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생인공언어론에 대해 올해 초에 쓴 글입니다.
네이버에 올렸던 글을 다시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내용이 많아서 요약글 모드니 알아서 펼쳐서 보시길.
신생인공언어론에 반대하며 : 언어와 문화
Ellif
이번에는 신생인공언어론에 대해서 생각해볼까 한다. 인공언어를 애호하고, 만드시거나, 혹은 Conlang에 대해 관심이 있으신 일본의 여러분들은, 당연히 신생인공언어론 사이트를 알고 계실 것이고, 이와 함께 아르카와 serix에 대해서 아시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모르는 한국어 사용자들과 기타의 여러분들이 있으리라 생각되므로, 신생인공언어론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드리고 넘어가고자 한다.
신생인공언어론( http://lanxante.higoyomi.com )1)은 일본의 세렌(セレン)씨에 의해 만들어진 사이트로서, 일본의 인공어 사이트중 하나이다. 이 사이트는 인공어에 대한 자신의 의견, 그리고 serix와 아르카를 개제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여타 다른 인공어 제작자들의 것들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 사이트의 어조는 일반적인 ‘사이트’의 그것과 똑같지 않다. 일련의 글들에서 가장 크게 드러나는 세렌씨 특유의 주장은 ‘언어는 문화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기존의 natlang이 가지고 있는 문화가 인공어에도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 주장의 주요 논지이다. 실제로 세렌씨는 에스페란토 등의 auxlang의 퇴화가 다름 아닌 에스페란토 특유의 문화(?)의 부재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어찌 보면 이 주장은 실제로 맞는 것일 수 있다. 또한, 새롭고 알맞은 언어를 만들기 위해서 세계관등의 ‘일종의 문화’등이 필요한 것은 적어도 Artlang에게는 적용되는 것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 사례를 들어 그것이 완전하게 그렇다고 보기 힘들듯이, 세렌씨의 주장에는 이러한 귀납법적 논리를 적용하는 데에 있어서 이에 대한 과장과 문제를 느낄 수 있다.
나는 세렌씨에 대해 비방이나 폄하를 하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없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의 주장에 약간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이를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에 대해서 한번 즈음은 다루고 싶었고, 세렌씨가 일본 Conlang계에서 은퇴를 발표하신 김에(근데 하신거 맞나? 본인은 복귀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에 대해서 다루고자 한다.
인공어의 특성 : 인공어는 인공어니까 인공어지~
인공어는 인공어이다. 이 짧은 한 문장 안에는 별로 큰 이야기가 없는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인공어가 다른 것에 비해서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는 특색이다. 인공어는 언어이지만 인간이 자연스럽게 생성한 언어가 아니라, 한명의 인간이, 아니 많아봤자 수십 명에 지나지 않을 사람들이 하나의 언어를 급격하게 생성해서 사용한다는 점에서 당연히 기존의 자연어와는 차이가 나지 않을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는 Auxlanger이기보다 Artlanger로서, 나는 일본의 라이트노벨 작가이신 신세이 카즈마(新星カズマ)씨가 그의 HP (http://sanpo.electric-cat.org)에 게재한 인공어 강좌를 좋아한다(그래서 이 글을 제본해서 지금 이곳으로 가져왔다). 그도 인공어는 ‘문법과 어휘, 사용자와 그에 따른 문화’를 창조한 것이라고 그 글에서 설명하고 있고, 이 de facto에는 아무런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에 벌어진다. 이것이 Artlanger와 Auxlanger들의 의견이 갈라지는 시작점이기도 하고, 아마 세렌씨와 나 사이에 가지고 있는 의견의 차이의 시작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인공어는 어떠한 목적으로 만들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그리고 계속되었던 Artlanger들과 Auxlanger들의 오래된 의견대립에 대해서는 길게 논하지 않기로 하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Artlang은 개인적이고 ‘즐기는 언어’쪽에 더 가까운 반면에, Auxlang은 번역어인 ‘국제 보조어’라는 말 자체에서 들어나듯이 ‘인류의 언어 통합’이라는 ‘큰 목적’을 두고 있다. 결국은 개인주의와 전체주의의 차이라고 할까나.2)
어쨌든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씩 시작된 언어가 현재까지 수천 개에 이르고 있어서, ‘사라지는 자연어가 인공어의 수로 유지되고 있다’라는 농담도 쉽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인공어계는 성장했다. 그런데 왜 성장하고 있는지는 아직 이러한 언어를 만들고 있는 사람들조차 잘 모르고 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성장하고,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Artlang과 Auxlang의 성장 견인의 요소가 엄연히 차이가 난다는 점이다.
