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2.14 18:35

〈너의 이름은.〉 - 가만히 있기를 거부함으로, 세카이계를 떠나다 ②

(ⓒ2016 『君の名は。』製作委員会)


오픈 엔딩, 그리고 재생산

다음으로 신경쓰이는 부분은 한국에서 진행한 GV에서 '엔딩에 대해 pixiv를 참조하라'고 발언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발언이다. 마침 [ 해당 메가토크를 촬영한 영상 ]이 있으니, 공식적으로 발언을 인용하고자 한다.

Q. (38:06) 어, 정말 영화 정말 잘 봤습니다. 제가 그, 개봉날 국내 인사에 있었던 그 영화, 그 때 봤었는데요, 사실 그 날 봤을 때 아무 마음의 준비[가] 없어서, 딱 보고나서 대개 해피엔딩이 있지만, 뭔가 마음이 대개 씁쓸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오늘 다시 한 번 봤을 때, 마음의 준비가 있어서, 그 해피엔딩[이] 조금 더, 조금 더 해피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있지만, 그래도 전에 그 무대인사하셨을 때, 그 아마도 나중에 3년 후에 다른 작품 하실 때, 어 '미츠하[하]고 타키, 어 한 장면이 나올 수도 있다'고 하셨는데요, (울먹거리며) 제가 정말 그 지금, 대개, 그 두 사람의 미래가 너무 궁금해서, 조금만 이야기해 주실 수 있는 지 … 감사하겠습니다.

A. (39:01) いや、そうですね。 二人の未来は、その、日本の同人誌、とか書いて******ますね。(관객 웃음) (同人誌とですね、二次ソースで,その、ファンが書いて*みたく漫画です。) あの、pixivでいう、サイトがありますね、pixiv。 その日本のサイトなんですけど、pixivに行けば、その漫画を*楽しめます。(폭소) あの、『君の名は。』のラストシーンで、二人が普通の本当***,普通の男性と女性として出会ったシーンなんです。 え、超能力もないし。え、お互いのこと、なんとなく知っている気がするけど、でも初対面のはわけですね。ですから、一回では、あれは、みなさん自身のわけです。あそこから先を見ていたたき、観客の方々が其々の物語りだと思います。あの、ですのでね。あの、面倒くさいんじゃないんですけれど、(웃음) みなさんが其々にイメージじていたたけば、と思います。

이야, 그렇네요. 두 사람의 미래는, 그, 일본어 동인지 등에 써져 **** 있습니다. (동인지라는 건, 이차 소스로 팬들이 그려서 보여주는 만화입니다.) 그, 픽시브라고 하는, 사이트가 있어요, 픽시브. 그런 일본 사이트가 있습니다만, 픽시브에 가면 그런 만화를 즐길 수 있습니다. 이 
〈너의 이름은.〉의 마지막 신에서, 두 사람은 평범한 ***, 평범한 남성과 여성으로서 만났다는 [상황의] 신입니다. 초능력도 없고요. 서로에 대해서는 무엇인가 알고 있는 느낌이 들지만, 그렇지만 첫 대면인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그것은, 여러분 자신의 역할입니다. 저쪽(pixiv)에서 먼저 본 것이고요, 관객 여러분들이 각자의 이야기[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귀찮은 것은 아니긴 합니다만, 여러분들이 각각의 이미지를 만들어주셨으면, 하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질문과 답변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의외로 생각보다 깊다. 그냥 웃고 넘길 일이 아니다. 여기서 질의자와 답변자인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입장 차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질의자는 이 질문에서 신카이 마코토를 〈너의 이름은.〉의 이야기에 대한 유일한 권한을 소유한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질의자는 신카이 감독이 가지고 있는 비밀을 드러내줌으로서 알지 못하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감성적으로 해소해 주기를 요청하고 있다. 그러나 신카이 감독은 그 권한을 갑작스럽게 최종적으로 관객에게 넘긴다. 여기까지는 일단 괜찮아 보인다. '이야기 이후의 해석은 관객의 자유입니다'라면서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기를 요청하는 것은 다른 창작자들도 종종 보이는 행동이다. 그러나 신카이 감독이 픽시브를 지정하는 상황에서부터 기존의 관행은 완전히 깨진다.

   이 대화에서 신카이 감독이 지정한 pixiv는 다양한 동인 창작 사이트 중에서 가장 생각하기 쉬운 대표명사 역할을 한다. 그리고 동인이나 코스어 등의 만화-애니메이션 동호인들은 자신이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위해 텍스트를 깨뜨리고, 텍스트의 벽에서 캐릭터를 구해와 자신이 가진 미디어를 통해 새롭게 배치하는데 익숙한 사람들, 다시 말해 디지털 리터러시에 능숙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신카이 감독은 이렇게 선언하는 셈이다. "이제 이 이야기의 전개를 그들에게 맡길 수 있다. 그들이 만들어주는 각각의 이야기가 이 영화의 세계관을 넓게 만들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다르다. 수많은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현상은, 저작물의 해체다. 즉 다시 말해 상상을 통해 생겨나는 새로운 이미지는 기존 이미지가 구축해 온 동일적인 세계관을 파괴해 나간다. 기존의 의미가 새로운 의미와 결합하면서 기존 텍스트가 전혀 의도한 적이 없던 부수효과(side effect)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래의 창작물을 보도록 하자.

    이 그림은 한 눈에 봐도 알 수 있듯이, 〈너의 이름은.〉의 미래를 상상한 그림이긴 하다. 그러나 이 그림이 가지고 있는 함축은 신카이 감독이 구축해온 〈너의 이름은.〉 세계관과 차이가 많다. 우선 미츠하와 동생 요츠바는 한국어를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 미츠하와 요츠바는 한국어로 대화하고 있으며, ○스타그램에 한국식 태그를 능숙하게 붙이기도 한다. 당연히 세계관과 맞지 않는다. 다음으로, 스트로베리 블라썸 푸라푸치노는 정확하게 한국 스타벅스를 시점으로 2016년에 도입된 것으로, 일본 내 정식 명칭은 '사쿠라 블라썸 & 스트로베리 프라푸치노'다. 일단 오리지널 기간 상으로는 시점이 맞기는 하다. 그러나 세계관 상으로 해당 시점이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우선 그림의 내재된 이야기를 통해 판단해 볼 때, 이 창작물에서 암시하는 (아마도 타키와의) 재회가 이뤄지는 것은 2021년의 시점이다. 해당 시점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 엄밀히 말해 2021년 일본 스타벅스 사쿠라 프로모션 기간에 해당 프라푸치노가 발매될 지 알 수 없다. 더군다나 이 그림을 창작한 창작자가 만든 재생산물들과 같이 놓고 판단하면 사정이 더 복잡해진다. 해당 창작자는 해당 인스타그램이 미츠하가 아직 고등학생으로 있던 2013년에 토쿄에서 해당 사진을 저작한 것으로 설정한 것으로 보이는데, 미츠하는 작품 속에서 2013년경 타키와 스쳐 만난적이 있을 뿐, 구체적으로 많은 시간을 들여 만난 사실은 없다. 결국 이 재생산된 그림은 〈너의 이름은.〉의 세계관과 들어맞지 않거나, 세계관을 파괴하는 작품에 속한다.

   이외에도 그림러들에 의해 생산된 다양한 〈너의 이름은.〉의 재생산물들이 신카이 감독이 언급한 픽시브 이외의 다양한 사이트에 올라와 있다. 그런데 해당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사진들에는 타키와 미츠하가 만나 대화하는 것을 통해 이토모리 유성 사건 이후 벌어진 일을 깨닫고 다시 기억을 되찾는다는 해석을 바탕으로 그려진 작품들이 꽤 많다. 즉 타키와 미츠하가 첫 대면일 뿐이고, 과거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위치를 되찾을 가능성이 적다고 암시하는 신카이 감독의 해석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는 해석이다.

   그런데 신카이 감독은 이러한 시도들을 긍정한다. 자신이 미래를 정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그들의 이야기들을 찾고 탐색할 것을 권한다. 저자는 여기에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로 신카이 감독이 소위 디지털 리터러시를 포함해 관객이 적극적으로 텍스트를 재해석,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작품의 세계관이나 저작권 질서를 벗어난 2차창작 또한 긍정가능한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해석이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동인 전통, 즉 작품 바깥의 이야기를 만화나 글, 코스프레 연기 등의 형태로 만들어내는 콘텐츠 수용자들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이 지난 수십여 년 동안 정착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일본은 최근 TPP 협상 과정에서 강력한 저작권 규정을 도입하는데 동의하면서도, 동인지 등의 2차창작물에 대해서는 저작권 단속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조치를 취하게 됐다. 물론 현재 동인지와 코스옷 시장 규모가 한 해에 1300억 엔이 넘고 있는(야노경제연구소, 2017) 문화 시장으로 정착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지만, 재생산 문화 또한 문화콘텐츠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활동이고, 이 또한 일본의 국부 증강에 기여하고 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라는 점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둘째로, 신카이 감독은 자신의 창작이 완료된 이후 자신을 다른 해석자와 다른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같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바르트가 이야기하듯이 '저자의 죽음'이나 창작자의 무기력함을 의미하는 행동은 아니다. 정확히 이야기해서, 그는 그가 마친 이야기를 굳이 이어가려고 하지 않고, 끝난 이야기는 끝난 이야기대로 관객의 보다 더 적극적인 해석에 맡기고, 자신은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나간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든 작가를 쥐어짜서라도 이야기를 늘리는 일본 만가-라노베-아니메 업계의 통상적인 전법은 쓸모가 없어진다. 이것이 신카이 감독이 아니메계에서 스튜디오 지브리의 후예로 오해되는 이유이기도 하다(물론 두 창작자 사이에 직접적인 연계성이 없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한 설명이다). 

  정리해보자. 신카이 감독은 오픈 엔딩을 만들고 관객들에게 재생산을 권장한다. 그가 저작권자의 입장이 아닌 창작자의 입장 속에 강하게 서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던 간에, 〈너의 이름은.〉을 통한 신카이 감독의 인식은 일본 저작권 산업 관계자의 입장 변화 또한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아직 일본 저작권 관계자, 특히 회사들의 2차저작권 인식은 매우 심각한 수준에 있으며, 자유로운 사용자의 재생산을 막는 쪽에 치중해 있다고 볼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를 시점으로 일본의 문화콘텐츠 회사들도 인식개선을 통해 2차창작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을 가지기를 기대해 본다.

정리 : 신카이 감독이 세카이계를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너의 이름은.〉에서 신카이 감독이 이 작품을 통해 세카이계와의 분리를 확실히 선언했다고 볼 수 있는 이유를 찾아보고, 이 작품에 대한 평가를 해보려고 한다.

   이와 관련해 세카이계에 대해 정리한 〈세카이계란 무엇인가〉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마에지마(2016:115)는 세카이계를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영향을 받아 1990년대 후반부터 제로연대에 만들어진, … 오타쿠 문화와 친화성이 높은 요소나 장르 코드를 작품 내에 도입한, 젊은이(특히 남성)의 자의식을 묘사한 작품군'으로 표현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니시오 이신의 작품이나 최종병기 그녀〈너의 목소리〉가 해당 계열의 작품으로 여겨지지만, 이러한 관점들을 비판해 나가며 마에지마씨는 어떻게 세카이계라는 '하나의 거대한 유령'이 일본 아니메계 전체를 뒤집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 설명해 나간다. (개인적으로는 신카이 감독의 처녀작인 〈너의 목소리〉가 세카이계의 주요 작품으로 인지되는 데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점에서 비판적인 입장이지만, 어쨌던 이러한 분석 틀을 받아들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 놓칠 수 없는 지적이 있다. 첫째로 에바 이후 세카이계의 형성과정에 대한 언급이다. 마에지마는 에반게리온 이후의 아니메, 더 나아가 아니메 수용자층으로 여겨졌던 '오타쿠'의 변화가 코베 대지진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라고 언급한다. 마에지마는 1994년 당시를 '한신 아와지 대지진과 옴진리교 사건[으로] …대도시가 괴멸적으로 파괴되었고, 토쿄가 큰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그 날이나 그 다음 날에도 일상은 계속되었다.'고 회상하면서, 설명하고 있던 최종병기 그녀〉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정치적, 군사적 리얼리티를 완전히 배제함으로서 오히려 10대, 20대가 피부로 체감할 수 있는 리얼리티를 획득'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ibid.,:76). 즉 비현실과 현실이 공존하던 한신 아와지 대지진 당시의 사회를 1년 후 에바가 포착해 애니메이션 형태로 내보내 당시 일본 구성원들이 가지고 있는 비현실적인 상황 속에서의 자아적 문제와 공명하면서 사회적 기반을 바탕으로 히트를 치는 데 성공했고(Ibid.,:79), 이후 그 포착의 결과가 다른 작품들로 퍼져나갔다는 설명이다.

   둘째로 사실 이 당시 전개되고 있던 남성향의 주요 장르인 '모에'와 '세카이계'가 사실은 동일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지적이다(ibid.,:101-102). 여기에서 마에지마는 1994년 대변혁과 에바 이후로 '애니메이션 이야기 바깥'에 몰입해 있던 과거의 오타쿠들과 달리, '작품을 자신의 내면으로 끌어당기'는(ibid.,) 다시 말해, 콘텐츠 속으로 들어가 콘텐츠의 등장인물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거대한 흐름이 생겼다는 점을 상기한다. 다시 말해, 현실에서 동떨어지는 경험을 그 당시의 사람들이 많이 했기 때문에, 그 충격을 어떻게라도 이겨나가고 있었고, 그 중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작품의 서사를 통해 현실을 이겨나가고자 하는 노력을 이어갔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카이 마코토가 〈너의 이름은.〉을 만들게 된 동기는 세카이계에서 만연하고 있던 자의식적인 서술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신카이 마코토가 한국에서 했던 또다른 발언을 재조명하고 싶다.

