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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콘텐츠/책들

뉴로트라이브 : 필요했던, 그러나 양가감정을 자아내는


이 책을 보고 나서 든 감상을, 나는 '양가감정'으로 줄여 소개하고자 한다. 거두절미하고, 책이 담은 내용은 그 뜻이 높고 깊은데, 책이 담긴 방식에 있어서는 아쉬움, 또는 고정관념이나 잘못된 용어 사용에 따른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여기서 책 리뷰를 끝낼 수는 없으니,  어째서 이런 판단을 내렸는지 좀 더 자세하게 소개하려고 한다. 


자폐성 장애에 대한 신뢰할만한 팩트북
   뉴로트라이브NeuroTribes. 직역하면 신경종족이나 신경부족이라고 읽히는 것이 마땅한데, 역시나 '신경부족'으로 번역하면 뭔가 자폐성 당사자들이 '신경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뜻이 될 것 같기도하고, 왜 자폐 장애와 '신경'이 관련되어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도 많아 그런 선택을 한 것 같다(참고로 자폐 장애가 내뇌 신경의 문제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미 신경의학이나 정신의학계적 연구를 통해 확증되어 있다). 어쨌던 이 책의 제목은 새롭게 만든 단어이기는 하지만, 신경적인 차이를 가진 사람인 자폐 당사자라는 콘셉트를 한번에 잡아낼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뉴로트라이브라는 단어는 한국어권에서도 '자폐'라는 단어를 대체할 수 있는 단어 후보군 중 하나로 편입될 것 같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자폐성 장애에 대한 숨겨진 역사나 자폐와 관련된 이슈들을 편견없이 잘 잡아냈다는 점에 있다. 물론 최근 20년간의 자폐성 장애에 대한 급속한 변화에 대해서 충분한 분량이 할애되지 않았지만, 헨리 캐번디시Henry Cavendish, 폴 디랙Paul Dirac, 휴고 건즈백 Hugo Gernsback이라는 사례는 자폐에 대한 인식을 전환하는 놀라운 발견이다. 아마 자폐 전문가들도 잘 몰랐을 인물들을 통해 자폐성 장애가 단순히 과거의 인식처럼 소아기에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발전과 함께 존재했던 장애임을 드러낸다.

   이어 이 책은(지금은 욕설이 되어 버린) 아스퍼거님의 발견과 카너의 발견이 각각 어떻게 이루어졌고, 아스퍼거의 발견이 어떻게 카너에 의해 사장 및 은폐되었는지를 설명하면서도, 카너의 개인사를 설명하며 이러한 결정을 카너가 내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한다. ABA에 대해서도 '유일하게 자폐를 개선할 수 있는 과학적인 방법'이라는 미국 연방 차원의 설명 대신, 개발자 로바스씨가 심리학 실험이라는 명목 아래 자폐 당사자들과 일반인들에게 진행했던 고문 수준의 실험 과정을 설명하며 상황 자체를 객관화한다. 그리고 자폐-백신논란이 왜 갑자기 떠올랐는지에 대해서부터 ( 나도 책을 읽고 나서야 알았다! )  최근의 [ 자폐인권운동 ]까지, 자폐성 장애와 관련된 전반적인 이슈를 설명하고 있으니 일종의 자폐연구 개론서로도 손색이 없다 ( 아마 이 책을 교과서 어투로 개조하고 몇가지 사진을 붙이고 제목을 바꾸면, 대학교 강의 교재로도 적절할 것이다 ) . 이 책에 있는 팩트들을 리프위키와 위키백과에 적용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뛰어난 책이었다. 