Artlang은 의외로 ‘리얼리티’3)를 추구하는 판타지소설이나 만화 등의 초현실, 혹은 신현실(Neo-reality)적인 이야기의 세계관을 세우기 위해 만들어지는 경우가 그 주요 경우라 하겠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즐기기 위해 만드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경우에, 그 언어는 공개될 수도, 공개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게 아쉬운 일이기는 하지만.
반면에 Auxlang은 그와는 달리, 거의 ‘바벨 이전의 상태’로 언어의 상태를 돌리는 이상에서 시작한다, 따라서 ‘사람들이 함께 즐거이 사용할 수 있는 언어’를 만들고 싶다는 동기를 가지게 된 사람들이 주로 만들게 되는 경우이다. 이러한 사람이 별로 많은 것 같지 않아서 Auxlang의 성장속도가 느린 것 같아 보이기도 하는데, 의외로 Auxlang은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에 비해 빠르다. 일찍이 한국의 나비학자이자 에스페란티스토인 석주명 씨는 ‘다른 Auxlang들은 사라지고 Esperanto만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라고 여러 번 기고를 했지만, 그가 고사되었다고 말한 다른 언어들은 볼라퓌크(volapük)만 빼고 다 남아있는 것으로 안다. 특히 ido는 작년에 데이빛씨에 의해 한국에 소개가 되었을 정도로, 어떤 의미에서의 ‘재기’를 노리고 있다. 그리고 다양한 새로운 언어들이 생겨서 조금씩 보급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 언어의 배열로 쉽게 그 품사를 알 수 있게 하는 논리어들도 있다.
그러한 것들 중에서 특히 지구어(http://earthlanguage.org)의 경우는 주목할 만한 것으로서, 2006년 5월에는 호주의 한 초등학교에서 교육이 이루어졌고, 동해 9월에는 일련의 독일 Esperantisto들이 지구어를 배우기 시작했다.4)
그런데 일본 Conlang계에서 지금까지의 Artlang-Auxlang 분류 너머에 있는 새로운 언어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2005년에는 2ch에서 gumosopo가, mixi에서는 mixic이 집체창작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는데, 이 언어들의 분류를 무엇으로 해야 할지, 나는 아직 아무런 견해가 서지 않는다. 물론 이 경우에는, 인공어의 창작이 진행 중이고, 사람들의 협력을 통해 진행되는 것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 구분이 가능해질 수도 있다(그리고 나는 그렇기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아르카 같은 경우에는 전자의 경우와 비슷한 것 같아 보이지만,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인다. 세렌씨 자신은 Auxlang을 원하지 않았고, 나도 이 언어가 auxlang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언어의 ‘문화’를 철저하게 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수인의 사람들이 이 언어를 제작하는데 참여했다는 점에서, 이 정도라면 단순하게 ‘이건 Artlang이야’라고 결론을 내릴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에 대한 문제를 전반적으로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일단 세렌씨의 주장대로 인공어가 그 인공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특유한 문화’와 관련성이 높다는 가설 하에서, 이를 검증하기 위해 신현실적인 면모를 보이는 다른 매체들과 필요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내가 주목해보고 싶은 다른 매체들은 다름이 아닌 판타지 소설과 TRPG이다.
판타지, tr, 인공어, 그리고 세계관
그런데, 결국 이 복잡해지는 이야기는 ‘세계관’이라는 한 단어로 수렴된다. 그리고 이 세계관은 우리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문화’에 가장 근접한 단어일 것이다. 그리고 판타지, TRPG5), 그리고 인공어 모두는 (가설에 의하면) 신현실을 가정하고, 이에 따른 세계관을 구축하기 위해 사용되는 도구로 볼 수 있겠다. 즉, 이러한 도구들은 최근의 온라인 게임 열풍이나 문화콘텐츠 분야의 확대 등을 불러오고 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이러한 매체 내지 도구의 사용이 조금씩이나마 증가되고 있는 데에는 최근의 사이버 열풍, 탈현실주의적인 성향에 맞닿아 있다.