(11:46)今回の映画は、 その日本の東宝と、大きな映画会社と一生にあったので、「商業的な要請からハッピーエンド作なさった」んじゃないか、という心配されることがありますね。あの、でも、実際はそうではないんです。あの脚本は何度も何度も書き直して生きましたが、そこに悲しいエンディングは一度もありませんでした。そうですね。2011年に日本で大きな地震が起きた、ですね。あの時から、日本社会、僕を含めて、あの日本人は少し変わってしまったと思います。東京を含めて、え、自分の街が、もしかしたら明日、いつか、なくなってしまうかもしれない。そういう気持ちを常に、その気持が常に、心の中にあり得るなったんですね。そういう時に、映画を作るのであれば、そのときに映画を見てもらうものであれば、諦めずに、何かを諦める、何かをお消える話がなくて、いつまでも諦めずに、何かを元に戻す、強く、生きることをつかむような映画が必要なんじゃないかと思いました。(13:21)

이번 영화에는, 일본의 토-호-라고, 큰 영화회사와 함께 한 것이어서, '상업적으로 요구를 받아 해피엔딩을 만들게 됐다'는 것은 아닐까, 라고 걱정해주시는 분들이 있으시네요. 그래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각본은 여러 번 계속해서 다시 쓰여져 왔습니다만, 그 [변화과정]에 슬픈 엔딩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렇네요. 2011년에 일본에서 큰 지진이 일어났네요. 그 때부터, 일본사회[와] -저를 포함한- 일본인은 조금씩 변할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을 포함해, 자신의 마을이, 어쩌면 내일, 언제라도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런 마음이 항상, 마음 속에 남게 됐다는 것이네요. 이런 때에, 영화를 만드는 것이라면, 이런 때에 영화를 봐주신다는 것이라면, 포기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포기하[거나], 무엇인가를 지운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언제까지나 포기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원래대로 돌려서, 강하게, 살아나가는 것을 감싸나가는 듯한 영화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위의 서술, 그리고 세월호 관련 서술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신카이 감독이 〈너의 이름은.〉의 이야기와 주제의식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붙잡은 것은 동일본 대지진과 세월호 참사라는, 있을 수는 없었고 있어서도 안되는 참사였다. 다시 말해, 동일본 대지진에서는 두려운 현실에 대한 공감과 대처의지를, 그리고 세월호에서는 현실을 극복하지 못하도록 막는 장애에 대한 도전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한편, 앞서 마에지마씨가 세카이계의 형성에 코-베 대지진이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점을 서술한 바 있다. 그런데 코-베 대지진의 충격이 그것을 겪은 일본 국민들의 내면을 담고, 그 속으로 들어가도록 하는 작품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면, 동일본대지진을 겪으면서 피해를 겪은 일본인들이 내면 세계 바깥에서 이뤄지는 일들에 교감하는 결과를 일으켰다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다시 말해 코-베 대지진의 충격으로 세카이계가 시작됐다면, 동일본대지진의 충격은 세카이계를 넘어선 새로운 시도들을 불러일으켰다고 읽어볼 수 있을 것 같다.

   더 나아가, 신카이 감독이 밝힌 동일본대지진에 의한 관점의 변경은, 사실은 세카이계라는 세계관을 떠나, 다른 사람들과 공감하고 저항하는 방법을 찾아나가기 위한 하나의 노력이 되지 않나 하는 생각 또한 가져볼 수 있다. 초기작으로 호평을 받은 〈너의 목소리〉와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에서 빠져 있지 않고 등장하는 장소가 바로 정부기관이다. 물론 이러한 전통이 남성향 SF계 아니메에서 포괄적으로 나타났던 현상이기도 하다. 지브리라는 가시적인 반례를 제외하면, 대다수의 일본의 남성향 아니메는 오랫동안 정부와 군이라는 '나와 먼 곳'에 대한 이야기를 펴내며 정부에 대한 환상이나 비판을 담아왔다. 그러나 동시에, 정부 기관 자체는 보통의 '내'가 접근할 수 없는, '나'와 멀리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신카이 감독은 정부 기관이라는 것에서 눈을 돌려 일상의 삶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너의 이름은.〉을 시점으로 신카이 마코토의 시선은 지방정부라는, '내'가 접근할 수 있고 대화할 수 있는 존재로 초점이 옮겨진다. 다시 말해, 지방정부가 나의 삶에 어떠한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대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두 가지 관점을 같이 종합해 보면, 신카이 감독의 작품들은 멀리 있는 곳에서 가까이 있는 곳으로 초점이 옮겨왔다고 볼 수 있다. 시선이 멀리 있기에 보지 못하는 주변의 사례가 시간이 지나옴에 따라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로 변화한다. 내가 닿을 수 없는 중앙의 계서적(hierarchic) 움직임에서 내가 닿을 수 있는 로컬리티의 움직임 속으로. 이런 변화가 서서히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면, 신카이 감독이 2000년대 이후 형성된 치유계-일상계 애니메이션의 흐름과 접촉, 집중하면서 자신의 서사에 변화를 일으켰다고 가정할 수 있을 것 같다(물론 개인의 속마음을 알 수는 없으므로 가설에 불과하다).

   물론 이러한 변화의 근본에 위험이라는 요소가 있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사실 이 영화의 메인 이벤트가 되고 있는 운성충돌이라는 재앙은 동일본 대지진의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라는 재앙의 변주에 가깝다.신카이 감독이 위에서 말했듯이, 언제라도 생명을 잃는 자연재해가 나타날 수 있고, 그 자연재해의 적절한 대처가 국가(세월호)와 자본(토쿄전력)에 의해 저지될 수 있다는 위험성이 이러한 심리적인 변화에 근본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보는 것이 편할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 자체는 세계관의 변화의 방아쇠가 되었을 뿐, 그 변화의 명확한 동력인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다. 

결론 :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이야기를 맺을 때가 왔다. 지금까지 〈너의 이름은.〉을 명확하게는 개인적인 관점에서 여러가지 키워드를 가지고 분석해 봤다. 이외에도 〈너의 이름은.〉을 해석할 수 있는 다양한 연구 방법론이 있고, 실제로 해당 방법론들을 사용해 적용한 연구들이 2017년 한해 국내에서 다수 발표 된 바가 있다(전윤경, 2017; 양원석 외, 2017 등). 그러나 〈너의 이름은.〉를 기존의 세카이계 논의틀로 읽을 수 없으며, 오히려 〈너의 이름은.〉은 신카이 감독의 의 탈세카이계 움직임을 잘 드러내주고 있으며, 이러한 변화를 영화 전반적인 내용을 통해 엿볼 수 있었다는 것이 필자의 결론이다.

   〈너의 이름은.〉은 그동안의 애니메이션이 현실과 떨어져 수용자를 작품 안으로 파고들도록 만들어온 현상을 벗어나고자 한 일상계 아니메와 콘텐츠관광이라는 영향을 받아들인, 현실을 반영하는 애니메이션이자, 현실참여적인 의사를 나타낸 작품이다. 물론 이러한 의사의 표현에는 일본 정부나 제작자 등의 다양한 권력을 통한 간섭이 있었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간섭을 잘 묶어내 제작자가 여러 통로를 통해 현실반영적 의견을 나타낼 수 있을 정도로 수용자, 미디어 환경이 변해준 것이 〈너의 이름은.〉의 성공 비결이지 않았겠느냐고 생각해 본다.

   아울러 한국사회가 〈너의 이름은.〉에 대해 뜨거운 반응을 보인 이유도 한국사회가 신카이 감독이 제기하고 있는 사회적인 문제들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너의 이름은.〉이 2017년 촛불혁명 시기에 굳이 한국 사회에서 300만 명을 훌쩍 뛰어넘는 히트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렇기에 〈너의 이름은.〉의 성공은 단순한 '히트'가 아니라, 사회적 변혁을 바라고 있던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데 성공한 것에서 가능한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피조물의 해방을 바라는(롬 8:21) 갈망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계 22:20) (170203 시작, 180214 완료)


참고문헌
마에지마 사토시(2016), 세카이계란 무엇인가 - 에반게리온 이후 오타쿠문화의 역사, 워크라이프. 원전: 前島賢(2014), セカイ系とは何か, 星海社.
윤민석(2016), 이게 나라냐ㅅㅂ. 디지탈레코드, 2016. 11. 24. 
이케가미 아키라(2001), 일본어를 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에게, 디자인하우스. 원전: 池上彰(2000), 日本語の'大疑問', 講談社.
야노경제연구소(2017), '오타쿠' 시장에 관한 조사를 실시(2017년), 2017. 12. 15. 
양원석, 권희주(2017), 신카이 마코토의 ‘세카이계' 연구 『너의 이름은』을 중심으로, 일본연구(고려대 글로벌일본연구원), 28호. p. 238-258.
전윤경(2017), 질 들뢰즈의 ‘되기’의 사유로 본 <너의 이름은> -‘몸 바꾸기’의 의미를 중심으로-, 문화콘텐츠연구(건국대 글로컬문화전략연구소),11호. p. 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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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9 03:17

〈너의 이름은.〉 - 가만히 있기를 거부함으로, 세카이계를 떠나다 ①


(ⓒ2016 『君の名は。』製作委員会)


국내 일본 아니메 상영기록 경신. 예스24 주간 베스트셀러 1위 차지. 최근 몇년 동안 상영된 수많은 일본 애니메이션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높은 성적이다. 그리고 이 영화가 끼친 사회적 영향에 대해서는 좀 더 시간을 두며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이 글에서는 이 영화의 내부적인 면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다른 관객들과 달리, 영화를 보면서 인상에 남은 두가지 점이 있었다. 첫째로, 〈너의 이름은.〉과 가장 비슷한 엔딩이 나온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둘째로 엔딩 크레딧에서 유난히도 크게 표시된 일본 문부과학성 예술문화진흥기금 마크. 이외에도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한국에서 '엔딩에 대해서는 pixiv에서 찾아보라'고 한 말 또한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세 가지를 소재로 지금부터의 이야기를 풀어나고자 한다. 개인적으로는 스포일러의 존재를 크게 신경쓰고 있지 않으므로, 이 글에서는 영화 안이나 다른 작품에서의 이야기를 직접 언급하고 있음에 유의하기 바란다. 

<운명에의 거부> - 그리고 "가만히 있으라"

   첫째로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세계를 멸망하고자 하는 스즈미야 하루히의 움직임을 쿈이 막음으로서 현실을 존속시킨다는 애니메이션 엔딩은, 〈너의 이름은.〉과 참 비슷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극중에서 일어난 움직임은 다르다. 쿈의 '구원'은 철저히 다른 사람들에 의한 도움을 받아서 이루어진다. 미래에서 온 미쿠루가 힌트를 주고, 유키가 접속해서 상기시켜줘서야 쿈은 스즈미야 하루히에 의한 세계파괴라는 문제를 해결한다. 하지만 〈너의 이름은.〉에서는 그러한 찾기가 자발적으로 일어난다. 타키는 이토모리가 사라져 미츠하가 사라진 '1차 현실'을 돌파하기 위해, 스스로 이토모리를 연구하고, 미츠하의 모습으로 있을 때 방문했던 '저승'으로 이동해 다시 미츠하가 되어 현실을 바꾸는, 과거로의 자격시련을 차례차례로 통과한다. 행동자의 적극성이 부여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토모리(糸森)에 대형 유성이 충돌하고, 그 와중에 더 많은 분들이 희생될 위험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더 많은 분들이 살아남게 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유성이 떨어지지 않는 지점인 이토모리고등학교로 향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미츠하와 친구들이 일으킨 사건이 이 작품의 클라이맥스에 위치한 일련의 변전소 폭파를 통한 '저항'이다. 미츠하는 이를 통해 미래에서의 요청에 응답하고, 미래에 일어날 일을 타츠키와 미츠하라는 관계를 대가로 치환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변전소 폭파와 가짜 방송 그 자체는 범죄행동이다. 그러나 이러한 범죄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더 많은 사람이 죽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와 달리 사건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미츠하의 아버지인 정장과 정의 직원들은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당연히 이러한 범죄행위를 차단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들은 미츠하 패거리를 한 명씩 한 명씩 잡아간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이토모리의 주민들이 살아나는가, 살아나지 않는가'를 생각하면 이들의 '작은' 범죄행위는 오히려 큰 재앙을 막기 위한 구출활동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미츠하는 저항하고, 결과적으로 아버지를 설득했기기에 마을을 살렸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때로는 미친것 같아 보이더라도 저항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사실을, 신카이 감독은 아마 그런 사실을 거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해당 사실을 보여주고자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에 대해 참고할만한 언급이 있다. 신카이 감독은 그의 2차 방한 중 이뤄진 SBS 나이트라인(SBS, 2017)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분명히 세월호와의 연계성을 인정하고 있다.

한국에 대해서는, 2014년, 마침 그 영화를 만들고 있을 때, 제가 크게 인상을 받았던 것이, 세월호 사고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 때에, 제가, 그 보도를 보고, 정말로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이, 침몰하는 배 안에서 "움직이지 말고 그 장소에서, 대기해 주세요"라는 안내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이, 정말로 아팠네요. '그 방송을 듣고 그 앞에 머물렀던 사람들이 있었다, 실제다'라는 것이어서, '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고 만 걸까'라고 [반응했습니다]. 역시 그 일은, 그렇게 될수 밖에 없었다고 제 안에서 남아 있어서… (저자 번역)

韓国といえば、2014年、ちょうどこの映画を作っているときに、僕がすごく印象ーに残っているのは、セウォル号の事故があったと思うんですね。あのときに、僕が、あの報道見ていって、とっても大きいなショックを受けているのは、沈む船の中で、『動かずにその場で、待機してぐださい』というアナウンスがあったと聞いたんですね。それが、とっても痛ましいこと、だしい、「その放送聞いてその前にとどまった人たちがいった、実際だ」ということなので、「え、どうしてこのことが起きてしまうんだろう」と、あの、やっぱりそのことは、そのできことはずと自分の中で残っていって…

(ⓒ2017 SBS)


   많은 분들이 아시겠다시피, 세월호 참사는 촛불혁명과 함께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이 정부의 정책을 인지하는 방식을 뒤흔들었다. 특히 2014년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이후 가장 이슈가 되었던 키워드가 '가만히 있으라'다. '가만히 있으라'는 분명히 탈출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서도 정부나 권력자가 명령했을 때 그것을 지키는 것을 통해 자신에게 손해가 올 수 있다는, 오래된 두려움을 구체화했다. 그런 의미에서 사건 이후 용혜원씨에 의해 '가만히 있으라' 행진이 발생한 것이나, 신카이 감독이 이코모리 사건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을 담은 것은 우연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권력들에 의해 부당하게 살해된 세월호에서 희생된 304명에 대한 적극적인 반응이라고 할 것이다.

   그래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이 작품은 한국의 지난 몇년동안 '혼이 비정상'이었던 역사와, 그리고 그 역사를 바꿔낸 저항과 맞물려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준다. 과연 저항은 어디까지 합법적으로 허용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결과적으로 사람을 살리는 활동까지 처벌하는 법률은 항상 올바르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우리는(그리고 최소한 나는) 한비자의 법치 이야기를 들으면서 왠지 모를 분노의 감정을 느낀다. 법률로 정해진 일이더라도 법률이 잘못됐다면 저항해 해당 법률을 폐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도덕과 사상들을 읽으며 롤스가 이야기한 기회의 균형이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동시에 로크의 저항권에 동감을 느낀다.

   우리는 국사를 읽으면서도 분노를 느낀다. 임진왜란 이후 세법이 흐트러지면서 나타난 결과인 무거운 세금은 법률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었고, 수많은 양민이 고통받았지만 교정된 일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동학 혁명에 대해, 아암도 소작항쟁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4·19 / 5·18 민주항쟁에 자부심을 느낀다. 그리고 그 저항의 결과물 중 하나로서 나타난 것이 이번 촛불혁명이다. 신카이 감독의 이번 작품이 한국에서 큰 영향을 불러일으킨 동력에는, 이러한 저항에 대한 정당성을 이 영화가 부여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이게 나라냐〉에 맞춰 추운 한겨울에 광화문 길을 걸었던 우리의 기억은, 〈너의 이름은.〉과 함께 조화돼 그 당시 일어나고 있던 카이로스적 변화를 순응하고 긍정하게 만든다.

