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15 04:44

'울려라! 유포니엄' 극장판 - 유포늄은 나를 위해 운다



1. 우선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역시나 언어 관련 부분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제목인 '울려라! 유포니엄'에서 주인공이 연주하는 악기의 이름인 Euphonium 말인데, 역시나 이 단어의 표기가 신경쓰이는 건 어쩔 수 없다. 국내악기에서 쓰이는 통용표기는 유포늄인 반면에, 외래어 표기법에 따른 표기는 유포니움, 그리고 공식 수입사인 애니플러스에서 공식적으로 들고나온 단어인 '유포니엄'까지… 개인적으로는 통용표기를 취해서 '유포늄' 쪽을 선호하지만, 여러 어른의 사정으로 이 글에 한해서 공식 제목에 들어가는 Euphonium의 표기로는 '유포니엄'을 선택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의 번역으로 <울려라! 유포늄>을 선택한다는 것을 밝혀두고자 한다.


2. 만화나 애니를 원전으로 하는 극장판 애니에는 두가지 테크가 있다. 하나는 애니메이션을 정리해서 다시 극장용으로 엮어서 새로운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쪽, 나머지 하나는 애니메이션의 캐릭터와 세계관을 기반으로 새로운 스토리텔링 콘텐츠를 만드는 쪽이다.

우선 애니메이션을 정리해서 하나의 극장판으로 만드는 쪽은 아무래도 원화나 작화를 다시 하지 않아도 되고 원본의 내용을 그대로 활용할 수 있어 편집 비용이 들지 않으므로 제작비용이 적게 들어간다는 점이 장점이다, 애니메이션을 봤던 사람들에게는 똑같은 내용을 다시 보는게 어떤 의미에서는 애니메이션에 대한 평가를 접게 만드는 고역일 수도 있다. 실제로 지난 2015년 개봉한 〈푸른 강철의 아르페지오〉 1차 극장판은 맨 마지막 장면을 제외하면 애니메이션 팬들이 모두 본 내용의 반복에 지나지 않아 결과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았다.

반면 〈케이온!〉이나 〈러브라이브!〉 극장판은 애니메이션과 독립된, 애니메이션의 연장선상에 있는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제시해 결과적으로는 팬들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 노선의 경우 많은 팬들이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므로 재구매를 하지 않는 이상 애니메이션의 제작비용을 회수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고, 역시나 제작인력이 충분한 경우에나 가능한 이야기라 여러 의미로도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단점이 있다,

3. 이런 시점에서 〈울려라! 유포니엄〉은 의외로 전자를 선택했다. ‘의외’로 느껴지지만, 제작에 이르게 된 콘텍스트까지 같이 생각해보면 당연한 결과이다. 우선 극장판 제작을 고려할 시, TVA 2기의 제작이 결정됐다. 이 상태에서 극장판을 위한 신을 크게 추가하거나, 인력을 크게 확충할 여력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이야기가 너무 길거나, 이야기를 빠르게 편집할 경우에는 역시나 이야기의 재미가 떨어질 수 밖에 없다. 

또한 이 극장판은 1기 사이와 2기 사이에 들어가 애니메이션 팬덤들의 관심을 자극해 2기에서도 팬들의 높은 시청이나 구매를 자극하기 위한 예정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많은 자원을 투자할 수 없었다. 또한 〈케이온!〉이나 〈러브라이브!〉같이 TVA 제작이 끝난 상태에서 이야기를 끌기 위한 작품도 아니다. 이러한 맥락들이 〈울려라! 유포니엄〉이 이러한 형태로 제작되게 된 이유이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4. 그렇다면 이러한 전략이 팬덤들이나, 아직 애니메이션을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재미를 주는지에 대한 평가인데, TVA를 전혀 보지 않았던 내 입장에서 평가해보면, 재미있었다. 무엇이 재미있었냐면,

1) 편집 리듬감. 기존의 TVA를 줄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가 설득력이 있었다. '총집편 형태의 TVA'는 분명히 이야기를 줄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담이라고 해야 하나, 문제라고 해야 하나 하는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특히 기존 팬덤에게는 재미가 보장되지는 않는다.

2) 그래서 TVA에서만 제공가능한 콘텐츠를 분명히 제공해 차별성을 두었다. 극중 등장한 '라이딘' 신은 애니메이션에서와 달리 상당히 긴 시간의 러닝타임을 배분했다. 마찬가지로 예선에서 연주하는 곡이 된 〈초승달의 춤〉이나 〈프로방스의 바람〉 또한 TVA보다 연주 시간을 길게 했다. TV에서 체험할 수 없는 내용을 극장판에서 새롭게 접할 수 있다는 감각이 주어진 것이 결국 설득력 있는 프로그램의 제공에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다.

3) 클래식이라는 소재. 특히 유포늄이라는 낯설지만, 중이병이니 양판소 세계급의 거리를 둔 장르와 다른 정상적인 현실 속 정상적인 악기를 가지고 온 것도 일반인이 접근하기 쉬운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특히 아직까지도 대중문화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지만, 클래식 악기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고리타분한 문화관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모에요소’에 의해 과장된 캐릭터들이 전혀 보이지 않고, 일반 스포츠 만화에도 존재하는 주인공의 장기나 특기가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 또한 애니메이션 장르에 낯선 이에게는 쉽게 접근하는 요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5. 마지막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싶은 부분은, 자기이입에 대한 측면이다. 대부분의 애니메이션은 3자적 관점에서 이뤄지는 현상이나, 주인공의 의지를 보여주는데 머문다. 이와 달리, 〈울려라! 유포니엄〉은 주인공 쿠미코의 내면 서술에 집중하고 있다. 북우지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왜 굳이 취주악부에 다시 들어가고 싶지 않았는지, 더군다나 저음악기를 왜 불고 싶지 않았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유포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왜 타키 선생을 만나면서 유포늄을 ‘잘하게 되고 싶ㅇ’ㅓ졌는지, 왜 레이나를 다시 만나게 됐는지… 이 모든 것들을 납득시키고 감정을 이입할 수 있도록 하는 애니메이션. 이것이 이 영화가 다른 영화와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이다.

그래서 이 애니메이션과 영화는 사람을 감동시키고, 움직이게 만든다. 실제로 애니메이션 방영 이후 일본 내 취주악부 내에서 유포늄에 대한 평가가 급변해, ‘울면서 맡아야 할 정도’로 피하던 악기가 ‘동경하는 악기’로 바뀌었다는 보도가 나온 바가 있다(쿄토신문, 2017. 8. 18). 또한 이후 유포니엄을 주제로 한 콘서트가 팬덤에 의해서 이어지는 등의 사례도 보고돼, 이 작품은 애니메이션 성지순례 사례와 다른 매커니즘을 통해 개인의 감성에 다가가 움직임을 변화시키는 데 성공한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애니메이션 속에서 쿠미코가 울리는 유포늄은 타키 선생이나 레이나, 쿠미코, 취주악부만을 위해 울리는 소리가 아니다, 무엇보다 그 소리를 듣고 있는 나를 위해 우는 것이다. (160901 작성 시작, 171115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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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31 23:07

95개 조항 500주년 기념문



95개 조항 500주년 기념문


전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수를 믿는 이에게 “회개하라!”, 즉 “전향하라!” 하신 것은, 믿는 이들의 삶을 온전히 바꿔 하나님 나라를 하늘과 땅에서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소망이다(마 4:17). 회개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다른 사람과 동일하게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죽어주셨으므로 나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마 28:19) 심령을 새롭게 함으로(엡 4:23) 성령님 안에서 주님의 제자가 됨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 참여한다는 진리를 믿는 가운데서만 이뤄질 수 있다. 그러므로 회개는 이 진리를 믿는 자에게 주어지지, 이 진리에 무엇을 더하여 믿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들은 복음에 우파 이데올로기를 더해 사회적 개혁 성향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가르치고, 그런 이들을 교회에서 몰아내고 있다.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문제가 아닌 교회 내부의 정치적 이슈로 가나안 성도가 되어 교회를 떠날 때, 교회의 지도자들은 오히려 현재의 상황이 그리스도를 믿은 데서 발생하는 당연한 ‘고난’인 것처럼 가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더욱 위기에 올리고 있는 한국교회를 돌아보며, 개인의 입장에서 한국교회의 문제점과 대안을 제시함이 마땅한 줄로 알아, 이와 같이 기념문을 기록해 둔다.


무엇이 문제인가

이세벨의 영 : 보수 이데올로기
  구원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초청을 받아들여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유일한 구속자이자 주로 고백하는 모든 이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러한 기회가 일부 사람들에게만 주어진다고 믿는 것은 성경에 위배되는 것이며, 이를 유도하는 공동체 또한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를 자처하는 한국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보수 이데올로기를 믿는 것처럼 보이는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한국교회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보수 이데올로기를 옹호해 왔으며, 때로는 일반인이 보기에도 비인륜적인 결정에도 거리낌 없이 지지해 왔다. 예를 들어 4‧3 제주항쟁에서 당시 한국교회 청년들로 구성된 서북청년단은 멸공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무고한 양민을 공산주의자로 조작하는 가해자의 최전선에 섰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교회의 죄를 사과하는 개교회나 교단 차원의 목소리는 지금까지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다.

  더군다나 최근 10여 년 동안 교회 강단은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하고 노무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 등의 자유주의자들을 종북좌파로 호칭하는 목소리로 가득했다. 이뢰자계 집단과 함께 하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다. 많은 교회 내 청장년들이 교회에서 울려퍼지는 소리에 시험당해 교회를 떠나갔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잃어버린 양들이 쉽게 전도만 하면 돌아오리라는 착각 속에 빠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보수 이데올로기가 내재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교회 내 권위자가 목회할 수 없을 정도로 치명적인 자신의 죄악을 드러내는 것을 막아준다는 데 있다. 성경적 근거로는 이미 출교되거나 치리되어야 할 사람이 다른 사람이 양심의 가책을 받아 죄를 드러냈을 때 그 사람을 오히려 회중에서 쫓아내 자신의 자리를 모면하는 사례가 이미 한 두 번이 아니고, 이미 교회 치리체계와 사법체계마저도 이들을 자정하는데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지난 촛불혁명에서 한국교회의 대다수는 분명한 상황 속에 침묵하거나 도리어 분명한 잘못을 한 박근혜를 교회의 이름으로 변명함으로서 자신의 한계를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다음 세대’의 절대다수가 진보‧중도 성향을 가지고 자유당에 반대하고 있지만, 교회에서는 계속해서 극우 이데올로기를 지지하는 교회 구성원들만이 교회의 주축이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교회에서 멀어진다. 매우 심각한 문제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개정)라는 말씀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대다수 회중은 진보적 성향을 가지고, 세상문화와 익숙한 사람들이 구원받아 하나님의 회중에 들어갈 수 없다는 보이지 않는 편견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말씀은 분명히 사도 바울의 다음 선언과 배치되는 것이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9, 개정)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늘나라의 문을 닫기 때문이다. 너희는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마 23:13, 새번역) 우리는 바리새파를 지적하며 그들과 멀리 되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하늘나라의 문을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게서 닫아두고자 하는 존재는 아닌지 깊이 돌아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인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반대되는 입장을 가진 사람이라도 우리의 이웃이라고 지적하신다(눅 10:36-37). 마찬가지로 내 공동체, 내 가족만이 아닌 나와 반대되는 입장을 가진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할 줄 알아야 우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얻을 것이다(마 5:9). 그러므로 교회에 들어오는 모든 이가 하나님의 사랑을 교회 공동체 안에서 느낄 수 있도록 교회 공동체를 운영하고, 혹시라도 누구라도 소외시켜 하나님 앞에서 책받지 않도록(마 18:10) 한국교회는 지금부터라도 궁리해야 할 것이다.

이단과 반지성주의, 가스라이팅 : 질문의 금지
  한국교회에서 또 다른 문제로 대두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이성과 감성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무관한 것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현재의 세태다.

  구약성경에서 예언자들과 선지자들은 당시의 세태에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해 왔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과 억울한 자, 눌림 받는 빛이 없는 자들의 현실을 무시하고 향락과 낭비로 삶을 살아온 당시 지도자들의 부정의와 우상숭배를 고발했으며,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올바른 통치를 위한 회개를 부르짖었다. 예수님도 이러한 선지자들의 영성을 본받아 성전 앞 장사판을 두 번이나 뒤엎으시고, 그 당시 하나님을 섬긴다고 자부하고 있던 바리새인들에게 매우 심각하게 화를 선포하시며 그들과 싸우기를 두려워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질문하지 못할 정도로(마 22:46) 뛰어난 지식과 지혜를 갖춘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셨다.

  이런 예수님을 따라 교회들마다 차이는 있지만, 그리스도인, 특히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성경과 성전, 이성을 하나님을 믿고 이해하는 주요 판단기준이라고 받아들인다(감리회 교리와 장정, 1편 2장 2절). 그러나 실제 한국교회에서 일정 ‘선’을 넘어가는 믿음과 교회에 대한 개인의 이성적 질문과 논의는 금단의 영역에 속하며, 교회 구성원들은 아무리 많은 지식과 지혜가 있더라도 선을 넘는 질문을 하지 않은 채 엄격한 선 안에서 살 것을 요구받는다. 이러한 반지성주의는 이단이 성행하는 현재 세태와 겹쳐 생각할 때 한국교회가 이단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지 자문하게 만든다.

  이단 사이비 종교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권위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과 교리에 대한 의문의 금지다. 신천지던, 하나님의 교회건, 여호와의 증인이건 사이비 이단 집단의 지도부는 자신들의 교리에 대한 자그마한 비판이더라도 받아들이지 못하며 이러한 비판과 의문이 어느 수준 이상에 이를 경우 지도부의 구성원이라도 아낌없이 내쫓는다. ‘판을 깨자는 거냐?’(이만희)라는 질문이 그 의미를 잘 설명해준다. 교리에 대한 의문과 문제점에 대해 하나라도 받아들인다면 그들의 교리는 한 순간에 멸망해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믿음이 그들보다 못한가? 그렇지 않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현대 사회인들 뿐만이 아니라 믿는이들의 질문에 능히 대답하지 못함으로서 이단과의 차이점을 능히 설명해버리지 못하고 있다. 한국교회에서 기독교 변증은 교회 전도를 위해 필요한 특수한 기술이 되었을 뿐이며, 세상의 전문 지식은 교회의 체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배설물’(빌 3:8)내지 적그리스도의 무기로 취급당하며, 신학은 목회자를 양성하고 전도를 돕기 위한 일종의 기술이 되어 버렸다. 그리스도인 개개인이 마땅히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갖는 질문은 교회 성도들끼리도 서로 들추어내기 어려운, 대나무숲의 메아리가 되었을 뿐이다.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하는 한국교회의 부끄러운 매커니즘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가스라이팅이다. 위키백과에서는 가스라이팅을 ‘지속적 부정, 상황 조작, 모순화와 거짓말을 통해, 타인이나 특정 집단 구성원들에게 의심의 싹을 심어, 그들이 자신이 가진 기억, 감각, 신념, 그리고 분별력에 대해 의심하도록 해 그 사람을 정신적으로 황폐화시키고 그 사람을 파국으로 몰아가는 조작 형태’라고 정의하고 있다(영어+한국어에서 정리). 

  문제는 한국교회 내 가스라이팅이 복음과 관계없는 비본질적인 영역에서 쓰인다는 데 있다. 한때 한국교회 내에서 컴퓨터 공학을 ‘사탄의 학문’으로 부르거나, 드럼을 ‘마귀의 악기’로 부르던 때가 있었다. 물론 지금도 밴드 형태의 경배와 찬양을 하나님과 동떨어진 것으로 주장하는 이단들이나 극우주의자들이 존재한다. 이와 같이 최근에도 가치중립적인 도구들이 ‘문화’나 ‘사탄의 도구’라는 이름으로 하나님과 반대되는 것으로 호출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며, 이는 해당 문화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을 믿음에서 끌어내리거나 이중 믿음을 가지도록 하는 결과를 낳는다.

  특히 이러한 결과가 복음의 진리와 섞여 있는 데에서 발생한다는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한국교회가 강조하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 오직 내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가운데 사는 것이라’(개정)라고 고백한다. ‘예수와 함께 내가 죽고, 예수와 함께 내가 사는’ 자아의 죽음은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 자아의 죽음은 내 교회만, 내 공동체만, 내 교리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고, 동시에 교회라는 몸 전체를 위해 부르심 받았다(엡 1:23).

