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2.18 22:13

로지피피의 알로하 오에, Full of Freshness




로지피피-ALOHA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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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번에 [ 퍼플 스위트 ]의 음반을 약간의 비판을 섞어가면서 이야기를 했던 슬픈 기억이 나는데, 이번에는 그와 달리 많은 내공을 갖추신(!) 로지피피의 음반을 듣게 되었다.

   로지피피라는 이름은 솔직히 중앙일보가 아니었으면 듣지 못했을 것이다. 아시다시피 중앙일보의 문화면은 <현문우답> 시리즈로 유명한 백성호 기자의 글쓰는 스타일을 보면 한번에 알 수 있듯이 개신교에 대해 비판적인 논조가 많은지라 거의 개신교에 대해서 다루거나 칭찬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 자체가 희귀한 일이기도 한 지면이다(지금까지 기억나는 게 옥한흠 목사님, 방지일 목사님, 김도현님 정도 뿐인 곳이다). 더군다나 이 문화면에는 아무 사람이나 싣지도 않으며, 대중문화 이야기는 가끔가다 한 번씩 기사가 나오는 곳이다.

   그 지면에 [ 상당한 지면을 들여 로지피피가 나왔다. ] 거기다가 그녀가 '개신교 신학'을 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이건 중앙일보가 이런 내용의 기사를 평소에 싣지 않는다는 면에서 대박인거다. 그만큼 깐깐한 중앙일보가 로지피피를 인정했다는 것 자체가 내가 로지피피를 눈여겨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녀가 성장한 스토리가 어쩌고 신학과 음악을 같이 하는게 어떤 의미가 있고 그런 이야기는 내려놓고 생각해보자. 일단 음악 면에 있어서도 여러 번의 다양한 싱글과 EP를 통해 많은 준비를 하고 나서 첫 정규앨범을 낸다는 점에서도 일단 누군가를 데뷔시키기 위해서 정규 1집부터 지르고 보는 우리나라의 그 구태한 모습과도 크게 달라보인다. 또한 그만큼 준비된 노래들이기 때문에 성숙한 음악을 들려주고 있다는 점이 음반을 들으면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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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세부적인 면에 있어서도 보통의 음반보다도 매우 만족스러운 면이 있다. 물론 로지피피의 음반에 있어서도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중음악을 싫어하게 된 절대적인 계기인 '사랑'이 노래 전반에 나오는 모습이나, 절가 형태를 이 음반의 곡들도 크게 답습하고 있다는 문제도 이 곡들에 내가 완전히 몰입하지 못하게 되는 일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메인 트랙인 <고양이와의 대화>는 이러한 단순한 내용을 고양이라는 새로운 화자의 도입을 통해 일부 해소하고 있고, 듣고 있다 보면 사랑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삶을 고양이와 나누고 있는 행복한 곡이다. 이런 식으로 노래하는 곡은 대중음악, 인디음악에서도 보기 힘든 흔치 않은 사례이다.

   어떤 분이 혹평을 하신 1번 트랙 <Hello>도 나는 좋게 평가한다. 특히 Hello는 이 곡중에서 쉽게 따라부를 수 있는 곡이라는 점이라는 면에서 큰 평가를 주고 싶다. 요즘 노래는 [ 같이 부르기 위해서 부르는 노래와 혼자 보여주기 위해서 부르는 노래 ] (나중에 쓸 글 링크) 로 나뉘는 것 같은데, Hello를 캠퍼스 워십 같은데서 사람들 불러놓고 부르게 시켜도 쉽게 배울 수 있고 쉽게 부를 수 있는 곡이다. 다만 전자 신호가 많이 쓰였다는 점이 자연성을 해치는 것 같다는 느낌은 든다. 새로운 반주로 접근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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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번 트랙 <어른아이>는 다른 곡들과는 달리 개인의 심리와 감성의 표현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에서 신선하고 , 4번 트랙인 <Falling in Love>는 가장 편하게 듣기 좋은 곡이랄까, 앞쪽의 다른 트랙들과 다른 목소리를 듣는 것만큼 신선한 분위기다. 특히 열애를 이렇게 조용하게, 느릿느릿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보통은 후렴으로 마무리하는 것에 비해 브릿지(후렴과 후렴 사이를 이어주는 부분)가 아웃트로(곡을 종료함)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신선한 충격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흐름은 이후의 <튤립>, <별과 당신>, <꽃잎>으로 그대로 이어진다. 특히 5-7번의 경우는 그냥 쉬고 싶을 때 4-7번 트랙만 무한반복하면서 들어도 괜찮을 듯 하다.

   8번 트랙 <Love fixer>는 다시 전자음악 분위기로 돌아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쿠스틱 기타가 적극적으로 쓰이기 때문에 그 점이 어느정도 묻힌다는 점 또한 로지피피만의 차별 포인트를 만들어내고 있다.  9번 트랙 <subiaco>는 로지피피의 1분짜리 사운드 믹싱이고, 마지막 곡인 <Goodbye>는 Hello부터 시작된 사랑이야기의 스토리텔링이 베드 앤딩으로 끝난다는 사실을 의외로 밝게 알려주면서, 동시에 음반의 종료를 알려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 다만 영어가사라서 신경 안쓰고 들으면 전혀 그렇지 않아 보인다.

   전반적으로 평가하자면 로지피피의 전체적인
음반이 사랑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비교적으로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음반 구성에 있어서 일련의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내고, 거기에 알맞는 노래들을 모아서 출시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접근 또한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음반 제작 현실(메인곡을 한 두개 만들고 나머지 곡들은 멤버가 만든 곡을 피쳐로 소개한다던가, 전혀 생뚱맞은 곡을 붙여 넣는다던가 등)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나아졌다는 인상을 받는다.

   또한 음악 반주에 있어서 VSTi도 상당수 들어가 있지만, 동시에 어쿠스틱 사운드의 사용이 잦다는 점도 크게 주목할 점이다. 특히 국내 음반의 제작에 있어서 이러한 하이브리드형 음반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심지어 인디음악의 1인자인 '장기하와 얼굴들' 같은 유명 인디들도 최근에는 어쿠스틱의 사용이 거의 전무한 편이다. 이런 점은 로지피피가 앞으로도 장기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 가수라고 판단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된다.

   또한 가사집도 일반 가사와는 달리 그녀의 손글씨로 작성되었다는 점부터 마음에 든다. 뭐 당장 표지커버부터가 그녀의 작품이고, 위에 올린 사진에도 있는 <Hello>의 가사는 아예 포스트잇 한 장에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았다. 이런 모습으로 음반을 꾸며놓는 것 또한 흔하지 않은 일인 것을 보면, 그녀의 개성이 얼마나 자유분방한지 깨달을 수 있다. 다만, 가사집에 있는 사진들의 컨셉은 보통의 인디밴드들과 같이 '자연스럽고' 편안하긴 했지만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하기에는 약간 거리가 있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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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음반에 대해서 자세하게 이야기를 해 놨으니, 마지막으로 내가 로지피피가 앞으로의 음반이나 음악 활동에서 바라는 점을 간단히 서술하고 마치자.
   첫째. 그냥 보여주기 좋은 음악보다 같이 부르기 좋은 음악을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특히 사랑 이야기보다 일상적인 이야기로 파고 들어가는게 좋을 것 같다. 1970~80년대 싱어롱 음반이 한 때 유행했을 때 올라온 노래들이 다들 그러한 노래들이었는데, 그런 노래들의 파급력을 재현해 낼 수 있는 가수가 필요해지기 시작할 시점인 듯 하다. 그 포인트를 해 낼 수 있을지, 그리고 그 시작점이 될 수 있을지와는 별개의 문제지만.
   둘째. 앞으로의 음악 활동에서 현재 기조를 그대로 이어가 주었으면 한다. 현재의 모습에서 크게 변화하는 것은 오히려 좋지 않을듯하다. 적어도 아이돌 식의 모습은 피해야 로지피피라는 이 음악세계가 잘 살아날 수 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기독교적인 음반까지 만들어주기를 바라는 건 내 작은 소원이다. 분명히 신학과까지 나왔으면 작곡한 찬양,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p.s. 이 음반에는 개신교 코드가 세 곳 들어가 있다. 첫번째는 <Hello>의 'I wanna show the Truth'(물론 가사집에서는 이걸 thruth(?)로 표기했지만)', 두번째는 <Love Fixer>의 '너는 뼈중의 뼈, 너는 살중의 살'(창 2:23), 마지막은 <subiaco> 맨 마지막에 나오는 <놀라운 놀라운 날이었네>의 '하늘 영광 내 안에 넘치네~'. 따라서(?) 가사집에도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는 빠지지 않는다. 참고로 알아두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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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2 21:32