   그러나 현재의 한국과 일본 법률 체계는 선의의 의도를 가지고 있고, 자신을 지켜야 해 어떤 행동을 위반했다고 하더라도 타이트한 법률의 조항을 위반했다면 그 사람을 교도소에 들어가도록 만든다. 실제로 엔딩에서 미츠하가 멀쩡하게 회사를 다니는 일은 제대로 따져보면 현대 일본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을법한 일이다. 일본의 정상적 시스템 아래서라면 미츠하와 동료들의 법률 위반은 이미 법률에 의해 처벌받아, 미츠하와 동료들은 교도소 생활을 거치고 나와서 정상적인 회사 채용이 거절받는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을 터이다.

   그러므로 신카이 감독이 나타낸 이야기의 반대선상에는 노조 혐오와 기업 자유 옹호, 그리고 법치를 통한 국격상승(?)을 강조한 한국의 극우정당들이 있다. 이들이 옹호하는 구 체계는 기업의 극대 이득 창출, 탈법적 노조 파괴, 최저임금 인상 반대, 친기업적 용어 왜곡 등 '개·돼지'들을 육성하고 가짜 민주주의를 활성화시키기 위한 것들로 가득차 있었으며, 외부 환경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표면적 변화만을 부르짖으며 대기업만을 위한 성장을 꾀했다. 그들은 그 결과로 그들이 위한다고 주장하는 국민들의 삶이 철저히 망가지든, 원전이 터져서 사람이 죽든, 급격한 원수 유입으로 지진이 나 수많은 사람이 다치든지에 대해서는 상관해오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들의 저항을 좌빨·용공·공산주의로 몰아가 분쇄하는 것이 대한민국을 살리기 위한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선전하고 있다. 일본도 많은 부분 비슷할 것이다. 이에 대해 '이것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한국과 일본의 많은 관객이 적극적으로 수신했다는 것은, 다시 말해, 이 모순적인 망국병에 대해 사람들이 더이상 '쇼하지 마라, 속지 않는다'(윤민석, 2016)라는 반응을 내보낼 수 있는 일련의 공통적인 문화자본을 수신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문화자본이 발출(發出)되었느냐, 그렇지 않냐의 차이만이 존재할 뿐이다.

'언령신앙'과 '무스비' 

그런데, 왜 이런 위험한(?) 작품을 일본 정부는 굳이 문제삼지 않는걸까? 게다가 유난히 까다로운 법률 및 규칙 파악에 빠른 일본 행정부가 단순히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네임 밸류나, 대기업의 지원을 받아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작품을 그냥 긍정적으로 파악할 리가 없다. 앞서 소개했듯이 이 작품은 '문부과학성 예술문화진흥기금'을 받아 제작됐다. 정부가 봤을 때도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근거에는 정부 정책, 특히 일본 문화를 발산하는데 긍정적인 요소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필자는 그 요소가 이 작품에 강하게 투영되어 있는 일본의 전통 문화라고 본다.

   첫번째 요소는 언령(言靈)신앙이다. 말에 힘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신도 신앙에서 유래된 이 신앙은 사람이 내뱉는 말을 통해 미래의 일을 좌우한다는 믿음을 나태나고 있다(이케가미 아키라, 2001). 또한 동시에, 그 속에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나타난 바가 있듯이, 이름을 바꾸는 행동이 사람의 존재나 의미 등을 바꾼다는 - 한국에서와 동일한 - 믿음 또한 깃들어 있다. 〈너의 이름은.〉에서도 이름의 존재가 결과적으로는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된다. 타키와 미츠하는 서로의 이름을 안다는 것을 전제로 다시 만날 수 있었으나, 두번째 만남을 통해 서로의 이름을 잊는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이름값'이 재앙의 결과를 바꾸는 대가로서 지불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두 사람의 이름을 둘러싼 인식 변화의 근거는 분명히 일본 전통 문화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두번째 요소는 애초의 이야기의 배경이 된 신사의 신화다. 이번 이야기에서 극중의 바탕이 된 것은 이토모리 산의 성역에 보존되어 있던 한 가지 옛 기록, 즉 과거에 운석이 도달했던 이토모리에 다시 동일하게 운석이 도달한다는 신화였고, 그 신화는 분명히 애니메이션에서 두번에 걸쳐서 재현되었다. 그리고 이야기 진행에 도움이 되었던 입으로 만든 술도, 해당 신사의 전통에 따라 미츠하의 몸으로 타키가 술을 만들고, 죽은 미츠하에게 돌아가기 위해 타키가 금기를 깨고 신사에 들어가 술을 마신다는 이야기 요소로 이어진다. 

   물론 작중의 이야기는 전부 픽션이지만, 신화의 재현이 이뤄진다는 이야기를 통해 일본의 정신을 떠받들고 있는 신도의 신뢰성이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물론 최근의 전형적인 TVA들에서 새해맞이 신사참배(初詣)가 자주 나오는 것을 보면 분명히 신사나 신도가 권위를 내세우는 것을 벗어나 일상생활의 일부분으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신사와 신도가 미디어를 통해 신뢰할만한 지혜로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 여러번 노출될 때, 일본국민 뿐만이 아니라, 애니메이션을 시청하는 (우리나라를 포함한) 해외의 사람들에게도 (역사적 사실과 무관하게) 일본문화를 친숙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물론 이로 인해 이어지는 역사왜곡의 가능성은 언제나 대비해야 할 것이다).

   셋째 요소로는 무스비(結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무스비 또한 이 애니에서 의외로 여러번 나오는 서사장치 중 하나다. 특히 신카이 감독은 結び가 '이어짐'과 '매듭', '끝맺음'이라는 서로 다른 의미를 활용해 극중에서의 타키와 미츠하의 관계를 시각화한다. 애니메이션 중간에 나오는 타키와 미츠하의 첫 만남은, 미츠하가 타키에게 긴 머리줄을 전달해주는 장면으로 상징된다. 타키가 받은 매듭은, 미츠하와 타키와의 상호신체교환이 일어나도록 하는 매개체가 되어준다. 또한 해당 매듭은 타키가 미트하를 발견하고 이동해, 타키와 미츠하의 재회를 이끌어주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한다. 이렇게 일본 전통의 '머리 묶는 줄'을 통해 신카이 감독은 타키와 미츠하 사이의 '매듭'을 시각화해 설명한다. 신카이 감독은 이를 통해 일본어-일본 문화에 대한 호감도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일본 전통문화는 이 작품을 이끄는 중요지점마다 나온다. 애니메이션 속에 딱 한번 나오는 수업 시간에, 굳이 '다소가레'(たそがれ)의 용법을 배우는 시간이 있다. 일본한자로는 '황혼'(黃昏)으로 전사되고, '저녁놀'로 번역되는 이 단어가 (만엽집을 구체적으로 적시하지는 않지만) 원래부터 '誰そ彼(너는 누구여)'에서 나온 말이라는 수업은 예상 그대로 떡밥이 되어 타키와 미츠하가 바뀐 몸을 가지고 만나는 지점에서 활용된다. 이 만남은 미츠하와 타키가 변화된 세계로 돌아가는 기회가 됨과 동시에, 변화된 세계를 고정하는 기회가 된다.

   이와 같이, 〈너의 이름은.〉은 이전 작품과 달리 일본문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이러한 활용 결과는 문부과학성 예술문화지원기금의 수령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결과가 신카이 감독의 네임 밸류에 의한 것이라고 판단하기는 힘들다. 신카이 감독이 지원을 받기 위해 이야기 속에 의도적으로 붙인 것일 수도 있고, 일본국 정부의 쿨재팬 정책에 맞춰 이야기를 조정한 것일 수도 있다. 이 외의 추측 중에서 신카이 감독이 가지고 있는 본심(本音)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와 관련된 정황적 판단은 뒷부분에 일부나마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70203 작성 시작, 180129 1부 공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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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7 22:24

서브컬처의 종말


(ⓒ2000, earpile, 이 사진의 허가 없는 사용을 금지함.)


한국의 서브컬처는 서브컬처가 아니다

최근 서브컬처가 언론의 높은 주목을 받고 있다. 학계에서는 하위문화로 익히 알려져 있고, 서브컬쳐라는 철자를 사용하기도 하는 서브컬처(subculture)는 본디 햅디지(D. Hebdige)나 스튜어트(J. Stuart)를 비롯한 영국 문화연구자들에 의해 제안된 개념으로, 한 국가의 소수 민족이나, 특정 젊은이 집단들이 일반 대중문화가 제시하는 라이프스타일을 거부하고 자신들만의 의상, 단어, 라이프스타일, 가치를 가지고 삶을 살아 나가는 방식을 이르는 말이었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이 단어의 사용은 2000년대부터는 분위기가 바뀌어, 일본 문화콘텐츠에서 비롯된 만화-애니메이션계 문화나 그와 비슷한 분위기의 문화를 전적으로 의미하는 단어로 그 의미가 바뀌었다. 그 이유는 국내 ‘하위문화 연구’들의 경향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현재도 그렇지만, 과도한 주입식 교육과 야간타율학습 등에 의해 청소년들의 자율성과 자유시간이 적고, 청소년들이 벌 수 있는 돈이 사실상 없다시피 한 상황에서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야간 시간대에 바깥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자신들의 조직적인 문화를 형성하기는 어려워진 반면, 동인지나 코스프레 등의 문화들이 2000년대 초반 청소년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대안 문화로 등장하는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구자들의 판단은 대안문화들로 구성된 새로운 문화향유 방식을 하위문화로 호칭하는 것을 대세로 만들었고, 결국은 문화의 향유자들이 이 단어를 자신들이 소속되어 있는 메타문화 전반을 ‘서브컬처’로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게 만들었다. 하지만 현재 한국에서 사용되고 있는 ‘서브컬처’라는 개념은 원래 영국 문화연구가 형성한 하위문화의 개념과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헵디지의 저서인 <하위문화>(헵디지, 1998)는 하위문화의 역사를 1976년의 무더웠던 영국의 여름, 그리고 그 여름 끝자락에 있었던 흑인과 경찰의 싸움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한다(:41-42). 헵디지에 따르면 이러한 사회문화적 환경이 받침이 되었기 때문에 뿌리가 불분명한 펑크 문화가 ‘묵시록적인 여름 기간’에 음반시장에 데뷔할 수 있었다(:42). 이와 함께 영국으로 이민 온 아프리카의 자손들, 특히 자메이카에서 온 이민자들은 성경과 에티오피아의 전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 1세에 대한 신앙을 결합한 라스타파리rastafari 신앙에 기반해 아프리카적인 ‘사악한 게릴라 스타일’(:66-67)을 드러냈다.

마찬가지로 백인들, 특히 노동자 계층의 청소년들은 자신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지식과 정숙함을 가르치는 학교에 대해서는 반항하는 모습을 공공연히 드러냈고(윌리스, 2004), 테드족teds, 힙스터족hipsters, 트래드족trads, 모드족mods 등의 패거리(헵디지, 1998:70-81)를 통해서 집단적인 소속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 하위집단들에는 애초에 집단 구성원들과 다른 나이나 민족, 배경 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참여가 거의 불가능했고, 가능하더라도 주변의 같은 나이대의 여성과 같은 예외적인 사례만이 보고되었을 뿐이다.


새로운 ‘서브컬처’의 특징

이러한 하위문화와 달리, 현재의 ‘서브컬처’에는 몇 가지 큰 차이가 있다. 첫째로, ‘서브컬처’의 구성원을 구별하는 기준이 기존 하위문화의 기준과 분명한 차이가 있다. 지역이나 젠더, 소속 계층 등 로컬리티에 기반한 하위문화의 입문 기준은 콘텐츠나 특정 대상에 대한 선호와 공감, 그리고 참여 정도라는 비가시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현재의 ‘서브컬처’는 더 이상 청소년의 전유물이나, 남성과 여성만의 문화가 아니다. 심지어 같은 ‘서브컬처’의 구성 콘텐츠 등에 공감하고 모임이나 인터넷 공간에서 열심히 활동한다면, 40대 아저씨도, 80대 어르신도 그 문화의 구성원이 될 수 있다.

  ‘서브컬처’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지만, 비슷한 사례로 아이돌 문화의 사례도 참조할만하다. 2015년 MBC가 방영한 파일럿 예능 프로그램 <별바라기>에는 90년대 활동을 시작한 스타를 십여 년 넘게 계속해서 쫓아다니는 팬들이 다수 등장했으며, 심지어 일본 유수 대학교의 교수도 한 가수의 팬클럽을 만들어 활동하는 대학교수도 이 방송에 출연한 바가 있다.

  둘째로, 하위문화를 구별하던 기존의 구성요소들(예를 들어 의상, 언어, 가치관의 차이, 그리고 반항도)가 ‘서브컬처’를 설명하는 변별 요소로 더 이상 작용하지 못한다. 물론 ‘서브컬처’ 중에서 하위문화의 구성요소로 보이는 문화적 특성이 발견되는 경우가 많고, 이러한 특성들을 기반으로 ‘서브컬처’가 하위문화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연구도 있지만, 이러한 주장은 이들 ‘서브컬처’ 구성원들이 왜 일상에서 자신의 삶을 반영하는 새로운 의상을 입지 않거나, 일상적인 삶을 벗어난 일탈 행위를 적극적으로 보여주지 않는지, ‘서브컬처’ 구성원의 연령대가 갈수록 넓어져 가는지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내놓고 있지 못하고 있다.

  셋째로, ‘서브컬처’는 근대사회에 의해 자연스럽게 형성된 기존 하위문화와 달리 근대 사회의 종말을 증언하는 증거이다. 인류 문화의 초기에는 가족, 친족, 이웃 관계에 의해 구성된 게마인샤프트(공동사회)가 주로 사회와 문화의 기반이 되었고, 산업시대에 들어서 회사나 정당 같이 이익이나 정치 가치에 의해 구성된 게젤샤프트(이익사회)가 지역간의 교류를 확산시켰다면, 이제 우리는 문화콘텐츠나 인터넷 등의 새로운 가치가 지역을 넘은 새로운 교류와 함께 문화산업과 정책 전반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2016년 6월 발표된 ‘포켓몬 고’를 가장 큰 사례로 꼽을 수 있다. ‘포켓몬 고’는 대한민국에서 원래 실행이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속초에서 ‘포켓몬 고’의 플레이가 가능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속초시는 아직 휴가철이 되지 않았는데도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 그 결과, ‘포켓몬 고’를 플레이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속초시로 몰리면서 속초로 가는 버스표가 전부 동나고, 당일치기로 속초로 향하는 전세관광버스 상품이 생겼다. 포켓몬의 알을 부화시키기 위해 폰을 이동시켜주는 아르바이트도 등장했다.