  복음에 있어서 비본질을 분별하는 현재의 기준은 우리의 양심 속에 있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만일 남자에게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부끄러움이 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고전 11:13)라고 분명히 말씀한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그 본성을 통해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아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고, 남자에게 긴 머리가 있어도 부끄럽지 않다는 것을 명확히 알아 예배에서 미사포를 쓰지 않는다. 머리에 대한 판단이 본성이 아닌 문화와 사회 규범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임을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사회와 문화적 차이를 배려하신 말씀의 성육신을 통해 지금도 우리에게 일하고 계신다. 

  우리는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 되는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를 추구한다(엡 4:13). 그러나 아는 것이 믿는 것에 분명히 배치되는데도 계속해서 아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과, 비본질적인 믿음을 구실로 아는 것을 지나치게 제약하는 것 모두 올바르지 않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은 자아에 대한 가스라이팅이 아닌, 자신이 가진 것으로 이웃과 세상, 그리고 교회를 섬길 때 이루어진다.

  한국교회에서 다양한 질문과 비판이 금지되는 현상은 참 선지자이시자 문제제기자의 삶을 살아 보이신 예수님의 모습, 이성과 감성을 결합해 지성적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통해 우리에게 학문과 문화를 발전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 우리의 이성적 판단과 편견을 언제라도 뛰어넘는 명령을 하실 수 있는 바람 같은 성령님의 역사를 제약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거부하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과도한 헌신 : 세상과의 분리, 계량화, 사랑의 소멸
  한편, 이러한 한국교회의 반지성주의나 가스라이팅은, 과도한 헌신이 있기에 가능하다.

  한국교회는 과도한 헌신을 요구하는 교회이다. 한국교회에서 믿음이 좋은 여부는 그 사람의 삶에서의 열매가 아닌 교회 예배 출석여부로 판가름난다. 한국교회에서 충성되이 헌신한다고 판단되는 성도는 주일 새벽 일찍이 일어나 주일 새벽 예배 이후 본예배를 드리며 봉사에 나서고, 오후에는 오후 예배 후 노방전도에 나서고, 저녁에는 저녁예배를 드리고 나서야 한숨 돌리며 집에 들어가 쉴 수 있다. 물론 교회에 따라 매일 새벽예배나 저녁예배, 수요예배나 금요예배가 기본인 교회가 많으며, 토요일에도 예배를 준비하기 위해 교회로 출근하는 이들이 많다. 그런데 이것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할 수 있는가?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로 세상 구성원들과 분리됨을 통해 세상을 품을 수 있는 능력을 손상당한다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와 자주 볼수록 세상 사람들과의 접촉 기회는 줄어든다. 당연히 세상과 공감할 기회 또한 줄어든다. 따라서 여호와께 성결한다는 이유로 최종 명령인 영혼구원을 위한 접촉과 모색에는 소홀해진다. 이러한 세상과의 분리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키우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영혼 구원과 다음세대 양성이라는 당면 과제와는 거리를 둘 수 밖에 없다. 더군다나 구원받아야 하는 성도들이 교회의 모습을 보고 교회와 거리를 두는 것은 당연해 재론할 것도 없다.

  또한 개인의 개성이 존중되지 않은 빡빡한 스케줄을 따라갈 수 있는 이는 많지 않다. 따라서 한국교회에서는 스케줄을 따라잡을 수 있는지의 여부에 따라 능력자와 비능력자가 갈린다. 교회에 충성봉사하면서도 사회에서 많은 돈을 벌며 교회에 많은 재정을 버는 사람은 하나님께 복 받은 성도로서 칭찬받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은 교회 구석에서 평신도이자 직분자로서 순종하기를 요구받는다. 이러한 교회 내 차이두기는 많은 지적에서 나타나듯이 사도 야고보의 간곡한 지적을 ‘씹어먹는’ 행동이기도 하다(약 2:2-).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교회에 참여하는 것이지, 교회에서의 인정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특히 이러한 헌신은 출석부나 헌금 현황 등을 통해 너무나 쉽게 계량화된다. 우리는 성령님을 통해 교회에서 얻어지는 열매가 어느새 교회 출석 횟수나 헌금 액수, 십일조 여부로 치환되는 매우 슬픈 시대를 살고 있다. 성령의 열매는 분명히 사랑과 희락과 화평, 오래참음, 자비와 양선, 충성, 온유와 절제인데(갈 5:22-23), 교회의 열매는 전도수, 교회 봉사 직분의 수 등 계측 가능한 헌신의 양으로만 측정된다. 교회의 직분부터 시작해서 성전헌금, 목적헌금에 헌금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다. 물론 자발적인 헌신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지만, 가스라이팅과 분위기 조성을 통한 강제적인 헌신은 교회 구성원들의 삶을 파괴하고 상처만 남길 뿐이다.

  이러한 과도한 헌신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분리할 뿐만이 아니라, 분명히 동일한 구원받은 이를 나누어 차별하는 비성경적인 행동이다. 이러한 행동의 결과, 한국교회에서 사랑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개인이 빡빡한 교회 스케줄 속을 따라가다 보니 영혼이 메말라가고, 공동체 속에서 사랑이 없어 셀 조직이 제대로 돌아가지 못한다. 한국교회에서 많은 구성원들과 구도자들이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얻지 못해 교회를 떠나가는 현상은 이제 가나안 성도라는 이름으로 구체화됐다. 길을 잃은 양들이 교회를 떠나가는 사이 교회는 변화의 요구를 분명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지나친 반 가톨릭주의와 반 은사주의
  한편 종교개혁 500주년은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의 큰 차이점을 드러내고 있다. 세계교회는 가톨릭과 개신교, 성공회가 서로 대화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어떻게라도 회복해보고자 노력하는데, 한국교회는 이를 벌리고자 노력하고 있다.

  우리는 지나친 반가톨릭주의를 가진 KJVism 등의 잘못된 교리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한국교회가 반가톨릭주의를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가톨릭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규정의 근본적인 이면에는 가톨릭에 대한 올바른 비판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더 많은 편견과 선입견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가령 전례에 보다 더 기반한 예배를 드리는 성공회와 루터회는 분명한 개신교 분류에 들어감에도 불구하고 주교가 있고, 성찬례가 중심이 된다는 점에서 한국 개신교인들이 백안시하는 면이 없잖아 있다. 

  이러한 오해는 분명히 한국교회에 의해 지정된 이단(예를 들어 KJVism과 다락방)들에 의해 보다 더 강화되었고, 일부 목회자들과 신도들은 이런 오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한국교회의 결집을 위해 외부의 적을 만들고자 하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이런 의미에서 지난 2013년 있었던 WCC 총회에 보수 개신교인들이 적극적으로 반대한 것은 이단과 손을 잡은 행위로서, 분명히 지혜롭지 못한 한국교회의 수치다.

  에큐메니컬 운동은 예수님께서 성찬례를 제정하신 직후 예수님의 죽으시기 전 하신 기도에 근거되어 있다(요 17:21-22).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교회들이 자신의 다양성을 통해 함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노력은 적극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물론 가톨릭교회의 잘못에 대한 비판과 성전에 대한 비판적인 수용은 적극적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러나 교황 프란치스코와 같은 지도자들을 마귀의 수장으로 그리거나 그들을 구원받아야 할 존재로 여기는 행위는 시정되어야 하며, 우리는 그들이 자신의 잘못과 오류를 인정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으로 돌아오도록 기도해야 한다. 아울러 이들 교회들의 지도자들 또한 이그러지기는 했으나 하나님이 허락하신 교회 공동체를 목회하는 목회자로서 인정되어야 한다.

  한편 은사주의에 대한 편견과 차별 또한 언급할 필요가 있다. 물론 소위 신사도주의 교회 중에서 극우 이데올로기와 결합된 교회가 적잖이 있으나, 교회에서 성령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교회에 대해서 일부 장로교회들이 (큰믿음교회와 같은 분명한 예외를 제외하고) 무조건적으로 이단으로 규정하는 행위는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특히 이러한 공격들은 감리회나 하나님의 성회와 같이 그리스도의 온전한 교회를 이루어온 정상적 한국교회를 공격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 왔으며, 성령 하나님의 분명한 역사를 부정하는 행위다. 분명히 존재하는 신유와 방언 등의 은사는 한국교회 내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가는 도구로서 인정되어야 한다.

과도한 권위와 이중잣대
  마지막으로 교회의 뿌리 깊은 이중잣대 문제도 짧게나마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밖에 없다. 교회 밖의 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심각하게 짚고 문제삼는 교회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추문에 대해서는 ‘은혜스럽지 못하다’며 매우 낮은 치리를 삼고 오히려 그들을 교회 속으로 다시 들여 교회 공동체에 흠집을 더하는 것은 매우 흔한일이 됐다.

  이러한 결과가 발생하는 이유는 목회자에 대한 과도한 권위와 연관되어 있다. 굳이 만인제사장론이니 현대의 목회자에 대한 다수의 비판을 이 자리에서 언급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평신도 또한 말씀을 해석할 수 있고, 그들 또한 교회를 위한 사역자로서 활동할 수 있을 가능성을 제약하는 현재의 한국교회 체계는 재고되어야 한다. 이미 장로권사호칭제 등의 대안이 실시되고 있다. 그러나 ‘부제’ 직분을 ‘집사’로 낮춰 평신도 직분자의 권위를 낮추고, 안수집사, 안수장로제도를 통해 교회에 여러개의 벽을 세우는 행위는 바람직하지 않다.


무엇이 바뀌어야 하는가

  한국교회에서 비판자들을 억누르는 주요 논리중 하나로 ‘대안 없는 비판’을 지적하는 이가 많다. 이제 위의 문제점들만을 제기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 대안을 제시함으로 한국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데 있어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해 몇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선교적 교회의 확대
  각 교회의 부르심이 있기에, 대형교회의 과도한 헌신이 무조건 틀렸다고 주장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하지 않고지 한다. 그러나 10년 이내 주류를 이룰 ‘다음세대’가 해당 교회에 들어가 쉽게 적응할 가능성은 지속적으로 적어지고 있으며, 이미 교회를 갔다 떠나간 다수의 젊은이들은 교회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교회를 적대시하고 있다. 안티개독교 주의자들이나 적극적 무신론자, 또는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 신도들에게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이제 중단되어야 한다. 

  젊은이들과 가나안 성도들을 대상으로, 그들이 교회에 가는 것을 막는 많은 헌신과 수치적 평가가 필요하지 않은, 쉼과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전파할 수 있도록 돕는 새로운 교회 공동체들이 많이 생겨날 필요가 있다. 이미 이를 위해 움직이는 사역자들을 위해 한국교회는 지지와 함께 새로운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전례의 회복
  오늘날 한국교회의 예배는 말씀전례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다. 말씀의 중요성을 거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19세기에나 생긴 매우 특수한 예배 양식을 현대에도 적용함으로서 발생하는 문제라는 사실이 감안되어야 한다. 

  기존 전례양식이 어느 정도는 회복되어야 하며, 아울러 성찬례의 회복이 시급하다. 특히 그리스도가 친히 정하신 성찬이 예배시간에서 점점 외면당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볼 수 없다. 이러한 문제는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찬양예배에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개신교회는 말씀 시간의 최소 1/4이라도 성찬 시간에 투자해야 하며, 공동성서정과(RCL)의 사용 또한 촉진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초대교회의 유산인 시간전례의 적용 또한 시도되어야 한다. 물론 시간전례가 QT 운동과 배치되는 측면이 있고, 복잡한 면이 없잖아 있다. 그러나 현재 기감에서 공식 매일기도서를 출판했고, 성공회 또한 시간전례를 적극 이용하고 있다. QT와 시간전례를 결합한 새로운 교회 공동체적 접근 또한 바람직하다.

장애인 신자에 대한 차별 철폐
  최근 장애인 신자수가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일반 교회 회중에 참여하는 장애인 신자는 많지 않으며, 감각장애인의 경우 청각장애인교회나 시각장애인교회 등으로 내몰리고 있는 실정이다. 발달장애인신자 또한 대형교회의 경우 ‘사랑부’라는 명목으로 정식 예배에 대한 접근권을 제약받고 있다. 그러나 이들을 그들만의 교회 공동체로 몰아내는 행위는 성경적 근거가 없는 폭력이다. 따라서 장애인의 의사 없이 장애인들만으로 구성된 별도 교회나 회중을 만들어 같은 진리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는 행위는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

  또한 한국교회들은 시설 운영에 앞장서 장애인들을 사회에서 분리하고, 그들의 자유를 제약하는 것에 대해 어떠한 양심적 가책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지속적으로 장애인들에게 폭력 피해를 주며, 자립성을 없애는 장애인 수용 시설과 복지관을 즉각 폐쇄하고 장애인들이 지역사회에서 자립하는데 앞장서 그들도 하나님이 명하신 십일조와 선교, 구제, 감사헌금을 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죄의 차이를 두지 말라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을 모욕하는 죄가 아닌 죄 중에서 어떤 하나가 다른 것들에 비해 더 심각하다고 말하신 적이 없다(마 12:31-2, 눅 12:10). 또한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려는 바리새인들에게 자신이 가진 죄들이 간음한 죄보다 크지 않다는 사실을 상기하셨다(요 8:1-).

  따라서 북한 인권과 이슬람 등에 대해 강조하면서, 그와 비슷하거나 더 심각한 이단, 내부 비리와 성추행, 인권침해, 교회정치적 문제를 경히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다. 어떤 한 죄에 대해서 두둔하고, 다른 죄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말고, 모든 죄에 대해서 사랑으로 품고 회개를 촉진하던가, 모든 문제에 대해서 단호하게 정죄하던가 하라. 예수님께서는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 5:37, 개정)이라고 이미 말씀하신 바가 있다.

교회의 유익과 하나님의 뜻
  최근 들어 교회의 우파 이데올로기적 유익(?)을 위해서라면 이단이나 정치 세력과도 교회가 협력하는 모습이 다수 발견된다. 앞서 말한 2013년 반 WCC 캠페인에는 한국교회에서 이단으로 판정받은 KJV 교회들과 다락방 교회가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 한국교회 구성원들이 그들과 함께 함으로 교회의 이단 판정을 불분명하게 만들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명령이 다른 유익에 우선할 수 없다. 벨리알과 예수가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고후 6:15)을 아는 사람들이, 교회의 유익(?)을 위해 심지어 일간베스트와 함께 행동하는 것은 교회에서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총회 구조의 개편
  무엇보다도 한국교회를 병들게 만든 제일 근원은 성직자와 장로만이 교회들을 다스리는 데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총회구조이다. 한국교회는 민주주의적 원칙에 의해 의사를 처리하면서, 정작 민주주의적 원칙의 근본인 대의민주주의에는 귀를 막고 있다. 현재 교회들이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말씀을 듣지 않고 이것이 누구나 순종할 수 있도록 입증되지 않는 한, 총회나 시노드 등의 참여권이 젊은이, 여성, 장애인을 포함한 다양한 교회 구성원의 대표들에게 개방되는 것이 마땅하다.

  이를 입증하는 많은 성경의 사례가 있다. 욥기에서 하나님은 엘리후를 들어 욥과 세 친구들보다 나은 지혜를 드러내게 하셨다.(욥 32~37). 예수님은 안식일에 눈먼 이를 고치시고 나서, 눈먼 이를 바리새인들의 궤변을 논박하는 도구로 사용하셨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따라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 공의회에 참여해 의견을 제시했다.

  한국교회는 이제 총대원의 대상에 평신도 대표를 추가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여성 총대(연회원)의 충분한 수가 보장되어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특히 청년‧청소년 대표를 다수 총대로 선정해 그들이 총회 표결에 참여하게 한다면, 그들의 목소리를 드러낼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총회의 공정성 또한 기할 수 있을 것이다. 연소함에도 불구하고 교회 감독(주교)으로 일한 디모데나 어릴 때부터 쓰임받은 다윗과 다니엘의 이야기는 청소년 비전을 위해 자주 언급되면서, 왜 그들이 교회에 대해 품고 있는 생각은 들으려고 하지 않는가?

사회참여와 에큐메니컬 운동, 국제 교류의 회복
  마지막으로 한국교회는 그동안 사회참여와 교회의 진보 세력에 대한 홀대를 즉각 중단하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균형을 잡아야 한다. 교회 공동체에 진보세력이 들어오는 것을 막는 다양한 장벽이 철거되어야 할 뿐만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잘못이었던 반에큐메니컬 흐름을 회개해야 한다.