그러면 왜 우리는 현실에서 나가고자 할까? 단순히 현실이 고달프고 힘들어서가 아니라, 그 탈현실에 빠져들었을 때 주어지는 보상에 더욱 더 우리가 주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렌씨의 가설이 맞는다면, 인공어도 ‘탈현실을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 즉, 다른 세계관은 다른 사고방식, 그리고 다른 행동방식을 불러오고, 이에 따라 우리를 기존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게 한다, 그리고, 기존의 세계관에서 벗어나게 한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부정하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서, 판타지 소설을 우리가 보고 있을 때, 우리는 현실의 룰을 판타지 소설에 적용시키지 않는다. 물론 기본적인, 그리고 마지노적인 어떤 기본적인 상식은 있겠지만, 판타지 소설은 우리에게 신현실을 제공하고, 우리는 받아들인다. 기존의 ‘사람과 사람’이 있는 ‘빌딩의 숲’에 우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엘프와 드워프, 그리고 페어리, 드래곤등의 다른 ‘존재’가 같이 있는 ‘나무의 숲’, 또는 ‘작은 성’, 그리고 또 다른 곳으로 우리를 데려 놓는다. 그리고 새로운 사회의 룰을 제시한다. 특정 종교를 철저히 받아들여야 한다든지, 신분제에 순응해야 한다든지, 어떤 비현실적인 상황에 접한다든지,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기에 모욕적인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등의 룰이 주어진다. 하지만 우리는 관조자로 서있기 때문에 이 상황에 반감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리고 굳이 애써 주어진 상황에 반대하지 않는다. 자기가 싫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이 룰을 받아들이고 기쁘게 등장인물의 이야기들을 읽어나간다. 그리고 우리도 그 자리에 있기를 희망한다.
TRPG는 좀 더 이것보다는 구체적이다. 하나의 캠페인을 하기 위해서, 일단 tr이나 or에 참가하고자 하는 사람은 캐릭터 시트를 만든다. GM은 참가자들에게 참가자 자신의 능력을 위한 포인트를 주고 제한하며, 자신이 tr에서 어떠한 사람으로 있을 것인지, 어떠한 역할을 맡아 활동할 것인지 등을 만들어 제시하게 한다. 또한 플레이를 진행하기 위한 여러 가지 룰을 참가자들에게 제시한다. 그리고 참가자들은 이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tr을 시작하는 순간, 이미 참가자와 GM은 어떻게 말하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비록 그것이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이미 GM이 창조한 새로운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우리’와는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다.6)
자, 그런데, 그렇다면 인공어의 경우에는 이러한 논리가 동일하게 적용될까? 일단 세렌씨의 주장은 그렇다는 것이었다. 하나의 언어는 문화를 담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인공어’라고 하더라도, 언어인 이상 그 나머지의 규칙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렌씨는 아르카를 통해 이를 증명해 보였다. 아르카의 언어에는 문화가 붙어 있었고, 그리고 이러한 문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수준보다도 더 숙련된 것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문화는 ‘부동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언어는 문화와 동시에 유동적이다. 언어는 얼마든지 사용자의 합의에 의해 바뀔 수 있고, 따라서 이러한 문화도 변화될 수 있다. 그러면, 인공어에 문화가 있다면, 이 역시 변화해야 하지 않을까? 세렌씨는 이 부분을 놓치고 있다.
TRPG도 지금까지 일부의 플레이어들이 국내에서 맥을 이어 왔지만, 시간이 지나고 사람들이 이에 대해 관심이 없어진다면 한국 내의 TRPG 문화는 사라질 것이다. 한국의 판타지도 이러한 운명을 피할 수 없다. 결국 사람들의 관심을 사로잡지 않는다면, 한국의 판타지를 중심으로 한 문화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일본의 라노베나 만화-애니메이션 계열도 피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할까. 결국 Natlang도 사라지며, 인공어도 사라지는데, 굳이 이러한 부분에 대해 왜 세부적으로까지 설정할 당연성이 있는 것일까?