   재미있는 점은 이 책을 통해 자폐와 웹컬처의 연결고리가 분명하게 드러났다는 점이다. 책의 중앙에 위치한 6장 〈무선통신의 왕자〉는 과학소설SF: Science Fiction 과 무선통신HAM 문화, 그리고 프로그래머 문화의 발전에 자폐성 장애 당사자들이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이러한 변화와 변천은 멀리 떨어진 만화-애니계에서도 큰 차이로 느껴지지 않아서, 소위 '오타쿠'로 대변되는 만화-애니 동호인의 상당수가 자폐성 장애와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중요한 지적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어쨌던 간에 그 연결고리가 될, 일본 SF계의 당사자 중 자폐성 장애 당사자가 얼마나 있는지는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 일본-만화 애니계의 부스트에 큰 도움이 된, 점점 이 땅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일본 SF운동의 초기 참여자들에 대해 자세하게 연구할 연구자가 일본에서는 아직 없다는 점이 아쉽다 ( 참고로 내가 손대기에는 매우 어려운 지점이다 ).  어쨌던 이 책을 통해 앞으로 자폐성 장애와 만화-애니계문화 사이의 관계 또한 밝혀졌으면 하는 부분이 있다 ( 물론 구미권에서도 연구가 별도로 이뤄져야 할 것이다 ).

   한국사회에서 이 책을 보면서 뜨금하거나 마음이 어려울 부분도 있다. 자폐성 장애와 성소수자의 연관성이 나오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야 지금은 성소수자 문제가 개신교에 의해 한국 사회의 핫한 이슈가 되었고, 장애와 성소수자 문제가 전혀 다른 문제처럼 취급되고 있지만, 7장에 긴 분량을 들여 소개되고 있는 부분은 자폐성 장애를 '교정'하고자 하는 손길과 성소수자를 '교정'하고자 하는 손길(:413-417)이 사실은 동일한 의도와 효과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을 열어준다. 즉 한 사람도 측은하게 여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한국 교회를 포함한 소위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을 반증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 실제로 자폐성 장애인의 한국교회에서의 위치는 '존재하기를 원하지 않는, 혹은 외곽에 있는' 대상일 뿐이다) . 또한 자폐사에 이름을 남긴 자폐성 당사자 중 상당수가 유대인 배경을 가지고 있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한편 아쉬운 점도 있다. 이 책의 원작은 2015년 아스퍼거 증후군 삭제로 가장 큰 논란이 된 규정인 DSM-5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관련 파동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 오히려 DSM-5의 초안에 ASAN 당사자들을 통해 자폐 당사자들의 참여가 보장되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597). DSM-5의 변화는 ICD-11 개정에도 그대로 적용돼 ICD에도 아스퍼거 증후군의 삭제를 가져왔고, 2022년부터는 이에 따라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DSM-5의 변화에 대한 설명 부재는 곧바로 또 다른 문제로 이어진다. 이 책에는 경계선 장애 및 장애 진단에서 제외된 자폐 당사자들을 어떻게 여길 것인지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 않고있다. 경계선 당사자들의 수가 적은 것도 아닌데, 셀프진단이나 진단포기를 해야 하는 당사자들이 왜 논의에서 제외되었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등록장애인 또한 마음이론과 체계화 이론을 창안해 자폐 이해에 큰 도움을 준 배론코언Simon Baron-cohen이 이 책에 한 글자도 나오지 않는다. 매우 이상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폐성 장애인에 대한 팩트를 분명하게 제시한 이 책의 공로는 칭찬받아야 마땅하며, 이 책이 자폐 장애계와 함께 소위 '서브컬처' 계에도 꽤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뛰어난 미시사 연구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신경다양성의 시대에 아직까지 '자폐증'이라니 
  그런데 이 책의 번역은 필자에게 씁쓸함을 남긴다. 이 책을 보는데 있어서 내가 느낀 가장 큰 어려움은 620p에 달하는 본문이 아니라, 중간에 나오는 내가 알고 있는 개념과 다른 번역들이었다. 물론 과학소설을 탐독했을 분이라면 다들 알고 있을 '랄프'라는 공식 번역 ( 원제:〈랄프 124C41+〉, 한국어본은 '27세기의 발명왕'으로 검색하면 나온다 ) 을 '랠프'로 오기했다던가 하는 덕후스러운 지적은 내려놓자 ( 오타도 몇 곳 있었는데, 방대한 분량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나올 수 밖에 없다는 점은 출판계 언저리에 있는 입장에서 이해한다 ). 그러나 이 책을 통틀어 가장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자폐에 대한 최신 언어적 이해와 다르게 '자폐증'이라는 단어를 남발한다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번역이 이뤄질 수 밖에 없는 배경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역자 선생님은 의사 면허를 가지고 계시고, 의학계에서 아직까지 자폐증이라는 단어가 쓰이고 있는 점을 무시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근 행정부나 자폐학계, 장애계 모두가 이 단어를 '자폐성 장애'나 '자폐 스펙트럼 장애' 등으로 사용하고 있는 점을 감안했을 때, 그리고 자폐가 치료될 수 있는 병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런 표현은 자폐다양성이나 자폐 장애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추구하는 이 책의 취지와 맞지 않다. 다음 판에서는 '자폐 장애' 등으로 수정되기를 바란다. 자조Self-advocacy도 장애계나 우리 쪽에서는 이미 정착된 단어이지만, '자기 권리옹호'로 오역되었다 ( 아, 맞아. 사랑협회가 그렇게 썼지 ). 그나마 NeuroTypical을 '신경전형적'이라고 하지 않고 '신경정상적'으로 번역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 :567. 참고로 저 번역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 