  속초시 또한 핸드폰 충전소 및 무료 와이파이, 포켓몬 고 체육관을 소개하는 무료 지도를 인터넷으로 소개하며 갑작스럽게 찾아온 포켓몬 붐에 대응했다. 이러한 붐은 그 정도만 달라졌다 뿐이지 미디어의 관심에서 멀어진 2016년 10월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공식 오픈도 되지 않은 게임 콘텐츠 하나가 지역활성화를 촉진하는 결과를 낳았다.

  ‘포켓몬 고’만이 이러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인터넷이 있기 전부터 ‘서브컬처’ 행사들은 ‘서브컬처’ 팬들의 이동과 결집을 촉진해 왔다. 다양한 콘텐츠를 좋아하기에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 심지어 남부 지방에서부터 한 장소에 모이는 많은 사람과, 그러한 현상을 일으키는 작고 큰 ‘서브컬처’ 행사들은 문화예술 바깥에서 이뤄지는 문화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이미 새로운 문화는 번성하고 있다

‘서브컬처’에서 쓰이는 단어들은 일상생활에서도 이미 스며들어 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서브컬처 팬들을 부르는 명칭은 오타쿠(お宅)을 한국어화한 ‘오덕후’, ‘오덕’, ‘씹덕’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특히 tvN의 <화성인 바이러스>에 방영된 ‘오덕페이트’ 이진규님 같이 부정적인 이미지를 담은 미디어 노출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2010년대 중반부터 서서히 ‘코스프레하다’는 단어를 정치인의 입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으며, ‘성지순례’, 니코니코니, 일코, 덕질 등의 단어 또한 한국인의 일상에서 쉽게 회자되고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데프콘씨의 <에반게리온> 사랑은 이미 유명 TV 예능 <나 혼자 산다>을 통해 ‘덕밍아웃’된 상태고, 코스어 출신 서유리(로즈나비) 성우는 <세터데이 나잇 코리아>(SNL Korea)와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서 활약하며 대중 연예인으로 자리잡았다. 유튜브를 기반으로 활약하는 씬님 또한 유명 코스어로 이름을 날린 바 있다. 시사iN에서는 잘못된 의미에 기반해 구성되기는 했지만 중림동 새우젓 팀을 구성해서 다양한 취미문화의 모습을 설명하는 기획을 진행하고 있고, 얼마전에 연재가 중단되었지만, 정용인 기자의 <언더그라운드.넷>또한 웹컬처 기반의 소문들을 공식적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했다.

  이제 청소년 문화에서 벗어나 한국 사회 문화의 일원이 되어가고 있는 ‘서브컬처’는 따라서 더 이상 하위문화라고 불려질 수 없다. 서브컬처나 하위문화, 오타쿠 문화 등 기존에 이 문화를 부르던 이름들이 문화향유자들에 대한 비하적인 의미를 담고 쓰여지는 것까지 감안한다면, 이 문화는 새로운 명명을 가지고 분류되는 것이 마땅하다. 따라서 본 논고에서는 이 문화의 새 이름으로 웹컬처를 제안한다.

  참고로, 국내 서브컬처 비평가들 사이에서는 웹컬처 이외에도 네오컬처(나 신문화), 동호문화 등의 새로운 제안이 등장한 적이 있다. 그러나 ‘서브컬처’가 기존의 로컬리티를 벗어난 트랜스로컬리티에 기반한 문화라는 점에서, 웹컬처만큼 이 문화의 본질을 표현한 문화는 없다고 생각된다.

  한편, 최근 성우계와 웹툰계 등 통상적인 웹컬처 분야에서 젠더 대결이 남성주의자들에 의해 제기됐다. 다시 언급2016년 김자연 성우 탄압 사건은 한국의 창조산업을 왜곡하고자 하는 노력이었다. 이 사태 와중에 ‘한국서브컬쳐협동조합’이라는 단체가 제안된 적이 있었다. 이 협동조합은 새로운 웹툰 플랫폼을 제안하면서 ‘비상식적인 커뮤니티를 지지하는 등의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작가를 위한 정기적인 SNS 인성 및 홍보 교육 및 시사 교육’(한국서브컬쳐협동조합, 2016)을 실시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1년이 지난 현재, 이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며, 작가의 창작의 자유를 비합리적으로 제약하고자 하는 행위는 결국 실패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는 교훈을 되새긴 바, 이들이 서브컬처라는 단어를 썼다는 사실은, 서브컬처의 종말이 이미 이르렀으며, 서브컬처가 경계적 상황을 벗어나 과경계적(transborder) 상태로 이행하면서 새로운 웹컬처로 재편되고 있는 현상이 실현되고 있다는 점을 함의한다. (161124 공개, 171227 일부 개정)


참고문헌

윌리스(2004), 학교와 계급재생산 - 반학교문화, 일상, 저항, 이매진. 원전: Willis(1981), Learning to Labour : How working class kids get working class job, Columbia University Press.
헵디지(1998), 서브컬처: 스타일의 의미, 현실문화연구. 원전: Hebdige(1979), Subculture: The Meaning of Style, Routledge.
한국서브컬쳐협동조합(2016), "협동조합 구조-한국서브컬쳐협동조합", 2016. 11. 24. 확인. http://modakbul.net/koscop/co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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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09 17:32

<일반의지 2.0>과 엔하계 위키, 그리고 친목사회


일반의지 2.0 - 8점
아즈마 히로키 지음, 안천 옮김/현실문화


단 해명부터 해두자. 나는 아즈마 히로키의 논의 그 자체에 대해서는 좋아한다. 그가 정리한 내용의 흐름, 그러니까 자신의 주장을 이끌어 내는 방식에 대해서는 좋아한다. 하지만 그가 주장하는 바는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자세히 살펴보고 있다보니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전에도 아즈마 히로키의 논의에 대해 크게 비판했는데, 이번에도 비판할 수 밖에 없다. 미리 양해를 구해둔다.

   엔하계 위키 이야기를 하기 위해 아즈마 히로키의 <일반의지 2.0>부터 다루고자 하는 이유는, <일반의지 2.0>이라는 개념이 가장 현실적으로 실현되고 있는 장소가 바로 한국 남성들이 주도하는 커뮤니티, 그리고 그 안에서의 커뮤니케이션 방식과 닮았기 때문이다. <일반의지 2.0>은 한국 사회의 무친목사회의 개념이 정확하게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그리고 그 방식이 왜 틀렸는지를 쉽게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좋은 도구다. 즉, <일반의지 2.0>을 통해 아즈마 히로키가 다룬 제안은 한국 사회와 엔하계 위키라는 -'다른' 것을 넘어 '틀렸다'고 판단하고 말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를 정도로 명확한 - 반례에 마주친다.

문제 1 : 일반의지의 조작가능성

<일반의지 2.0>의 한국어판이 출간되고(2012. 7. 10) 정확하게 다섯달이 지난 2012년 12월 11일부터, 한국 국민들은 당장 '일반의지'(General Will)의 무용성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당시 서울의 모 오피스텔에 머물러 있던 故 김하영 회사 직원(지금은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故라는 표기를 썼다)은 대선에 대입하기 위해 댓글을 달고 있던 중 갑자기 저녁에 들이친 민주통합당 의원들과 경찰들에 의해 적발당했다. 그러나 김씨는 자신이 소속된 심리정보국의 지시를 받고 해당 사실을 은폐했고, 대선이 치뤄진 이후 지속적으로 이뤄진 검찰과 대안언론 뉴스타파, JTBC의 조사가 있고 나서야 사실이 밝혀졌다.

   김씨를 포함한 여러 국정원 요원, 그리고 외부 조력자들은 국정원 상부의 지시에 따라 내부 비용으로 박근혜를 지지하고 문재인 당시 후보를 비난하는 댓글을 트위터와 뽐뿌, 보배드림, 일베 등의 SNS와 커뮤니티 게시판에 다중계정을 통해 다량으로 올렸으며, 이러한 사실이 빅데이터 회사들에 의해 밝혀지자 즉각적으로 해당 내용을 삭제하는 등 증거조작도 서슴지 않았다(물론 명품타임라인 윤정훈 목사의 십자가 알바단과 같이 당시 새누리당 내부에서 일어난 조작 움직임이나, 사이버군의 군기문란과는 별개의 움직임이었다). 즉 현재 박근혜 대통령은 당시 이명박 정부의 행정부와 입법부 일부가 결합해 만들어 낸 일방향적인 의견 조작에 의해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을 밝혀내는 즉시 박근혜 대통령은 수사에 임한 윤석렬 검사를 좌천시키고, 채동욱 전 검찰총장은 사적 사건을 드러내 결국 퇴임시켰다. 그리고 박근혜는 퇴임하지 않았다.

   이후 박근혜 대통령은 줄곧 여론의 조작을 지속적으로 꾀하고, 자신의 사익을 추구했다. 박근혜 정부는 최순실과 전 김기춘 비서실장의 조언에 의해 2014년부터 문화계, 스포츠계 등 각종 정부지원금 사업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의 목록인 블랙리스트를 만들었으며, 이에 반발하는 유진룡 전 장관을 해임해, 심사결과와 무관하게 이들을 지원결과에서 제거하고, 이를 통해 '종북좌파'의 돈줄을 끊었다. 동시에 박근혜 정부는 이명박 정부에 이어 이른바 '종북좌파'로 불리는 환경운동연합, 참여연대 등의 사회단체에는 지원을 끊고, 반대로 아무런 사회공헌 없이 박근혜 정권에 유익한 목소리를 내놓은 어버이연합, 미디어워치 등의 여론조작 기관에는 전경련 등을 통해 재정을 우회지원했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의도적으로 만든 것이다.

   그 결과 최순실의 국정농단은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의 생성 및 정부와 기업에서의 예산 뜯어내기로 이어졌고, 결국 이러한 사실들이 폭로되면서 작년 12월 9월에서야 박근혜는 탄핵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이라는 이승만의 자유당이나 일본 자유민주당을 연상케 하는 아연실색한 이름으로 당명을 바꾸고, 이미 보도된 바와 같이 행정부의 수반인 황교안 대행은 자유총연맹에 돈을 지원하면서 3월 1일에 100만명의 시민을 반대집회에 동원하도록 지시해 이러한 공론장 왜곡을 꾀하고 있다.

   그렇다면, 애초에 공론장이 정부에 의해 조작될 수 있는데, 일반의지가 정상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아즈마 히로키는 <일반의지 2.0>에서 이러한 공론장이 트위터 등의 SNS에 의해 오롯이 존재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애초에 원래의 데이터베이스의 조작 및 개입 가능성이 농후하고, 그러한 의견들을 나머지 개인의 의견과 분리해 볼 수 있는 방법론이 없는 한, SNS를 통한 일반의지의 형성은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당장 아즈마 히로키가 의지하는 댓글의 결과물 자체가 한국에서는 정부나 정당이 운영하는 댓글부대, 망○지, 장○ 냉면 등의 사이비 집단, 박사모를 포함한 '적극적 의사표현집단'들에 의해 왜곡될 가능성이 높고, 그런 사례가 한국에서 수도 없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상기하고자 한다.

이게 나라냐? (출처 : 연합뉴스)


   이러한 의문을 품을 수 밖에 없게 하는 또 다른 곳이 북괴일 것이다. 북괴는 자신들이 민주주의 국가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소위 민주주의적 투표를 한다. 하지만 실제로 투표로 발표되는 결과는 98%, 99% 이상의 찬성결과다. 즉 해외에 나가 투표할 수 없는 사람을 제외한 숫자 전부가 로동당이 제시한 단일후보에 찬성투표를 한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나오는 슬로건이 '모두 다 찬성투표하자!'다. 그런 투표를 통해서 '일반의지'가 형성되었으므로 김정일 김정은의 독재체제가 합법적으로 형성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객관적으로 보면 불가능하다.

   이와 같이, 실제의 일반의지와 다른 가시적인 '일반의지'가 정부나 다른 조직에 의해 형성될 가능성이 농후하고, 그러한 의지가 실제 통치기반을 지지해주는 것처럼 보일 가능성이 많다. 따라서 기존 일반의지와 다르게 나오로록 유도된 '일반의지'에 대해 다른 이름을 붙여 루소와 아즈마가 주장하고자 하는 일반의지와 구분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는 일단 의사일반의지(Pseudo General Will)라는 이름을 붙여보자.

   박근혜 정권이나 북괴정권이 만들어낸 '일반의지'를 구분해서 원래 일반의지와 구별해 본다면, 이해는 간단해진다. 박근혜 정권이 강변하거나, 유지하거나, 실제 국민의 뜻이라고 대변한 의사일반의지는 대한민국 국민의 일반의지와 충돌하거나, 상반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다면 의사일반의지에 의해 생성된 정책 결과나, 아즈마 히로키가 그토록 비판한 '숙의민주주의'에 의해 생성된 결과나 동일하게 일반적으로 편향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일반의지 2.0>이 제시한 개념은 일반의지에 의사일반의지가 결합된 왜곡된 결과를 낳을 수 밖에 없는것으로서, 오히려 일반 절차에 비해 더 많은 빈도로 왜곡된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인데, 이 개념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다.

문제 2: 구성원의 자격

<일반의지 2.0>에 따르면, 일반의지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항상 개인간의 의견 토론이나 의견 조정, 정당이나 결사와 같이 개인의 자발적인 의견을 훼손할 수 있는 내용(아즈마, 2012:52)은 배제되어야 하며, 정부는 일반의지를 즉각적으로 수집할 수 있도록 구성해(p. 39), 개인의지를 합친 결과물인 전체의지를 제대로 분석해 백터값을 제대로 계산해내고(pp. 46-7), 그 결과물인, '항상 옳고 공공의 이익을 향하고 있는'(p. 44. 루소의 말에서 재인용) 일반의지를 즉각적으로 실행해낼 수 있는 '중간단체'(p. 39)로서만 기능해야 한다.

   그런데 일반의지의 구현을 위해서 루소가 또 하나 더 강조한 것이 있다. 루소는 '공동선'을 이루기 위해 동질한 집단의 연합인 사회를 구성하기 위한(오근창, 2013:74) 필수적인 수단이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봤다. 첫째로 시민이 '공공선'을 인지하기 위해서 입법자가 입법 전에 '사회적 정신'을 양성시켜 공동체에 들어오거나 그 안에서 태어난 인간이 공동체의 일반의지를 준수하도록 만드는 것이다(:77). 둘째로, 이를 위해, 공동체를 애국심, 또는 '사회성의 감정'에 기반해 사랑하도록 만들기 위한(:79) 문화자본-사회자본을 구성하기 위해, 시민종교를 지정하고, 모든 공동체가 같은 종교 아래에서 '조국'을 사랑하도록 제안한다(:80).