좀 더 이러한 설명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세렌씨가 그렇게 지적한 에스페란토의 ‘무문화성’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에스페란토, 톨킨, 그리고 문화
사실 에스페란토에는 문화가 부재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KEA (Korea Esperanta Asocio, 한국 에스페란토 협회)의 회지인 La lanterno azia에서 보았던 한 가지 아티클이 생각났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한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기 때문에 그 부분을 인용해서 수록한다.
가장 높은 수준의 문서에서도 번역의 정확성은 의심스럽다. 나는 유럽에스페란토연합의 간사로서 유럽연합의 교육위원인 Ján figel'에게 보낸 편지에서, 유럽연합이 “인공어에는 문화적 업적이 없다”라고 한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은 네 가지를 질문했다.
1. 그 주장에 근거한다면 인공어는 어느 언어들인가?
2. 인공어와 다른 언어들과의 차이를 누가 어떻게 정의하였는가?
3. 어떤 회합을 거쳐서 유럽위원회가 그와 같은 주장을 채택하였는가?
4. 만약 유럽위원회가 에스페란토를 말 그대로 문화적 업적이 없는 인공어라고 생각한다면, 에스페란토로 쓴 원작서적들, 위키백과에 있는 과학기사들, 그리고 인터넷에 있는 수백만편의 에스페란토 글들은 문화와 상관없는 허깨비인가?
(La lanterno azia, 2006. 11. 20p)
상기 글에서 보았듯이, 이 글의 작자는 세렌씨의 이야기와는 전혀 반대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에스페란토로 된 문학이 있으며, 온라인 커뮤니티와 커뮤니케이션이 존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에스페란토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에스페란토를 모국어로서 배운 사람도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에, 에스페란토에는 문화가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세렌씨는, 이러한 ‘표면적인 문화’가 있지만, 아무리 모국어로서 배운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처음의 Natlang을 배운 사람의 문화에 ‘도구로서의 언어’만이 붙여진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이 지적은 올바른가?
아니, 그에 앞서서, 우리는 무엇을 문화라고 해야 하는가? 지금 이 문제부터 시작해서 상당한 혼란을 우리가 겪고 있는 것 같다. 에스페란토 쪽의 ‘문화’와 세렌씨의 ‘문화’의 뉘앙스부터 차이가 난다. 그리고 우리는 이 단어에 대해서 각기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자세한 이야기를 하기에는 역시 이야기의 흐름상이나 내 지식 상에서도 부족함이 있기 때문에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도록 하지만, 역시 ‘cultivate(경작하다)’와 ‘文化(글 적인 것이 되다)’의 차이가 여기에서 드러나지 않나 싶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영향을 받고 있는 동아시아권의 국가들, 그리고 그 국가의 국민들(나 역시 또한)은 역시 이 文化라는 단어 때문에, 어쩌면 뭔가 ‘고상한’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조심스런 이야기지만, 세렌씨의 이러한 주장도 여기에서 기원하여 드러난 것이 아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다면, 역시 세렌씨의 주장에는 역시 일반적으로 그냥 넘겨버리기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고상한 문화’의 입장에서 분명히 우리가 문화를 생각해 본다면, 세렌씨의 주장은 당연하다. 그리고 우리도 그러한 기준에서 언어를 당장 만들기 시작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완전한 존재가 아니다. 그리고 따라서 나는, 그리고 우리는, 심지어 세렌씨마저도 완전한 언어를 만들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인공어들과 그 언어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를 결코 ‘완성할 수’ 없다. 즉, 어떠한 의미에서, 세렌씨가 원하고 있는 ‘이상적인 언어’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 신세이 카즈마씨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분명히, ‘인공어는 완성되지 않아도 괜찮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인공어는 완성될 수 없다. 물론 우리가 최대한 인공어를 구성하고, 그리고 인공어에 맞는 문화를 만드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우리는 그것을 완전히 이룰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어쩌면 그러한 것에 시간을 투자할 시간에, 다른 일을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좀 뚱딴지같은 인용이 되겠지만, 이 시점에서 톨킨의 글을 인용하기로 한다.