무엇을 위하여 종은 울리나 물었다가는 큰일나려나 - 고 옥한흠 목사님의 소천에 즈음하여



 1. 옥한흠 목사님이 오늘 아침 많은 성도들의 중보기도에도 불구하고 결국 하나님의 품에 안기셨다. 그는 제자훈련이라는 한국 교회의 성장동력 하나를 만들어 놓으시고 사랑의 교회를 큰 교회로 만들었던 하나님의 종(Servus Dei)이셨다. 그리고 좋은 목사님들을 양성하셨고 성도들도 양성하셨다. 옥한흠 목사님이 그의 후임인 오정현목사님과 함께 하나님의 교회를 이끌어 오신 하나의 축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2. 그런데 나는 왜 옥한흠 목사님을 왜 지금 불러가셨는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다. 문득 비슷한 나이대이신 하용조 목사님이 생각난다. 그분은 옥한흠목사님보다도 더 건강하지 못하시고, 아프심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살아계시다. 그리고 다른 목사님들은 더 건강하게 살아계신다. 그런데 왜 지금이어야 했을까.

 이 시점에서 내 머리에 잡히는 생각이 하나가 있었다. 바로 사랑의교회 재건축이다.

3. 사랑의 교회 재건축은 그동안 많은 논란을 불러왔다. 왜 강남에 있는 교회가, 그것보다 더 비싼 검찰 근처의 장소에 들어가야 했는지에 대한 많은 논의를 불러왔고, 사람들은 한 교회 예산의 수십 배, 수백 배를 호가하는 2100억이라는 건축비에 놀랐다. 이에 반대하는 단체가 그 주위에서 자발적으로 구성되어서 움직였다. 그것도 불신자가 아닌 믿는 사람들, 특히 복음주의자들에 의한 반대다. 이 반대에 대해서 사랑의 교회가 보여준 움직임은 달랐다. 입을 막기에 바빴다. 오히려 반대 시위를 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성도들의 감정을 이용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교회 안에서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교회 직임을 박탈했다. 교회 건축에 대한 반대 의견에 대해 사랑을 보여주기보다는 무정함으로 대응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디모데후서 3 : 1~5, 개역개정)

 하나님께서 혹시 그 죄에 대해서 값을 물으신 것은 아닐까. 하나님께서 옥한흠 목사님을 통해 지금 자신들이 짓기 원하는 건물을 짓기 보다는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기를 원하신다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랑의교회 성도들에게, 그리교 교회에 말씀하시기 위해 무엇보다 사랑하신 그를 사용하신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면 내가 너무 이상한건가?

4. 어쨌든 하나님의 계획을 판단할 수 없다. 다른 이유로 부르셨을 가능성이 90% 이상이셨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질문을 한다면 곧바로 '이상한 사람'으로 판단을 받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지라, 그리고 [순종이라는 이유로] 너무 일직선적인 지시와 명령이 이상하게도 환영받는 상황인지라, 더 이상 더 많은 말을 했다가는 나도 그 바람에 휩쓸려 쓸려갈지도 모르니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자. 

5. 어쨌든 한번도 옥한흠 목사님을 볼 기회가 없었고, 어떠한 분인지 모르고, 사귀어 본 적도 없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목사님의 죽음을 마음으로 애도하고 싶다. 그리고 교계를 이끌어오신 하나의 큰 별이 떨어졌다는 것에 대해, 사랑의 교회에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모쪼록 하나님의 전에서 다시 만났을 때, 인사드릴 기회가 있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그 때 즐거운 이야기들을 아주 실컷, 나누기를 원한다.

 그러니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지 물어보려고 하지는 말자. 물었다가는 큰 코 다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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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14 23:16

Innocent Eyes, 개신교적으로 분석하기


들어가며

 ... 랄까 장난 같아 보입니다만 나름 진지한 분석물입니다. 그러므로 낚시글이 전혀 아닙니다.

  이 글은 Sid-Sound의 첫 오프라인 앨범인 Innocent Eyes(2007)의 주제곡이자 앨범과 동명인 Innocent Eyes를 개신교인인 필자가 저의 개신교인적인 관점에서 가사를 새롭게 해석해 본 것입니다. 이 해석 내용은 일반적인 해석 의도와 전혀 다른 것이며, 따라서 다른 사람에게 반감을 살 수 있는 내용이 존재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혹시 저작권과 관련해서 이견이 있을 수 있어서 이 부분에 대해서도 말씀드립니다. Innocent Eyes의 저작권자인 Sid-Sound[현 (주)이노센트 미디어]에도 이러한 시도를 하겠다는 언급을 관련자를 통하여 전달드렸고(이 과정에서 구두로 2차저작물의 생성을 허락받았습니다), 1차저작권을 존중한다면(아니, 그것과 상관없이) 그 위에 2차저작권을 세우는 것은 대한민국 저작권법에 의하면 전혀 불법이 아닙니다. 또한, 저는 1차저작물의 내용을 변경한 적이 없으며, 단지 이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고 있음을 통해 새로운 해석을 창출한 것임을 뿐임을 분명히 합니다.


본문 : 가사와 그 해석

서론 : 전반적인 주제

 "솔로몬의 아가라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 왕이 나를 그의 방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아 1:1-2,4a)

 
Innocent Eyes를 여러번 듣게 되면서 생각났던 부분들은 사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였다. 흔히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알아가는' 것으로 많이 표현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존재를 알아가는 것은 동시에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 중 우리에게 가장 크게 다가오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은 예수님께서 '온 율법과 선지자중의 강령'이라고 표현하시기도 했고 (마 22:37~40),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에서도 하나님의 성품을 딱 한마디로 표현한 말이기도 하다 (요일 4:8b). 사실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수없이 말하고 또다시 말하더라도 형언하거나 설명할 수조차 없는 부분이다(찬 404(304) 3절). 어쩌면 천국에 가서도 계속해서 언급해야 할 부분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Innocent eyes는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가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지, 그리고 그 만남 이후에 우리의 삶이 어떻게 바뀌는지에 대한 insight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좋은 노래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 나는, 이 텍스트 안에서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마음, 그리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자 하는 우리의 마음을 다루고자 한다.

 Innocent Eyes는 그러나 진한 사랑 고백은 아니다. 그 사랑의 대상이 하나님을 의도한 것도 아니었고, 하지만 조금씩 다가가려는 모습이다. 물론 마지막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 다가서지 못하는 죄된 인간의 습성일런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찬양이 아니다. 하지만 이 글에서 내가 시도하려는 것은, 오히려 이 짧은 텍스트에서 가지고 있을지도 모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마음, 그리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자 하는(호 6:1),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요일 4:8) 우리의 마음이다.


언젠가 그리운 하늘 아래서


 창세기에 명시되어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다 (창 1:1), 특별히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드시기로 하고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다. 이들은 하나님에게서 에덴 동산에 있는 과실을 먹을 수 있도록 배려되었다. 하지만 사단의 꼬임 떄문에 하와는 하나님께서 먹지말라고 하신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었고, 하와는 또다시 아담에게 이를 먹였다, 그리고 이들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고, 그들은 죄인이 되어 이 땅에 살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후손인 우리는 죄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의식의 여부를 떠나서) 부족한 하나님의 사랑을 찾고자 노력한다. 즉, 모든 인간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귀속본능이 존재한다. 
 따라서, 이 글에서 화자(앞으로 '나'로 대칭함)는 '그리운 하늘'이라는 말을 통해 하나님을 찾고 있는 우리를 형상화하고 있다.