   그렇다면 공동체의 일반의지는 항상 타당하다는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는, 공동체에 새로 들어오거나 공동체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공동체의 일반의지를 드러내기에 적절한 인성이나 품성을 갖추지 않았을 때, 이를 교정하거나, 그들을 공동체나 공동체의 의사결정과정에서 내쫓아내면 된다는 결론이 쉽게 도출된다. 간단히 말해 일반의지는 일반적으로 동질적이거나 일원화된 사회에서라야 정상적으로 작동된다는 의미기도 하다. 세계화의 여파로 다원화, 다문화로 구성되어가고 있는 현재의 사회에는 적절하지 않은 방식인 셈이기도 하다.

현재는 당연하게 여기는 여성 투표, 아무렇게나 이뤄진 결과가 아니다.(Voice of America, PD)


   어쨌거나, 유일종교 형성을 위한 타종교 탄압이나 민주주의 탄압(은 이미 심각한 인권침해라는 사실이 자명하지만)을 통해 이런 절차를 충실히 거쳐 국민의 일반의지를 파악할 수 있는 단계에 도착한다고 치자. 그렇게 형성된 일반의지는 유지될 수 있는가. '집단'의 일관성이 항상 유지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집단의 일관성은 언제나 도전받으며, 더군다나 역사의 진행에 따른 결과물은 집단의 의사결정 참여권과 중요한 역할을 가진 사람의 수가 시간이 지날 수록 늘어나는 일관적인 현상을 보여왔다. 이미 인류는 흑인과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받기 위해 많은 피와 시간을 소비했고, 그 결과 현대 사회는 여성이나 흑인들의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이들의 일반의지와 기존의 '일반의지'가 충돌할 때, 단순히 이들이 합쳐진다는 것만으로, 올바른 '일반의지'가 측정될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은 우리가 이미 경험하고 있다. 핫한 이슈들을 제외하고 나서더라도, 우리는 장애인이나 노인이 일반 남성들과 동일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러한 상황을 느끼고, 살아나가고 있다. 심지어 개방된 믿음-사랑 공동체라는 개신교 교회라도, 가톨릭 교회라도, 어느 상가라도, 모든 공동체에서 발언권의 정도가 동일한 곳은 아무 곳도 없다. 어디선가는 자신의 발언의 권한이 깎여져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다. '적법한' 모든 사람들이(여기에서 어린이나 범죄자는 일단 빼 주도록 하자) 자신의 배경에 의해 발언권이나 의결권을 제한당한다면, 그리고 누군가에 의해서 언제라도 그 의결권이 제한당할 우려가 있다면, 그 사람들이 빠져 있는 상태에서 이뤄지는 정치행위는 정당한가. 여기에 하나 더해, 최근 다문화 사회 문제로 발생하는, 공동체 속으로 들어오는 외국인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문제 3: 파당이 없더라도, 차이는 존재한다

셋째로 살펴봐야 할 점은, 루소가 '일반의지'의 활성화 요건의 하나로, 파당이나 사전담론 구성의 금지, 더 정확하게는 '시민 상호간에 어떤 소통도 없는 상태'(오근창, 2013:72, 사회계약론 :371-372에서 재인용)를 명시했다는 점이다. 이 주장을 그대로 실현하기 위해 파당이나 사전담론 구성을 금지한 가장 효율적인 사례가, 조지 오웰의 <1984>의 국가 IngSoc이 나타내는 공통의 비판 대상과 강력한 숙청이나, 그 곳의 현실판인 북괴에서 나타내는 상호비판과 수용소 제도라는 사실만을 살펴도 분명한 바, '부분적 사회'(Partial society, ibid.)를 없애기 위한 노력은 결국 인간 본성과 인권에 대한 침범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할 수 밖에 없다. 즉 일반의지가 생기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전적 조건은, 사실 이성적 판단을 빌미로 한 비인간성이다.

   그렇지 않고, 이성적 판단이나 대화가 존재한다면, 과연 그 안에서 어떤 결과가 발생하는가. 루소가 비판하는 특수의지가 자연적으로 생겨난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아즈마 히로키가 희망을 걸고 의지하는 트위터 등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가 한국에서 어떻게 발전되었는지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물론 라운지를 갖췄던 플레이톡이라는 반례를 여기에서 무시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관리자에 의한 종국을 생각하면, 이렇게 형성된 일반의지가 언제라도 파괴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2009년 트위터 붐이 시작된 이후 2011년까지, 트위터는 하나의 공론장으로 인식됐다. 생각해 보면 이런 결과는 플레이톡 사건 이후 사용자들이 트위터로 나오면서 강화되기까지 했다. 그 당시를 떠올려보면 모르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쉽게 만날 수 있거나 친해질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모든 사람들이 이 공산을 소통의 공간으로 생각하고 대화를 이어 나갔으니, 당연히 사회적 공론장의 기능을 충분히 소화할 수 있을 줄로 생각했다. 하지만 201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이런 모습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 확실한 증거가 이찬진 전 한글과컴퓨터 사장이 개발한 서비스 twtkr과 다양한 당 활동을 트위터를 통해 제공했던 twtmt의 몰락이다. 여기까지만 읽고 보면 트위터라는 공론장이 특수의지를 배척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고, 일반의지를 형성해주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미 2010년도부터 일반적 공론장보다는 더욱 세부화된 특수공론장의 존재가 그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그것이 보여주는 것이 TL계다. 타임라인이라는 단어를 차지한 TL계, 또는 '애니프사'로 불리는 주로 10-20대 남성들의 그룹이 2010년도 초부터 생겨나기 시작했다(참고로 이들의 타임라인을 수집해 볼 목적으로 @e1if를 저자가 만든 시점이 2010년 6월이다). 물론 그 당시 기존 트위터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있었지만, 이들이 동시 시점에 트위터에서 나눴던 담론의 내용은 기존의 한국 트위터 사용자들과는 달리, 주로 만화-애니메이션 동호문화나 리듬게임 등의 내용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타임라인 내용은 기존의 담론과 다른 특수의지의 발현일 수 밖에 없었다. 이 시기에 생겨난 기타 당들도 별도의 해시태그를 달고 트위터 안에서 결과적으로 또래별 움직임과 같이 분리된 집단을 형성했다는 점에 유의하자.

   이 글이 한국 트위터사를 쓰려는 목적이 아니므로 짧게 더 언급하자면, 이후 2013~4년부터 그 대척점에 여성 코스어를 포함한 여성 만화-애니메이션 동호인들, 대중문화 팬덤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 또한 자신들의 선호에 따라 자신들의 친구가 될 사람들을 선택했으며, 특히 기존 TL러들이 구축해 사용하던 봇 기능을 캐릭터를 이입시키는 새로운 방식으로 전환했다(이 과정에서 수동봇 기능에 대한 남TL-여TL간 설전이 있기도 했다). 그 결과 이들 또한 트위터에서 새로은 비가시적인 사용자그룹으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모습이 한국에서만 발생한 특수사례일까? 그렇지 않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일본의 코스어나 철도동호인들도 이미 나름대로의 비가시적 유저 그룹을 형성하고 있고, 이들의 대화 내용 또한 일반인들의 그것과는 분리되어 있다.

여TL과 남TL 모두를 정치 장(field)에 끌고 들어온 김용익 전 의원의 공로를 무시할 수 없다. (출처:twitter.com)


   그렇다면 이 사례를 다시 우리가 검토할 주장에 비추어 살펴보도록 하자. 아즈마의 <일반의지 2.0>의 가능성은, SNS, 특히 트위터의 '비분할된 하나의 공론장'을 형성하고, 이를 통해 '모두'의 '일반의지'를 즉각적으로 수렴할 수 있다는 기능을 바탕으로 제안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 트위터만 해도 하나의 '공개되어 있는 언어별 언론에 의한 공론장'은 나이와 성별, 문화자본이나 사회자본, 정치적 성향, 종교 등의 비가시적인 구성요소들에 의해 잘게 조개져 있다. 이런 상태에서 단순히 트위터를 일반의지를 형성할 수 있는 통로로 보기에는 큰 무리가 있다. 당장 트위터만 해도 공개적인 라운지가 아닌 사용자에 의한 폴로잉에 의해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그 과정에서 네트워크 바깥의 정보를 공식적으로 수집하는 데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점들이 더욱 심화된 장소가 페이스북이나 카카오스토리 등의 폐쇄적인 SNS다. 많은 소셜미디어 업계인들은 카카오스토리를 주로 20대 후반 ~ 30대 어머니들의 소통 공간으로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카카오스토리를 젊은 주부들에게 마케팅하기 위한 공간으로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 한켠에는 코스어들이나 만화-애니메이션 동호인 등이 상당수 있다. 이들의 소통 내용 또한 젊은 주부의 그것과 전혀 다르고, 더군다나 이들의 네트워크들은 결과적으로 몇몇의 소수 링크를 제외하면 메인스트림과 분리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들 SNS에서는 <일반의지>가 여러 개가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가? 일반의지가 전체 담론을 수용하는 공론장 개념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이들 네트워크에서는 특수의지들만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해 준다.

   또한 SNS와 같이 자발적인 서비스에서는 한국 국민이나 일본 국민과 같이 일정 사회 구성원의 일반의지를 수집하고자 하는 시도에도 무리가 있다. 우선 폴로잉이나 이를 차단하는 것은 사용자의 자유이므로 하나의 계정이 모든 계정을 폴로잉하는 것을 수락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즉, 일반의지 구성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또한 같은 언어권에 있고 타자의 언어를 이해하고 표출하기에 큰 어려움이 없지만, 집단의지를 구성하기에 적정하지 않은 구성원들이 해당 일반의지 구성을 위한 단계에 끼어들 수 있다. 또한 인터넷 사용이 어려운 어르신, 신체 장애인(정신/발달장애의 문제는 여기서 잠시 미뤄두도록 하자) 등의 정보취약계층은 당연히 SNS에서 다른 일반인과 동일한 만큼의 의사표현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SNS를 포함한 네트워킹 서비스는 특수의지들을 더욱 극명히 드러내는 역할을 할 뿐, 특수의지들 속에서 일반의지를 드러내는데 기여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반론 : 통계학적 관점에서?

그러나 다음과 같은 반론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아즈키 히로마는 루소가 벡터 개념을 이용해 의견을 수학적으로 도출할 수 있는 상태를 예측했으며, <일반의지>가 수학적인 존재이자 사물적인 존재로서 존재한다고 봤다(아즈마 히로키, 2013:). 즉 일반의지의 구성은 자신의 내용만을 피력할 수 있는 충분한 물리적 조치가 이뤄진다면 충분히 성립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주장하는 집단들의 차이가 실제로 파당으로는 나타나지 않은 상태이므로, 이들의 차이는 일반의지를 나타내는 데 무리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충분히 이러한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통계학에 따르면 모집단의 수가 많아질 수록, 실제 결과와의 오차는 크게 줄어든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의 일반의지가 구축될 수 없는 상황에 있다고 하더라도,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모아 구축한 일반의지라면 실제 일반의지와의 차이가 적지 않겠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답하고 싶다. 우선 SNS가 구축한 모집단이 한국인이나 일본인 등의 국민 일반을 대표하는 집단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하물며 1000명짜리 설문조사라도 국가 국민의 인구 구성비율에 맞춰 최대한 가깝게 구성해서 설문을 진행한다. 심지어 모든 사람이 응답할 수 없는 모집단인 RDD(무작위 전화방식)로 전화를 걸더라도 전화를 받은 설문 대상자가 미리 설정된 해당 나이대나 연령대에 배정된 사람 수를 넘어선다면 그 사람에게서는 설문을 받지 않는다. 그런 물리적인 모집단 구축이 SNS에서는 가능할까? SNS에서는 계정 뒤에 있는 사람의 개인정보를 셀러브리티가 아닌 이상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들다. 나이나 연령도, 라이프스타일도 글재주와 문화자본이 있다면야 넷카마(ネカマ) 같이 쉽게 속일 수 있다. 그렇다면 트위터라는 모집단에서 추출한 사람들이 실제 한국 국민이나 일본 국민의 일반의지와 유사한 결과에서 얼마나 큰 오차범위를 가질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아마 생각보다 더 많은 오차가 발생할 가능성을 더욱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마땅하리라.

   따라서 우리는 인터넷 상에서 형성되는 의견이 완전한 인간이나 해당 국가, 사회 구성원의 전체 의지를 항상 대변할 수 없고, 한 사람이 다수의 내용에서 습득할 수 있는 내용은 그 사람이 속해 있는 네트워크에 따라 달라지므로, 이 네트워크에서 습득한 <일반의지>는 사실 국가-지역 공동체, 또는 어중의 일부로 구성된 '파당'에서만 모을 수 있는 내용을 모은, 이른바 유사일반의지에 가까울 수 밖에 없다는 추론을 도출할 수 있다. 이 추론의 이론적 정합성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다른 분들이 논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제 유사일반의지가 '파당'속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엔하계 위키 사례를 통해 살펴보도록 하자.

무엇이 일어났는가

티셔츠 한장의 힘. (출처: tumblbug.com)


나 같은 ‘한남충’ ‘개저씨’의 눈으로 봐도 너무들 한다. 이제야 메갈리안의 행태가 이해가 될 정도다. 듣자 하니 이들이 자기와 견해가 다른 웹툰 작가들의 살생부까지 만들어 돌렸단다. 그 살생부에 아직 자리가 남아 있으면 내 이름도 넣어주기 바란다. 메갈리안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 빌어먹을 상황은 나로 하여금 그 비열한 자들의 집단을 향해 이렇게 외치게 만든다. “나도 메갈리안이다.”
- 진중권(2016년 7월 27일), 매일신문, '나도 메갈리안이다'

진중권 교수가 이렇게까지 말하게 한 '집단'은 사회 집단이 아니었다. 그들은 서로 얼굴도 모르고, 그곳에서 만나는 다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활동을 하는지에 대한 관심도 없다. 그러나 이들은 사회에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한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소비자'의 힘으로 이를 밀어붙였다. 나중에는 해외에도 존재하지 않는 '성평등주의'라는 개인연구의 결과물이 실존하는 학술 개념인 것처럼 문서를 작성하고, 모두가 실존하는 개념으로 인식하도록 하는 위키얼리티(Wikiality : 위키에 글을 올려 '현실'을 수정하고자 하는 반달리즘) 행위를 저지르기까지 했다. 바로 익명의 나무위키 편집자들이다. 어쩌다 집단지성 위키 편집자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폭력을 가하는데까지 이르게 됐나.