...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조각의 모든 것이고, 영감에 의한 기본적 언어학에 대한 내 일에 대한 중요한 '사실'일세. (중략) 이것은 어떠한 사람의 일과는 꽤 다른 안도의 배출구(relief-outlet)로서의 '취미'가 아니지. 언어를 고안(invention)하는 것은 창립(foundation)하는 것일세. 그 '이야기'는 언어를 위한 세계를 제공하기 위해 만들었던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었네. 나에게 있어서는 이름을 짓는 것이 먼저였고 그 다음이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었네. 나는 '엘프어'로 (글을) 쓰는 것을 더 좋아했네. 하지만, 당연히 반지의 제왕의 경우에는 수정이 되었고, 많은 '언어'는 내가 독자들이 싫어할 것으로 생각해 버려졌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더 좋아한다고 생각하지만) (중략) 어쨌든 나에게 있어서는, 가끔씩 '이게 무엇인지(What is it all about)' 나에게 묻는 사람들에게 말해주는 대부분인, '미의 언어학'으로서의 수필일세. (Letters:219-220, Quenya Cource introduce에서 재인용)
톨킨은 사실상, 현대의 문화를 세운, 비틀스와 비교될만한 거장이다. 그는 언어를 좋아했고, 어려서부터 인공적인 언어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7) 그리고 핀란드어(suomi)에 빠졌고, 그때부터 상상의 역사를 만들었고, 퀜야(Qenya)제작에 몰두했다. 결국 그의 만들어 놓은 자료들은 호빗과, 반지의 제왕에 의해 발표되고, 사후 그의 아들인 크리스토퍼 톨킨에 의해 실마릴리온, 끝나지 않은 이야기들(Unfinished Tales : UT), 그리고 12권의 가운데땅의 역사(History of Middle-earth)의 방대한 양으로 출판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의 글은 사실상 하나의 ‘팬덤적인 문화’를 만들어냈다(물론 영화의 성공이 꽤 큰 요인이지만). 좀 이야기를 뒤로 돌려서, 어쨌든 반지의 제왕(LotR), 이 한권의 소설은 현대의 문화의 큰 기둥을 만들어냈다 - 한쪽으로는 판타지와 TRPG의 개발 등에 힘입은 미국의 판타지 문화의 발달, 그리고 다른 한쪽으로는 이 전통(?)을 받아들이고 나서, 소설과 만화, 그리고 애니메이션으로 전세계를 강타한 일본의 문화. 그리고 우리는 이 두 가지에서 크게 벗어난 삶을 살고 있지 않다 - 우리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즐기고, 판타지를 즐긴다. 하지만 또한 온라인 게임을 즐기며, MNORPG라는 하나의 ‘의식’에 ‘참예’하고 있다 - 참으로 톨킨이 우리에게 끼친 영향은 방대하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자. 톨킨은 무엇을 위해 Quenya, 그리고 Sindarin등의 언어와 가상의 역사, 그리고 ‘문화’를 만들었을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 단지 그는 즐기기 위해 만들었을 뿐이라고. 그는 단순히 언어를 좋아했다 - 그 언어를 뒷받침하는 역사와, 거기에서 드러날 문화는 둘째 치고, 그는 그의 언어와 상상을 키워가기 위해서 그의 언어를 만들었고, 그것 이외에 그가 언어를 만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아마. 그러면 우리는 톨킨을 어떻게 평해야 할까? 그냥 언어를 좋아하기만 했던 오타쿠(?) 같은 사람? 아니면 그렇지만(?) 뛰어난 업적을 이룬 사람? 아마 일반상식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둘 중 하나의 판단도 하지 않을 것이다. 생각해보라. 영어 연구의 권위자이자, 세기 최고의 소설을 써냈지, 거기다가 전세계의 판타지 소설의 중시조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지금, 논리전개에 억지와 과장이 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언어에 문화를 무조건적으로 연결하는 것은 좋지 않으며, 특히 인공어의 경우에는 그러하다는 사실이다.