따스한 구름 감싸안으며 잠들 때

  인간에게 특별히 하나님은 많은 은혜를 허락하셨다. 즉 지구에서 살 수 있도록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고, 또한 이들이 살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창조하여 부여하신 것인데(cf. 마 5:45), 이를 신학적인 용어로 일반은총, 또는 일반 은혜(Common grace)라고 한다. 반면,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 주는 특별한 은혜가 있다. 그것은 더이상 종의 영을 받지 않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특권(롬 8:45)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마귀와 영적 전쟁을 할 수 있는 특권(cf. 엡 6:10~1)이다. 이를 특별 은혜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나'는 아직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한 안타까운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모르는 새에 하나님의 그 은총을 누리고 있다. 여기에서 '따스한 구름'이라는 말이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하고 있다. 이 구름을 감싸안으며 잠드는 행동은, 화자가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있음을 알려준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애절한 속삭임

 그런데 '나'는 갑자기 애절한 속삭임을 듣게 된다. 이전에는 깨닫지 못했던 소리이다. 발견하고 싶어도 발견할 수 없었던, 아니 발견하고자 하는 마음도 없었던 소리이다.
 이것이 성령님께서 그 사람의 심령속에 역사하시는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전에는 들을 수 없었던, 성령님께서 탄식하시는 그 소리(롬 8:23)이다. 이전에 '나'는 그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 소리가 있는지 조차, 어디에 그것이 있는지 조차도 생각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속삭임은 이전부터 존재해 왔고, 그곳에 존재했다. '나'의 마음에서 울부짖고 있는 소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보고싶어 알고싶어 슬픔의 이유를

 그렇기 때문에 소리를 들은 '나'는 그 소리에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생각하게 된다. 누가 울고 있는 것일까? 왜 울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나'는 아직 어디에선가 그런 소리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그 소리가 왜 있는 것인지를 발견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바깥에서의 성령님의 말씀은 단호하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계 3:2))
 어쨌든 그것은 되어질 일이고, 아직 '나'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처음본 듯한 낯선 거리에서 / 슬픈눈을 한 그대가 나를 바라봐

 이윽고 '나'는 어느 장소 ('낯선 거리')에서 '그대'를 만나게 된다. 이 두개의 장소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단순히 어떤 낮선 장소에서 운명적인 상대를 만나는 것일까? 그 '그대'에 예수님을 대입해보자. 놀랍게도 해석은 너무나도 위대하시지만, 하나님의 예정으로 십자가에 달리게 된, 예루살렘 거리에서 십자가를 지다못해 여러차례 쓰러지게 된 한 서른 된 남자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슬픈 눈을 가지고 있었고, 십자가를 지고, 온 몸이 그의 피로 칠해져 있었다. 너무 고통스러운 가운데 걸어가던 중, 그는 '나'와 눈빛을 마주치게 된다. 그때 '나'는 어떠한 생각이 들었을까?
 그러나, 다음 부분과의 말을 고려할 때, 이러한 해석 이외에도 또 하나의 해석이 가능할 것 같다. 그것은 천국에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역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까 염려하시며 노심초사하시는 예수님과 그 옆에서 탄식하시며 구하시는 성령님의 모습이다. 그 모습이 왜곡되어서 '나'에게는 정말 낮선, 존재하지 않는, 마치 판타지 소설의 수도, 혹은 도시에서 볼 수 있는 곳에서 울고 있는 '그대'로 비취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다음 가사에서의 '그대'와 '나'의 반응이다.

가르쳐줘 꼭 끌어안는 그대 품 속을

 갑자기 '나'는 그대에 대해서 많은 호감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대'의 품 속을 갈망하게 된다. 그리고 그대에게 그 '품 속'을 가르쳐주기를 원하고 있다. 이것은 상상할 수 없는 전향이다. 이전의 해석과 연계하게 된다면, 갑자기 예수님에 대해 마음이 끌리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그 사랑의 품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사단과 세상의 공격으로 인해 그러한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씨 뿌리는 비유를 생각하라).
 그러나 이 가사의 시점에서 분명히, '나'는 그러하고 있다. 나중에 이 부분이 복선으로 작용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것은 기본적으로는 성령님의 감화로 인해 발생하는 마음의 돌이킴을 의미한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하나님의 감화에 기뻐하며, 하나님께 더욱 나가고 싶은, 그리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더 이해하고,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존재하고 싶은 마음을 일으키고 있다(불. 發心).

 (반면 '그대'의 입장에서 지금 '나'는 어떻게 비취고 있을까? 두가지 경우일 것이다. 첫번쨰는 '그대'가 '나'를 잘 알고 있는 경우. 이 경우에 '그대'는 결론적으로 신적인 존재, 즉 예수님이나 하나님 같은 존재이다. 두번째의 경우는 전혀 모르고 있는 경우이다. 이 경우 '나'가 보이고 있는 반응은 '그대'에게는 짝사랑 같은 것일 것이다. 두가지 해석 모두 다 개신교적인 해석에 도움이 될 수 있다. 특히 후자의 경우 다시 인간의 본성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보다 깊은 해석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나중에 별도의 문서로 시도하기로 하고, 지금은 전자의 해석을 우선적으로 채택하도록 한다.)

희미하게 적셔버린 눈물의 이유를

 그리고 그 하나님과의 대면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그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표상될 수 있는 '눈물'의 이유를 찾고자 한다. 그러한 이유를 알고자 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우리의 본능과 함께 성령님의 탄식이 하나되어 생겨나는 새로운 고도의 욕구이다.
 그렇다면 '눈물'의 의미는 무엇일까? 십자가의 눈물? 성령님의 탄식?(롬 8:26) 그런데 그 두가지의 가능성 모두 결론적으로는 하나이지 않았던가. 하나님의 인간을 사랑하시는 마음. 그러나 인간이 아담의 죄로 인하여 에덴에서 쫒겨나 발생한 모든 일들.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인간을 수도 없이 죽이셔야 했을 때의 슬픔들, 지금도 아직도 예수를 부인하고, 예수 믿는 사람을 조롱하고, 멸시하고, 부인하고, 때리고, 죽이고, 그리고 상처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만지고 싶지만 깊게 들어가지 못하는 사정, 또는 막고 중재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 이 모든 것이 응측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어쨌든 아직 '나'는 이를 알고 있지 못하지만, 이제 인식하게 되었다. 이것은 놀라운 하나님을 앎(호 6:3)에 대한 갈망의 진전이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기억에 스민 그 파동에

 그리고 여기에 하나님께서는 또 한가지의 역사를 '나'에게 보이신다. 그 중의 하나는 '기억'이다. 성령님의 가장 큰 능력이자 역할 중 하나가 '기억나게 하시는 성령님'이다(요 14:26). 그럼 성령님은 나에게 무엇을 기억나게 하시는 것일까.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아마 '행복했던 순간'일 것이다. 세상으로 나가 방황하기 전에 교회에서 행복하게 누렸었던 기억이 있는 사람에게 그 때를 기억나게 하실 수 있다. 또는 자신이 이전에 함께 있었을 때 행복했던 기억을 기억나게 하실 수도 있다. 그러나 성령님을 제한하지 말자. 예수님은 정말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멋진 일들을 보이시기 때문이다. 가능성은 무한하다.
 어쨌든 기억은 자신의 마음을 울리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정말 그 때가 그리웠는데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무언가 슬픈 마음이 터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눈물이 흘러나올 것이다. 그리고 울려진 마음에는 성령님의 파동이 남는다. 마음은 생명의 근원이기도 하다(잠 4:23).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여 메말라 가는, 사마리아 여인같은 마음에, 강도 만난자 같은 마음에, 진정한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이 찾아오신다, 그리고 그 터치는, 이윽고 잊을 수 없는 울림이 되어 그에게. 그녀에게 다가온다.

조심스럽게 숨겨둔 마음 그대에게 향했어

 그리하여 '나'는 이제 예수님께 다가가기 시작한다. 상처받고 메말라 있었던 마음이다. 하지만 세상의 풍조에 밀려, 종과 같이, 아니 거짓 아비의 아들로, 종의 영을 가지고 살아야 했기에, 결코 말할 수도 없었고, 표출할 수 없었던 마음이다. 그 마음을 이제 조심스럽게 예수님께 내놓기 시작한다. 꺼내놓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공개하는 폭은 점점 더 커져 나갈것이다. 예수님이 받고 그것을 치유하실 수 있다는 것을 '내'가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가사의 시점에서는 앞으로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웃음지어줘 언제나 지켜봐줘

 이제 1절을 마치고 후렴이다. 1절의 다가가는 모습들, 망설이던 모습들이 드디어 행동으로 옮겨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 중요한 고백들을 내놓기 시작한다.
 후렴의 첫 가사는 두가지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 즉 임마누엘(마 1:23)이시자 엘 엘로이의 하나님(나를 살피시는 하나님, 감찰하시는 하나님 : 창 16:13)이신 하나님이 항상 '나'를 지켜보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그분에게 자신의 삶을 내어드리는 것에 '나'가 동의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삶을 드리는 순종이며,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하나의 이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렇기에 곁에서, 가까이에서 나를 지켜보아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있다(롬 1:16, 막 8:38 & 눅 9:26). 그리고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다 (웨스턴민스터 소교리문답 #1).