  광복 후 한국교회는 수백 개의 교단으로 쪼개졌다. 이 사상 유례가 없는 교회 분리에 에큐메니컬 운동을 반대하는 세력이 주축이 되었다는 점은 한국교회의 수치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하나님과 반대되는 육체의 일로 ‘당지음과 분열’을 언급하고(갈 5:20), 육체의 일을 저지른 자들이 하나님의 유업을 얻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분열은 참된 복음을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포장되어 왔다. 우리의 회칠한 무덤을 허물고, 에큐메니컬 운동에 앞서야 한다.

  특히 이 부분에 대해서는 감리회의 잘못이 매우 크다. 지난 10년 동안 감리회는 신앙의 유산이자 신앙고백인 사회신경을 교인들에게 가르치지 않고, 교권 싸움에 앞장서며 사회와 거리를 두어 왔다. 존 웨슬리 신부(목사)는 당시 성공회가 방기하고 있던 사회적 책임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겼기에, 자신의 전도구를 벗어나 거리로 나가 그들을 위한 사역을 전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감리회는 그동안 사회운동에 대한 장로‧성결‧침례교의 우파적 이해를 그대로 수용해 왔다. 결국 사회실천과 봉사는 사회복지 분야로 축소되고, 사회를 보다 더 나은 노력으로 바꾸려는 움직임들은 평가절하돼, 가톨릭의 사회교리보다 못한 수준으로 전락했다.

  특히 기감은 광복이래 곧바로 에큐메니컬에 참여해, 에큐메니컬 운동에서 한번도 나가본 적이 없다. 그런데 최근 일부 본부급 평신도 단체들마저 WCC 탈퇴를 주창한 것은 감리회의 수치다. 이러한 억지춘향식 주장은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 오히려 감리회는 웨슬리안 전통과 알미니안 전통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교회 내의 진보적 기독교 이해를 가지고 있는 교역자들과 평신도들이 하나님 나라와 이 땅과 세계를 일해 일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국제적 교류가 보다 더 확장되어야 한다. 선교를 위한 교단간 교류나 특정 대형교단간의 뻔한 교류보다는, 도움이 필요한 세계의 교회와 선교단체를 위해 손을 뻗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선교는 이제 그 지역 주민들에게 상처를 주는 지경에 이르렀다. 개별 교단 선교부는 한국교회의 복사판을 전 세계에 만드는 것이 선교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것을 인식하고, 각자의 문화와 사회에 맞는 성육신화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가 무엇인지 고민하고 실천해 나가야 할 것이다. 1984년 서약한 10만 선교사를 다 내보내지 못할 것이 뻔하다면 제대로 된 선교라도 하자.


마지막으로
오늘의 글이 금과옥조인 것이 아니며, 개인의 제안일 뿐이 아니고, 더군다나 다른 이들에게 밟힐 소금처럼 평가될 것이라는 것은 이미 각오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기를 위해, 모든 이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한국교회에는 개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거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루터가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라고 지적했던 것처럼. 한국 교회는 이제 새로운 개혁의 길을 걸으며 하나님을 모든 사람에게 전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얻은 새 생명과 기쁨은 더 이상 더 많은 한국인에게 전달될 수 없고, 우리는 썩은 소금이 되어 한국 사회의 새로운 차별의 대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세대에게 그 책임을 더 이상 떠넘기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회개하고 우리 자신을 새롭게 하자. 우리가 돌이키지 않는 한, 우리에게 남아있는 시간은 더 이상 많지 않다. 하나님의 재림과 달란트를 낭비한 자에게 내려지는 형벌만 더욱 가까워질 것이다.


2017. 10. 31.
종교개혁 제 500주년을 맞아 아픔과 감사를 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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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1 23:51

관서지방 여행을 위한 충실한 읽을거리, <리얼 오사카 교토 ( 쿄토 )>



1. 여행 안내서 시장은 포화상태다. 이미 엔조이나 Just Go, 심지어 같은 다양한 안내서들이 시장에 깔려 있다. 더군다나 여행 정보를 여행 안내서보다는 인터넷 검색으로 알아보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있다. 특히 일본 여행안내서는 나와 같은 중급 이상, 목적지향적 일본 여행자들은 어느 정도 일본어를 알고 있으니,  차라리 인터넷 자료를 찾는게 나을 지경이다.


2. 그런데 기대를 깨고 오랜만에 일본 여행을 제대로 다룬 여행서가 등장했다. 바로 <리얼 오사카 교토>다. 한빛출판네트워크가 고민 끝에 내놓은 이 책, 의외로 볼만하다.


  우선 페이지 수가 732페이지에 달한다. 책이 너무 두꺼워서 2쇄부터는 분책을 했을 정도로 많은 정보다. 그런데 18,000원밖에 안 한다! 가성비가 최고인 것은 두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 정도면 국내에서 지금까지 나온 여행서 중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담고 있다. 보통 국내 여행 안내서는 300~400페이지, 많더라도 500페이지를 넘지 않고 있다. 짧은 페이지 안에서 일본 출국부터 입국까지를 다뤄야 하니 일반인들이 다니기에 중요한 내용만 담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리얼 오사카 쿄토>는 다르다. 키노사키 온천이나 아마노하시다테, 심지어 번외편으로 와카야마까지 내용을 다 담아낼수 있을 정도다.

   내용 또한 일본 여행경험이 다수 있는 본인으로서도 내용이 잘 만들어졌다고 보일 정도로 검수가 잘 되어 있고, 중요 내용만을 보고 싶은 사람부터 시작해서 자세한 정보를 찾고 싶은 사람들까지 어느 정도 만족할 수 있는 내용이다. 물론 좀 세부로 들어가면 더 제대로 다루어졌으면 하는 부분도 보이기도 한다(토롯코 사가역이 없다던가 쿄토철도박물관이 없다던가 애니메이트/멜론북스/나침반이 같이 들어가 있는 건물을 애니메이트만 적어뒀다던가, 라운드원이 없다던가 등등). 하지만 여행서적을 만들어 본 적이 없는 곳에서, 굳이 경쟁 서적이 가장 많은 관서지방을 이렇게까지 다룰 정도로 자세하게 초중급 여행자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모두 적어두었다는 점은 칭찬할 만하다.

보통의 여행서보다도 두 배 두꺼운 내용을 가지고 있다. 


   다음으로 좋은 평가를 내리고 싶은 것이 한국 출판계의 재앙인 표준표기를 일부나마 벗어나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국가에서 정한 외래어표기법은 특히 일본어 표기에 있어서 최악인데, 칸사이(관서)가 간사이로 표기되고, 큐-슈-가 규슈로 잘못 표기된 것을 보고 있자면 (생각해보니 외래어 표기법을 제대로 따르자면 구수가 정확하지 않나?) 정말 마음이 답답할 지경이다. 그런데 이번에 <리얼 오사카 쿄토>는 텐노지나 카츠동, 심지어 항상 논란이 되는 금각사(킨가쿠지)나 은각사(긴가쿠지) 등의 표기까지 표준어 표기가 아닌 통용표기를 채택했다. 물론 간사이, 교토, 고베(모두 어두가 ㅋ인 것이 옳다)같이 줄곧 사용되던 표기까지 바꾸지 못한 점은 아쉽기는 하지만, 이들 표기는 현재 일반인들이 가장 많이 알고 있고 사용하고 있는 내용이니 만큼, 제대로 된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3-4일 정도 단기 일정을 다녀오는 관광객들을 위해 to-do list와 일정표를 여행서 표지에 올려 놨다. 이 또한 다른 여행사에서 다루지 않고 있는 좋은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여행책의 내용은 의외로 3단계로 나뉘는 만큼, 책을 두 권이 아니라 세 권으로 분권하거나, 1부와 3부를 1권, 나머지 세부 내용을 2권으로 나눠 분권하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리얼 오사카 토쿄>는 사실 한빛라이프가 새롭게 보여줄 시도의 1탄에 지나지 않는다. 앞으로도 <리얼 상하이> 등의 후속작들이 차례차례 준비되고 있다. 일반적인 오사카 관광을 주로 다루고 있는 있는 책이라는 점이 약간 아쉽기는 하지만, 가성비 최고, 그리고 깊게 살펴보기 위한 책이라는 점에는 손색이 없다. 현재 후속작들은 일본 이외의 지역들을 주로 다루고 있는데, <리얼 토쿄> <리얼 홋카이도> <리얼 큐슈>등의 후속작등도 나와서 일본 여행 전체를 개괄할 수 있는 여행서 시리즈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리얼 오사카 교토 PLUS 고베 나라 (분리형 가이드북) - 10점
황성민.정현미 지음/한빛라이프

(이 글은 한빛출판네트워크 한빛리더스…가 아닌 한빛라이프 '나는 리뷰어다!' 2017년 3-4월 이벤트의 협력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리뷰 작성과 이해에 도움이 되도록 한빛리더스 오프모임을 열어주신 한빛미디어 송관 차장님 이하 한빛라이프의 직원 여러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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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09 17:32

<일반의지 2.0>과 엔하계 위키, 그리고 친목사회


일반의지 2.0 - 8점
아즈마 히로키 지음, 안천 옮김/현실문화


단 해명부터 해두자. 나는 아즈마 히로키의 논의 그 자체에 대해서는 좋아한다. 그가 정리한 내용의 흐름, 그러니까 자신의 주장을 이끌어 내는 방식에 대해서는 좋아한다. 하지만 그가 주장하는 바는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자세히 살펴보고 있다보니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전에도 아즈마 히로키의 논의에 대해 크게 비판했는데, 이번에도 비판할 수 밖에 없다. 미리 양해를 구해둔다.

   엔하계 위키 이야기를 하기 위해 아즈마 히로키의 <일반의지 2.0>부터 다루고자 하는 이유는, <일반의지 2.0>이라는 개념이 가장 현실적으로 실현되고 있는 장소가 바로 한국 남성들이 주도하는 커뮤니티, 그리고 그 안에서의 커뮤니케이션 방식과 닮았기 때문이다. <일반의지 2.0>은 한국 사회의 무친목사회의 개념이 정확하게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그리고 그 방식이 왜 틀렸는지를 쉽게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좋은 도구다. 즉, <일반의지 2.0>을 통해 아즈마 히로키가 다룬 제안은 한국 사회와 엔하계 위키라는 -'다른' 것을 넘어 '틀렸다'고 판단하고 말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를 정도로 명확한 - 반례에 마주친다.

문제 1 : 일반의지의 조작가능성

<일반의지 2.0>의 한국어판이 출간되고(2012. 7. 10) 정확하게 다섯달이 지난 2012년 12월 11일부터, 한국 국민들은 당장 '일반의지'(General Will)의 무용성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당시 서울의 모 오피스텔에 머물러 있던 故 김하영 회사 직원(지금은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故라는 표기를 썼다)은 대선에 대입하기 위해 댓글을 달고 있던 중 갑자기 저녁에 들이친 민주통합당 의원들과 경찰들에 의해 적발당했다. 그러나 김씨는 자신이 소속된 심리정보국의 지시를 받고 해당 사실을 은폐했고, 대선이 치뤄진 이후 지속적으로 이뤄진 검찰과 대안언론 뉴스타파, JTBC의 조사가 있고 나서야 사실이 밝혀졌다.

   김씨를 포함한 여러 국정원 요원, 그리고 외부 조력자들은 국정원 상부의 지시에 따라 내부 비용으로 박근혜를 지지하고 문재인 당시 후보를 비난하는 댓글을 트위터와 뽐뿌, 보배드림, 일베 등의 SNS와 커뮤니티 게시판에 다중계정을 통해 다량으로 올렸으며, 이러한 사실이 빅데이터 회사들에 의해 밝혀지자 즉각적으로 해당 내용을 삭제하는 등 증거조작도 서슴지 않았다(물론 명품타임라인 윤정훈 목사의 십자가 알바단과 같이 당시 새누리당 내부에서 일어난 조작 움직임이나, 사이버군의 군기문란과는 별개의 움직임이었다). 즉 현재 박근혜 대통령은 당시 이명박 정부의 행정부와 입법부 일부가 결합해 만들어 낸 일방향적인 의견 조작에 의해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을 밝혀내는 즉시 박근혜 대통령은 수사에 임한 윤석렬 검사를 좌천시키고, 채동욱 전 검찰총장은 사적 사건을 드러내 결국 퇴임시켰다. 그리고 박근혜는 퇴임하지 않았다.

   이후 박근혜 대통령은 줄곧 여론의 조작을 지속적으로 꾀하고, 자신의 사익을 추구했다. 박근혜 정부는 최순실과 전 김기춘 비서실장의 조언에 의해 2014년부터 문화계, 스포츠계 등 각종 정부지원금 사업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의 목록인 블랙리스트를 만들었으며, 이에 반발하는 유진룡 전 장관을 해임해, 심사결과와 무관하게 이들을 지원결과에서 제거하고, 이를 통해 '종북좌파'의 돈줄을 끊었다. 동시에 박근혜 정부는 이명박 정부에 이어 이른바 '종북좌파'로 불리는 환경운동연합, 참여연대 등의 사회단체에는 지원을 끊고, 반대로 아무런 사회공헌 없이 박근혜 정권에 유익한 목소리를 내놓은 어버이연합, 미디어워치 등의 여론조작 기관에는 전경련 등을 통해 재정을 우회지원했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의도적으로 만든 것이다.

   그 결과 최순실의 국정농단은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의 생성 및 정부와 기업에서의 예산 뜯어내기로 이어졌고, 결국 이러한 사실들이 폭로되면서 작년 12월 9월에서야 박근혜는 탄핵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이라는 이승만의 자유당이나 일본 자유민주당을 연상케 하는 아연실색한 이름으로 당명을 바꾸고, 이미 보도된 바와 같이 행정부의 수반인 황교안 대행은 자유총연맹에 돈을 지원하면서 3월 1일에 100만명의 시민을 반대집회에 동원하도록 지시해 이러한 공론장 왜곡을 꾀하고 있다.

   그렇다면, 애초에 공론장이 정부에 의해 조작될 수 있는데, 일반의지가 정상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아즈마 히로키는 <일반의지 2.0>에서 이러한 공론장이 트위터 등의 SNS에 의해 오롯이 존재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애초에 원래의 데이터베이스의 조작 및 개입 가능성이 농후하고, 그러한 의견들을 나머지 개인의 의견과 분리해 볼 수 있는 방법론이 없는 한, SNS를 통한 일반의지의 형성은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당장 아즈마 히로키가 의지하는 댓글의 결과물 자체가 한국에서는 정부나 정당이 운영하는 댓글부대, 망○지, 장○ 냉면 등의 사이비 집단, 박사모를 포함한 '적극적 의사표현집단'들에 의해 왜곡될 가능성이 높고, 그런 사례가 한국에서 수도 없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상기하고자 한다.

이게 나라냐? (출처 : 연합뉴스)


   이러한 의문을 품을 수 밖에 없게 하는 또 다른 곳이 북괴일 것이다. 북괴는 자신들이 민주주의 국가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소위 민주주의적 투표를 한다. 하지만 실제로 투표로 발표되는 결과는 98%, 99% 이상의 찬성결과다. 즉 해외에 나가 투표할 수 없는 사람을 제외한 숫자 전부가 로동당이 제시한 단일후보에 찬성투표를 한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나오는 슬로건이 '모두 다 찬성투표하자!'다. 그런 투표를 통해서 '일반의지'가 형성되었으므로 김정일 김정은의 독재체제가 합법적으로 형성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객관적으로 보면 불가능하다.

   이와 같이, 실제의 일반의지와 다른 가시적인 '일반의지'가 정부나 다른 조직에 의해 형성될 가능성이 농후하고, 그러한 의지가 실제 통치기반을 지지해주는 것처럼 보일 가능성이 많다. 따라서 기존 일반의지와 다르게 나오로록 유도된 '일반의지'에 대해 다른 이름을 붙여 루소와 아즈마가 주장하고자 하는 일반의지와 구분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는 일단 의사일반의지(Pseudo General Will)라는 이름을 붙여보자.

   박근혜 정권이나 북괴정권이 만들어낸 '일반의지'를 구분해서 원래 일반의지와 구별해 본다면, 이해는 간단해진다. 박근혜 정권이 강변하거나, 유지하거나, 실제 국민의 뜻이라고 대변한 의사일반의지는 대한민국 국민의 일반의지와 충돌하거나, 상반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다면 의사일반의지에 의해 생성된 정책 결과나, 아즈마 히로키가 그토록 비판한 '숙의민주주의'에 의해 생성된 결과나 동일하게 일반적으로 편향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일반의지 2.0>이 제시한 개념은 일반의지에 의사일반의지가 결합된 왜곡된 결과를 낳을 수 밖에 없는것으로서, 오히려 일반 절차에 비해 더 많은 빈도로 왜곡된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인데, 이 개념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다.

