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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visible Traits

아싸되기, 아니 자랑스레 이상-스러워지기

 

Weird Pride day flag, Made by Oolong and Autistamatic 

 

2021년 3월 4일, 오늘은 세상에 또 다른 기념일 하나가 생기는 날이다. [ Weird Pride Day ]. 한국어로 번역해 보면 이상함 자랑의 날, 아니 좀 더 한국어 친화적으로는 아싸 자랑의 날. 또는 찐따 자랑의 날로 번역할만한 이 날은 나에게 여러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처음에 이야기를 들었을 때, 표준분표 바깥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가치를 역전적으로 재평가하고, 자랑하자는 이야기를 공감하면서도 동시에 뭔가 말이 안 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 ‘말이 안 됨’은 역설적으로, 이상함을 지닌 사람들이 어떤 평가를 받아 왔는지 다시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된다.

 

찐따가 ‘무서운’ 이유

많은 일반인들이 장애인을 보호하고 사회에 통합시켜야 한다고 말로 주장하면서도, 정작 주변에 있는 ‘아싸’들, 특히 Weird pride day가 격려하고자 하는 신경다양당사자들Neurodivergents은 무시, 아니 혐오해 왔다. 그러한 혐오가 얼마나 뿌리 깊게 자리 잡혔는지, 그들은 ‘자연스럽게’ 조금이라도 일반인과 다른 모습을 가진 모습을 가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2020년 [ 널디 ]가 네고왕을 통해 브랜드를 키우려고 하던 시점에 이름 모를 조작세력이 ‘찐따’ 마케팅을 한 것이 들어 먹히는 사건이 있었다. 하나의 브랜드에 아싸라는 이미지를 투영하는 것만으로도 브랜드에 큰 손상이 미친 이 사건은 한국에서 너드와 같이 된다는 것이, ‘이상’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얼마나 많은 조롱과 혐오를 견뎌야 하는 일인지 잘 알려준다.

 

사회들, 특히 한국사회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누구와 언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하는 것이 옳은지를 결정한다. 학교에서는 야간타율학습을 강요당해도 기쁘게 해야 한다. 좋은 점수를 맞되, 특히 수학은 고득점을 맞아야 한다. 대학에 가면 MT를 열심히 다니고 외부활동을 열심히 하며 스펙을 쌓아야 한다. 대기업에 들어가야 한다. 운전은 과속하면 안 된다. 안전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곧바로 아웃사이더라는 이름이 붙는다. 애초에 아싸라는 말 자체가 내가 인싸가 되기 위해서 누군가를 밀어내기 위해 쓰이는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단어는, 신경다양당사자들을 쉽게 사회에서 몰아내는 데 활용되어 왔다.

 

개인의 심리적 상태, 의향과 상관없이, 우리는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일반인과 비슷하기를, 아니 똑같기를 바란다.  그렇게 되거나, 그렇게 감정 연기하는 것을 장애를 극복했다고 말하고 이를 칭송한다. ‘극복’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고등교육의 기회도 거부된다. 그들은 괜찮은 일자리와는 거리가 먼, 일용직, 저임금 일자리의 삶을 견뎌야 한다. 그렇게 잊혀지다 고독사를 맞이하던지, 시설이나 ‘요양병원’ 안에 틀어박히기 위해 백신이나마 먼저 맞는 존재가 되기를 명령한다. 관제시위로 ‘공정’을 주장하는 사람들조차, ‘공정경쟁’에서 떨어진 사람의 운명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그들이 동정 ― ‘현저한 사회적 돌봄’의 대상으로 기록되기 전까지는,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는다. 죽어야, 안타까워하는 척할 뿐이다.

 

연례적인 말이지만, 이상함을 금지하는 것은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를 상징하는 동아시아 유교문화가 품어왔던 바람직함이자 이상이었다. 유교 문화에서, 위치 바깥에 있는 사람이 위치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처벌의 대상이 됐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죽음까지도 무릅써야 하는, 선 바깥으로 나갈 수 없는 사회에서 장영실, 안용복, 김대건, 심지어 대관 고작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예에, 분수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재능과 능력을 사회에 나누지 못하고 처벌되었다.