그대의 온기 그대의 하늘 / 영원히 간직할수 있도록

 두번째 가사는, 또한 하나님을 마음속에 더욱 간직하고자 하는 '나'의 의지를 보여준다. 즉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직시함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을 마음에 새기고 (신 6:6, 렘 31:33)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와 실천을 보이게 된다. 그러나 연약한 육신이고 계속해서 죄를 짓기 쉽기에 우리는 성령님의 의지가 필요하게 되고, 이를 계속해서 remind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도 간직할 수 있도록, '그대'가 항상 옆에 있어주기를 원한다. 이것이 선지 에녹이나 할수 있을 것 같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요체이다.

의미없는 대화라도 익숙하진 않아도

 그러나 우리는 (다시 한 번) 연약한 존재이다. 따라서 아직 죄가 있으므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어렵다. 그나마 복음시대가 되어 이나마 나아진 것이지, 이 전에는 솔직히 소와 양을 잡는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지 않았던가? 지성소에 접근만 해도 죽을 수 밖에 없었던. 하나님을 보는 것이 죽음이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 비하면 우리는 너무나도 복을 받은 존재이다. 하지만 역시 우리도 하나님께 다가가기 어렵다.
 기도를 한다고는 하지만 맨날 비는 내용이 기복신앙적인 이야기니 속 깊은 이야기를 하나님께 털어놓기는 쉽지 않다. 경건생활도 하기 어렵다. Sunday christian이라는 말이 왜 생겼는가.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묵상하고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포기하기 쉽다. 이 가사는 이와 같은 우리의 연약함을 조명하고 있다.

그 목소리가 그 눈동자가 가장 좋으니까

 하지만 연약하고, 성장하지 못한 사람이라도, 어린 아이라도 예수님이 좋다고 당연하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가슴 깊이는 아닐지라도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나'도 '그대'가 끌려진다. 아직 그 깊이는 깊지 않다. 하지만 그는 끌려지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있다. 좋아하고 있다. 그래서 그 목소리와 그 눈동자를 가장 좋아하는 것이다. Just that is(그것 뿐이다).

지금은 단지 그걸로 좋아

 네. 고로 제발 '나'를 과소평가하지 말자. 하나님꼐 나가가는 것을 그만 둔다고 비난하지 말자. 우리도 항상 하나님꼐 나아간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진정으로 자신을 깨부스며 나아간 적이, 열정으로 하나님꼐 예배드린 적이, 눈물 흘리면서 기도한 적이 얼마나 되는가? 아마 항상 그래야 한다면 그리스도인이 될 사람은 한명도 없을 것이다. 항상 열정적이어야 하는, 신앙생활을 가질 수 없는 것은 우리가 더욱 잘 안다.
 He's changing me라는 노래를 알 것이다. 그 말 그대로이다. '날마다 주의 형상대로 변화되'어 가고 있는 우리이다. 그렇기에 너무 많이 바라지 말자. 너무 많은 은사. 너무 많은 은혜. '이방인들이나 구하는 것'을 구하지 말자. 단지 지금 상황에 만족하는 삶을 살자.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고, 내가 원하(고자 하)는 나의 삶에 대한 계획이다.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다해도

 그러나 그러한 만남은 더이상 이어지지 못하고,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곳을 떠나야 했다. 그리고 다시 그대를 만날 수없게 되었다.
 여기에 대해서 두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그러한 상황이 마치 하나의 꿈같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 된 것으로서, 이러한 만남은 단지 환상으로서 '나'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즉 예수님을 만났지만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두번째로는, '나'가 정말 '그대'와의 만남을 통해 사명을 받고 보내심을 받은 것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이 내용은 왜인지 찬송가 442(499)장 "저 장미꽃 위의 이슬" 3절을 기억나게 한다.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나 하나,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참고로 처음에는 나도 전자의 해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진행을 하는 과정에서 후자의 관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여기에 대한 최종 판단은 독자의 상상과 판단에 맡긴다. 그러나 일단 진행을 위해 전자의 관점에서 나머지 가사를 인식해 보자.
 이제 예수님과 만나는 기억은 사라졌다. 그리고 '나'의 기억에서 잊혀졌을 지도모르겠다. 어쩌면 정말 나도 인지하지 못한 무의식 속에서 일어난 것일 수도, 순간적인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아직 하나님을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하나님께 다가갈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알게 되었다 - 그러한 사실이 있었다는 것을.

상냥한 바람 모든걸 간직할테니

 그러나, 설령 전자와 같이 되었다고 해도, 실망하지는 말자. 그것은 그와 '그대'와 만났던 기억은 그에게 남아 있어서, 그를 결코 떠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항상 같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바람'은 성령님에 대한 매개체로 해석될 수 있다 (요 3:8, 그리고 다시 한 번 요 14:26.)

결코 사라지지 않을 작은 메아리가 / 기억속의 꿈을 향해 같이가 줄테니

 위 가사도 나와 같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성령님을 상기하게 한다. 그리고 '기억속의 꿈'을 통해, '나'가 예수님에 의해 예수님을 더욱 더 알고 신뢰하도록, 그리고 마침내 의인의 종말인 천국으로의 길, 즉 신앙생활에 부르심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메아리'는 사라질래야 사라질 수 없으며, 오늘도 나와 함께, 여러분들과 함께 같이 계시기 때문이다. (히 13:8)
 하지만 그 메아리가 작기 때문에, 우리는 세밀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왕상 19:12). 그러나 그 하나님의 음성은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왜냐하면 어제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며, 이후에도 계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계 4:8).

더이상 낯설지 않은 추억이 잠긴 거리에서

 그러기 때문에 내가 있는 자리는 더이상 낯설지 않게 되었다. 자신이 하나님과 만났던 그 자리가 자신에게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야곱이 하나님을 만났던 벧엘(창 28:10~22)과도 유사한 작용을 한다. 자신이 하나님을 만났던 자리가 다시 그를 하나님의 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즉, '낮선 거리'가 이제는 떠나고 싶지 않은, 떠났다가도 다시 돌아오고 싶어지는 '추억이 잠긴 거리'가 되는 것이다.

조심스럽게 숨겨둔 미래 함께 이루는거야

 그리고 그는 이제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는다. 열방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가운데 이루시기 원하시는 그 미래를,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쉽게 인정하지 못할 미래를 위해 같이 나아가기로 작정한다. 그리고 그렇게 나아가자고 동시에 '그대'에게 마음 속으로 외치고 있다. 비록 그 미래가 조심스럽게 숨겨두어야 할 것인지는 몰라도, 꿈꿀 수 있는 것은 이제 '나'가 내면에 있어서 많은 변화를 가지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언제나 웃음지어줘 언제나 지켜봐줘

 위의 내용과 동일하다.

희망을 향한 낯선 길에서 쓰러지지 않을 수 있도록

 그래서 우리는 그 하나님의 나라를 ('희망') 향하여 달려간다. 열방을 향하여 달려나가기 원하므로 그 길은 낮선 길이 될 수 밖에 없다. 아골 골짝 빈들이 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 곳에서 쓰러지지 않을 수 있도록 받쳐주시는 성령님을 '나'는 지금 이 시간에 구하고 있다.

빛나는 하늘을 향해 잠든 날개를 깨워

 하나님의 나라 ('빛나는 하늘')을 향해 이제 달려가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았던 날개까지 벌려 달려가고 싶다고 한다(행 20:24). 우리는 하나님께 창조받은 존재이다. 따라서 우리가 낼 수 있는 최대의 힘을 내는 것도, 그리고 자신의 능력과 지식도 모두 예수님께 있다. 그리고 그 '날개'(잠재의식에 숨겨져 있는 위대한 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를 '깨우'는 것은 하나님의 허락하신 섭리 안에 있는 일이다.

다시 한걸음 미래를 향해 다가가는 거야

 그러기에 작은 발걸음 하나의 중요성이 있는 것이다. 작은 발걸음 하나하나는 변화를 주지 않지만, 작은 발걸음들이 누적되었을 때 행로와 방향은 크게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는 명심보감 계선편의 "一日行善, 福雖未至, 禍自遠矣. 一日行惡, 禍雖未至, 福自遠矣."을 생각나게 한다.