   뉴로트라이브에 대한 표지의 텍스트 처리도 아쉬운 점이다. 특히 책등 부분의 제목 띄어쓰기는 '뉴로/트라이브'가 아니라 '뉴로트/라이브'라고 되어 있다. 잘못 읽었다가는 뉴○○이○로 오해하기 딱 좋다. 책등 부분만이라도 제대로 처리했다면 오해의 소지가 적지 않았을까 싶다. 

'슬픈 대한' : 한국은 아직 멀었다
  돌아가서, 이 책이 11장부터 담아내고 있는 자폐에 대한 세계적인 추세에 한국은 얼마나 따라오고 있는가? 놀랍게도 한국은 선진국을 내다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이러한 추세와 무관한 삶을 살아오고 있다. 9월 12일 발표된 발달장애인 평생케어 종합대책은 자폐성 장애에 대한 정부의 무지 정도가 심하다는 것을 전세계에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고기능성 자폐와 미등록 자폐 당사자에 대한 정책은 눈씻고 찾아볼 수 없다. 실제로 해외 자폐 당사자들에게 해당 대책을 보여줬더니, 매우 문제가 많다very problematic는 반응이 돌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발달장애인 포용정책을 표방하겠다며 16일 프랑스 국빈 순방일정에 자폐 감수성이 매우 떨어지는 프랑스의 자폐 당사자 대상 특수학교를 굳이 다녀왔다니 여러 의미에서 기가 막힐 지경이다.

   생각해보니 국내에서 자폐성 장애 당사자들에 의한 자조운동이 생기는데도 5년이 걸렸고, 미등록 자페성 당사자들도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게 얼마 되지 않는다. 해외와 달리 자폐성 장애 자조운동이라는 개념 자체가 발달장애인법 제정과 함께 지적장애인들에 의해 수입되는 방식으로 들어왔고, 자폐성 장애 운동이 이와 별개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지도 얼마 지나지 않았다. 해외에서는 자폐성 장애인을 위한 법률이 있고 지자체에서도 관련 정책을 입안하며, 자폐 당사자들을 위한 지원을 팍팍 해주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모습을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아니 그러한 추세를 따라가겠다는 의지 자체가 없다.

   8월 21일, 미국에서 '스펙트럼 여성'이라는 책이 출간됐다. 여성 전문가를 포함해 자폐성 장애를 가진 여성 작가들이 직접 쓴 글들에는 자폐를 가진 여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자신이 느낀 내용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이 국내에 수입되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국내 자폐 여성 당사자도 존재하지만 그들의 존재를 찾아보기가 힘든 상황에서,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시점에 이 책이 나왔다는 것을 감지덕지해야 하는 대한민국의 상황을 보니 한국은 아직 멀었다. 자폐성 장애인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한국 사회는 아직 신기루 속에 있다. (181017)

뉴로트라이브 - 10점
스티브 실버만 지음, 강병철 옮김/알마







Spectrum Women: Walking to the Beat of Autism (Paperback) - 10점
COOK BARB/Jessica Kingsl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