 

그 폭력의 역사는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로 포장된, 대한민국의 권위주의 정부에서도 반복됐다. 금지곡이 쏟아지고 ‘건전가요’를 강요당했으며, 의복과 머리는 항상 단속의 대상이 됐다. 농촌의 사람들은 새마을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조직에 끌려다니며 ‘부지런함’을 강요당했고, 공장에서 강제노동이 반복되는 ‘명랑’한 사회 속에서 의분을 참지 못하고 나서는 항의자들은 항상 ‘폭도’로 전락됐다. 피를 흘려 겨우 멈춰 세운 역사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으며 반복되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여전히 찬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정상’=‘자유민주주의’로 돌아가야 나라가 발전한다고 말한다. 맞는 말일까?

 

‘이상’해야 성공한다

이상할 수 없는 사회는 사회발전에 필요한 다양한 인재의 가능성을 처벌한다. 그 결과 21세기 국가경쟁력 유지에 필요한 다양성을 잃어버리고, 장기적인 국가성장동력의 추락이 이뤄지지만, 사회는 그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성공하는 국가가 되기를 바라고, 실리콘밸리와 같은 경쟁동력을 만들기를 원하지만, 그 핵심에 있는 ‘이상함’을 따라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계 역사에 남은 위대한 사람의 다수는 이상했던 사람들이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르네상스 시기 다양한 이상함을 드러냈지만, 그의 업적을 칭찬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모차르트의 ‘이상한’ 모습 또한 그 당시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우리는 올해 초 [ 그의 자그마한 곡 ] 마저도 찾아내 [ 초연하는 ‘촌극’ ] 을 목격했다.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타나카 코-이치 또한 회사 내에서의 사람의 위치가 정해진 일본 사회 속에서 굳이 연구직을 지향했고, 지금도 그 직을 유지하고 있다.

 

20세기 성장과 발전을 주도한 미국 사회 또한 이상함을 품은, ‘이상스러운’ 사회였다. 1910년대 한 자폐당사자에 의해 활성화된 SF 장르는 판타지 소설과 미국 만화 시장을 만들며 미국을 문화콘텐츠 강국으로 만들었다. 1960-70년대 너드들로 가득한 대학과 NASA의 노력이 인간을 우주로 실어 보냈고, 인터넷을 만들었고, 실리콘밸리 신화를 만들었고, 컴퓨터로, 스마트폰으로 누구나 접속할 수 있는 시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이상’하다고 비판을 받아 온 일런 머스크가 또다시 세계를 뒤집어 놓고 있다. 자폐당사자 그레타 툰베리의 행동이 아무 생각도 없던 한국과 일본의 정상들이 ‘탄소중립’을 선언하지 않을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위치가, -다움-ness이 아닌 ‘이상함’에서 혁신이 나오고 성공이 생긴다. 플로리다 교수의 창조도시론이 이상한 사람들에 대한 포용 정도와 창조도시를 직결하는 것도 이러한 취지에서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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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싸 예수

Weird pride day가 사순시기 속에 이뤄지는 만큼 [ 나를 ‘이상’하게 만드는 예수 ]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도 빼놓을 수 없다. 예수야말로 ‘이상’의 극치였다. 예수는 ‘소란거리’였다. 공식 데뷔부터 가족의 반대(막 3:21)와 지역사회의 저주(눅 4:16~)를 무릅썼다. 안식일에 의도적으로 사람을 치유해 논란거리를 만들었으며, 먹을 것을 만들어 내시면서도 유대인의 왕이 되시기는 거부했다. 그는 사회적 배척 대상인 세리를 자신의 제자로 삼았고, 그들과 함께 먹고 마셨다(눅 5:30). 심지어 성전을 뒤엎고 정화했다. 의도적으로 사회의 혐오 대상인 사마리아인을 찾아가서 대화하고,  급기야 사마리아인과 같이 되라고 설교했다(눅 10:30-37). 십자가를 지시기 이전에, 그는 아싸가 되기 좋은 방법만 따라 했다.