문제 2: 구성원의 자격

<일반의지 2.0>에 따르면, 일반의지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항상 개인간의 의견 토론이나 의견 조정, 정당이나 결사와 같이 개인의 자발적인 의견을 훼손할 수 있는 내용(아즈마, 2012:52)은 배제되어야 하며, 정부는 일반의지를 즉각적으로 수집할 수 있도록 구성해(p. 39), 개인의지를 합친 결과물인 전체의지를 제대로 분석해 백터값을 제대로 계산해내고(pp. 46-7), 그 결과물인, '항상 옳고 공공의 이익을 향하고 있는'(p. 44. 루소의 말에서 재인용) 일반의지를 즉각적으로 실행해낼 수 있는 '중간단체'(p. 39)로서만 기능해야 한다.

   그런데 일반의지의 구현을 위해서 루소가 또 하나 더 강조한 것이 있다. 루소는 '공동선'을 이루기 위해 동질한 집단의 연합인 사회를 구성하기 위한(오근창, 2013:74) 필수적인 수단이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봤다. 첫째로 시민이 '공공선'을 인지하기 위해서 입법자가 입법 전에 '사회적 정신'을 양성시켜 공동체에 들어오거나 그 안에서 태어난 인간이 공동체의 일반의지를 준수하도록 만드는 것이다(:77). 둘째로, 이를 위해, 공동체를 애국심, 또는 '사회성의 감정'에 기반해 사랑하도록 만들기 위한(:79) 문화자본-사회자본을 구성하기 위해, 시민종교를 지정하고, 모든 공동체가 같은 종교 아래에서 '조국'을 사랑하도록 제안한다(:80).

   그렇다면 공동체의 일반의지는 항상 타당하다는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는, 공동체에 새로 들어오거나 공동체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공동체의 일반의지를 드러내기에 적절한 인성이나 품성을 갖추지 않았을 때, 이를 교정하거나, 그들을 공동체나 공동체의 의사결정과정에서 내쫓아내면 된다는 결론이 쉽게 도출된다. 간단히 말해 일반의지는 일반적으로 동질적이거나 일원화된 사회에서라야 정상적으로 작동된다는 의미기도 하다. 세계화의 여파로 다원화, 다문화로 구성되어가고 있는 현재의 사회에는 적절하지 않은 방식인 셈이기도 하다.

현재는 당연하게 여기는 여성 투표, 아무렇게나 이뤄진 결과가 아니다.(Voice of America, PD)


   어쨌거나, 유일종교 형성을 위한 타종교 탄압이나 민주주의 탄압(은 이미 심각한 인권침해라는 사실이 자명하지만)을 통해 이런 절차를 충실히 거쳐 국민의 일반의지를 파악할 수 있는 단계에 도착한다고 치자. 그렇게 형성된 일반의지는 유지될 수 있는가. '집단'의 일관성이 항상 유지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집단의 일관성은 언제나 도전받으며, 더군다나 역사의 진행에 따른 결과물은 집단의 의사결정 참여권과 중요한 역할을 가진 사람의 수가 시간이 지날 수록 늘어나는 일관적인 현상을 보여왔다. 이미 인류는 흑인과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받기 위해 많은 피와 시간을 소비했고, 그 결과 현대 사회는 여성이나 흑인들의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이들의 일반의지와 기존의 '일반의지'가 충돌할 때, 단순히 이들이 합쳐진다는 것만으로, 올바른 '일반의지'가 측정될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은 우리가 이미 경험하고 있다. 핫한 이슈들을 제외하고 나서더라도, 우리는 장애인이나 노인이 일반 남성들과 동일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러한 상황을 느끼고, 살아나가고 있다. 심지어 개방된 믿음-사랑 공동체라는 개신교 교회라도, 가톨릭 교회라도, 어느 상가라도, 모든 공동체에서 발언권의 정도가 동일한 곳은 아무 곳도 없다. 어디선가는 자신의 발언의 권한이 깎여져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다. '적법한' 모든 사람들이(여기에서 어린이나 범죄자는 일단 빼 주도록 하자) 자신의 배경에 의해 발언권이나 의결권을 제한당한다면, 그리고 누군가에 의해서 언제라도 그 의결권이 제한당할 우려가 있다면, 그 사람들이 빠져 있는 상태에서 이뤄지는 정치행위는 정당한가. 여기에 하나 더해, 최근 다문화 사회 문제로 발생하는, 공동체 속으로 들어오는 외국인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문제 3: 파당이 없더라도, 차이는 존재한다

셋째로 살펴봐야 할 점은, 루소가 '일반의지'의 활성화 요건의 하나로, 파당이나 사전담론 구성의 금지, 더 정확하게는 '시민 상호간에 어떤 소통도 없는 상태'(오근창, 2013:72, 사회계약론 :371-372에서 재인용)를 명시했다는 점이다. 이 주장을 그대로 실현하기 위해 파당이나 사전담론 구성을 금지한 가장 효율적인 사례가, 조지 오웰의 <1984>의 국가 IngSoc이 나타내는 공통의 비판 대상과 강력한 숙청이나, 그 곳의 현실판인 북괴에서 나타내는 상호비판과 수용소 제도라는 사실만을 살펴도 분명한 바, '부분적 사회'(Partial society, ibid.)를 없애기 위한 노력은 결국 인간 본성과 인권에 대한 침범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할 수 밖에 없다. 즉 일반의지가 생기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전적 조건은, 사실 이성적 판단을 빌미로 한 비인간성이다.

   그렇지 않고, 이성적 판단이나 대화가 존재한다면, 과연 그 안에서 어떤 결과가 발생하는가. 루소가 비판하는 특수의지가 자연적으로 생겨난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아즈마 히로키가 희망을 걸고 의지하는 트위터 등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가 한국에서 어떻게 발전되었는지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물론 라운지를 갖췄던 플레이톡이라는 반례를 여기에서 무시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관리자에 의한 종국을 생각하면, 이렇게 형성된 일반의지가 언제라도 파괴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2009년 트위터 붐이 시작된 이후 2011년까지, 트위터는 하나의 공론장으로 인식됐다. 생각해 보면 이런 결과는 플레이톡 사건 이후 사용자들이 트위터로 나오면서 강화되기까지 했다. 그 당시를 떠올려보면 모르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쉽게 만날 수 있거나 친해질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모든 사람들이 이 공산을 소통의 공간으로 생각하고 대화를 이어 나갔으니, 당연히 사회적 공론장의 기능을 충분히 소화할 수 있을 줄로 생각했다. 하지만 201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이런 모습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 확실한 증거가 이찬진 전 한글과컴퓨터 사장이 개발한 서비스 twtkr과 다양한 당 활동을 트위터를 통해 제공했던 twtmt의 몰락이다. 여기까지만 읽고 보면 트위터라는 공론장이 특수의지를 배척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고, 일반의지를 형성해주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미 2010년도부터 일반적 공론장보다는 더욱 세부화된 특수공론장의 존재가 그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그것이 보여주는 것이 TL계다. 타임라인이라는 단어를 차지한 TL계, 또는 '애니프사'로 불리는 주로 10-20대 남성들의 그룹이 2010년도 초부터 생겨나기 시작했다(참고로 이들의 타임라인을 수집해 볼 목적으로 @e1if를 저자가 만든 시점이 2010년 6월이다). 물론 그 당시 기존 트위터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있었지만, 이들이 동시 시점에 트위터에서 나눴던 담론의 내용은 기존의 한국 트위터 사용자들과는 달리, 주로 만화-애니메이션 동호문화나 리듬게임 등의 내용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타임라인 내용은 기존의 담론과 다른 특수의지의 발현일 수 밖에 없었다. 이 시기에 생겨난 기타 당들도 별도의 해시태그를 달고 트위터 안에서 결과적으로 또래별 움직임과 같이 분리된 집단을 형성했다는 점에 유의하자.

   이 글이 한국 트위터사를 쓰려는 목적이 아니므로 짧게 더 언급하자면, 이후 2013~4년부터 그 대척점에 여성 코스어를 포함한 여성 만화-애니메이션 동호인들, 대중문화 팬덤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 또한 자신들의 선호에 따라 자신들의 친구가 될 사람들을 선택했으며, 특히 기존 TL러들이 구축해 사용하던 봇 기능을 캐릭터를 이입시키는 새로운 방식으로 전환했다(이 과정에서 수동봇 기능에 대한 남TL-여TL간 설전이 있기도 했다). 그 결과 이들 또한 트위터에서 새로은 비가시적인 사용자그룹으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모습이 한국에서만 발생한 특수사례일까? 그렇지 않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일본의 코스어나 철도동호인들도 이미 나름대로의 비가시적 유저 그룹을 형성하고 있고, 이들의 대화 내용 또한 일반인들의 그것과는 분리되어 있다.

여TL과 남TL 모두를 정치 장(field)에 끌고 들어온 김용익 전 의원의 공로를 무시할 수 없다. (출처:twitter.com)


   그렇다면 이 사례를 다시 우리가 검토할 주장에 비추어 살펴보도록 하자. 아즈마의 <일반의지 2.0>의 가능성은, SNS, 특히 트위터의 '비분할된 하나의 공론장'을 형성하고, 이를 통해 '모두'의 '일반의지'를 즉각적으로 수렴할 수 있다는 기능을 바탕으로 제안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 트위터만 해도 하나의 '공개되어 있는 언어별 언론에 의한 공론장'은 나이와 성별, 문화자본이나 사회자본, 정치적 성향, 종교 등의 비가시적인 구성요소들에 의해 잘게 조개져 있다. 이런 상태에서 단순히 트위터를 일반의지를 형성할 수 있는 통로로 보기에는 큰 무리가 있다. 당장 트위터만 해도 공개적인 라운지가 아닌 사용자에 의한 폴로잉에 의해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그 과정에서 네트워크 바깥의 정보를 공식적으로 수집하는 데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점들이 더욱 심화된 장소가 페이스북이나 카카오스토리 등의 폐쇄적인 SNS다. 많은 소셜미디어 업계인들은 카카오스토리를 주로 20대 후반 ~ 30대 어머니들의 소통 공간으로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카카오스토리를 젊은 주부들에게 마케팅하기 위한 공간으로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 한켠에는 코스어들이나 만화-애니메이션 동호인 등이 상당수 있다. 이들의 소통 내용 또한 젊은 주부의 그것과 전혀 다르고, 더군다나 이들의 네트워크들은 결과적으로 몇몇의 소수 링크를 제외하면 메인스트림과 분리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들 SNS에서는 <일반의지>가 여러 개가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가? 일반의지가 전체 담론을 수용하는 공론장 개념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이들 네트워크에서는 특수의지들만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해 준다.

   또한 SNS와 같이 자발적인 서비스에서는 한국 국민이나 일본 국민과 같이 일정 사회 구성원의 일반의지를 수집하고자 하는 시도에도 무리가 있다. 우선 폴로잉이나 이를 차단하는 것은 사용자의 자유이므로 하나의 계정이 모든 계정을 폴로잉하는 것을 수락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즉, 일반의지 구성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또한 같은 언어권에 있고 타자의 언어를 이해하고 표출하기에 큰 어려움이 없지만, 집단의지를 구성하기에 적정하지 않은 구성원들이 해당 일반의지 구성을 위한 단계에 끼어들 수 있다. 또한 인터넷 사용이 어려운 어르신, 신체 장애인(정신/발달장애의 문제는 여기서 잠시 미뤄두도록 하자) 등의 정보취약계층은 당연히 SNS에서 다른 일반인과 동일한 만큼의 의사표현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SNS를 포함한 네트워킹 서비스는 특수의지들을 더욱 극명히 드러내는 역할을 할 뿐, 특수의지들 속에서 일반의지를 드러내는데 기여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반론 : 통계학적 관점에서?

그러나 다음과 같은 반론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아즈키 히로마는 루소가 벡터 개념을 이용해 의견을 수학적으로 도출할 수 있는 상태를 예측했으며, <일반의지>가 수학적인 존재이자 사물적인 존재로서 존재한다고 봤다(아즈마 히로키, 2013:). 즉 일반의지의 구성은 자신의 내용만을 피력할 수 있는 충분한 물리적 조치가 이뤄진다면 충분히 성립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주장하는 집단들의 차이가 실제로 파당으로는 나타나지 않은 상태이므로, 이들의 차이는 일반의지를 나타내는 데 무리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충분히 이러한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통계학에 따르면 모집단의 수가 많아질 수록, 실제 결과와의 오차는 크게 줄어든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의 일반의지가 구축될 수 없는 상황에 있다고 하더라도,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모아 구축한 일반의지라면 실제 일반의지와의 차이가 적지 않겠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답하고 싶다. 우선 SNS가 구축한 모집단이 한국인이나 일본인 등의 국민 일반을 대표하는 집단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하물며 1000명짜리 설문조사라도 국가 국민의 인구 구성비율에 맞춰 최대한 가깝게 구성해서 설문을 진행한다. 심지어 모든 사람이 응답할 수 없는 모집단인 RDD(무작위 전화방식)로 전화를 걸더라도 전화를 받은 설문 대상자가 미리 설정된 해당 나이대나 연령대에 배정된 사람 수를 넘어선다면 그 사람에게서는 설문을 받지 않는다. 그런 물리적인 모집단 구축이 SNS에서는 가능할까? SNS에서는 계정 뒤에 있는 사람의 개인정보를 셀러브리티가 아닌 이상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들다. 나이나 연령도, 라이프스타일도 글재주와 문화자본이 있다면야 넷카마(ネカマ) 같이 쉽게 속일 수 있다. 그렇다면 트위터라는 모집단에서 추출한 사람들이 실제 한국 국민이나 일본 국민의 일반의지와 유사한 결과에서 얼마나 큰 오차범위를 가질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아마 생각보다 더 많은 오차가 발생할 가능성을 더욱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마땅하리라.

   따라서 우리는 인터넷 상에서 형성되는 의견이 완전한 인간이나 해당 국가, 사회 구성원의 전체 의지를 항상 대변할 수 없고, 한 사람이 다수의 내용에서 습득할 수 있는 내용은 그 사람이 속해 있는 네트워크에 따라 달라지므로, 이 네트워크에서 습득한 <일반의지>는 사실 국가-지역 공동체, 또는 어중의 일부로 구성된 '파당'에서만 모을 수 있는 내용을 모은, 이른바 유사일반의지에 가까울 수 밖에 없다는 추론을 도출할 수 있다. 이 추론의 이론적 정합성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다른 분들이 논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제 유사일반의지가 '파당'속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엔하계 위키 사례를 통해 살펴보도록 하자.

무엇이 일어났는가

티셔츠 한장의 힘. (출처: tumblbug.com)


나 같은 ‘한남충’ ‘개저씨’의 눈으로 봐도 너무들 한다. 이제야 메갈리안의 행태가 이해가 될 정도다. 듣자 하니 이들이 자기와 견해가 다른 웹툰 작가들의 살생부까지 만들어 돌렸단다. 그 살생부에 아직 자리가 남아 있으면 내 이름도 넣어주기 바란다. 메갈리안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 빌어먹을 상황은 나로 하여금 그 비열한 자들의 집단을 향해 이렇게 외치게 만든다. “나도 메갈리안이다.”
- 진중권(2016년 7월 27일), 매일신문, '나도 메갈리안이다'

진중권 교수가 이렇게까지 말하게 한 '집단'은 사회 집단이 아니었다. 그들은 서로 얼굴도 모르고, 그곳에서 만나는 다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활동을 하는지에 대한 관심도 없다. 그러나 이들은 사회에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한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소비자'의 힘으로 이를 밀어붙였다. 나중에는 해외에도 존재하지 않는 '성평등주의'라는 개인연구의 결과물이 실존하는 학술 개념인 것처럼 문서를 작성하고, 모두가 실존하는 개념으로 인식하도록 하는 위키얼리티(Wikiality : 위키에 글을 올려 '현실'을 수정하고자 하는 반달리즘) 행위를 저지르기까지 했다. 바로 익명의 나무위키 편집자들이다. 어쩌다 집단지성 위키 편집자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폭력을 가하는데까지 이르게 됐나.

   이 사건은 클로저스의 신 캐릭 '티나'에서 목소리 성우로 활동하게 된 김자연 성우(이후 '김자연'이라고 칭한다)가 2016년 7월 '메갈리안4'를 위한 텀블벅 펀딩 결과물인 'Girls do not need a prince' 티셔츠를 찍은 사진을 올린 작은 행동에서 시작됐다. 당시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남성들의 부당한 분노가 형성된 상황에서, 이 '작은 행동'에 분개한, '남성옹호론'을 가진 편집자들은 이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목록을 근거를 붙여 나무위키에 목록으로 남겼다. 그 자체로는 일상생활 사회에서 영향을 끼칠 수 없을 법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지속적으로 트위터나 페이스북으로 김자연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목록화한 결과는 처참했다. 이 리스트에 올려진 상당수가 계약 해지를 당하고, 작가나 제작자들에게는 환불 사례가 이어지는 등 물질적인 손해가 이어졌다. 