슬픈 순간들 소중한 기억들 이젠 절대로 잊지않아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함께 한 시간은 내가 아닌 사람은 누구도 겪지 못할 시간이다. 하나님과 함께 지냈던 고난도, 슬픔도, 기억도, 환한 웃음도, 편안한 시간도, 고통의 시간도 모두 주님이 있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러한 시간들을 기억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사실들을 기억하는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 삶속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존재하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맡겨드리는 것이다. 더군다나 성령님의 역할 중 하나가 '기억나게 하시는 성령님'이라는 사실을 추가하여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기억하는 것은 중요한 역할을 점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 장빈 간사님의 [ 기기천 시리즈 ], ⓑ 그리고 할 일이 딥다 없다면 [ dnatree ]를 참조하기 바란다. 참고로 후자는 몰몬교(예수그리스도 후기성도교회) 교도 사이트다. 믿음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흔들릴 가능성이 높으므로 보지 않기를 추천하지만, 믿음이 바로 잡혀있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기록하는 것에 있어서는 이 사이트를 넘어설 곳이 아무곳도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간주
(언제나 웃음지어줘 언제나 웃음지어줘
 언제나 웃음 제나 웃음 제나 웃음지어줘
 언제나 웃음지어줘 줘줘줘줘줘줘줘줘줘줘줘줘줘줘)

 작곡자는 간주에서도 노래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 물론 이것이 녹음된 것이 아니라 편집된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간주의 노래에서 작곡자가 편집을 통해 의도하는 것은 무엇인가? '언제나 웃음 지어줘'라는 하나의 말이다. 왜 강조하게 되었는가? 언제나 웃음지어주면서 맞아주는 누구. 같이 있어줄 누군가를 찾기 위하여 의도하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군가'를 찾지 못하는 우리는, 그 영적인 욕구를 누군가 채워줄 것을 기대하면서 돌아다닌다. 하지만 가끔씩 일시적인 충족을 얻을 뿐, 완전한 충족은 얻지 못한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진정한 충족은 예수님만을 통해서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후렴 1, 후렴 2
(언제나 웃음지어줘 언제나 지켜봐줘
희망을 향한 낯선 길에서 쓰러지지 않을수 있도록
언제나 웃음지어줘 언제나 지켜봐줘
그대의 온기 그대의 하늘 영원히 간직할수 있도록)

 이제 노래의 끝부분이다. 세세한 내용도 여기에서 봤고, 강조에 대해서도 윗 단락에서 논했으므로 패스.

더이상 망설임 없이 껴안아 주고싶어

  그런데 위 후렴 1,2 에서 생각하지 못했던 충격적인 말로 이 노래의 피날레가 이루어지게 된다. 망설임 없이 나의 '사랑'을 껴안아 주고 싶다는 것이다. 물론 누구도 하나님을 예수님을 껴안을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가 천국에 올라가게 되었을 때, 우리는 껴안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을 누구보다 더욱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 것이 무엇보다 이 노래가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하지만, 동시에 두번째 해석이 존재한다. 아직 예수님을 알지 못하지만, 그분을 껴안고 싶다는 점에서, 아바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하고 떠돌면서, '껴안아 주고 싶은 사람'을 찾아다니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갈망은 아직도 가지고 있다. 결국은 죄 가운데서 빠져서 헤메는 사람의 깊은 심정을 대변해주는 것일런지도 모르겠다.

그 목소리가 그 눈동자가 가장 좋으니까

 패스.

지금은 단지 그걸로 괜찮아

  이제 노래의 마지막 단락이다. 그런데 이 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상당히 고뇌에 빠지게 되는 구문이다. 그 이유는, ① '그걸로 괜찮아'에서의 '그것'이 정확히 어떠한 상태인가, ② '나'의 입장과 위치는 미래지향적인가, 아니면 현재보수적인가, 라는 사실을 정확히 구별해낼 수 없는 데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이 해석의 난점은 우리가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다 해도' 구문부터 가지고 있던 전자와 후자의 큰 갭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는 일단 전자를 따르기로 했으니 다시 전자의 관점에서 돌아가서 보도록 하자.
 그런데, 그렇게 된다고 해도 위의 두가지 질문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거'ㅅ이라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인가? 하나님과 멀리하고 있는 상태 그대로 인가? 아니면 다가가고자 하는 상태인가? 아니면 그냥 방황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냥 일시적으로 상황을 봉합하고자 하는 것인가? 나의 입장은 그래서 이 상황을 해결하고자 하는건가? 아니면 외면하는건가? 아니면 어쩔줄 물라하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독자 여러분들께 맡긴다.
 (개인적인 전자의 입장에서의 답은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으나 다가가지는 못하는 보수적인 상황'이다.)

추억은 이제 영원히 있어

  마지막 문장에서 '나'는 가장 중요한 발언을 남기게 된다. 마치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정확하게 깨달은 사람처럼, 비록 내가 주님을 알고 있지 않을지라도, 주님이 나를 보호하심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했던, 삶의 모든 순간들이 영원히 주님께 있음을 '나'가 느끼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므로, 우리가 했던 모든 말과 행동, 그리고 생각 모두가 예수님께 있으며(시 139, 특별히 :1~4) 그곳에서 다시 경험할 수 있음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하나님은 존재하고 계시고, 우리는 그분의 특별한 준비에 의하여 창조되었고, 그 삶과 행동 모두가 하나님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에 의해서도 거절될 수 없는 것임을, 이 마지막 구절은 잘 지적해내고 있다.

결론

 그러므로, 이 노래는 드러나지 않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경륜, 그리고 모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작자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이 직선적으로 표현되거나, 정확하게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이 곡 자체가 그러한 의도를 가지지 않았고, 따라서 많은 경우에서 보는 것과 같이, 진리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에서 일시적인 진리를 찾아낼 수 있지만, 그 진리가 진리로서 비그리스도인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낮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분석을 통하여 우리는
    1) 진리를 감안하고 쓰여지지 않는 글에서도 충분히 진리가 발견될 수 있고,
    2) 그 진리가 충분히 설명되었을 때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는 두가지 관점의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 또한 우리는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그리고 경륜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다루었다. 그것으로 하나님께 감사하자. 그리고 하나님이 이 글을 통하여 어떠한 이들에게 하나님을 더욱 계시하여 주실 것에 대하여 기대하자.

2008. earpile de arsle.

후기
 
  블로그 포스팅 상 쓰는데 가장 김을 들였고 (2008년 2월부터 시작했으니 10개월을 달렸군요. 구상은 2007년부터 하고 있었습니다만..), 그만큼 노력한 글입니다. 드디어 이글이 끝나 세상에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퇴고를 할 짬도 나지 않고 이렇게 올렸으니, 당연히 처음에 썼을 때와 지금의 논조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혹시 이 글에 대해서 자세하게 코멘트 해주실 분이 있다면 환영할 일입니다. 또는 내용에 있어서 궁금한 사항이 있다던가, 토론등의 feedback이 있으셔도 환영합니다. 수정사항도 환영합니다. 다만 문제가 있을 사항은 알아서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젠 그만 발행해야죠. 글쓰느라 지겨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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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1 01:04

달라진 세대 간의 세계관, 위기의 기독교 (1)

 15일날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높은뜻 숭의교회 (제가 다니고 있는 숭의교회와는 전혀 다른 교회입니다.) 의 김동호 목사님의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원래 크기는 30분짜리던데, 그걸 유튜브 기준에 맞게 10분짜리로 줄여놓았더라고요. 랄까 역시 말씀은 모두 듣는게 좋아서.. 부득이 FIrefox에서의 실행을 위하여 mncast를 통해 업로드해 둡니다. (높은뜻 숭의교회 미디어팀 분들에게는 양해드립니다. 불여우에서 실행에 문제가 없도록 개선된다면 내용을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한국교회 위험하다>라는 제목으로 유명한 설교인데 원제는 <우리 한국교회 이대로는 위험하다> 입니다.



<출처 및 mp3 다운받기>

 왜이런 동영상을 먼저 올리느냐하면, 오늘,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할 개신교 관련 이야기의 주된 사상적 근본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공감하고 있는 부분, 혹은 저도 모르고 있던 부분을 꼭 집어주셨고, 이 부분이 저만이 아닌 거의 대부분의 개신교 청년 그리스도인이라면 현실을 살아가면서 고민하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 몇가지 내용을 인용해 보고자 합니다. 출처는 위 링크에 그대로 게제된 설교 원고입니다.