 

예수가 당한 고난과 죽음 또한 그의 본디 목적과 별개로 볼 포인트가 있다. 예수는 사회적이지 않았다. 그가 사회를 시끄럽게 만든다는 것은 그가 촉망받는 랍비, 또는 대중이 원하는 새 왕으로서의 사회적 위치를 가지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였다. 영문 밖으로 나가는 그의 십자가 이동은 조롱과 채찍, 욕설, 사회적 거부로 점철됐다. 그리고 그 피가 그리스도인을 구원하고 사회 바깥으로 불렀다(ἐκ-κλη-σία).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사회를 혼란스럽게 한다는 이유로, 고난과 고문을 받고 피를 흘리고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이상-스럽자

한국어에서 이상異常과 이상理想이 같은 음을 사용한다는 것은, 그동안의 한국 사회가 理想을 異常으로 여겨왔다는 점을 뜻한다. 어떤 것에 이르는 것을 미쳤다고 하는 것 또한 그런 집중이 사회적으로 이상한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상함을 결정하는 것은 사회적, 다른 말로 신경규범적Neuronormative 규범에 의한 것일 뿐이다. 그 행동을 통해 폭력=처벌이 들어와 사회에 의한 심리적 압박을 느끼지 않는 이상 개인은 자유함을 느낀다.

 

많은 자폐당사자들이 일반인과는 전혀 다른 패션 감각을 보인다. 그 옷이 이상한 옷이라고 결정하는 것은 누구일까? 주위 사람의 단순한 일탈이 아니라, 사회가 품고 있는 패션 코드가 크고 두껍기 때문일 것이다. 신경다양당사자들이 자신이 가진 의견이나 취향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도 사회성이 끼치고 있는 심리적 압박 때문이다. 자폐-스러운 사고와 발언이 일반인의 소통 코드와 다르다 보니 다른 생각과 말을 하게 된다. 결국 오해를 불러일으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기 어렵게 된다. ‘사회’와 소통하지 못하다 보니 스트레스를 받다 못해 분노가 쌓이고, 다름이 인정받지 않다 보니 ‘여기저기 찌르고 다니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사회에서 점차 발언권을 빼앗긴다.

 

그러나 우리는 ‘강해져야 하’(황푸하(2020), 〈길 나서기 전 부르는 노래〉)기 이전에 더 이상異常-스러워야 하고, 자폐-스러워야 한다. 이미 설명했듯이, 사회가 가질 수 없는 혁신의 근원은 이상함에 있다. 그래서 이상-스러운 사람에게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있다. 바뀌어야 하는 것은 이상한 이를 ‘찐따’로 부르고, 소통하는 방법을 배우는 대신 ‘이 상하셨어요?’라는 개그를 치는 사회이지, 이상한 사람이 아니다. 이상-스러운이라는 말은 그래서 자랑-스러운, 자연-스러운 느낌과 동일하게, 긍정적 느낌을 담아야 한다.

 

(한국) 사회 또한 혁신과 새로운 아이디어를 줄 수 있는 아싸들의 사고를 존중하고, 그들과 함께해야 한다. 그들이 혁신의 주체가 될 때 (한국) 사회가 발전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BPBest Practice를 창출해야 한다. 장애인들이 주변을 돌아다녀야 한다. 이상한 사람이 주위에 많아져야 한다. 그들의 아이디어가 사회적 혁신을 이루고 경제적 성장을 이룬다면, 아싸가 되는 것은, 다시 말해 이상해 지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일이요, 앞날이 기대되는 일일 것이다.

 

이상함을 자랑하자(고후 11:30). 아싸가 되기를 두려워하지 말자. 공간 안에 갇혀있기를 요구하는 사회와 맞서 ‘대문을 나서’(Ibid., )자. 함께 영문 바깥으로 나아가자. 사회라는 ‘휘장’을 가르자. 더 많이,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지자. 그리고 빛나자(사 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