인공어, 세계관, 그리고 개인의 문화
다시 판타지 소설로 이야기를 돌려서, 이번에는 이영도나 전민희씨의 경우로 이야기를 돌려보고자 한다. 특히 두 작가의 소설은 한국 판타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꼭 보고 넘어가야 하는 소설이다. 일단 두 작가와 그 작품들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지면을 줄이기 위해 생략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두 작가의 초기작인 드래곤 라자와 세월의 돌8)을 중심으로 하기로 한다. 물론 두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시간 흐르기에 딱 좋다. 하지만, 여기서 생각하고 싶은 부분은 두 작품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과 그에 따른 ‘문화’이다. 사실 두 작품들 모두가 톨킨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두 작품은 각자 가지고 있는 독특한 세계관을 통해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물론 전민희씨의 그것이 이영도보다 더욱 섬세하고, 자세하며, 보다 ‘근원적’인 면이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작품들에서 보여주는 세계관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세월의 돌에서만 잡아도, 스조렌 산맥의 한 부분에 남겨져 있는 파하잔, 아티유와 푸른 굴조개 이야기, 그리고 ‘처음 세워진 그 모습대로 영원하라’ (sdol:8-1-2:434)라는 마법으로 보존되어 있는 아름다운 성 달크로즈, 그리고 나르디와 파비안의 우정 가운데 숨겨진 무서운 권력관계. 이 모든 것들은 자세하게 잡혀져 있지 않았다면 존재할 수 없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만큼 세계관은 중요하고, 또한 우리를 상상의 세계로 불러 모은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계관’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이 단어를 ‘문화’로 대치하는 것이 옳을까? 아. 좀 더 어려운 수준으로 이 문제를 업그레이드해 보자. 드래곤 라자와 세월의 돌 모두는 언어를 가지고 있다. 그럼 이 언어는 문화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것은 아니지 않을까 싶다. 두 작품 모두는 언어를 주로 하지 않았다. 다만 스토리텔링과, 그 속에 깃들인 세계관을 주로 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판타지 작품에 언어를 싣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 그것이 가장 올바른 해결책인가?
아니다. 결국 세렌씨의 주장과 반대되는 이야기이지만, 인공어에는 문화가 반드시 후속되어야 할 필요까지는 없다. 물론 언어를 만들면서 세계관, 또는 문화를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고, Artlang의 경우에는 좋은 언어를 위해서 이러한 작업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문화’정도에까지 전환되어야 할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세렌씨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긍극적으로 ‘세계관’을 의미한다면, 나도 그러한 작업을 하고 있는 셈이니 세렌씨에게 뭐라고 할 바가 없다. 하지만, 정말 그가 원하는 것이 진정한 ‘문화’이라면, 정말 그러한 것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있어서 불가능하다. 진리의 깊은 부분까지 받아들일 정도의 능력이 우리에게 되지 않는데, 하물며 이러한 하나의 문화이랴!
아니,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를 단정 짓기 전에, 우리는 하나의 경우를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개인에게 문화가 있는가? 세렌씨가 의도하는 ‘문화’가 이 경우에 속한다면9), 우리의 결론은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 여기에 졸작 마레(marE)를 가지고 이야기해보고 싶다.
나는 요즘도 마레를 가지고 생각을 한다. 마레로 번역한 곡을 불러보기도 하고, 한국어로 된 노래나 단어를 마레로 번역해보려 애쓰기도 한다(물론 단어가 부족해서 불가능한 경우가 많지만). 그리고 마레를 사용하려고 노력한다(이번 여행의 수첩 한 장마다 mare seae!(마레를 우선에!)라고 적어놓았을 정도다(라지만 별로 쓴적이 없..). 이번 여행의 기도편지를 위해서 성경구절을 마레로 번역해 놓았을 정도로, 개인적으로 이 언어에 대한 관심은 높다. 그렇다면, 과연 이것으로 문화가 성립될 수 있을까? 역시 억지라고 보는 것이 옳겠다. 결국 문화라는 것 자체가 혼자로서는 존재할 수 없는, 서로간의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기호교환에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세렌씨는 그 반증을 제시해 주었다. 세렌씨가 홈페이지에서 설명한 것 같이, 여러 사람이 이 인공어의 제작에 참여했고, 언어와 함께 문화를 제작했다. 그렇다면 세렌씨의 주장이 관철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는가? 아니다. 결국 최근의 인공어는 개인 한 사람이 만드는 경우가 많고, 여럿이 만들더라도 반드시 문화를 기반으로 하고 만드는 경우는 드물다. 특히 여럿이 만드는 경우에는 언어의 단어나 문법을 정하는 것도 힘들기 때문에, 한사람이 만드는 것보다 상당히 힘이 들어간다.10) 결국, 처음부터 마음에 드는 문화를 만들고 완성하여, 사람들에게 보급시킨다는 것 자체는 작자가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던가, 아니면 같이 만드는 사람들이 일심동체라던가 하지 않으면 원래부터 불가능한 이야기다.