   문제는 이러한 물리적인 피해가 단순히 만화-애니메이션 문화 뿐만이 아니라, TRPG 같이 논리적으로는 관계가 없어보이는 문화구성원, 심지어 시사iN이라는 공식적인 언론 매체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물론 소비자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콘텐츠 구매를 취소하거나 거절하는 등의 다양한 소비자 권리를 행사할 능력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의지와 반한다는 이유로 타인의 표현의 자유를 훼손할 정도까지 압박을 주는, 폭력을 행사할 규모의 '권리행사'는 곧 정당하지 않은 폭력이 되기 마련이다. 또한 이러한 폭력은 다른 사람에 대한 차별 행위이기도 하다. 장애인에게 동일한 수준의 차별이 이어졌다면 곧바로 장애인차별법에 의해 처벌받았을 분명한 차별행위였다.

   이런 결과는 현재까지 나무위키에서 일으킨 가장 큰 지적 사기 사건인 성평등주의 사건이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성평등주의 날조사건은 김자연 성우 사이버 폭력 사건이 진정되어 가던 2016년 8월 2일, 한 나무위키 편집자가 성평등주의라는 문서를 작성한 것으로 시작된다. 이 문서에 대해서는 대학원생 연구자나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했으나, 이러한 문제제기는 어김없이 막혀졌다. 결국 이 사건은 한 페미위키 사용자가 반대근거를 정당하게 제시하고 나서야 날조사건으로 정리되었으나, 해당 문제를 제기한 사용자는 괴씸죄로 차단되기에 이른다.

   우리는 이들의 모습을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서도 본다. 박근혜 대통령을 찬성하는 시위를 하는 사람들이 세월호 뱃지를 단 사람이나, 자신들의 입장을 보도해 온 MBC를 제외한 언론기자들에게 적대감을 보내는 일은 이제 익숙할 지경이다. 심지어 우리는 2017년 3월 10일 탄핵 가결과 함께 지지자들이 기자들의 카메라를 빼앗아 가고, 육중한 철사다리로 그들을 타격하며, 심지어 (기존의 '좌빨' 시위자들도 감히 시도하지 않았던 결과인) 경찰차를 빼앗아 폴리스라인을 파괴하고, 그 사이로 쳐들어가는 '폭동'을 목격했다. 이들의 모습과 엔하위키 사용자, 또는 '남성 누리꾼'들의 폭력성은 단지 자신의 주장을 실현하기 위한 폭력이 결과적으로 성공해 효력을 끼쳤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만 다를 뿐이지 사실 큰 차이가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2017:01:06 23:45:40

(출처: nocutilbe.com)


의사일반의지의 작동방식 : 동일성, 억압/폭력, 배제/학습-체념

   의사일반의지가 어떻게 엔하계 위키에서 형성돼 자리잡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나무위키나 엔하위키의 토론장 안에서 흘러가는 모습들을 찾아보면 금새 이해할 수 있다. 우선 그룹 안에서 헤게모니를 잡은 사람들이 자신의 헤게모니와 반대되는 사람들이 제시하는 의견을 무시하거나 지속적으로 반박한다. 이 단계에서 이들은 인신공격을 일삼고, 절대로 자신의 주장과 반대되는 것이 사실이거나, 자신의 주장과 반대되는 사실이 존재할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즉 자신의 주장의 근거와 반대되는 신뢰할 수 있는 증거들이 존재하더라도 그들 근거의 가치를 얕잡고 무조건적으로 부정한다. 물론 그러한 것들을 부정할 수 밖에 없는 합리적인 반례가 등장하면 해당 내용을 일반적인 것이 아닌 '일부'의 사례라고 몰아세운다. 그리고는 자신의 논리가 코너로 몰리더라도 자신을 구원해줄 다른 사용자가 등장해 주리라고 믿는다. 물론 그 믿음에 따라 엔하계 위키에서는 다른 사용자가 금새 등장한다. 

   다른 사용자들과 함께 합세하면 이성적 논의에 대한 이성을 가장한 '유사감성'적이거나 반이성적인 주장의 표면적 신뢰성은 배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용자가 해당 주장을 지속적으로 반박하면 이제 할 일은 그 사람을 다양한 죄명을 붙여 차단을 신청하는 일이다. 차단이 받아들여지면 그 사람이 다른 공동체의 사람들에게 반박을 지속할 수 없으므로, 합리적인 주장을 차단하는데 있어서 매우 효과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 이후에 계속해서 의견을 피력하려는 경우에는 영구차단을 통해 해당 담론장에서 추방해버리면 된다. 물론 자신이 '밀려서' 처벌받는 경우더라도, 자신의 잘못을 '그런 의도가 없었다'고 해명하면 그만이다. 이것이 심지어 한국어 위키백과를 포함한 대부분의 집단지성 위키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는 흐름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의사일반의지의 실현과정을 보다 학술적 개념으로 다듬어 볼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 기호학이나 응용인문학, 사회학과의 이론과 도식들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도식을 제안해보고자 한다.물론 본 글의 특성상 개인의 아이디어에 기반한 가설일 뿐이니 대안 제시와 반론은 언제라도 환영한다.

   첫째로 '동일성'단계다. 의사일반의지는, 애초에 내가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다수가 될 때 형성된다. 삼인성호라는 말이 있다. 세 사람이 같은 말을 하기만 해도 없던 사실이 생겨난다는 말인데, 이를 다른 관점에서 보면, 다른 사람들이 주장하는 내용에 동감하는 사람이 많아질 수록 해당 주장의 힘이 강해진다고 해석할 수 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어떤 주장이 많은 사람들의 동감을 얻는 과정이 주장의 진위나 이성적 합리성과 무관하게, 동일성을 구성하기 위해 필요한 능력인 일부의 공감화(Empathizing)와 다수의 체계화(Systemizing: Baron-Cohen, 2008, 2009) - 즉 체계화 주도적인 인지-의사판단에 따라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박근헤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믿는 것은,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만들어 공당의 의사결정까지 영향을 끼친 그 사람들이 믿는 그 것은, 팩트가 아닌 체계화된 지식이다. 

   또한 함께, 인간의 기본적인 능력이자, 의사소통, 친목의 기본 조건인 공감화가 한편으로 공감의 정도를 높여 다른 사람들을 환대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는 반면, 다른 편에서는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를 두기 위한 고맥락적(high-contextual) 상황을 만들어내기 위한 요소가 될수 있다는 점에 유의하고 싶다. 특히 고맥락성은 커뮤니케이션 주체가 다른 사람과 같은 경험이나 기억을 지니고 있을 것을 가정하고 있다. 즉 같은 경험을 많이 쌓은 사람들과의 관계가 발전할수록, 맥락이 쌓여나가고, 이것은 또다시 다른 사회자본이나 문화자본으로 발전한다. 문화자본의 차이가 사회 계급의 형성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브루디외가 사회학적 연구를 통해 증명해 낸 바이기도 하다.

   둘째로 '억압/폭력' 단계다. 구체적으로 억압 단계는 사람의 인지 구성 단계에서, 폭력은 해당 인지 결과에 의한 행동적 단계에서 발생하는 상호작용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 같다. 이 단계에서 해당 의사일반의지에 소속되었다고 여기는 구성원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자신의 인지 체계나 세계관, 또는 독특한 주장을 받아들이도록 비명시적이거나 명시적인 방식을 통해 설득하며, 일정기간이 지나도 설득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구성원들이 책임을 느끼게 될 경우에는, 그 정도가 심해지면 아예 물리적/심리적 억압이나, 체벌이나 집단 따돌림을 가하기 시작한다. 

   특히 억압을 받은 대상이 해당 의사일반의지를 가진 사람들 사이와 큰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거나, 그들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는 경우에는 그 공동체에 친화될 것을 요청받는 정도가 더욱 심해지게 된다. 이러한 것을 이용해 사람들을 억누르는 구체적인 사례가 소위 이단-사이비 종교나, 강제 네트워크 마케팅 업체들이다. 특히 특정 종교는 이를 매우 극대화해 활용하고 있다. 이 종교집단은 교회나 일상생활 주변의 섭외 대상자들과 관계를 형성하고, 이를 통해 결과적으로 그 종교공동체에 소속되기에 필요한 세뇌 교육과정을 교육받도록 유도하고 있는데, 이 현상은 해당 섭외대상자가 직접적으로 억압과 폭력을 느끼지는 않지만, 실제로는 집단의 힘으로 해당 대상자의 생활에 폭력을 가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러한 주장은 최병철 교수의 최신작 <타자의 추방>과 곁들여 읽을 때 보다 더 구체적이 된다. 이 책에서 최 교수는 하이데거를 인용해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가 사라지도록 강요하는 존재인 세인das Man을 소개하고, 주체가 다른 타자가 아닌 세인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지적한다(최병철, 2017:46). 특히 전제적 통치사회와 달리, 현재의 사회는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상대적 평균치와 자신과의 비교를 끊임없이 유도한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과의 동일성을 유지해야 하기 위한 '자기정체성'의 범위는 시장이나 국가가 용인할 수 있을 정도의 '시스템과 일치하는 차이'만이 허용된다는 것이다(:35). 여기에서의 '시스템'은 또한 자신이 용인할 수 없는 차이에 대해서는 그 '의지'를 지키기 위해 가차없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의사일반의지와 호환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배제/학습-체념' 단계다. 이 단계에서의 반응은 해당 대상자의 반응에 따라 두가지로 나뉜다.

   첫째로, 어떠한 설득을 해도 듣지 않는 사람들은 배제시켜버린다. 물론 그 방식은 왕따에서부터 공동체로부터의 추방, 더 나아가 사형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이미 이 단계에서 해당 의사일반의지 속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은 '추방자'들의 인권이나 존재를 고려하지 않으며, 그들을 무시하는 것이 '일반의지'의 성취를 이루는데 오히려 도움이 될 뿐만이 아니라, '추방자'들에게도 다시 생각할 기회를 주는 올바른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마저 있다. 물론 배제된 대상자 또한 일반의지 바깥으로 나오도록 내부 구성원들을 추동할 수 있지만, 동시에 그들에게 관심을 두는 것을 중단하는 것을 대안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한편, 양심의 자유보다는 눈 앞의 위협이나 생사의 갈림길 앞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하는 경우가 있다. 즉 그들의 주장이 거짓말임을 알면서도 그들의 주장을 학습하고 '받아들이는 척' 하는 것이다. 이 경우 이들은 거짓말로 해당 의사일반의지를 갖춘 집단 속에서 살아나가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결국 거짓말을 할 수 없어서 시간이 지나면 탈출 방법을 모색해 결국은 그 곳을 벗어나는 경우도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제반 사정으로 마음과 몸에 상처를 입고 그 곳의 주장에 알맞게 살아나갈 수 밖에 없는 경우가 더 많다. 결국 이들은 거짓의 왕국 속에서, 거짓말을 하며, 가끔씩 머리 속으로 진실을 되뇌이는 수밖에 없다. 거짓이 사실로 입증되지 않는 것을 보면서도 계속해서 그 거짓 속에 머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나가며

더 길어졌다가는 이 글의 원 목적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글이 너무 길어질테니, 이쯤에서 정리해 보도록 하자.

   한병철은 다른 사람과 동일하게 되도록 끊임없이 요구하는 것이 과거에는 정부와 같이 명시적인 획일성을 지시하는 외부 폭력에 의한 압력이었다면, 지금은 보이지 않는 힘인, 다른 사람과 동일하게 되는 데에서 발생하는 긍정성 - 그리고 그가 명시하지는 않지만, 이익일 것이다 - 이라고 지적한다(한병철, 2012:12, 16-17). 문제는 그 긍정성이 결과적으로 무한한 상대평가를 불러 일으키고 그럼으로서 '개인들에게 부담을 주고 개인들을 망가뜨리'게 된다는 점에 있다(한병철, 2017:53), 황푸하(2016)가 말하듯이, '우리'가 '실패에 동참하'고, '비참한 패배'를 느끼도록 하는 존재는 다른 사람이 아닌, 자아 그 자체다. 하지만, 그 자아의 정념서사 프로그램을 가동시키는 것은 '같은 것을 지속시키'ㅁ으로서 '체계적인 폭력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한병철, 2017:47), 의사일반의지다. 아니, 의사일반의지를 일반의지처럼 느끼게 만드는 폭력이다.

   예수와 스데반이 죽으면서 공통적으로 말한 말이 '저들이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올바른 말이다. 의사일반의지 속에 있는 사람들은 결국 그 사실이나 세계관, 사고구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가능성을 거의 차단당한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그 의사일반의지가 생성하는 서사구조 체계속에서 자신들의 서사구조 체계에 합당한 왜곡된 '팩트'만을 수신하고, 그 팩트들이 구성한 의사구조-앎 속에서 살아간다. 한번 형성된 세계관, 그리고 패러다임은 그 패러다임을 대체할 의지를 제공할만큼 큰 반대 자극이 없는 한, 결과적으로는 그 발동에 실패하게 된다. 그리고 폭력은 결국 희생양을 찾고, 의사일반의지 속의 사람들은 계속해서 불필요한 높은 기준에 시달리면서, 언젠가 나도 그들 속에서 희생양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가운데 살아가야만 한다.

   그렇다면, 무한의 정념서사구조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해당 서사구조에의 동참을 취소하고 새로운 서사구조로 이행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까지 인터넷 일각에서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는 친목에 대한 재가치평가가 필요하다. 친목이라는 말이 인터넷 상에서 보통 여러명이서 소규모로만 모이는 것을 가르키는 개념인 것과는 반대로, 실제의 친목은 '서로 뜻이 맞고 정다'ㅂ도록(우리말샘, CC BY-SA 2.0) 친해지는 행위를 의미한다. 레비나스는 환대를 강조하면서, 환대에 필요한 기본적인 자질이 자아에 대한 부인이라고 지적한다. 자신의 주장만을 반복할 때, 폭력은 오히려 정당화된다.

   그러므로 친목, 또는 화목은 '자아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행위를 통해 달성된다. 서로 다른 사람이라도 뜻을 맞추거나, 그 사이에서 최소한의 합의를 찾아나가기 위해서는, 당연히 자신의 의지를 어느 정도 내려놓아야 한다. 한병철은 <타자의 추방>에서 결과적인 대안으로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제안한다. '성평등주의가 올바른 방향이며, 현재의 잘못된 페미니즘은 개정되어야 한다'는 나무위키 구성원들의 주장, '박근혜 탄핵은 무효이며, 이에 찬동하지 않는 사람들은 종북세력으로서 대한민국을 멸망시킬 것이다'는 박사모의 주장, 기타 신흥종교 집단들의 터무니없는 주장들을 멈추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이 다른 이야기들을 듣고, 그 이야기들에 반응해 보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반응에의 초대는 누군가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깊고 높은 벽을 넘어 '아니라'는 목소리, 즉 '고귀한 저항'(황푸하, 2016)을 시작할 때,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다. (170214-0405)

참고문헌 

자크 데리다(2016), 아듀 레비나스, 문학과지성사.
아즈마 히로키(2012), 일반의지 2.0, 현실문화.
오근창(2013), 일반의지의 두 조건은 상충하는가? - 루소와 '자유롭도록 강제됨'의 역설, 철학사상, 47. pp. 67-98.
진중권(2016), 나도 메갈리안이다, 매일신문. 2016. 7. 27.
한병철(2012), 피로사회, 문학과지성사.
한병철(2017), 타자의 추방, 문학과지성사.
황푸하(2016), 우리는 오늘도, 젠트리피케이션.  
Simon Baron-Cohen(2008). "Autism, hypersystemizing, and truth" (PDF). Quarterly Journal of Experimental Psychology. 61(1), 64-75. doi:10.1080/1747021070150874
Simon Baron-Cohen(2009). "Autism: The Empathizing–Systemizing (E-S) Theory". Annals of the New York Academy of Sciences, 1156, 68-80. doi:10.1111/j.1749-6632.2009.04467.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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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2 22:59

<세카이계란 무엇인가> - 좋지만 논란성이 많을, 웹컬처 역사서


SM-G930L | 1/11sec | F/1.7 | 0.00 EV | 4.2mm | ISO-200 | 2017:01:26 14:04:52


1. <세카이계란 무엇인가>가 작년에 국내에서 번역출판되었다는 사실은 접했지만, 최근에 들어서 웹컬처 비평계에서 <너의 이름은>과 세카이계의 유사성이 지적되면서 책의 내용을 읽게 되었다.