  71년도에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신학교에서 설교와 강의 그리고 기도를 통하여 제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선지 동산’이라는 표현이었습니다. 목회자로서의 소명감을 고취시킨다는 면에서 긍정적인 면도 있었지만 그런 표현을 통하여 우리 신학생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①영적인 우월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왜곡된 인식은 지금까지 전혀 개선되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와 같은 분위기에서 교육을 받은 목회자들은 자동적으로 교회와 교인을 섬긴다는 정신과 자세를 배우기보다는 싸구려(?) 부흥회에서 가장 많이 남발되고 있는 ②‘주의 종을 잘 섬기면 복을 받고, 주의 종을 거역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식의 사고방식에 감염되어 교인을 섬기려 하기 보다는 교인들로부터 섬김을 받으려하고 그것이 되지 않을 때 못 견뎌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기업을 하는 사람들은 원칙적으로 노골적으로 정치에 개입하지 않습니다. 특히 어느 한 쪽의 편을 들지 않습니다. 기업과 기업을 하는 사람이라고 정치적인 입장과 취향이 없겠습니까만은 사업을 하는 사람은 그것을 표명하지 않습니다. 저들은 자기들과 정치적인 성향이 같은 사람도 고객으로 보고 정치적인 성향이 다른 사람도 고객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자기들과 정치적인 성향이 다른 고객들을 포기하고 ③자기들과 정치적인 성향이 같은 사람에게 자기 회사 물건을 팔겠다고 생각하는 기업은 세상에 없습니다. 아예 회사 문 닫을 생각을 한 사람이 아니라면 기업은 절대로 자신의 정치적인 색깔과 성향을 겉으로 나타내고 표명하지 않습니다


  아예 저도 대놓고 [ 기독교 성도 여러분께 호소드립니다 ] 라는 포스팅을 통해 말씀드렸습니다만, 지금 보수와 진보의 개념은 아예 세대간의 개념이 되었습니다. 특히 두려운 것은 하나님의 진리는 어떤 세대나 문화를 넘어서 일정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특별히 그것이 분리되어서 인식되고 있고, 그 인식이 고착화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러냐고요? 보수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는, 혹은 교육을 통해 자동으로 습득된 반공, 즉 '빨갱이는 나쁘다'는 의식과, 이에 비해 진보주의자들의 피해의식이 부딪히고 있는데, 어느 한쪽도 이 싸움에서 물러서기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10대, 20대가 가지고 있는 한국에 대한 피해의식으로 인해 떠날 사람은 떠나버리고, 결국 남은 사람들은 대한민국을 이렇게 두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개념이 쉽게 이해가 가지 않으시는 분이 있을 겁니다. 그래서 이 포스팅의 목적은 이러한 세대적인 세계관 차이가 왜 빚어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차이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를 극복하고, 한국 기독교가 다시 부흥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입니다.


 한국 현대 사회의 강력한 이-이분법

 말 그대로 한국 현대 사회를 붙잡고 있는 강력한 하나의 이분법이 있다면 좌파와 우파입니다. 그리고 좌파에는 어느정도 못 사는 사람들이(?) 들어 있고, 우파에는 어느 정도 잘 사는 사람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이념지도 상에서 일반적인 기독교는 확실하게 우파에 속해 있고요. 물론 기장, 기독교 대한 복음교회, 그리고 일부 기감 교회 등의 좌파적 (그러니까 [ 이런 교회 ]가 있는게 기적입니다) 예외가 있습니다만.

 그럼 이 두개의 이-이분법은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우선 여러가지 인식 방법이 있겠지만 우파가 자주 아껴 쓰는 등분식 방법으로 이 '규정'들을 규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은 좀 심각하고 세지만 어떤 우파주의자가 써둔 등식 그대로를 인용해보지요.

오마이뉴스 = 국내 좌파 = 친중파 = 친북파 = 사대주의자 = 반미주의자 = 조선족 = 한족등 중국인 = 화교 = 뽤갱이 = 오랑캐 =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 = 동북공정에 찬성 = 한국을 중국의 속국이라고 주장 = 전교조 = 빨치산 = 좌파정권 = 학생운동권 = 김일성,김정일

중국과 북한까지에 대한 증오가 왜 나오는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그런 부분을 제외하고 정리해 보자면,

국내 좌파 = 반미주의자 =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 = 전교조 = 빨치산 = 좌파정권 = 학생운동권 = 김일성, 김정일

 이라는 어이없는 공식이 나오게 됩니다. 즉, 우파는 좌파를 친북, 반미적인 정권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국가의 기반을 허물고 있다고 해석합니다. 따라서 좌파는 없어져야 할 대상이 되는 거죠. 하지만 좌파의 입장에서는 어떨까요?

 그 오마이뉴스에서 [ 친일인명사전, 오늘 발간 못했습니다 ] 라는 기사를 보면서 몇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이 기고문 중에서 국가 건국에 대한 부분을 파악할 수 있는데요, 원문을 좀 인용해봅니다.

건국절 기념하면 김구 선생은 반국가사범 된다

최근 시국은 과거 친일세력이 득세하던 시절로 돌아가고 있다. 오직 반공만이 절대 가치인 수구 세력은 8·15의 진정한 의의는 1945년의 광복절이 아니라 1948년의 대한민국 '건국'에 있다면서, 8·15를 광복절 대신 건국절로 고쳐 기념해야 한다면 거품을 물고 있다. 여기에 실용(實用)아닌 실용(失用)으로 빠져버린 이명박 정권이 장단을 맞추고 있다.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꿔치기하는 것은 항일선열에 대한 모독이자 추악한 색깔론의 부활이며 지금껏 기득권을 유지해 온 친일파와 그 후계들을 다시 애국자로 둔갑시키려는 술책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이 전 민족적 해방을 가져온 8·15보다 대한민국의 수립의 8·15를 기념하자는 것은 대한민국은 일제와 항일투쟁 속에서 만들어진 자주독립국가가 아니라 해방 후 좌익과 투쟁하면서 세운 반공국가라는 점을 국민들에게 주입하기 위해서다. 이 경우 일제 강점기 악랄하게 친일을 했더라도 해방 후 빨갱이만 때려잡으면 반공애국투사이자 건국공로자로 둔갑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세계관의 시점은,
 1) 친일파들이 자신들의 친일행적을 감추기 위해 건국절 등으로 사실을 왜국하고 있다.
 2) 반북을 하면 건국공로자라는 말은 말도 안되는 말이다.
 라는 것입니다.

 즉, (우파적인) 좌파들의 입장에서, 친일파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은 이후 건국 과정에서 있었던 미국과의 결탁, 그리고 이후 벌어진 매카시즘적인 행태와 더불어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니 공산당 반대 세력이 결코 긍정적으로 읽혀질 수 없는 것이겠지요. 즉 현재 대한민국은 아직도 우파-반공, 좌파-친공(?)이라는 만들어진 구도에서 결코 벗어나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분법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파'에서 바라보는 이분법과 '좌파'에서 바라보는 이분법에는 긍극적인 차이가 존재합니다.

 우파에서는 아시다시피 반공-친자본주의-신자유주의 체계가 모두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반중적이고요. 하지만 좌파에서는 반공-친자본주의-신자유주의 체계가 모두 옳다고 생각하지만 다 틀렸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진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는 의외로 공산주의에 부정적인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우파를 친일파로 보고 이들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가집니다. 그것이 공산주의입니까? 아니요. 하지만 우파의 입장에서 그건 공산주의라고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서로 가운데의 심각한 생각의 차이는 이 차이를 더욱 깊고 크게 만드는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우파'는 좌파에 비해서 그 자질이나 그들의 가치에 있어서 긍정적인 평가가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주장하는 바가 간단하고, 이해하기 쉽기 때문에 좌파에 있어서 좋은(?) 포지셔닝을 점유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반대로, 좌파는 그에 비해서 부정적으로 포지셔닝이 되고 있기에 도매금으로 취급당합니다. 즉, 진보의 좋은 점은 항상 '공산당', '빨갱이'라는 이유로 무시되고, 자본주의를 빙자한 신자유주의가 오늘 날 우리나라 사회를 휩쓸게 된 이유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한국의 이분법이 다른 이분법과 비해 다른 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두개의 가치 (친공-반공, 이권자-서민 이데올로기)가 엇물리면서, 보수가 비판하는 진보나 진보가 비판하는 보수는 진보가 아니거나 보수가 아닌,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내 환상 속의 적'이 되어버린 겁니다. 물론 진보의 보수비판의 대부분에는 일리가 있지만, 그것이 객관적으로 보수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보장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즉, 우파와 좌파는 자신들이 모두 옳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확정시킬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넓은 하나의 인식상의 차이가 놓여 있습니다. 제가 작성한 표로 나름 정리해 보았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럼 왜 이러한 서로간의 차이가 한국 기독교에 위협이 되고 있을까요? 그리고 이 시점에서 기독교가 어떻게 행동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다음 이시간에 더욱 자세하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p.s 이 글이 앞으로도 상당히 길게 나올것 같습니다 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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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10 18:56

기독교 성도 여러분들께 호소드립니다

  사랑하는 기독교 성도 여러분! 감히 젋은 청년으로서 한 말씀 드립니다.