   이 사건은 클로저스의 신 캐릭 '티나'에서 목소리 성우로 활동하게 된 김자연 성우(이후 '김자연'이라고 칭한다)가 2016년 7월 '메갈리안4'를 위한 텀블벅 펀딩 결과물인 'Girls do not need a prince' 티셔츠를 찍은 사진을 올린 작은 행동에서 시작됐다. 당시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남성들의 부당한 분노가 형성된 상황에서, 이 '작은 행동'에 분개한, '남성옹호론'을 가진 편집자들은 이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목록을 근거를 붙여 나무위키에 목록으로 남겼다. 그 자체로는 일상생활 사회에서 영향을 끼칠 수 없을 법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지속적으로 트위터나 페이스북으로 김자연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목록화한 결과는 처참했다. 이 리스트에 올려진 상당수가 계약 해지를 당하고, 작가나 제작자들에게는 환불 사례가 이어지는 등 물질적인 손해가 이어졌다. 

   문제는 이러한 물리적인 피해가 단순히 만화-애니메이션 문화 뿐만이 아니라, TRPG 같이 논리적으로는 관계가 없어보이는 문화구성원, 심지어 시사iN이라는 공식적인 언론 매체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물론 소비자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콘텐츠 구매를 취소하거나 거절하는 등의 다양한 소비자 권리를 행사할 능력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의지와 반한다는 이유로 타인의 표현의 자유를 훼손할 정도까지 압박을 주는, 폭력을 행사할 규모의 '권리행사'는 곧 정당하지 않은 폭력이 되기 마련이다. 또한 이러한 폭력은 다른 사람에 대한 차별 행위이기도 하다. 장애인에게 동일한 수준의 차별이 이어졌다면 곧바로 장애인차별법에 의해 처벌받았을 분명한 차별행위였다.

   이런 결과는 현재까지 나무위키에서 일으킨 가장 큰 지적 사기 사건인 성평등주의 사건이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성평등주의 날조사건은 김자연 성우 사이버 폭력 사건이 진정되어 가던 2016년 8월 2일, 한 나무위키 편집자가 성평등주의라는 문서를 작성한 것으로 시작된다. 이 문서에 대해서는 대학원생 연구자나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했으나, 이러한 문제제기는 어김없이 막혀졌다. 결국 이 사건은 한 페미위키 사용자가 반대근거를 정당하게 제시하고 나서야 날조사건으로 정리되었으나, 해당 문제를 제기한 사용자는 괴씸죄로 차단되기에 이른다.

   우리는 이들의 모습을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서도 본다. 박근혜 대통령을 찬성하는 시위를 하는 사람들이 세월호 뱃지를 단 사람이나, 자신들의 입장을 보도해 온 MBC를 제외한 언론기자들에게 적대감을 보내는 일은 이제 익숙할 지경이다. 심지어 우리는 2017년 3월 10일 탄핵 가결과 함께 지지자들이 기자들의 카메라를 빼앗아 가고, 육중한 철사다리로 그들을 타격하며, 심지어 (기존의 '좌빨' 시위자들도 감히 시도하지 않았던 결과인) 경찰차를 빼앗아 폴리스라인을 파괴하고, 그 사이로 쳐들어가는 '폭동'을 목격했다. 이들의 모습과 엔하위키 사용자, 또는 '남성 누리꾼'들의 폭력성은 단지 자신의 주장을 실현하기 위한 폭력이 결과적으로 성공해 효력을 끼쳤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만 다를 뿐이지 사실 큰 차이가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2017:01:06 23:45:40

(출처: nocutilbe.com)


의사일반의지의 작동방식 : 동일성, 억압/폭력, 배제/학습-체념

   의사일반의지가 어떻게 엔하계 위키에서 형성돼 자리잡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나무위키나 엔하위키의 토론장 안에서 흘러가는 모습들을 찾아보면 금새 이해할 수 있다. 우선 그룹 안에서 헤게모니를 잡은 사람들이 자신의 헤게모니와 반대되는 사람들이 제시하는 의견을 무시하거나 지속적으로 반박한다. 이 단계에서 이들은 인신공격을 일삼고, 절대로 자신의 주장과 반대되는 것이 사실이거나, 자신의 주장과 반대되는 사실이 존재할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즉 자신의 주장의 근거와 반대되는 신뢰할 수 있는 증거들이 존재하더라도 그들 근거의 가치를 얕잡고 무조건적으로 부정한다. 물론 그러한 것들을 부정할 수 밖에 없는 합리적인 반례가 등장하면 해당 내용을 일반적인 것이 아닌 '일부'의 사례라고 몰아세운다. 그리고는 자신의 논리가 코너로 몰리더라도 자신을 구원해줄 다른 사용자가 등장해 주리라고 믿는다. 물론 그 믿음에 따라 엔하계 위키에서는 다른 사용자가 금새 등장한다. 

   다른 사용자들과 함께 합세하면 이성적 논의에 대한 이성을 가장한 '유사감성'적이거나 반이성적인 주장의 표면적 신뢰성은 배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용자가 해당 주장을 지속적으로 반박하면 이제 할 일은 그 사람을 다양한 죄명을 붙여 차단을 신청하는 일이다. 차단이 받아들여지면 그 사람이 다른 공동체의 사람들에게 반박을 지속할 수 없으므로, 합리적인 주장을 차단하는데 있어서 매우 효과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 이후에 계속해서 의견을 피력하려는 경우에는 영구차단을 통해 해당 담론장에서 추방해버리면 된다. 물론 자신이 '밀려서' 처벌받는 경우더라도, 자신의 잘못을 '그런 의도가 없었다'고 해명하면 그만이다. 이것이 심지어 한국어 위키백과를 포함한 대부분의 집단지성 위키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는 흐름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의사일반의지의 실현과정을 보다 학술적 개념으로 다듬어 볼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 기호학이나 응용인문학, 사회학과의 이론과 도식들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도식을 제안해보고자 한다.물론 본 글의 특성상 개인의 아이디어에 기반한 가설일 뿐이니 대안 제시와 반론은 언제라도 환영한다.

   첫째로 '동일성'단계다. 의사일반의지는, 애초에 내가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다수가 될 때 형성된다. 삼인성호라는 말이 있다. 세 사람이 같은 말을 하기만 해도 없던 사실이 생겨난다는 말인데, 이를 다른 관점에서 보면, 다른 사람들이 주장하는 내용에 동감하는 사람이 많아질 수록 해당 주장의 힘이 강해진다고 해석할 수 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어떤 주장이 많은 사람들의 동감을 얻는 과정이 주장의 진위나 이성적 합리성과 무관하게, 동일성을 구성하기 위해 필요한 능력인 일부의 공감화(Empathizing)와 다수의 체계화(Systemizing: Baron-Cohen, 2008, 2009) - 즉 체계화 주도적인 인지-의사판단에 따라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박근헤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믿는 것은,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만들어 공당의 의사결정까지 영향을 끼친 그 사람들이 믿는 그 것은, 팩트가 아닌 체계화된 지식이다. 

   또한 함께, 인간의 기본적인 능력이자, 의사소통, 친목의 기본 조건인 공감화가 한편으로 공감의 정도를 높여 다른 사람들을 환대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는 반면, 다른 편에서는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를 두기 위한 고맥락적(high-contextual) 상황을 만들어내기 위한 요소가 될수 있다는 점에 유의하고 싶다. 특히 고맥락성은 커뮤니케이션 주체가 다른 사람과 같은 경험이나 기억을 지니고 있을 것을 가정하고 있다. 즉 같은 경험을 많이 쌓은 사람들과의 관계가 발전할수록, 맥락이 쌓여나가고, 이것은 또다시 다른 사회자본이나 문화자본으로 발전한다. 문화자본의 차이가 사회 계급의 형성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브루디외가 사회학적 연구를 통해 증명해 낸 바이기도 하다.

   둘째로 '억압/폭력' 단계다. 구체적으로 억압 단계는 사람의 인지 구성 단계에서, 폭력은 해당 인지 결과에 의한 행동적 단계에서 발생하는 상호작용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 같다. 이 단계에서 해당 의사일반의지에 소속되었다고 여기는 구성원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자신의 인지 체계나 세계관, 또는 독특한 주장을 받아들이도록 비명시적이거나 명시적인 방식을 통해 설득하며, 일정기간이 지나도 설득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구성원들이 책임을 느끼게 될 경우에는, 그 정도가 심해지면 아예 물리적/심리적 억압이나, 체벌이나 집단 따돌림을 가하기 시작한다. 

   특히 억압을 받은 대상이 해당 의사일반의지를 가진 사람들 사이와 큰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거나, 그들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는 경우에는 그 공동체에 친화될 것을 요청받는 정도가 더욱 심해지게 된다. 이러한 것을 이용해 사람들을 억누르는 구체적인 사례가 소위 이단-사이비 종교나, 강제 네트워크 마케팅 업체들이다. 특히 특정 종교는 이를 매우 극대화해 활용하고 있다. 이 종교집단은 교회나 일상생활 주변의 섭외 대상자들과 관계를 형성하고, 이를 통해 결과적으로 그 종교공동체에 소속되기에 필요한 세뇌 교육과정을 교육받도록 유도하고 있는데, 이 현상은 해당 섭외대상자가 직접적으로 억압과 폭력을 느끼지는 않지만, 실제로는 집단의 힘으로 해당 대상자의 생활에 폭력을 가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러한 주장은 최병철 교수의 최신작 <타자의 추방>과 곁들여 읽을 때 보다 더 구체적이 된다. 이 책에서 최 교수는 하이데거를 인용해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가 사라지도록 강요하는 존재인 세인das Man을 소개하고, 주체가 다른 타자가 아닌 세인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지적한다(최병철, 2017:46). 특히 전제적 통치사회와 달리, 현재의 사회는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상대적 평균치와 자신과의 비교를 끊임없이 유도한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과의 동일성을 유지해야 하기 위한 '자기정체성'의 범위는 시장이나 국가가 용인할 수 있을 정도의 '시스템과 일치하는 차이'만이 허용된다는 것이다(:35). 여기에서의 '시스템'은 또한 자신이 용인할 수 없는 차이에 대해서는 그 '의지'를 지키기 위해 가차없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의사일반의지와 호환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배제/학습-체념' 단계다. 이 단계에서의 반응은 해당 대상자의 반응에 따라 두가지로 나뉜다.

   첫째로, 어떠한 설득을 해도 듣지 않는 사람들은 배제시켜버린다. 물론 그 방식은 왕따에서부터 공동체로부터의 추방, 더 나아가 사형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이미 이 단계에서 해당 의사일반의지 속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은 '추방자'들의 인권이나 존재를 고려하지 않으며, 그들을 무시하는 것이 '일반의지'의 성취를 이루는데 오히려 도움이 될 뿐만이 아니라, '추방자'들에게도 다시 생각할 기회를 주는 올바른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마저 있다. 물론 배제된 대상자 또한 일반의지 바깥으로 나오도록 내부 구성원들을 추동할 수 있지만, 동시에 그들에게 관심을 두는 것을 중단하는 것을 대안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한편, 양심의 자유보다는 눈 앞의 위협이나 생사의 갈림길 앞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하는 경우가 있다. 즉 그들의 주장이 거짓말임을 알면서도 그들의 주장을 학습하고 '받아들이는 척' 하는 것이다. 이 경우 이들은 거짓말로 해당 의사일반의지를 갖춘 집단 속에서 살아나가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결국 거짓말을 할 수 없어서 시간이 지나면 탈출 방법을 모색해 결국은 그 곳을 벗어나는 경우도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제반 사정으로 마음과 몸에 상처를 입고 그 곳의 주장에 알맞게 살아나갈 수 밖에 없는 경우가 더 많다. 결국 이들은 거짓의 왕국 속에서, 거짓말을 하며, 가끔씩 머리 속으로 진실을 되뇌이는 수밖에 없다. 거짓이 사실로 입증되지 않는 것을 보면서도 계속해서 그 거짓 속에 머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나가며

더 길어졌다가는 이 글의 원 목적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글이 너무 길어질테니, 이쯤에서 정리해 보도록 하자.

   한병철은 다른 사람과 동일하게 되도록 끊임없이 요구하는 것이 과거에는 정부와 같이 명시적인 획일성을 지시하는 외부 폭력에 의한 압력이었다면, 지금은 보이지 않는 힘인, 다른 사람과 동일하게 되는 데에서 발생하는 긍정성 - 그리고 그가 명시하지는 않지만, 이익일 것이다 - 이라고 지적한다(한병철, 2012:12, 16-17). 문제는 그 긍정성이 결과적으로 무한한 상대평가를 불러 일으키고 그럼으로서 '개인들에게 부담을 주고 개인들을 망가뜨리'게 된다는 점에 있다(한병철, 2017:53), 황푸하(2016)가 말하듯이, '우리'가 '실패에 동참하'고, '비참한 패배'를 느끼도록 하는 존재는 다른 사람이 아닌, 자아 그 자체다. 하지만, 그 자아의 정념서사 프로그램을 가동시키는 것은 '같은 것을 지속시키'ㅁ으로서 '체계적인 폭력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한병철, 2017:47), 의사일반의지다. 아니, 의사일반의지를 일반의지처럼 느끼게 만드는 폭력이다.

   예수와 스데반이 죽으면서 공통적으로 말한 말이 '저들이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올바른 말이다. 의사일반의지 속에 있는 사람들은 결국 그 사실이나 세계관, 사고구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가능성을 거의 차단당한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그 의사일반의지가 생성하는 서사구조 체계속에서 자신들의 서사구조 체계에 합당한 왜곡된 '팩트'만을 수신하고, 그 팩트들이 구성한 의사구조-앎 속에서 살아간다. 한번 형성된 세계관, 그리고 패러다임은 그 패러다임을 대체할 의지를 제공할만큼 큰 반대 자극이 없는 한, 결과적으로는 그 발동에 실패하게 된다. 그리고 폭력은 결국 희생양을 찾고, 의사일반의지 속의 사람들은 계속해서 불필요한 높은 기준에 시달리면서, 언젠가 나도 그들 속에서 희생양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가운데 살아가야만 한다.

   그렇다면, 무한의 정념서사구조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해당 서사구조에의 동참을 취소하고 새로운 서사구조로 이행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까지 인터넷 일각에서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는 친목에 대한 재가치평가가 필요하다. 친목이라는 말이 인터넷 상에서 보통 여러명이서 소규모로만 모이는 것을 가르키는 개념인 것과는 반대로, 실제의 친목은 '서로 뜻이 맞고 정다'ㅂ도록(우리말샘, CC BY-SA 2.0) 친해지는 행위를 의미한다. 레비나스는 환대를 강조하면서, 환대에 필요한 기본적인 자질이 자아에 대한 부인이라고 지적한다. 자신의 주장만을 반복할 때, 폭력은 오히려 정당화된다.

