나도록 하는 매개체가 되어준다. 또한 해당 매듭은 타키가 미트하를 발견하고 이동해, 타키와 미츠하의 재회를 이끌어주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한다. 이렇게 일본 전통의 '머리 묶는 줄'을 통해 신카이 감독은 타키와 미츠하 사이의 '매듭'을 시각화해 설명한다. 신카이 감독은 이를 통해 일본어-일본 문화에 대한 호감도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일본 전통문화는 이 작품을 이끄는 중요지점마다 나온다. 애니메이션 속에 딱 한번 나오는 수업 시간에, 굳이 '다소가레'(たそがれ)의 용법을 배우는 시간이 있다. 일본한자로는 '황혼'(黃昏)으로 전사되고, '저녁놀'로 번역되는 이 단어가 (만엽집을 구체적으로 적시하지는 않지만) 원래부터 '誰そ彼(너는 누구여)'에서 나온 말이라는 수업은 예상 그대로 떡밥이 되어 타키와 미츠하가 바뀐 몸을 가지고 만나는 지점에서 활용된다. 이 만남은 미츠하와 타키가 변화된 세계로 돌아가는 기회가 됨과 동시에, 변화된 세계를 고정하는 기회가 된다.

   이와 같이, 〈너의 이름은.〉은 이전 작품과 달리 일본문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이러한 활용 결과는 문부과학성 예술문화지원기금의 수령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결과가 신카이 감독의 네임 밸류에 의한 것이라고 판단하기는 힘들다. 신카이 감독이 지원을 받기 위해 이야기 속에 의도적으로 붙인 것일 수도 있고, 일본국 정부의 쿨재팬 정책에 맞춰 이야기를 조정한 것일 수도 있다. 이 외의 추측 중에서 신카이 감독이 가지고 있는 본심(本音)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와 관련된 정황적 판단은 뒷부분에 일부나마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70203 작성 시작, 180129 1부 공개) (계속)

[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


2018년 엘리프 신년사


신   년   사


하나님 나라와 민주주의 국가 : 이뤄졌으나 이뤄지지 않은
2017년 한 해동안 하나님께서는 어둡던 이 나라에 구원을 베푸사 9년동안의 이명박근혜 폭정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합법적으로 폐하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또한 문재인 대통령을 세워주셔서 하나님 나라에 필요한 국가 체제를 구축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러나 나라는 아직까지 위험속에 처해 있습니다. 북의 위협은 계속되고 있고, 동시에 박근혜 대통령을 결사옹위하고 문재인 대통령과 노동조합 세력 등을 매일 저주하는 세력이 일어나 이 나라에 하나님께서 내리시고자 하는 은혜를 막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2017년의 자유와 해방감에 만족하지 말고, 나라를 위해 늘 깨어 기도하고 싸울 때가 왔습니다.

온전한 민주주의 국가를 이루기 위한 대한민국의 도전은 지금도 구축해 가지고 완성해 나가시는 하나님 나라의 도전과 그 궤도가 겹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나라를 진정으로 살리는 방법이 소위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가짜 민주주의가 아닌 참여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민주주의라는 것에 대해 부정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민주주의는 완성되었다고 볼 수 없으며, 앞으로도 시민들의 교육과, 극우 이데올로기를 뽑아내고자 하는 각자의 노력을 통해서야 완성해 나갈 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 또한 이 땅에 이뤄졌으나, 주님 오시기 전까지는 완성되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한국 교회들의 높은 벽을 낮추고, 맹목적으로 거룩을 추구하는 삶을 벗어나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가 전해지도록 그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 나라 건설에 부르심을 받은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을 등지지 말고, 세상에서 구별되되 세상을 변화시키며 하느님 나라를 인지하며 살아 나갑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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