 저는 보수 개신교인들의 생각을 이해하고, 저도 그 '믿음의 기반'에 서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기도하시고 기대하는 다음 세대는 이미 '진보 기독교인'이지, 결코 여러분들이 원하는 '보수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전쟁을 경험하는 것 이전에, 많은 개신교 청년들은 '복음에 대한 부끄러움'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당신들의 행동에 대한 것이라는 걸 생각해 보신 적이 있나요? 이 부분이 해결되지 않는 한, 대한민국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건 여러분이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말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다음 세대'들은 이미 당신들의 생각에서 그 손을 돌렸습니다. 이에 대해 앞으로도 '어른이 옳다'라는 말로 그 생각을 무시하실 수도 있고,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확실히 알고 넘어가십시오. 앞으로 대한민국의 하나님의 나라는 청소년과 청년들을 향해 돌아설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과 그들의 사상이 '역설적으로'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걱정할 대한민국에 대한 하나님의 소망이자 하나님의 해결책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여러분의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길'로 여러분들을 이끄시고자 하십니다. 그것은 '내가 할 수 없다' 라고 속이는 사단에 의해 생겨진 두려움의 영역에 대한 하나님의 도전이요, 여러분의 자아에 대한 도전입니다.

다윗과 골리앗


 요즘 제가 매일성경을 따라 사무엘상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며칠전에 지나간 부분 중에 골리앗에 대한 부분이 나옵니다. 골리앗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이 잘 아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윗이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 17:45)라고 외쳤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왜 다윗이 그런 일을 해야 했을까요? 당시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이 골리앗을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삼상 17장 16절에 보면 골리앗이 나와서 40일 동안이나 이스라엘 군대를 위협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40일동안이나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섬기자, 내가 오늘 이스라엘 군대를 위협하였다(17:9~10)'라고 말을 들었던 이스라엘 군대가 두려워 떨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리나 진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셨고, '죄를 짓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는 모두를 살피시고 도와주신다라는 사실을 왜 하필 이스라엘 군대가 모르고 있었을까요? 그건 자신들의 두려움의 영역 떄문이었습니다.

말도 안되는 시위모습

하나님과 사람 중 무엇을 두려워 하십니까? <출처:뉴스앤조이>


 똑같은 경우입니다. 왜 북한에 대해 두려워 하십니까? 북핵 어짜피 폐기 단곈데 왜 북한에 대해 북핵폐기하라고 난리치십니까? 이미 선교사들이 북한 안까지 돌아가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고, 성경이 전국으로 퍼진 마당에 왜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이를 두려워하십니까? 여호수아와 갈렙이 그랬죠. '저들은 내 밥이다!' 그럼 우리는 왜 '북한은 내 밥이다!'라면서 북핵에 대해서는 왜 이렇게 두려워합니까?

 그건 여러분들이 그동안 배워왔던 '반공주의' 교육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고 싶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입니까?

 왜 북한 김정일이가 기뻐하는걸 두려워합니까? 하나님의 큰 숲은 보지 못하면서, 왜 작은걸 보고 두려워 합니까? 그러니까 성경에는 '두려워 말라'라는 말이 365번이나 나와 있지 않나요? 삶의 문제에 대해서는 두려워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왜 그런건 두려워합니까? 덕분에 여러분들의 모습은 현재 하나님이 아닌, '김정일이와 김일성이'라는 마귀와 사단을 두려워할 뿐입니다. 이게 바른 신앙의 모습입니까?

 저야 그리스도인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합니다. 저도 죄인이고, 주님 앞에 부끄러운거 많고, 거룩하지 못합니다. 근데 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언코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그 때문에 청소년과 청년들이 하나님 앞을 떠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생각과 자아를 지키다가 남이 어려운 꼴 당해서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면 그건 아니잖습니까? 바울 선배가 '믿음이 연약한 자가 있으면 우상의 고기는 먹지 말아라'라고 했듯이, 예수님께서 '영혼을 잃게 하는자는 지옥에 들어간다' 라고 했듯이, 거기에 대해서 더 두려워해야 하는게 아닙니까?

 존경하는 기독교인 여러분께 부탁드립니다. 여러분들의 시위를 멈춰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특히 이명박 대통령에 회개의 영이 필요합니다. 그가 '다음 세대'가 원하는 것인지 온전히 자신을 내려놓고 순종하지 못할 때, 하나님은 그를 곧바로 내리실 겁니다. 여러분들이 원하지 않지만, 여러분들이 그렇게 항의함으로서 그 속도가 점점 빨라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왜 이렇게 못 깨닫고 계시는 것인지 안타깝습니다.

 마지막으로, 혹시 여러분이 기독교 대한 감리회 교회를 다니시는 분이라면, 당연히 지금 여러분들의 그 시위는 교회의 뜻에 맞추어서 중단되어야 한다는 것을 고지해 드립니다. 지난 6월 5일. 감리교회는 그렇게도 여러분들이 반대하시는 '쇠고기 수입 중단과 한반도 대운하 철폐'를 찬성하는 입장을 고지하였습니다. 그 내용을 올려드립니다. 읽어가시면서 느끼시는 바가 있기를 원합니다.

&lt;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한반도 대운하 건설에 대한 감리교회의 입장&gt;


 끝으로,
 "극우보수로 사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면, 저는 그 길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떠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Let We joy "Cosplay with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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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03 23:00

전광훈 목사님, 죄를 지으셨습니다.

 글을 시작하기전에 몇가지 알려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이 글의 완성시기는 2008/01/30 01:17 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파장 부분이나 영향 등을 생각하면서 공개시기를 계속 늦춰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전광훈 목사님이 [ 다른 당과 합당하기까지 했다 ]는 어이없는 소식을 듣고 더이상 이런 상황을 내버려두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마침내 글을 공개합니다. 다만 몰지각한 일부 안티개독교도 여러분들의 트롤짓을 막기 위해 코멘트를 막았으니 이 글을 보시는 블로거 여러분들의 양해 부탁드립니다.

전광훈 목사님께.



 왜 이러한 길을 가셔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사랑실천당을 만드셨으니 이제 막을 수 없는 길을 가셨겠죠. 하지만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는것 같습니다. 이렇게 만들어 놓으신 정당을 통해 우리나라 개신교는 또다시 암흑속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겁니다. 왜 이러한 일을 하나님께서 일으키셔야 했는지 안타까울 뿐입니다.

 일단 논지를 이야기하기 전에 제 소개를 하고자 합니다. 저는 인천의 한 대형교회에 다니고 있는 청년이며, 태어났을 때 자폐를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나았음을 주님안에서 자랑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셔서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죄를 사하셨음을 전혀 부정하지 않으며, 기본적인 십자가의 도에 동의합니다. 또한 제가 다니고 있는 대학교에서도 예수전도단 소속으로서 봉사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어려운 성화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몇달 전에는 성경번역선교회에서 선교사 훈련도 받았고요.

 하지만 그런 저임에도 불구하고 전광훈 목사님의 논지에는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 우리나라가 보수-보수로 개판인 국가가 되어야 합니까? 왜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 아니라 보수와 극보수의 대립으로 대한민국의 시계를 수십년 뒤로 돌려야 하는겁니까? 저는 그런 이유에서 전광훈 목사님이 말하시는 논의에 전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일단 전광훈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그 논지를 먼저 정리해 보기로 할까요?
창당 취지문에서 "배가 고팠던 시절에는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었는데, 경제가 성장한 이후 신앙심이 떨어지고, 교회는 힘을 잃었다"고 했다. 또 "사회 일각에서는 친북반미사상을 가진 좌파들이 들고 일어나 난동을 부리며, 사회를 혼란시키고, 국가를 존폐의 위기로 내몰았다"고 덧붙였다.