2. <세카이계가 무엇인가>는 의외로 세카이계의 개념에 대해 논의하는 연구서라기보다는, 세카이계라는 개념을 빌어 '오타쿠'문화, 특히 소위 '3세대 오덕'의 역사 전개 과정을 정립한 역사서에 가깝다는 것이 내 인상이다. 특히 오카다 토시오의 <오타쿠학 입문>(한국어판 <오타쿠>)에서 설명한 오타쿠와 현재의 '오타쿠' 문화와의 차이가 적지 않아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의외로 그 사이의 변화를 가장 납득가능하게 설명한 논고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3. 본격적으로 몇가지 점에서 책의 논의에 대한 입장을 남기고자 한다. 우선 기존의 애니메이션의 팬들은 애니메이션을 메타서사적 관점에서 바라봤지만, <에반게리온>기점으로 캐릭터에 집중하는 일련의 팬들이 생겨나 일반화됐고, 그 추진력에 의해 기존의 오타쿠 문화에서 현재의 '오덕' 문화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기존의 오타쿠가 끼치는 역할이 적어지게 되었다는 논의 전반에 대해서는 동감하고, 기존의 만화-애니 동호 논의에 있어서 간과되기 쉬웠던 부분에 대한 지적이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또한 '세카이계'의 핵심 부분으로 '세계 설정',즉 '세계관'의 부재를 지적하고 있는 점(p. 91-92)에도 매우 동감한다. 다만 이러한 세계관의 부재가 가져다 준 영향력은 이 책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부연설명을 하도록 한다. 톨킨의 방대한 판타지, 그의 세계관에서 출몰한 D&D(Dungeon and Dragon)를 시점으로 하는 TRPG, 그리고 SF가 1960-70년대 일본에 수입된다. 이 시기의 일본 만화-애니메이션도 설정, 즉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하기에 집중하면서 일본 내에서 충분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출판했다. 이어 미국에서 수입된 소설들의 이야기하기 방식이나 세계관을 바탕으로 생겨난 일본인 SF/판타지 작가들의 스토리텔링도 세계관을 충분히 구축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1986년도에 TR 리플레이로 시작돼 1988년 출간된 판타지 소설 <로도스도 전기>다. 이런 흐름은 1996년 4월부터 발간돼 1999년 2월 1쿨 애니메이션으로 등장한 <성계의 문장> 시리즈까지 이어진다. 물론 한국에서도 1990년대 후반 이영도-전민희 작가님들에 의해 이러한 흐름이 충실하게 소개된다. 

   이러한 상황이 1995년 <에바>로 깨지기 시작했다는 것이 이 책의 중심 주장이다. 따라서 <에바>는, 일본 장르문학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즉 2000년대 전까지 판타지/SF 소설이 장르문학의 중심을 차지했다면, 2000년대 이후에는 알 수 없는 사이에 그 자리를 라이트노벨이 점거하게 된다. 이러한 점은 1994년 로도스도 전기의 후속작 <표류전기 크리스타니아>로 시작된 (ASCII) 미디어웍스 (현 카도가와) 전격문고가 현재는 라이트노벨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문고가 되어 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이 가능할 것이라고 보인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전격문고를 포함한 다양한 문고들의 매체 발간 현황에 대한 정확한 추가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어쨌던, 장르문학의 선호도를 '세계관 기반 스토리'에서 '캐릭터 기반 스토리'로 변형시킨 일본의 웹컬처 지각변동에 <에바>가 어떤 의미에서든지 큰 영향력을 끼쳤다는 점은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4. 그러나 세부 텍스트로 들어가보면 저자의 논조에는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우선 다음 인용문을 살펴보자.

즉, <에반게리온> 이전 시기 오타쿠들의 작품 수용 태도는 이야기로부터 세계관을 읽어내는 '이야기 소비'를 비롯해 오카타 토시오가 말한 암호를 읽어내는 태도 같은, 지극히 기형적인 형태로 변해 있었다. 때문에 <별의 목소리>나 <최종병기 그녀> <이리야> 같은 소박한 이야기로의 회귀, 또는 평범하게 '이야기를 즐긴다' '등장인물에 감정을 입한다'는 작품 수용태도가 오히려 기이한 것으로 인식된 것이다. (p. 99.)

   저자가 아즈마 히로키씨와 일정 부분의 관점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인용문은 저자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이지만, 전술한 장르문학 사정까지 고려해 살펴볼 때, 이 주장에는 분명한 오류가 있다고 생각된다. 굳이 <왕립우주군: 오네아미스의 날개>를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이야기와 그 세계관에 주목하는 활동은 만화-애니메이션만이 아니라 이미 그 모태가 되는 장르문학 차원에서도 흔한 일이었고, 그것이 영상 분야에서는 영상에 대한 철저한 탐구로 나타났을 뿐이다. 오타쿠의 세계관 기반 활동이 기형적인 형태였다면, 그 당시의 일본의 판타지/SF 작가와 독자들, 그리고 TRPG 플레이어들 또한 '기형적인 형태'의 스토리 소비를 하고 있었단 말인가. 

   <에반게리온> 이전의 '이야기 기반'의 작품,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스토리에서 캐릭터에 대한 이입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여성 동인계의 동인활동이 그 주요 반례가 되리라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 2002년 <반지의 제왕> 영화 개봉의 결과로 한국에서는 한국반지연맹과 (특히) 절대반지동맹을 중심으로 한 '캐릭터 몰입'이 나타나고, 이에 따라 코믹월드 등의 만화 동인지 판매회에 반지의 제왕 동인지가 대거 등장했다. 이야기 기반의 작품의 캐릭터들이 데이터베이스화된 '캐릭터'로서 읽히는 현상이 일본에서 세카이계가 한창 꽃피울 시점에 이뤄지고 있었다는 점은, 이 책이 가진 논지의 한계점을 보여주고 있다.

5. 그리고 세카이계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판적인 관점을 가지고 세카이계와 거리를 두는 것은 좋지만, '세카이계 만가-아니메를 통해 시청자들의 취향이 크게 변하기 시작했다'는 논문의 가설을 바탕으로 만화-애니메이션 소비자의 성향을 단일화해서 표현하는 환원주의적 입장 또한 분명한 한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특히 이 책에서 현실 반영에 소홀했다는 느낌을 받기 쉬운 것이 다음과 같은 일방적인 서술이다.

그러나 로봇 애니메이션에서, 미소년 게임에서, 미스터리에서 돌연 주저리주저리 독백을 시작합니다! 라는 건 처음의 몇 작품은 재미있을지 몰라도, 유사한 작품을 몇 편씩이나 보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을 것이다.<에반게리온>은 충격적인 작품이었지만, 역시 사람들은 미소녀에 모에하고, 로봇에 불타오르고, 트릭에 놀라기 위해 콘텐츠를 소비한다. (pp. 184-5.)

   물론 저자는 본격적으로 논의를 펼쳐나가기 이전 이 책이 '남성 오타쿠 중심'으로 서술되고 있다(p. 27.)고 설명해 여성향 콘텐츠가 빠진 이유에 대한 양해를 시도하고 있지만, 이러한 주장이 논의 전반을 정당화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고 보니 이 책에서 의도적으로 서술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정말 몰랐기 때문에 서술하지 않았(을 리는 <케이온!> 때문에라도 없다고 생각하지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ARIA>를 시점으로 한 치유계와 일상계가 전혀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는 점도 이러한 무리한 환원주의적 주장을 논리적으로 펼치기 위한 꼼수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들 또한 여성이 아닌 남성 아니메 팬들을 중심으로 소비되고 있으므로, 이 연구서의 분명한 한계로 지적하고자 한다.

6. 이전 특정 논고에서 아즈마 히로키에 대한 비판을 통해 분명히 설명한 바가 있지만, 따라서 '이야기 소비'와 '데이터베이스 소비'라는 단순한 이항을 세우고, 해당 '상품'들의 소비자의 성향의 변화를 통해 소비자의 적극성이 사라진, '소비즘'에 근거한 후기 오타쿠들의 활동이 현재 소위 '오타쿠' 문화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들은 결코 텍스트에 대해 적극적인 반응을 일으킬 수 없이 해당 텍스트만을 소비한다는 '가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한 이 책의 전반적인 논지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현재의 상황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대안은 "기존의 '세계관 기반 이야기'에 기반한 일본의 이야기 시장 전반이<에반게리온>을 시점으로 '캐릭터 기반 이야기'로 변경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세계관 기반 이야기'들은 시류 내지 시장을 구성하는 독자들에 의해 때로는 큰 비판을 받으면서, 적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가정이다. 

7. 결과적으로 '세카이계'를 통해 시작된 '캐릭터 기반 이야기하기'의 우위가 앞으로도 지속될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들 수 밖에 없다. 그 사례로서 주목하고 싶은 것이, 이 책의 문고판 발매 이후 2014년 4분기부터 2015년 1분기까지 TVA로 방영된 판타지 소설 <새벽의 연화>다. 2009년부터 쓰여진 이 소설은, 현재 주류 아니메인 '캐릭터 기반 아니메'와는 달리 기존 판타지 소설의 작법을 그대로 따라갔으나, 캐릭터적 접근이 강해 일본과 한국에서 많은 팬덤을 가지고 있다. <Rail Wars : 일본국유철도공안대>도 그렇다. 일본국유철도 JNR이 해체되지 않고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는 가설 아래 라이트 노벨에서 시작해 2014년 3분기에 아니메화된 이 작품은, 캐릭터성보다는 세계관에 더욱 기반을 두고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한국 판타지나 웹소설 또한 점차 캐릭터에 대한 집중보다는 이야기나 세계관을 충실히 하고 있는 작품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그동안 비판을 받으면서도 소비되고 창작되고 있는 양판소 시대를 벗어날 새로운 동력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관 기반 이야기'가 언제까지라도 소수로 자리잡고, 캐릭터 기반 이야기가 지속될 것이라는 듯한 이 책이 주는 인상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거리를 두고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8. 마지막으로 이 책의 한국어판에 대해서 잠깐 코멘트한다면, 이 책에서 페이지수를 안쪽에 두고, 제목과 하위제목도 세로로 세운 디자인 자체는 매우 뛰어난 시도라고 생각되며, 필자로서도 앞으로도 출판하게 될 작품에 응용하고 싶은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실제 책에서 봤을 때의 위치가 애매애매하다. 0.5mm-1mm 정도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시각적으로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느낀다. 또한 일상계와 치유계는 한국어로 표기하면서, 세카이계는 '세계계'라고 부를 수 없으며, 일본어로 굳이 음역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추후의 논의사항으로 남겨두고자 한다.

(2017. 2.7 : 본문 2차개정)


세카이계란 무엇인가 - 10점
마에지마 사토시 지음, 주재명.김현아 옮김/워크라이프

참고문헌

빠른 글의 작성을 위해, 한국어 번역본의 서지사항만을 기재하기로 한다.
마에지마 사토시(2016), 세카이계란 무엇인가, 워크라이프.
아리스가와 아리스(2014), 말레이 철도의 비밀, 북홀릭.
오카다 토시오(2001), 오타쿠, 현실과 미래사.
히카와 레이코(2004), 토쿄에서 판타지를 읽다, 청어람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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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02 03:49

2016년 정리 (1) - 글


사진은 좋아하지만 닿을 수 없는, 카랏(カラット)의 Line 팬서비스 사진에서… 



2016년이라는 꽤 힘든 시기가 지났다. 사진은 매년 하는대로 정리해서 100장을 선정했다. 이걸 리사이징하고 줄이는 것만으로도 몇시간이 더 걸릴 것 같아서, 지금 시점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간략하게, 보안에 걸리지 않는대로 남겨보고자 한다.


2016년에 나는 무엇을 했을까

※ 1월
2일 퀘이크스퀘어. 느릿하게 3시쯤 가니 역시나 볼 내용이 다 사라져 있는 상태를 목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난 구매러는 이미 졸업한 상태라… 한편 학위논문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1년 반 전부턴가 미루고 미루었던 인터뷰 한 건을 마쳤다. 24일에는 삼청동에 갔다가 작년에 한 번 뵈었던 분과 구체적으로 삶을 나누기 시작했다. 30일 애니라이브. 삼각대까지 사들고 열심히 취재한다고 했으나, 650D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게다가…

※ 2월
원래 기사를 기고하고 있던 회사에서 원소속회사와의 문제로 올린 기사를 받지 않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일하고 있던 곳을 나오고, 새 곳에서 간헐적으로 기사를 기고하기 시작하려고 했으나 첫 기사는 망. 2월 3주에 황간역 철도교류회. 그다음 날 곧바로 A모팀 이벤트를 취재했으나 끝나고 택시가 오지 않아 1시간 가량 추운 겨울바람을 맞았으며, 게다가 관계자와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뭐 그래도 이 겨울에는 코스갠촬을 많이 했으니 좋은건가- 아, 그리고 그 논문이 통과됐네.

※ 3월
부순장이라는 이유로 청년국 LT 강제 참여. 이후 5일에는 수인선 사진전을 가까스로 관람. 성경공부 시작. 19일에는 한 교회에서 이뤄진 담임목사님의 원정결혼식에 갔다가 토요일에 닫혀있는 교회에 깜놀. 기도실에 갔다가 하나님이 10분간 기도를 막으셔서 더 깜놀. 그달 말에 요청 있어서 갠촬 갔다가 코스프레 정체성 논란 - 이 시점부터 코스에 대한 헌신도가 줄어들기 시작한 것 같다. 한편 논문준비를 같이 하면서, 오키나와 기사 + 신문사에서 제안해주신 일본여행 준비 개시. 3월 27일 최악의 다이아개정. 성삼일은 새로운 곳에서 보냈다.

※ 4월
4월 2일 자폐인의 날. 염수정 가톨릭 서울추기경은 왔으나 한국을 책임진다는 개신교회 총회장, 감독회장급은 없는 것을 보고 좌절. 16일 아는 녀석이 결혼. 그담에 위키미디어 들렀다가 세월호 대회에 나갔다가 감당하기 힘든 비를 맞았다. 한편 논문은 지지부지하던 차에, 그 '뜨거운 사건'에 휘말리게 되었으나, 자세한 내용은 금지사항입니다.

※ 5월
사건 이후로 논문이 한창. 그러나 5일 어린이날이라서 촬영을 나갔다. 17일 서울신대에서 DJinho 전도사 워십을 처음으로 봤다. 19일에는 트와이스를 봤는데 왜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저걸 보는걸까라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15일 장빈 목사님 재회. 새로운 제안을 받았다. 담임목사님 소개시켜드리려고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실패. 20-21일 코스 컬렉션 #4. 역시 일본은 한국 코스판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런 상태가 반복된다면… 끔찍할텐데. 21일은 그 사이에 학회 학술대회까지 다녀오고 강남역 살인사건 추모까지 다녀왔다. 22일 반대쪽 '스승의 날' 행사에 나갔다가 새 학생회장이라는 사람한테서 명예훼손 이야기까지 들었다. 25일 옥바라지선교센터 행사에 처음으로 나가 보았다. 글고 보니 그 사이에도 스캔에 열심이었구나(...) 그리고 estas가 논문 인터뷰 관계로 복원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 6월
4일 갠촬 이외 행사 2건 이후로 일본에 나가기까지 사진을 찍지 못할 정도로 논문에 열심.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논문이 통과됐으나 채워야 할 내용이 많아 ㄷㄷ 18일 홍대 비닐에 다녀온것과 여행 시각표 작성 이외에는 논문에 정말 전념. 23일 출국하고 나서야 한숨 돌렸다.