   그러므로 친목, 또는 화목은 '자아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행위를 통해 달성된다. 서로 다른 사람이라도 뜻을 맞추거나, 그 사이에서 최소한의 합의를 찾아나가기 위해서는, 당연히 자신의 의지를 어느 정도 내려놓아야 한다. 한병철은 <타자의 추방>에서 결과적인 대안으로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제안한다. '성평등주의가 올바른 방향이며, 현재의 잘못된 페미니즘은 개정되어야 한다'는 나무위키 구성원들의 주장, '박근혜 탄핵은 무효이며, 이에 찬동하지 않는 사람들은 종북세력으로서 대한민국을 멸망시킬 것이다'는 박사모의 주장, 기타 신흥종교 집단들의 터무니없는 주장들을 멈추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이 다른 이야기들을 듣고, 그 이야기들에 반응해 보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반응에의 초대는 누군가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깊고 높은 벽을 넘어 '아니라'는 목소리, 즉 '고귀한 저항'(황푸하, 2016)을 시작할 때,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다. (170214-0405)

참고문헌 

자크 데리다(2016), 아듀 레비나스, 문학과지성사.
아즈마 히로키(2012), 일반의지 2.0, 현실문화.
오근창(2013), 일반의지의 두 조건은 상충하는가? - 루소와 '자유롭도록 강제됨'의 역설, 철학사상, 47. pp. 67-98.
진중권(2016), 나도 메갈리안이다, 매일신문. 2016. 7. 27.
한병철(2012), 피로사회, 문학과지성사.
한병철(2017), 타자의 추방, 문학과지성사.
황푸하(2016), 우리는 오늘도, 젠트리피케이션.  
Simon Baron-Cohen(2008). "Autism, hypersystemizing, and truth" (PDF). Quarterly Journal of Experimental Psychology. 61(1), 64-75. doi:10.1080/1747021070150874
Simon Baron-Cohen(2009). "Autism: The Empathizing–Systemizing (E-S) Theory". Annals of the New York Academy of Sciences, 1156, 68-80. doi:10.1111/j.1749-6632.2009.04467.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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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5 23:04

<울려라! 유포니엄> 극장판 대담 : TV판보다 극장판이 더 나은 애니가 여기에 있다


(ⓒ武田綾乃・宝島社/『響け!』製作委員会 인용)


<울려라! 유포니엄>響け!ユーフォニアム 극장판(부제는 생략하기로 하자)은 저음 금관악기 중 하나인 유포늄을 연주하는 오마에 쿠미코黃前久美子(CV: 쿠로사와 토모요黒沢ともよ 분)이 진학한 북우지고등학교 관악부에 어쩔 수 없이 다시 들어가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담은 동작의 애니메이션을 재편집한, 소위 총집편 극장판 애니메이션이다. 국내에는 9월 1일 메가박스에서 애니플러스사의 주관 아래 개봉해 5일까지 4,169명이 관람했다.

원래 이 글은 모 사이트에 기고할 용도로 영담산 님과 같이 작성했으나, 사이트가 날라간 관계로(...) 개인 블로그로 이전해 올린다. 대담에 응해주신 영담산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TVA와의 차이 1: 편집의 긴장감
엘리프 : 자 이제 시작할까요? 우선 TVA와 영화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이라고 생각되냐능?
영담산 : 긴장감이라고 생각함. 그 이유는 TVA에서 시청자의 의견 대립이 거의 없으리라고 생각한 부분이 통편집되어서라고 봄. 5화의 라이딘이랑 9화의 소방차 게임까지 체감 러닝타임이 10분 이하라는 경이로운 급전개를 보여줬기 때문 아닐지...
엘리프 : ??
영담산 : YMO의 라이딘을 연주하는 기악행진 신에서 축제 나가서 레이나가 쿠미코의 미간에서 인중까지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는 신까지의 개인적인 체감 시간이 십 분 이하라는 거임. 그 레이나가 쿠미코 미간에서 인중까지를 쓸어내리는 장면을 개인적으로는 '소방차 게임'이라고 부름 ㅋㅋㅋㅋ
엘리프 : 나는 30분 정도 걸렸다고 기억하고 있는데 ㅇㅁㅇ
영담산 : 그 사이에 보여준 게 많지 않았다고 생각했지. 뒤의 트럼펫 솔로 공천 파동이랑 쿠미코가 특정 파트 강판되는 대목 즈음한 TVA의 10-12화 부분은 거의 편집 안 된 걸 생각하면 작품 내 갈등을 극대화해 보여주기라는 제작진의 의도는 충분히 성공적이었다는 생각이.

수수께끼: 쿠미코와 레이나의 관계, 그 것이 궁금하다
엘리프 : 오히려 내가 처음에 극장판만을 보고 나서 너무 스킵했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서머패스 착수 이후부터 서머패스 공연 장면까지 사이 과정이 거의 없다고 생각됐는데, 그 부분은 애니에도 별로 없더라. 전반적으로 중간과정 생략의 일본 음악애니지만.
영담산 : 라이딘 이전 부분 이야기인가?
엘리프 : 직전부분이지. 그리고 약간 애매했던 게, 오마에와 레이나가 급친해지는 전개의 심리 상태를 읽기 힘들어.
영담산 : 쿠미코 레이나는 원래 작품 앞에서부터 아는 사이였고-
엘리프 : 아는 사이였던 건 맞는데, 그동안 쿠미코를 열심히 무시하시던 레이나가 왜 갑자기 만나서 '사랑의 고백'을 하는가의 부분. 그 축제 데이트 관련 부분이 아니었다면 만날 이유도 없었거던.
영담산 : 그건 아마 레이나가 쿠미코한테 마음을 품고 있었는데 내색하지 못하는 특성 때문 아니었을까 싶어. 쿠미코가 축제 같이 갈 거라고 아무렇게나 팔을 덥썩 집은 것이 레이나였다는 우연이 아니었다면 쿠미코는 전혀 모르고 넘어갔겠지. 정말로 레이나가 솔직하지 못해서 그런 것인지에 대해서는 레이나의 설정 자료를 확인해봐야 하겠지만.
엘리프 : 그런 의미에서는 애니메이션을 보지 않은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들었던 한 가지 요소가 아니었을까 싶어.
영담산 : 그러고 보니 그러네. 지금 쓴 이것도 내가 추리해낸 가설이지 진짜 설정자료는 아니니까. ㄷ

<울려라! 유포니엄>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장면인 듯…
(ⓒ武田綾乃・宝島社/『響け!』製作委員会 인용)


TVA와의 차이 2: 연주장면이 대단하다
엘리프 : 그리고 이번에 제대로 했다고 생각되는 게 주요 관악곡의 연주 장면을 충분히 실은 점.
영담산 : 그치. 난 편곡판이라도 라이딘을 완주시켜준 게 그렇게 고마울 수 없더라고. 그리고 트럼펫 솔로 재심 부분에서 두 후보의 연주 특성의 차이를 더 잘 느낄 수 있었어. TVA로는 잘 안 와닿을 수 있는 부분이었거든.
엘리프 : TVA에서는 컷 되어 있던 부분인가?
영담산 : 아니. 근데 그 레이나랑 선배의 기량이나 진정성이 잘 안 느껴져. 극장 AV설비와 가정 AV의 한계 때문일지도.
엘리프 : 난 한 눈에 알겠던데 으음.
영담산 : 레이나랑 선배 둘 중 누가 나았어? 난 TVA 때는 잘 모르겠던데 극장판에서는 '아, 이건 레이나가 이겼다.' 라고 감이 오더라고.
엘리프 : 레이나였어. 첫음부터 강약조절이 차이가 나지
영담산 : 더 웅장했고...
엘리프 : 그리고 선배가 삑사리가 하나 더 있어
영담산 : 그랬나 ㄷ ㄷ

<초승달의 춤>, 쿠미코를 위한 작곡
엘리프 : 그래도 이야기는 어쨌던 오마에의 성장 과정을 담아낸다는 취지를 잘 살리고 있고
영담산 : 그랬네.
엘리프 : 그런 의미에서 ‘우마쿠나리타이’(잘하고 싶어) 신은 의외로 이상한 것 같지만 좋은 스토리텔링 장치였지.
영담산 : 그 부분에 들어갔어야 하는 씬이기도 하고...
엘리프 : 그래도 세족대학교의 <초승달의 춤> 동영상 보면 157마디 부분이 의외로 고등학생치고는 높은 스킬을 강요한 부분이기도 하지 뭐(...)




영담산 : 고등학생은 대학생을 이기기 어렵지. 스포츠에서도 리그를 할 때 고등학생 리그는 대학생보다 아래로 치고...
엘리프 : (자료를 찾다가) ‘2015년 4월부터 같은 해 6월 말까지 방송된 TV애니메이션 「울려 라! 유포니엄」을 위해 특별히 새로 쓴 곡이며, 작중에서는 취주악 콩쿠르의 자유곡으로 등장하고 있다.’ 아아....()
영담산 : 애니를 위해 ㄷㄷㄷ
엘리프 : 그러니 야마하에서 악보를 독점판매하지. ㄷㄷ 근데 비싼데?
영담산 : 야마하 스폰서였던가?
엘리프 : ㅇㅇ. 그래서 라이딘 신에서 야마하가 나타나 있지. (자료 찾다가) 1620엔이다 ㄷㄷ



영담산 : 우와...........
엘리프 : 비싼거여.
영담산 : 그런가.
엘리프 : 취주악협회 과제곡 풀 스코어가 다섯 곡 합쳐서 1200엔인 거에 비하면 (주: 당시 북우지고등학교가 선택한 과제곡 4 <프로방스의 바람>을 담은 2015년 풀스코어집은 [ 2016년 8월 현재 1028엔(일본 국내, 송료 포함)에 판매되고 있다 ].)
영담산 : 저건 저거 하나뿐이잖 ㄷㄷㄷㄷ
엘리프 : 그나저나 일단 TVA를 만들 때 그당시 일본취주악연맹 연례 콩쿨 과제곡을 그대로 채택한 것도 그렇고, 상당히 현실에 맞춰서 제대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한 걸 보면 일본이 대단하기는 하다는 생각이 들어.
영담산 : 애니메이션이 현실을 담아내는 능력 ㄷㄷ

단점 : 케이한전기철도가 너무 잘렸다
엘리프 : 스폰서하니까 TVA랑 극장판 차이가 나는게 케이한. 케이한 신이 이번 극장판에서 대폭 잘렸지.
영담산 : 거의 없었지 그러고 보니 홍보에 기여했는데..... 우지역도 나와주고 했는데 말이지
엘리프 : 돈 내고 안 내고의 차이가 크다는 거겠지. 그러니까 애니판에서 협찬했어도 극장판에서 협찬 안하거나 그러면 그렇다는 느낌이려나. 우리나라라면 그런 식으로 확실하게 구분을 짓지는 않을 것 같아.
영담산 : 스폰서 이야기구나. 일본에서야 애니메이션과 이어지는 산업이 꽤 많고 비중이 한국보다 되는 편이니까 그럴지 모르겠네.

정리: 정리 치고는 꽤나 긴 이야기
엘리프 : 슬슬 오늘 이야기를 정리해볼까. 일단 정리하자면 1) '<초승달의 춤> 작곡가가 대단하다'. 애니메이션 감독의 주문을 맞춰서 생산하지만 그대로 콩쿠르에서 연주해도 되거든. 2) 극장판이 총집편인 것 치고는 상당히 높은 퀄리티가 나왔는데, 그 이유로는 역시 충분한 연주시간 + 편집을 했는데도 어색하지 않은 분위기.
영담산 : 동의합니다. 그 외에 나는 ㄱ. 같은 제작사의 다른 작품인 중2사랑은 열광적이었던 TVA와 달리 극장판은 실망스럽다는 평을 들어야 했는데 이건 그 정반대겠구나 싶고
엘리프 : 그 점은 동감. 영화가 TVA를 살렸는데 이 기쁜 소식(?)이 잘 알려지지 않은 점이 안타깝달까-
영담산 : ㄴ. 레이나가 이번 작품에서 정말 달리 보였는데 느낌이 '카리스마 있어 보이지만 사실은 감정 표현이 서툴고 솔직하지 못한' 캐릭터라는 걸 알게 됐지. 극장판에서는 쿠미코랑 레이나 둘한테 초점이 특히 더 맞춰진 느낌이라, 보면 쿠미코 보고 '성격이 나빠'라고 말하는데 조금 거친 표현이지.
엘리프 : 그렇지.
영담산 : 보통 저 나이대의 일반적인 언어 사용이라면 '짖궂어'いじわる라고 할 텐데. 그런데 그걸 굳이 성격이 나쁘대 ㅋㅋㅋㅋ 되레 귀엽더라고. 엄하게 교육받은 부잣집 아가씨의 언행 불일치를 보는 느낌(?) TVA에서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극장판으로 보니까 매력 있던...
엘리프 : 그리고 3) 왜 동성애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신을 굳이 삽입하셨나요(...) + 쿠미코의 연애전선은 어떻게 될 것인가? - 특히 레이나의 원래 사랑이 타키 선생인걸 생각해 보면(...) NL로 돌아갈 것인가? 그렇다면 '사랑의 고백'은 어떻게 되나요 라던가(...)
영담산 : 어쩌면 철저한 상업성 치중이지. 아마 확인은 2기에서 하라는 의도일는지 모르겠네
엘리프 : 2016년 8월에 시작한다던 건가?
영담산 : 울려라 유포니엄 2라는 제목으로 방영한다고 했어. 그리고 ㄷ. 극장판과 이어지는 TVA는 원래 관례가 과거 TVA의 편집분이 끝나는 시점에서 차기 작품과 이어지는 내용을 넣는 거였는데, 이 극장판에서는 그런 것이 없었지.
엘리프 : ㅇㅇ 앗싸리 깔끔하게 TVA만 총집했는데 상큼했어.
영담산 : 그것은 '구태여 극장판에 차기작 이어지는 스토리를 넣는 것은 무의미하다'라고 판단했기 때문 아닐까 싶어.
엘리프 : 어쨌든 TVA에서는 애매했던 '츠즈쿠'(계속)도 이번에는 제대로 정리가 된것 같기도 하고. 참고로 관서 2차예선 대회 진출 여부는 1회차에서는 못 알아챘었는데 두 번 째로 보면서 이해했음. 아마 릿코랑 북우지 둘이서 진출하지 않았을까 싶음.
영담산 : 그랬겠지??
엘리프 : 아마 이야기 구도로 봐서는 그렇게 만들었을거고. 어쨌던 간에 4) 결국 북우지고등학교 관악부는 사기캐였습니다(…)
영담산 : 고등학교 수준이 아니……
엘리프 : 그 부분에 있어서는 소리와 영상의 차이가 나서 아무래도(…)
영담산 : 그럴지도 모르겠네.
엘리프 : 그리고 애초에 1학년생이 대폭 들어와 주축을 맡은 고등학교 클럽이 저렇게 치고 올라가는 건, 경험자가 많다는 건데, <겁쟁이 페달>과 비교했을 때 거기에 대한 언급도 별로 없었고. 이야기를 세세히 짚으면 뭔가 아닌데 간신히 균형을 잡아 이 정도로 성공한 거지(…) 그냥 현재로서는 '10월 2기를 기대해 봅시다'.
영담산 : 확인은 2탄에서 ㅋㅋㅋㅋㅋ

마무리: 그리고 이야기는 한국의 현실 성토로…
엘리프 : 그리고 마지막으로 5) 우리나라에서는 죽어도 못나올 작품.
영담산 : 한국의 창의적 체험활동 수준으로는 나올 수 없지. 일단 중고등학생의 동아리 활동 자체를 배격하는데…
엘리프 : 아니 취주악 작곡 + 연주 역량 자체부터. 취주악 콩쿠르를 위한 작곡을 매년 겹치지 않게 다섯 곡이나 선정할만한 나라라는 거지, 아무래도(…)
영담산 : 그런 인력풀이 일본은 있다는거지.
엘리프 : 일본은 [ 전일본취주악연맹 ]에서 과제곡 선정과 악보 판매, 그리고 콩쿨 진행을 맡고 있음. 북우지고등학교가 있는 쿄토부에서는 관서지역대회에 보낼 세 팀을 뽑아[ 1 ], 그리고 북우지고등학교가 앞으로 나갈 관서에서 또다시 세 팀을 뽑아서[ 2 ] 마지막으로 전국에서 30개 팀이 경쟁[ 3 ]…
영담산 : 이야…… 아 진짜 탄탄하네. 진짜 일본 중등교육계의 이런 모습 보면 정말 부러워.
물론 관현악부에 한한 이야기가 아니라 창체라는 거시적 시점에서 전부…
엘리프 : 아니 중등교육뿐만이 아니라 전 국가적인 시스템이지. 대학?일반부도 치열하게 보니까.
영담산 : 그렇게 볼 수 있지. 여가활동 전반에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ㄹ. 이 작품은 쇼와 후기에서 헤이세이 초기(1980년대)의 향수로 무장한 게 느껴지는구나 싶다 정도?