"대통합신당은 다 무너졌는데, 이는 대한민국은 좌파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예수 안믿으면 빨갱이다" 등의 거친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정말 어이가 없다 싶군요. 더군다나 저 말로 하면 저는 전광훈 목사님께 딜레마를 가져다주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왜 그러냐고요?

 일단 제 정치노선은 이렇습니다. 반미, 반북, 진보. 저는 이것이 대한민국을 살리는 가장 옳은 길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저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을 가져줄 수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럼 저는 빨갱이인가요? 아니면 빨갱이가 아닌가요? 모르시겠죠? 뭐 정치노선을 봐서 저를 빨갱이라고 생각하실 수 있겠죠. 하지만 저는 빨갱이기를 거부합니다. 사회주의를 저주하고요. 그래서 반북이라는 노선을 명확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어떠한 사람일까요? 빨갱이? 아니면 좀 이상한 그리스도인?

 뭐 거기다가 한가지 더 추가한다면 이러한 예도 있습니다. 저는 민주노동당 당원입니다. 당비를 납부 안하고 있고, 요즘 하는 행동에 대해 절대 동의 안합니다만, 아직 당적에서는 아직 삭제가 되지 않았죠. 당번도 있습니다. 83835. 그런데 저희 교회 감독님은 (이제 은퇴하시지만) 설교에서 여러번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민주노동당 같은 애들은 없어져야 한다." 그럼 저는 어쩌라는 이야기입니까?  저는 음모를 꾸미는, 우리나라를 망치고 있는 녀석입니까? 아니면 어엿한 교회의 신자입니까?

 오늘날 우리 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원론을 가장 심각하게 적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예수천국 불신지옥의 Dogma를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그것이 이원론이 필요하지 않은 분야까지 확장되고 있는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게 가장 심각하게 적용되는 부분이 정치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요즘 청년들 중에서 최소한 제가 가까이 만나는 사람들 중에 보수쪽의 입장을 가진 사람은 (설령 개신교인이라고 해도) 만나기 어렵습니다. 제 인맥이 이상한 것일지도 모르겠는데, 제가 아는 웹 2.0 사이트에서는 12월 19일 6시에 이명박 당선인이 큰 표차로 당선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자마자 사이트가 '우리나라가 망했다'라는 내용으로 가득 찼습니다. 저도 어쨌든 그들의 생각에 어느정도는 동의합니다. 물론 권위는 세워졌죠. 그리고 성경에 따르면 우리는 권위를 위해 도고하고 기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과 관계없이 우리나라가 이명박 대통령을 통해 더욱 안 좋아질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안 믿기시면 제가 [ 12월 18일날 올린 글 ]을 보시면 정확하게 제 '사상'을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문제 하나 더 드릴게요.


 특히 다음과 같은 부분이 재미있네요.

이와 같이 희년을 기도하고 선포해야 할 한국교회의 일원으로서 한미FTA기독교공동대책위원회는, 교회와 기독교인들에게 한미FTA의 심각한 문제점을 알리고 한미FTA를 저지하기 위해 2006년 9월 4일에 창립되어 각종 활동을 펼쳐 왔다. (중략) 앞으로도 한미FTA기독교공동대책위원회는 나사렛 메시야 선언처럼,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성령 하나님께 의지하여, 반(反)희년적인 한미FTA를 저지하고 희년을 선포하는 예언자적 사명을 감히 감당하고자 한다. 이에 한미FTA기독교공동대책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국회에 촉구하며 한국 교회에 호소한다.

 전광훈 목사님, 이 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같은 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데, 그럼 이들은 빨갱이입니까? 같은 성령으로 하나되게 하신 하나님이 이러한 사람들을 허용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단이 저들을 속여서? 아니면 무엇? 저는 그 전에 전광훈 목사님이 가지고 계시는 이러한 생각에 더 먼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광훈 목사님, 목사님은 하나님 앞과 5천만 대한민국 국민 앞에서 공식적으로 죄를 지으셨습니다.

 먼저, 크리스챤 아카데미, 그리고 조지 오글 목사님(이전 저희교회 소속 목사로서 진보적인 노동활동을 하셨다가 추방당하셨던 분입니다), 그리고 여중생 사망 사건때 문제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예배를 드린 KNCC, 그리고 유신과 군부독재의 슬픈 과거속에서 반독재정권의 기치를 들면서, 고난당하고 고욕당한 수많은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마음으로 노동자를 위해 분신을 선택한 전태일 열사, 그리고 현재 진보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저를 포함한) 기독교인들을 정죄하시고,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선포하신 꼴이 됩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판단하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입니다 (약 4:11~2, 롬 14:10~3, 마 7:1~5)

 둘째로, '다음 세대'들이 계속해서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하셨고, 이를 통해 한국의 기독교가 계속 쇠퇴하게 하는 가장 큰 실수를 저지르셨습니다. 다음 세대 중에서 보수의 논리에 완전히 동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요즘 88만원 세대등의 논의가 나오면서, 보수층의 논리에 대해 반발하는 사람이 많아지는데, 거기에 기독교인들이 그 가치에 동의를 한다면서 불을 지르면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겠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떠나겠습니까? 전광훈 목사님은 정치참여를 통해 그러한 부분들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세계관에 대해서 정확하게 공부하셨다면 그러한 이야기는 나올 수 없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를 통해 안티개독교도들의 활동이 늘어날 빌미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사단에게 빌미를 주지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입니다. 실제로 저번 생명책 발언등으로 이미 전광훈 목사님은 인터넷에서 [ 부정적인 평가 ]를 받고 있는데, 이번 사랑실천당 건은 안티개독교도들이 반기독교적인 정책(?)을 펼쳐 나가는데 더욱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어짜피 이제 [ 반 이명박이 ] 판을 치고 있는 판에 더이상 이명박을 지지해 보았자 청년들이 예수님을 지지하는데는 반감과 반대를 사게 할 뿐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이제 한국 기독교는 이러한 씨를 심었으니 거둬야 하겠고, 그 책임은 앞으로 일할 우리같은 청년 그리스도인들이 다 뒤집어 써야 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간단히 말합시다. 저희 다음세대를 살리려고 한다는 껍질을 쓰고 죽이려고 드시는 건가요?

 항상하는 이야기지만 그리스도인들이 다음세대를 너무 모르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고, 앞으로는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지는 않을텐데... 라고도 생각합니다. 어쨌든, 전광훈 목사님의 지금 행동은 앞으로도 한국 기독교에 큰 상처를 남길 것입니다.

 이야기를 정리해야겠습니다. 사실은 처음 제목을 "저는 전광훈 목사님을 목사라고 부르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려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권위를 세우신 하나님꼐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제목을 바꿨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현재 한국 기독교에 문제가 있다는 것과, 그 문제에 전광훈 목사님이 불을 지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끝으로, 최근 감명을 받은 고신 헌법을 인용하며 (전광훈 목사님이 어느 교단 소속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이 글이 나단 선지자와 같은 역할을 하여 그 죄에서 돌이키는 기회가 되길 다시 한 번 기도합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교회 정치 원리 8개조는 다음과 같다.

제1조 양심의 자유
양심을 주재하시는 이는 하나님 뿐 이시다. 그가 신앙과 예배에 대하여 그 말씀에 위반되거나 탈선되는 사람의 명령이나 교리를 받지 않게 양심의 자유를 주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종교에 관계되는 각 항 사건에 대하여 속박을 받지 않고, 각자 양심대로 판단할 권리가 있으므로 누구든지 이 권리를 침해하지 못한다.

(중략)

제4조 진리와 행위
진리는 선행의 기초이다. 진리가 진리 되는 증거는 사람으로 성결하게 하는 경향에 있으니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하심과 같다. 진리와 거짓이 평등하다고 하거나, 사람의 신앙이 어떠하든지 무관하다 하는 이 말들보다 더 패역하고 모순된 것은 없다. 신앙과 행위, 진리와 의무는 서로 연결되어 분리될 수 없다.


끝으로 : 이 글은 종교관련 글이므로 안티개독교도등의 난동을 막기 위해 코멘트를 받지 않으며, 모든 의견을 트랙백으로만 받도록 하겠습니다. 서로 가운데서 토의를 통한 올바른 블로거 문화를 세워 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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