※ 6-7월 일본여행
매년 다녀오던 대로 학술대회 참가라는 목적이 있었지만, 일본 철도여행기 작성이라는 2차 요청도 곁들인 시코토. 결과적으로는 약 250만원의 일정으로 17일간 다녀오게 됐다. 결과적으로는 JR Pass를 14일동안 이용해 패스값의 3.5배를 벌어들였다. 여기서 남기고 싶은 이야기야 많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사진과 이후 여행기에 풀도록 한다. 그리고 6월 29일, 일본에 들어온지 7일만에 시간을 쪼개 논문을 특급 북두에서 완성했다! 논문도 제대로 제출했다! 얏타! -라고 생각했으나…

※ 7월
다녀와서 봤더니, 으억! 오타와 다시쓸 부분이 보이고, 참고문헌 작성도 안돼서 또다시 논문 뜯어고치기에 돌입. 그대신 하드커버 인쇄와 산돌돋움 사용으로 퀄리티를 끌어올렸다. 23일 위키미디어 컨퍼런스. 못볼 꼴 다 봤다. 그리고 27-31일에 BICOF가 있었으나, 29일까지 논문 수정+ 그 논문에 의한 애매한 상황 + 리더십이 교체, 그리고 29일 인천지하철 2호선 개통식 참석, 30일 갠촬로 내가 가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 와중에 30일 8년만에(40년은 거짓말이다) 인천시내버스 대형개편. 41번 버스가 폐지되면서 인천남구대중교통의 암흑기가 오픈, 그리고 시장이라는 사람은 지금까지도 자신이 정말 교통주권시대를 연 줄로 생각하고 있다. 주민이 원하는 버스, 아무 대책 없이 없애는 시대가 교통주권시댄가

※ 8월
그리고 나서 며칠간은 열심히 쉬고, 7일부터 예의 그 산상성회. 예배 빼고 프로그램이 없어서 모든 청년들이 환호성을 질렀다고 한다. 그리고 19일 드디어 11년간의 공부를 마무리짓는, 졸업식 없는 졸업. 많은 돈을 받았는데 세달 지나지 않아 앵꼬가 났다. 참고로 우수학생 시상식에서 받은 삼성 2TB 외장하드는 3주만에 터졌다. 더 이상 삼성 외장하드를 쓰지 않겠노라 다짐하는 계기가 됐다. 27일 사촌이 결혼, 그리고 곧바로 황간역으로 향했던- 뜨거운(?) 추억이 있다. 그다음 날에는 영동포도축제 + 사보텐 대전점 크리. 역시 바쁘다.

※ 9월
2일 좋은 목적의 행사에서 좋은 이야기를 듣고 지우맨님을 뵈었다가, 한 예술가가 던진 계급주의론에 화나며 나간 추억이 있다. 이 시기 <울려라! 유포늄> 극장판을 배견하고, 작년 11월 경애니에서 봤음에도 불구하고 관심없었던 유포늄에 관심이 생겼다. 이 시기부터 한 법인을 통해 한국모금가협회 이사님의 강연을 듣고 사회NGO의 역할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9월에는 처음으로 중국 여행을 다녀왔고, 내 한계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시기가 되었다 + 현재의 작업기인 샤오미북을 얻었다. 1080p 화면이라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핸드폰 화면이 깨지면서, 핸드폰을 갤럭시 S7로 바꿨다! 는 아이폰은 과연 언제 만날 수 있을까… 이 시기에 의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논문 한편의 의뢰를 받았다.

※ 10월
1일 NaNoWriMo 행사에 나가며 올해는! 이라는 투지를 불태웠지만, 올해도 실패했다 ㅠㅠ 한편 와우북페스티벌은 올해도 참가. 적어진 규모 속에서도 버티고 계시는 도서출판 온우주에게 감사를. 그리고 SF 카르텔이 되었죠..() 2일 처음으로 점프수트 구매. 사흘만에 들켰다. 10일에는 책장 추가 + 결혼식 참가 + 총회 참여 + 국제행사 진행이라는 있을수 없는 일까지 겪었다. 21-22일 장지공측 한국피플퍼스트대회(창원) 참가. 내년에는 서울이라 한숨 돌렸다. 하지만 이 행사에서 자폐성장애인의 발언 기회는 여전히 없었으며, 이 행사가 겹쳐서 BIAF에는 마지막 날(25일)에야 행사 일부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JR큐슈 열차 디자이너 전시회는 꼭 첫날 갔어야 했는데 ㅠㅠㅠ  한편 커피 티페어에 가서 새 그라인더 세트를 샀는데, 정작 요즘은 전혀 먹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역시 핸드드립을 시도해야 하나) 그리고 논문은 지역 관광을 주제로 결성된 스터디그룹에서 큰 공격과 비판을 받으면서 어떻게 기한에 맞춰 완성. 한편 24-5일 JTBC 보도로 새로운 구름이 삶을 덮기 시작하는데…

※ 11월
교수님이 갑자기 일을 시키기 시작한데다가 원 회사에서 아르바이트 요청을 해오고 내가 작업하고 싶은 글도 겹치면서 이래저래 피곤했던 시점. 이 시점에 <콘텐츠 관광연구>라는 일본어 서적을 알고 구매, 내용이 좋아 번역에 착수했다. 6일에는 지역에서 두번째로, 공식 행사로는 11년만에 코스 행사가 있었는데, 이날 구청장이 왔으나 내 얼굴은 쌩까고 갔다. 참 일 잘하고 좋은 구청장이셨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셨담. 한편 박근혜를 통해 이 나라를 개혁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로 8일에는 기독교신학생연대회의 시국기도회에 참여. 떼제성가의 힘을 실감했다. 이날은 일단 서울청사 앞에서 막혔다. 12일 학술대회 하나 치뤘다 19일 11코에 갔는데 사람이 없어서 코스 활동에 대한 실망감을 품었다. 이날 4차 대회에 갔다가 생각나는 것을 나눴는데, 트위터와 페이스북에서 모두 일이 나버렸다. 꽤 마음에 상처가 됐다. 21-22일 장애인 토론회 한건은 참가하고, 한건은 발표했는데, 여전히 나아지지 않는 상황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아. SRT&KTX 통합시각표 긴급제작도 있었지…

※ 12월
3일 6차 대회는 새누리당 항의만 참여하고 만화애니학회 총회 참여. 학회 교수님들과 인사하는 기회가 되었다. 6일 인천센터 개소했으나 유정복은 축사에서 발달장애인과 무관한 정책만을 열거했다. 9일 또 다른 학술대회. 갑작스러운 준비를 하게 됐지만 결과적으로 문제없이 끝났다. 다만 이날 저녁 핸드폰을 잃어버리는 대사태가 발생. 내 인지 체계에 대한 질문을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잘 지내다가 최근 감기에 걸렸고, 24일 성탄절을 지내면서 풀릴 수 있었다. 그리고 29일, 갑작스러운 취업과 30일 황간역 취재까지. 비정상의 정상화, 그리고 아픔을 겪으면서 보낸 한 해는 31일, 10차 대회를 마지막으로 마무리됐다.

 기타 숫자들
- 학위논문 1편, 학술지 논문 2편 발표, 학술발표 1회
- 기사는 한 40건 정도 쓴듯
- 해외여행 2회
- TVA 시청 4편, OVA 시청 1편
- 블로그 방문자수 21,367건(정말 작년에는 별로 게시를 못했다)

생각해보면 꽤 힘든 시기를 보냈고, 앞으로도 어려운 시기가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은혜를 주셔서 내년도 한해 동안 살 기업을 주시고, 9일 탄핵을 가결해주셔서 나라를 새롭게 해 주시고 그 일을 확정하실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에, 예수님을 더욱 의지해보는 삶을 살아보고자 한다. 2016년도 함께 할 수 있었던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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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6 00:49

[긴급제작/배포] 경부고속선계 KTX + SRT 통합 시각표 (2016년 12월 9일 개정)


Canon EOS 650D | 1/160sec | F/8.0 | 0.00 EV | 21.0mm | ISO-100 | 2016:02:20 10:09:16


 
 안녕하세요. 엘리프입니다.
  현재 성과연봉제를 시점으로 하는 노동악법을 막아내기 위한 철도노조의 정당한 투쟁과, 국민들의 시위가 계속되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어쨌던 9일부터 KTX와 SRT가 서로 다른 회사가 되어 하나의 노선 안에서 불필요하게 투쟁하는 결과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SRT와 KTX가 별개의 회사가 되면서, 각각 자신의 회사별로 별개의 시간표를 배부해, 같은 노선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쪽을 이용하는 것이 보다 더 합리적인 활동인지 판단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최근 며칠동안 노선 시각표를 일본 시각표 체계에 맞춰 정리하는 작업을 진행했고, 그 성과물을 오늘부로 경부고속선계를 중심으로 우선 공개합니다.
  이 시각표가 가지고 있는 큰 장점에 대해 알려드리자면,
  • 경부고속선과 경부선, 경전선, 동해선을 지나는 KTX와 SRT의 모든 열차의 운행시각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게 작성해, 빠르게 시각 일정을 확인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습니다 (호남-전라선 시각표는 별개로 다시 작성중에 있습니다).
  • 열차 도착시간을 추정해 기재해, 시각표로는 알 수 없는 대전역과 동대구역, 상행 서울역의 도착시각을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습니다(다만, 사례가 많지 않은 상행 용산역은 이번 버전에서 제외되었습니다).
  • 수도권 서부 주민들에게 도움이 되지만 실제로는 타기 힘든 광명급행의 시각표를 포함해, 어떤 열차를 탈 때 광명에서 내리면 구로역에서 갈아탈 수 있는지 설명드렸습니다.
텍스트 일부에 오류가 있을 가능성이 있고(일단 대전-동대구간 시격을 40분에서 38분으로 수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워낙이 철도 시각표를 믿을 수 없는 우리나라의 사정을 감안한다면 이 시각표가 그대로 지켜질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KTX와 SRT를 타시는 여러분들께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앞으로 시각표의 오류가 정정되거나 내용의 업데이트가 이뤄진다면 이 페이지나 다른 페이지를 통해 업데이트를 제공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또한 파일 내 오류가 발견된다면 이 페이지를 통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경부고속선계 - 2016년 12월 9일 (12월 6일 배포 버전)

경부계KTX_161209.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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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2 22:51

박근혜 하야 시국선언 동조서

 
엘리프는 최근 그리스도인 개인의 자격으로 최근의 시국선언에 참여하거나 다른 시국선언들의 논조에 동조한 사실이 있다. 그러나 개인의 입장으로서 이러한 시국선언들에 동감하는 이유를 밝히기 위한 새로운 시국선언을 작성하는 것은 대부분의 시국선언의 작성이 조직이나 단위 별로 이루어지는 점을 감안 한다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본 논고에서는 본인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러한 선언들에 '반응'하게 된 이유를 밝힘으로서, 이들 시국선언에 동조하는 개별적 입장을 밝히고자 한다(참고로 주로 개신교에서 활동하는 본인의 입장에서, 이 글은 개신한국어로 작성되었음을 밝힌다).


Canon EOS 650D | 1/30sec | F/4.0 | 0.00 EV | 18.0mm | ISO-2500 | 2016:11:19 20:22:34


"우리는 정권 유지를 위해 국민을 억압하고 언론의 자유를 위협하는 어떠한 정치 제도도 배격한다. … 또한 오늘의 현실 속에서 정의로운 사회 건설을 위해서는 타종교와 공동 노력한다."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신경 3 · 9조

1. 하나님의 구원과, 그 구원을 주시기 위한 수단인 복음과 교회는 모든 사람(multis)을 위하여,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눅 26:28, 막 14;24; 겔 46:8-12 참조) 있다. 여기에서의 '많은 사람'의 범위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시편 87편과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하여 볼 때, 구원의 초대 대상은 특히 우리가 흔히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방인', 또는 일본 민족 같이 우리가 혐오하는 대상까지도 포함하는 넓은 범위이다. 모든 교회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까지 구원을 전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인정하게 하는 초대의 역할을 맡았다.

2. 한편, 대부분의 한국 개신교 교회는 최근 사태와 관련해 신자들에게 모든 정치적 표현을 삼가고, 단지 나라를 위해서 기도할 것을 권한다.그러나 한국 교회는 예수님꼐서 바리새인들을 강렬하게 꾸짖으셨듯이, 구원의 문에 들어올 자격이 있는 모든 사람들을 보수적인 교회 문화와 우파 이데올로기에 맞춰 판단하고, 그 자격과 규정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구원에서 제외하고 있다(마 23:13). 수많은 담임 목사님들은 우파 이데올로기에 기반해 교회 성도들 중에도 있는 '종북좌파'들을 정죄하기를 그치지 않으며, 심지어 어떤 목사는 '이명박 안 찍는 사람은 내가 생명책에서 지워버리'겠다는, 예수님이 피값주고 사신 교회가 마땅히 전파해야 할 복음과 상반된 주장을 하기까지 한다.

  따라서, 예수는 믿되, 교회는 떠난 '가나안 성도'가 발생하는 제1이유가 교회에서 발생하는 논란이라면, 제2이유가 교회 공동체의 극우적이자 폐쇄적인 분위기 때문임은 우리가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바이다. 교회는 진보적 성향을 가진 성도들을 정죄하고, 우파 이데올로기를 견지하는 믿음만이 올바른 믿음이라고 가르치며, 그 가르침에 대한 의문은 허용되지 않는다. 대신에 한국 개신교회는 성도들에게 시편 84편, 학개서, 그리고 수많은 성경구절을 들어 교회당 안에서의 과도한 시간투자와 전도, 그리고 헌금을 요구한다. 그러나 교회에 이미 한두번 찾아간 사람들이 어려서부터 경험한 교회 이미지는 교회 진입을 빌미로 예수님의 거룩한 구속에 들어오지 못하게 할 뿐만이 아니라, 특히 소위 '다음세대'의 교회 이탈을 가속화시킬 뿐이다. 이제 교회 성도들은 복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복음이 전파된다는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자랑할 수 없어 전도를 두려워한다. 

3. 교회가 폐쇄적인 모습으로, 비신자, 더 나아가 길찾는 이(구도자)들의 질문을 무시하려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지적했듯이 서로 '편을 갈라'(공동) 자신들에게의 공감을 요구하는, 공감이 없는 세대(즉 롬 12:1-2로 만날 언급되는 그 '세대')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눅 7:31-2). 한국교회는 따라서 사도 바울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고전 9:22) 교회 공동체 뿐만이 아니라 주위의 이웃들, 더군다나 자신과 반대되는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미 적어도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차별(약 2:1-4; 약 2:9)이라는 우리 공동체의 흉악한 죄를 회개할 능력조차도 잊어버린지 오래다.

4. 현대 개신교회는 신자, 특히 보조교역자에게 수치적 결과물을 요구한다. 그러나 진정한 복음의 변화는 비수치적이며, 복음의 씨앗의 발화 과정은 하나님만 아시며, 드러나지 않는다.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고전 9:22, 가톨릭)이 되어 누구나 '썩지 아니할 것'(고전 9:25; 고전 15:53-4; 벧전 1:23, 개개)을 얻도록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이 우파 성향을 가진 사람들, 돈을 잘 버는 사람, 교회 예배시간에 늦지 않는 사람, 교회 사역을 잘하는 사람, 적은 돈에도 모든 것을 드리며 헌신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좌파 성향을 가진 사람들, 가난한 사람, 예배시간에 늦기를 밥먹듯이 하는 사람, 교회 사역을 꺼리는 사람, 헌금과 연보를 소홀히 하는 사람들에게도 공감하고, 그들을 여전히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이끌 의무가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전도의 과정은 '투입-산출'이라는 산업적, 또는 상업적 방법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을 인정하고, 그들이 가진 은사를 그들의 방식으로 활용함으로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 일부나마 참여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개선되어 이어져야 한다.

5.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박근혜 퇴진과 하야에 찬성하는 행위는, 1) 성자 하나님이 피주고 사신 교회의 다양성을 드러내고, 2) 성부 하나님이 마련하신 구원의 범위가 제한되어 있지 않음을 드러내는 신앙고백으로 작용할 수 있다. 또한 이 행위는 3) 교회가 세상과 분리된 공동체가 아닌, 세상과 함께 공감하는 공동체임을 드러내며, 4) 교회가 잃어버리고자 작정한 '잃어버린 자'들에게 다시 다가서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구원론에 대한 고찰을 통해 볼때, 굳이 십자가 이론과 대조적인 사회구원론 사이의 차이를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박근혜 퇴진과 하야를 주장하는 것은 성경적 세계관적 관점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따라서 죄라고 볼 수없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엘리프는 지난 10월 기명한 [ 대통령 하야 요구 그리스도인 성명 ]에의 동의 의사를 재확인하면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박근혜는 퇴진하라!
하나님의 정의는 법 너머에 있다! 
한국 개신교회여, 하나님께로 돌아가자(호 6:1)!


2016. 11. 22.
엘리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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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5 23:04

<울려라! 유포니엄> 극장판 대담 : TV판보다 극장판이 더 나은 애니가 여기에 있다


(ⓒ武田綾乃・宝島社/『響け!』製作委員会 인용)


<울려라! 유포니엄>響け!ユーフォニアム 극장판(부제는 생략하기로 하자)은 저음 금관악기 중 하나인 유포늄을 연주하는 오마에 쿠미코黃前久美子(CV: 쿠로사와 토모요黒沢ともよ 분)이 진학한 북우지고등학교 관악부에 어쩔 수 없이 다시 들어가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담은 동작의 애니메이션을 재편집한, 소위 총집편 극장판 애니메이션이다. 국내에는 9월 1일 메가박스에서 애니플러스사의 주관 아래 개봉해 5일까지 4,169명이 관람했다.