결국 우리는 한가지 결론에 도달한다 : 인공어에 있어서 문화는 필수조항이 아니다.
문화와 인공어 : 인공어는 인공어다와서 인공어가 아니다
정말, 우리는 문화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왜 우리는 문화를 중하게 여기는가? 그것 자체부터 명확하고 통일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어쩌면, 이 글 자체가 성립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가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하나의 ‘문화’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 글을 쓰기로 하였고, 이제 글의 막바지에 도달하였다. 물론 제대로 이야기를 격식에 맞게 표현하지 못했고, 논리에 맞지 않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글을 쓰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
대부분 우리는 인공어를 너무 큰 시간을 들여서 만들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언어를 만들다가 언어를 폐기할 수도 있고, 기억 속 한 부분으로 남겨두고 영원히 묻어버릴 수 있다. 물론 Conlang에 대해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계신 여러분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언어는 남아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 언어가 언제까지나 남아있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는 혼자서 그 언어를 만드는 만큼, 그 언어를 완성하지 않을 수 있다.11)
그런 인공어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은 사실 너무하다. Artlang에게 있어서도, Auxlang에 있어서도 말이다. 내 자신이 Artlanger이기 때문에 Auxlang에 대해서는 많은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사실 Auxlanger들이 Artlanger들에 비해 공격적인 이유가 바로 ‘보급의 가능성’을 중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두자. Artlang은 보급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Auxlang중에서도 보급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언어도 있다.12) 그런 언어들에게까지 동일한 조건을 요구하는 것은, 에스페란토가 ‘문화 없이도’ 어느정도 성공할수 있었던 것을 생각해 볼 때, 거의 억지에 가까운 이야기다.
에스페란토가 전성기에 보급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름이 아닌 사회의 분위기였으며(한국 에스페란토의 2~30년대의 급성장이 사회가 억눌려 있었던 시기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 현재 한국의 에스페란토 운동은 극히 저하되어 있다), 현재의 경우에는 그 용도가 친목과 교제로 바뀌었지만, 그때 즈음에는 오히려 아나키즘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도 참조해야 할 부분이다.13) 즉, 인공어의 보급은 전적으로, 문화에 의거하지 않았다. 그건 Natlang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단순히 문화가 뛰어나다는 이유로 우리의 모국어를 선택하지도 않았으며, 바꾸려고 하지도 않았고, 앞으로 그렇지 않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인공어는 완전하지 않기에 인공어이다. 이러한 문제성을 완화하고 좀 더 나은 언어를 만들기 위해서 세렌씨와 같은 언어 창조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도 분명히 좋은 방안이며, 추천할 만하지만, 이것이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서는 안된다. 또한 세계관을 만드는 것은 Artlang에 있어서 사실상 의무사항이지만, 이것이 Auxlang에게까지 적용될 명백한 논리전개가 없으며, 세계관을 문화로 대체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의 의지감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세렌씨의 주장에는 문제가 있으며, 재고가 필요하다.
Laita I Heru.
(1차 집필 : 2007. 1. 9~13, 라사~보미 / 수정 : 2007. 2. 13.)
주
- 최근 쿠로씨에 의해 폐쇄시를 대비한 개조 사이트 (http://lidlelderksad.higoyomi.com/)가 만들어졌다.
- 내 자신이 Artlanger이기 때문에 중립적인 입장(Non-Point Of View : NPOV)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하긴 힘들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역시 Auxlang보다 Artlang이 더 옳다고 생각한다. 특히 바벨탑 사건을 생각하면 그렇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는. 아마 주위의 Esperantistoj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좀 편견을 가지고 이야기하자면, Artlang은 Auxlang에 대해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는데, 오직 Auxlanger들만 Artlanger들을 물어 뜯는 건 아닌지.