원래 이 글은 모 사이트에 기고할 용도로 영담산 님과 같이 작성했으나, 사이트가 날라간 관계로(...) 개인 블로그로 이전해 올린다. 대담에 응해주신 영담산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TVA와의 차이 1: 편집의 긴장감
엘리프 : 자 이제 시작할까요? 우선 TVA와 영화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이라고 생각되냐능?
영담산 : 긴장감이라고 생각함. 그 이유는 TVA에서 시청자의 의견 대립이 거의 없으리라고 생각한 부분이 통편집되어서라고 봄. 5화의 라이딘이랑 9화의 소방차 게임까지 체감 러닝타임이 10분 이하라는 경이로운 급전개를 보여줬기 때문 아닐지...
엘리프 : ??
영담산 : YMO의 라이딘을 연주하는 기악행진 신에서 축제 나가서 레이나가 쿠미코의 미간에서 인중까지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는 신까지의 개인적인 체감 시간이 십 분 이하라는 거임. 그 레이나가 쿠미코 미간에서 인중까지를 쓸어내리는 장면을 개인적으로는 '소방차 게임'이라고 부름 ㅋㅋㅋㅋ
엘리프 : 나는 30분 정도 걸렸다고 기억하고 있는데 ㅇㅁㅇ
영담산 : 그 사이에 보여준 게 많지 않았다고 생각했지. 뒤의 트럼펫 솔로 공천 파동이랑 쿠미코가 특정 파트 강판되는 대목 즈음한 TVA의 10-12화 부분은 거의 편집 안 된 걸 생각하면 작품 내 갈등을 극대화해 보여주기라는 제작진의 의도는 충분히 성공적이었다는 생각이.

수수께끼: 쿠미코와 레이나의 관계, 그 것이 궁금하다
엘리프 : 오히려 내가 처음에 극장판만을 보고 나서 너무 스킵했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서머패스 착수 이후부터 서머패스 공연 장면까지 사이 과정이 거의 없다고 생각됐는데, 그 부분은 애니에도 별로 없더라. 전반적으로 중간과정 생략의 일본 음악애니지만.
영담산 : 라이딘 이전 부분 이야기인가?
엘리프 : 직전부분이지. 그리고 약간 애매했던 게, 오마에와 레이나가 급친해지는 전개의 심리 상태를 읽기 힘들어.
영담산 : 쿠미코 레이나는 원래 작품 앞에서부터 아는 사이였고-
엘리프 : 아는 사이였던 건 맞는데, 그동안 쿠미코를 열심히 무시하시던 레이나가 왜 갑자기 만나서 '사랑의 고백'을 하는가의 부분. 그 축제 데이트 관련 부분이 아니었다면 만날 이유도 없었거던.
영담산 : 그건 아마 레이나가 쿠미코한테 마음을 품고 있었는데 내색하지 못하는 특성 때문 아니었을까 싶어. 쿠미코가 축제 같이 갈 거라고 아무렇게나 팔을 덥썩 집은 것이 레이나였다는 우연이 아니었다면 쿠미코는 전혀 모르고 넘어갔겠지. 정말로 레이나가 솔직하지 못해서 그런 것인지에 대해서는 레이나의 설정 자료를 확인해봐야 하겠지만.
엘리프 : 그런 의미에서는 애니메이션을 보지 않은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들었던 한 가지 요소가 아니었을까 싶어.
영담산 : 그러고 보니 그러네. 지금 쓴 이것도 내가 추리해낸 가설이지 진짜 설정자료는 아니니까. ㄷ

<울려라! 유포니엄>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장면인 듯…
(ⓒ武田綾乃・宝島社/『響け!』製作委員会 인용)


TVA와의 차이 2: 연주장면이 대단하다
엘리프 : 그리고 이번에 제대로 했다고 생각되는 게 주요 관악곡의 연주 장면을 충분히 실은 점.
영담산 : 그치. 난 편곡판이라도 라이딘을 완주시켜준 게 그렇게 고마울 수 없더라고. 그리고 트럼펫 솔로 재심 부분에서 두 후보의 연주 특성의 차이를 더 잘 느낄 수 있었어. TVA로는 잘 안 와닿을 수 있는 부분이었거든.
엘리프 : TVA에서는 컷 되어 있던 부분인가?
영담산 : 아니. 근데 그 레이나랑 선배의 기량이나 진정성이 잘 안 느껴져. 극장 AV설비와 가정 AV의 한계 때문일지도.
엘리프 : 난 한 눈에 알겠던데 으음.
영담산 : 레이나랑 선배 둘 중 누가 나았어? 난 TVA 때는 잘 모르겠던데 극장판에서는 '아, 이건 레이나가 이겼다.' 라고 감이 오더라고.
엘리프 : 레이나였어. 첫음부터 강약조절이 차이가 나지
영담산 : 더 웅장했고...
엘리프 : 그리고 선배가 삑사리가 하나 더 있어
영담산 : 그랬나 ㄷ ㄷ

<초승달의 춤>, 쿠미코를 위한 작곡
엘리프 : 그래도 이야기는 어쨌던 오마에의 성장 과정을 담아낸다는 취지를 잘 살리고 있고
영담산 : 그랬네.
엘리프 : 그런 의미에서 ‘우마쿠나리타이’(잘하고 싶어) 신은 의외로 이상한 것 같지만 좋은 스토리텔링 장치였지.
영담산 : 그 부분에 들어갔어야 하는 씬이기도 하고...
엘리프 : 그래도 세족대학교의 <초승달의 춤> 동영상 보면 157마디 부분이 의외로 고등학생치고는 높은 스킬을 강요한 부분이기도 하지 뭐(...)




영담산 : 고등학생은 대학생을 이기기 어렵지. 스포츠에서도 리그를 할 때 고등학생 리그는 대학생보다 아래로 치고...
엘리프 : (자료를 찾다가) ‘2015년 4월부터 같은 해 6월 말까지 방송된 TV애니메이션 「울려 라! 유포니엄」을 위해 특별히 새로 쓴 곡이며, 작중에서는 취주악 콩쿠르의 자유곡으로 등장하고 있다.’ 아아....()
영담산 : 애니를 위해 ㄷㄷㄷ
엘리프 : 그러니 야마하에서 악보를 독점판매하지. ㄷㄷ 근데 비싼데?
영담산 : 야마하 스폰서였던가?
엘리프 : ㅇㅇ. 그래서 라이딘 신에서 야마하가 나타나 있지. (자료 찾다가) 1620엔이다 ㄷㄷ



영담산 : 우와...........
엘리프 : 비싼거여.
영담산 : 그런가.
엘리프 : 취주악협회 과제곡 풀 스코어가 다섯 곡 합쳐서 1200엔인 거에 비하면 (주: 당시 북우지고등학교가 선택한 과제곡 4 <프로방스의 바람>을 담은 2015년 풀스코어집은 [ 2016년 8월 현재 1028엔(일본 국내, 송료 포함)에 판매되고 있다 ].)
영담산 : 저건 저거 하나뿐이잖 ㄷㄷㄷㄷ
엘리프 : 그나저나 일단 TVA를 만들 때 그당시 일본취주악연맹 연례 콩쿨 과제곡을 그대로 채택한 것도 그렇고, 상당히 현실에 맞춰서 제대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한 걸 보면 일본이 대단하기는 하다는 생각이 들어.
영담산 : 애니메이션이 현실을 담아내는 능력 ㄷㄷ

단점 : 케이한전기철도가 너무 잘렸다
엘리프 : 스폰서하니까 TVA랑 극장판 차이가 나는게 케이한. 케이한 신이 이번 극장판에서 대폭 잘렸지.
영담산 : 거의 없었지 그러고 보니 홍보에 기여했는데..... 우지역도 나와주고 했는데 말이지
엘리프 : 돈 내고 안 내고의 차이가 크다는 거겠지. 그러니까 애니판에서 협찬했어도 극장판에서 협찬 안하거나 그러면 그렇다는 느낌이려나. 우리나라라면 그런 식으로 확실하게 구분을 짓지는 않을 것 같아.
영담산 : 스폰서 이야기구나. 일본에서야 애니메이션과 이어지는 산업이 꽤 많고 비중이 한국보다 되는 편이니까 그럴지 모르겠네.

정리: 정리 치고는 꽤나 긴 이야기
엘리프 : 슬슬 오늘 이야기를 정리해볼까. 일단 정리하자면 1) '<초승달의 춤> 작곡가가 대단하다'. 애니메이션 감독의 주문을 맞춰서 생산하지만 그대로 콩쿠르에서 연주해도 되거든. 2) 극장판이 총집편인 것 치고는 상당히 높은 퀄리티가 나왔는데, 그 이유로는 역시 충분한 연주시간 + 편집을 했는데도 어색하지 않은 분위기.
영담산 : 동의합니다. 그 외에 나는 ㄱ. 같은 제작사의 다른 작품인 중2사랑은 열광적이었던 TVA와 달리 극장판은 실망스럽다는 평을 들어야 했는데 이건 그 정반대겠구나 싶고
엘리프 : 그 점은 동감. 영화가 TVA를 살렸는데 이 기쁜 소식(?)이 잘 알려지지 않은 점이 안타깝달까-
영담산 : ㄴ. 레이나가 이번 작품에서 정말 달리 보였는데 느낌이 '카리스마 있어 보이지만 사실은 감정 표현이 서툴고 솔직하지 못한' 캐릭터라는 걸 알게 됐지. 극장판에서는 쿠미코랑 레이나 둘한테 초점이 특히 더 맞춰진 느낌이라, 보면 쿠미코 보고 '성격이 나빠'라고 말하는데 조금 거친 표현이지.
엘리프 : 그렇지.
영담산 : 보통 저 나이대의 일반적인 언어 사용이라면 '짖궂어'いじわる라고 할 텐데. 그런데 그걸 굳이 성격이 나쁘대 ㅋㅋㅋㅋ 되레 귀엽더라고. 엄하게 교육받은 부잣집 아가씨의 언행 불일치를 보는 느낌(?) TVA에서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극장판으로 보니까 매력 있던...
엘리프 : 그리고 3) 왜 동성애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신을 굳이 삽입하셨나요(...) + 쿠미코의 연애전선은 어떻게 될 것인가? - 특히 레이나의 원래 사랑이 타키 선생인걸 생각해 보면(...) NL로 돌아갈 것인가? 그렇다면 '사랑의 고백'은 어떻게 되나요 라던가(...)
영담산 : 어쩌면 철저한 상업성 치중이지. 아마 확인은 2기에서 하라는 의도일는지 모르겠네
엘리프 : 2016년 8월에 시작한다던 건가?
영담산 : 울려라 유포니엄 2라는 제목으로 방영한다고 했어. 그리고 ㄷ. 극장판과 이어지는 TVA는 원래 관례가 과거 TVA의 편집분이 끝나는 시점에서 차기 작품과 이어지는 내용을 넣는 거였는데, 이 극장판에서는 그런 것이 없었지.
엘리프 : ㅇㅇ 앗싸리 깔끔하게 TVA만 총집했는데 상큼했어.
영담산 : 그것은 '구태여 극장판에 차기작 이어지는 스토리를 넣는 것은 무의미하다'라고 판단했기 때문 아닐까 싶어.
엘리프 : 어쨌든 TVA에서는 애매했던 '츠즈쿠'(계속)도 이번에는 제대로 정리가 된것 같기도 하고. 참고로 관서 2차예선 대회 진출 여부는 1회차에서는 못 알아챘었는데 두 번 째로 보면서 이해했음. 아마 릿코랑 북우지 둘이서 진출하지 않았을까 싶음.
영담산 : 그랬겠지??
엘리프 : 아마 이야기 구도로 봐서는 그렇게 만들었을거고. 어쨌던 간에 4) 결국 북우지고등학교 관악부는 사기캐였습니다(…)
영담산 : 고등학교 수준이 아니……
엘리프 : 그 부분에 있어서는 소리와 영상의 차이가 나서 아무래도(…)
영담산 : 그럴지도 모르겠네.
엘리프 : 그리고 애초에 1학년생이 대폭 들어와 주축을 맡은 고등학교 클럽이 저렇게 치고 올라가는 건, 경험자가 많다는 건데, <겁쟁이 페달>과 비교했을 때 거기에 대한 언급도 별로 없었고. 이야기를 세세히 짚으면 뭔가 아닌데 간신히 균형을 잡아 이 정도로 성공한 거지(…) 그냥 현재로서는 '10월 2기를 기대해 봅시다'.
영담산 : 확인은 2탄에서 ㅋㅋㅋㅋㅋ

마무리: 그리고 이야기는 한국의 현실 성토로…
엘리프 : 그리고 마지막으로 5) 우리나라에서는 죽어도 못나올 작품.
영담산 : 한국의 창의적 체험활동 수준으로는 나올 수 없지. 일단 중고등학생의 동아리 활동 자체를 배격하는데…
엘리프 : 아니 취주악 작곡 + 연주 역량 자체부터. 취주악 콩쿠르를 위한 작곡을 매년 겹치지 않게 다섯 곡이나 선정할만한 나라라는 거지, 아무래도(…)
영담산 : 그런 인력풀이 일본은 있다는거지.
엘리프 : 일본은 [ 전일본취주악연맹 ]에서 과제곡 선정과 악보 판매, 그리고 콩쿨 진행을 맡고 있음. 북우지고등학교가 있는 쿄토부에서는 관서지역대회에 보낼 세 팀을 뽑아[ 1 ], 그리고 북우지고등학교가 앞으로 나갈 관서에서 또다시 세 팀을 뽑아서[ 2 ] 마지막으로 전국에서 30개 팀이 경쟁[ 3 ]…
영담산 : 이야…… 아 진짜 탄탄하네. 진짜 일본 중등교육계의 이런 모습 보면 정말 부러워.
물론 관현악부에 한한 이야기가 아니라 창체라는 거시적 시점에서 전부…
엘리프 : 아니 중등교육뿐만이 아니라 전 국가적인 시스템이지. 대학?일반부도 치열하게 보니까.
영담산 : 그렇게 볼 수 있지. 여가활동 전반에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ㄹ. 이 작품은 쇼와 후기에서 헤이세이 초기(1980년대)의 향수로 무장한 게 느껴지는구나 싶다 정도?

엘리프 : 오케. 그럼 긴 시간 고생하셨습니다.
영담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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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15 17:33

'팬덤문화'


홍종윤(2014), 팬덤문화, 커뮤니케이션이해총서, 커뮤니케이션북스.


1.  간단한 책일줄로 생각했다가 깊이가 느껴져서 놀랐다. 

2.  한국식 팬덤 연구는 생각해 보면 서구쪽에서의 이론화와 일본쪽에서의 이론화가 섞여 있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봤을때는 대중문화쪽 팬덤 연구가 대세고, 따라서 서구 이론화 쪽의 이론이 보다 더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책에서도 서구쪽 이론이나 대중문화 팬덤이라는 현실이 채택되어서 우리쪽에 더 어울리는 '야오이'나 수공, 동인지 대신 '슬래시 픽션'(:14)이라는 애매한 이름이 쓰이고 있고, 코스프레도 팬덤에 전적으로 기반한 문화라고 절하되어 평가되고 있다(:32). UCC나 2차창작도 애매한 명칭인 '밈 비디오'로 불리고 있고. 그런 면에서 이 책의 한계는 분명하다. 팬덤의 집단지성 항목 개념도 일본문화 팬덤에서는 적용되지 않는 이야기뿐이고 말이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지나갈 수 없었던 이유는 문화연구이론에서 가끔씩 이름만 듣던 피스크가 의외로 중요한 이론가였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 책에 소개된 피스크에 따르면 팬 문화가 지닌 생산성은 기호[학]적 생산성(Semiotic productivity), 언술적 생산성(enunciative  productivity), 텍스쳐적 생산성(textual productivity)로 대표되는데(:2-3), 첫번째 지적은 그동안 기호학적 차원에서 ***과 기호작용을 강조했던 내 개념과 흡사하다. 그런 의미에서 피스크(1996), 팬덤의 문화경제학, 한나래 그런 의미에서 원전이던 텍스트던 읽어보기로 했다. 아울러 검색하다 나온 제레미 홀든(2013), 팬덤의 경제학(Second that emotion), 책읽는수요일 도 나중에 찾아보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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