-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사실주의’의 그 리얼리티가 아니다. 여기에서는 좀 더 자연스럽게, 시뮬라크르, 즉 극사실에 가깝게 하기위한 수단으로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 http://earthlanguage.org/New-Wave/nwj0506.htm
- Table-talk Role Playing Game의 약자로서, 최근의 MNORPG와는 달리 주사위와 룰, 그리고 GM과 사용자로 특징지어지는 RPG 게임이다. 최근 이 TRPG를 온라인에서 하기도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를 ORPG라고 한다.
- 어떻게 보면 이러한 상황은 보다 더 ‘제의적 놀이’에 기반을 두고 있을 수 있다(호이징거, 호모 루덴스). 하지만 나는 이러한 류의 것을 ‘제의적 놀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의 아이덴티티를 버리고 그 자리를 ‘magic circle’로 삼아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잠시 부여받는 절차는 호이징거의 개념에 부합한다. 하지만, 닉의 개념이 생기면서, 우리는 기존의 그 놀이와는 다른 상황을 지닌다. 예를 들어서 기존의 놀이에서 A가 B라는 역할을 받았다면, 그 역할이 끝난 이후에는 A는 더 이상 B라는 이름과 직책을 사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TRPG에서는 엄연히 다르게, D라는 닉의 C가 E라는 역할을 받았을 때, C는 C, D, E 어느 이름으로도 불릴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이 더욱 더 구체화되는 것이 MNORPG류의 온라인 게임이다. F가 G라는 닉을 쓰고, 그 G에게 역할이 주어지며, 그곳에서, 그리고 관련 커뮤니티에서는 F를 F로 부르지 않고 G로 칭하며, G에게는 또 다른 임무가 부여된다(그리고 당연히 우리는 그를 G라고도 칭할 수 있다). 이러한 개념들은 기존의 ‘놀이’의 개념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 자세한 것은 아르다람비온의 아티클(http://www.uib.no/People/hnohf/vice.htm)을 참조하라.
- 일본의 여러분들을 위해 : 이영도의 소설인 드래곤 라자(ISBN 978-4265050512 부터)는 이미 일본 국내에 번역되어 출판되고 있다 (12권이 나오지 않았음). 전민희의 ‘세월의 돌’은 현재 번역이 되어 있지 않지만, 현재 한국어로 개정판 작업(ISBN (978) 8990886333 부터)이 진행중이기 때문에, 이 작업이 완료되면 번역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우선은 소프트맥스의 ‘포립’을 위한 작품인 ‘룬의 아이들-윈터러’(ISBN 978-4776792376, 978-4776792383, 978-4776792536)가 일본어로 번역되어 있다.
- 실제로 세렌씨는 자신의 사이트에서, Auxlang을 보급하고자 하면, 우선 자신이 그 언어에 익숙해있지 않으면 안된다고 지적하고 있다(http://www.rivo.mediatti.net/~lanxante/how_34.html). 즉, 언어를 보급하고 제창하는 자신 자체부터 이 언어를 제대로 쓰지 않는다면, 결국은 그 언어 자체가 사어가 된다고 했는데, 이 부분은 지극히 맞는 부분이다.
- 실제로 11월부터 필자가 몇 명과 함께 주마다 모여서 인공어를 만드는 프로젝트 ‘ropt'(가제)를 진행했었는데. 결국 단어 자체를 정하는 것이나, 시간 참여의 부분에서 문제가 생겨서 프로젝트를 일시중단했다. 일본에서도 gumosopo는 2ch의 특성을 이용하고, 만든 단어 자체를 곧바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약간 빨리 진행되고 있을 뿐, 합의제로 진행되는 mixic의 경우에는 속도가 빠르지 않다.
- 신소우 카즈마, 가공언어 공개강좌 1회 (http://sanpo.electric-cat.org/txt/conlang01.html)
- 가령 링구아 프랑카 노바같은 언어. 이 언어는 ‘LFN이 세계의 국제보조어가 되지 않아도 괜찮다, 우리는 모든 국제보조어를 지원한다.’ (in Ko-wikipedia)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 에스페란토 아나키즘 그리고 평화, 안종수, 선인. ISBN (978)8959330426. 한중일의 에스페란토 아나키즘 무브먼트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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