엘리프 : 오케. 그럼 긴 시간 고생하셨습니다.
영담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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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26 18:35

케이크스퀘어, 한국 동인 생태계의 미래를 바꾸다


문제 : 그 코믹월드The Problem : the Comic World

   어떤 사람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문화콘텐츠와 그 캐릭터를 좋아하게 되어 이들을 이용한 비공식적 미디어 믹스 차원에서 책이나 소설, 또는 기타 문화콘텐트를 저작하는 행위를 우리는 동인 활동이라고 칭하고, 그리고 그러한 활동의 결과물로 도출된 결과물 중의 일부를 동인지라고 한다. 그러나 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제작비용이 들어가고, 그리고 이 제작비용을 일정 부분이라도 회수하기 위해서는 판매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집중된 시간 내에 동인지를 판매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이러한 경제 활동의 결과의 집대성이 바로 동인지 판매 행사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판매 행사에 있어서 국내에서 거의 반독점 상태로 동인지 판매 행사를 독점하다시피 한 회사가 있다. 그 곳이 바로 코믹월드다. 한국의 코믹월드는 결코 높은 서비스 질을 제공하는 곳은 아니나, 국내 내 대표성을 가진 브랜드 아이덴티티 구축에 성공하고, 이를 바탕으로 많은 동인지 소비자들과 스어들, 그리고 동인들에게 어쩔수 없이  마음을 끌고 있으며, 가장 많은 부스를 제공하는 곳으로서 그동안 수백 회의 행사 진행에 성공하며 한국 동인지 판매 행사 시장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는 결과를 이끌어냈다.

   문제는 코믹월드가 그동안 반독점적 시장을 구축하면서 도전자들에 대한 불공정한 횡포, 코스어들에 대한 불법적인 개인정보 취득(실제로 코믹월드는 코스어들에게 등록시에 개인정보 수집을 요청하면서 대한민국 개인정보보호법에 따른 절차를 전혀 따르고 있지 않으며, 이는 위법행위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코믹월드를 이용하는 많은 이용자들에 대한 대화 거부 등의 심각한 단점을 가지고 있는 데 있다. 행사를 개최하기 위해 고액의 부스 등록비와 코스어 등록 강요 등으로 높은 입장료 등을 수수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코스프레 탈의장에 대한 배려 자체가 부족하다던가, 스탭들의 고압적인 움직임이 보인다던가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함으로서 기본적인 소비자 마케팅 마인드 자체의 결여를 보이고 있다. 즉, 코믹월드는 동인과 코스인 공동체를 단순히 돈벌이의 대상으로 인식해왔다고 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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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짜 코스인들은 전혀 모를 서울 코믹월드의 흑역사.

2009년 11월 14일, 89회 서코의 aT센터 ↔ 양재시민의숲 간 다리 입구 임의강제폐쇄.


   이러한 문제점에 대한 대안으로 그동안 몇 가지 시도가 있었다. 코믹월드와 비슷한 크기의 행사를 진행한 몇몇 행사들이 있는데, 2005년 코믹스피리츠(코스피)는 3회 정도 동안 거의 코믹월드와 비슷한 크기로 행사를 진행했으나, [ 결국 흑자 전환에 실패하여 행사를 접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 또한 비슷한 시기에 하나의 행사가 더 있었고, 또한 여러 행사들이 더 열리는 시도가 있었으나 코믹월드는 해당 일자에 동일하게 행사를 잡는 등의 행동으로 대안적인 행사가 일어나는 것을 막았다.

   이러한 결과는 한국의 만화-애니메이션계 문화가 코믹월드라는 단 하나의 요인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결과를 낳았고, 미국이나 일본과 같이 다양한 대형 행사가 공존하며 발전하는 상생발전이라기 보다는, 동인문화의 주인이어야 할 대한민국의 네오컬쳐 구성원들이 최근의 남양유업 사태나 배상면주가 사태와 같이 '슈퍼 갑'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을'로서의 생활을 향유할 수 밖에 없게 하는 단점을 낳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 외국에서는 볼 수 없는, 코믹월드에 의해 코스인과 동인들이 모여서 네오컬쳐 생활을 향유할 수 밖에 없는, 현재의 기형 동인문화 생태계 구조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이해해야, 왜 현재의 상황 속에서 케이크스퀘어를 높게 평가할 수 밖에 없는지, 그리고 앞으로 케이크스퀘어가 대한민국의 동인문화에 끼칠 영향이 어떤 정도의 크기가 될 것인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케이크스퀘어, 희망이 되다

   케이크스퀘어는 코믹월드를 재해석해냈다. 아니, 코믹월드가 동인시장에서 독주하다 보니 당연히 그들 입장에서는 신경쓰지 않아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국내 동인들에게 있어서는 턱없이 부족하거나, 아니면 부당했으나 코믹월드 체제 하에서는 개선할 수 없었던 부분을 정확하게 집어 내었다.

   첫째로, 동인음악이라는 장르의 활성화로 대표되는 동인문화 참여 범위의 확대이다. 현재 tacat의 프로듀싱으로 동인음악계의 선두주자로 꼽히고 있는  이노센트 미디어Innocent media의 발단이 2007년 당시 시드사운드S.I.D-Sound의 첫 정규앨범인 <Innocent Eyes>를 64회 서울 코믹월드 내에서 판매하기 위해 문의 중 코믹월드측이 일방적으로 부스 배정을 취소하고 참가비를 환불한 결과 이에 대한 반발로 상업화를 선언한 데에 있다는 사실은 코믹월드가 '만화 종합행사'라는 명목 하에 불필요한 규제를 일관적으로 적용한 것이 얼마나 한국 동인문화에 해를 끼쳤는지를 상기하게 해 준다. 이에 비해 케이크스퀘어는 행사 초반부터 장르나 매체, 성격을 아우르는 모든 동인 창작활동을 허용한다는 원칙을 밝힘으로서 현재 대한민국의 동인음악 씬의 거의 전부(인 2개 회사((주)이노센트 미디어, (주)MVZ Production)와 1개 단체(Crost ensemble))가 2회 행사에서 신규 앨범을 동시 발표하는 등 자발적인 동인활동을 오히려 유발하는 모습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참여성의 확대는 코믹월드의 세계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동인문화의 출몰 가능성 또한 높이며, 이로서 향후 동인문화의 다양성 또한 넓히는 새로운 계기가 될 것이다. 예를 들어서 앞으로 케이크 스퀘어 행사를 이용한 전시나 미디어 아트, 또한 새로운 개념의 제품 판매도 가능하게 되어 새로운 방향성을 지닌 상품을 시험하는 아마추어 동인이나 신진 예술 작가들의 활동 공간으로 재활용될 가능성 또한 있는 것이다.

Canon EOS 450D | 1/25sec | F/3.5 | 0.00 EV | 18.0mm | ISO-250 | 2013:05:04 01:02:15

제2회 케이크스퀘어 당시 (주)이노센트미디어 부스에서 이루어진 이노센트 스타즈 런칭 기념 사인회.


   둘째로, 새로 생긴 네오컬쳐 기업 생태계와의 접촉에 있어서 강한 면모를 보였다. (주)아트림미디어를 필두로 (주)SBT(사보텐스토어를 운영하는 주식화사), MO'FUN, 또한 상기 동인음악 회사들의 새로운 사업자가 생기는 시점을 케이크스퀘어는 놓치지 않았다. 케이크스퀘어는 이들 전부와 협력관계를 맺고 기업 부스를 차려주면서 여기에서 공간 제공료를 받아 이득을 챙기는 대신, 기업 부스들은 이에 따라 자사 홍보나 제품 판매 등을 실시하여 이득을 얻는 구조가 성공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이에 비해 코믹월드 초기에만 해도 <tomak>을 개발한 'SEED9'사나 반지의 제왕 번역 출판사인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기업 부스가 차려진 적이 있었지만, 최근 들어 한 번도 기업부스가 차려진 적이 없는데, 이는 코믹월드가 기업 부스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기업이 생각하는 것보다 상당히 높은 금액을 부르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셋째로, 동인 문제에 있어서 언제나 논란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는 19금 회지에 대해서 보다 더 효율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한 점 또한 높이 평가할 부분이다. 코믹월드의 경우 19금으로 되어 있는 잡지를 판매하는 것에 대한 책임을 부스 참가자에게 떠넘김으로서 사고가 발생할 시에는 판매자에게 무한 첵임을 부과하였는데, 이는 코믹월드가 기본적으로는 중개자-방관자 역할을 하지만 자신에게 손해가 될 때에는 곧바로 이득을 챙기는 이해관계적 장사자로 전환하는 것에 비해 케이크스퀘어는 처음부터 동인 활동의 동반자를 자처하면서 19금 문제를 미성년자들이 악용하지 않도록 분명한 조치를 취하는 결과를 이루어 냈다.

   우선 케이크스퀘어는 입장부터가 확실하다. 미성년자와 성년자를 나누어서 입장을 하게 하고, 입장 띠를 미성년자와 성년자로 나누어서 분명하게 규정을 하였다. 이 때 성년자는 신분증을 반드시 제시하도록 규정함으로서 성년자라고 하더라도 신분증이 없이는 입장할 수 없도록 분명하게 규정하였다. 미성년자가 성년이라고 하면서 신분증을 제시하지 않는 잘못된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규정한 것이다. 또한 케이크스퀘어 내에서는 19금 존을 확실하게 만들어 놓고 그 존에 들어갈 때는 띠나 신분증으로 인증을 다시 하도록 하였다. 즉 미성년자가 성인 동인지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길 자체를 막아놓은 셈이다. 그리고 조치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성인 동인지 판매 행위시마다 동인지 구매자가 해당 동인지를 미성년자에게 보여주거나 대여, 양도 하지 않겠다는 확약서를 본부에 제출하도록 하였다. 이로서 성인동인지 구매자가 (최소한 행사 내에서는) 동인지를 외부인에게 보여 주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이상의 3단계 체계는 최종단계에서 성인동인지 구매자의 정직함을 필요로 함으로 근본적인 한계를 벗어날 수 없기는 하나, 행사 자체 내에서는 분명히 다단계의 절차를 둠으로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였다.

   마지막으로, 피스 오브 케이크piece of cake 시스템도 기존의 판매전에서는 볼 수 없었던 개념이다. 동인 그룹들이 서로 앤솔로지 그룹을 결성하여 케이크스퀘어 안에서 새로운 공간을 배정받는 행위는, 기존의 행사들의 한계점에서 동인들이 서로 온리전을 여는 점을 차용하였다. 즉 대형 동인행사의 특성상 '서로 핥는' 부분을 모두 고려한 부스 배치는 할 수 없으나, 그 중 일부라도 '파고 핥는' 이들을 위한 공간을 배치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PoC 시스템 자체가 동시 신청에 의해서 신청 결과가 정해질 수 밖에 없는 한계가 있기는 하나, 이러한 문제 자체는 시간이 지나면서 수익을 내고 있는 케이크스퀘어 측이 부스 물량을 늘림으로서 조금씩 해결되어 가리라고 생각한다.

한국 동인문화 2.0? : 코믹월드를 떠난 새로운 동인 생태계는 가능…
   
   글을 정리하면서, 현재의 한국 동인문화에 새로운 대안이 제시 가능하다는 희망을 품어본다. 그것은 바로 '포스트 코믹월드'와 '동인문화의 다양화'로 대표되는 한국 동인 문화 2.0이라는 개념이다. 기존의 한국 동인문화 1.0이 국내 유일한 사업체였던, 게다가 폭식자였던 코믹월드의 입김에 따라 흔들리는, 그래서 동인과 코스인들이 코믹월드의 눈치만 살펴볼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있었고, 그 바깥에서 자생적인 움직임을 일으키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면, 이제 대한민국의 하위문화 구성원들이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들고 일어난다면 외국 기업(그것도 일본 기업)인 코믹월드에 의존해 살아갈 수 밖에 없게 하는 이 구조를 집어 치우고, 케이크스퀘어나 곧 개최를 앞두고 있는 페피 등의 다양한 행사들에 의해 구성되는 다양하고 새로운, 창조경제적 동인 생태계를 꿈꿀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씨앗과 싹이 케이크스퀘어를 통해서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케이크스퀘어를 주목하고 앞으로 지지해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 물론 케이크스퀘어에서 일어난 현상들에 대해서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도 있고, 행사 진행에 있어서 보다 더 민주적으로 풀어나가야 할 부분도 있으며, 또한 앞으로 대두될 수 있는 문제들도 누군가는 시뮬레이팅해서 대안과 대책을 제시해야 한다. 하지만 기자가 안 되고 바꾸어야 할 부분에 대한 논의를 굳이 빼 놓고 케이크스퀘어의 장점만을 부각하는 장문의 글을 쓰는 이유는 분명하다. 퀘이크스퀘어는 현재 한국 동인문화의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자, 유일한 해결책이기 떄문이다.

이 글은 잉여잉여한 한국의 '오덕'들을 위한 국내 유일의 [ 대한민국 대표 덕후 언론, 오덕의 소리 ] 에 게제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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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2 21:15

한밀아 최대의 위기는 어떻게 일어났나?


   최근 애니 덕후들을 중심으로 한국어판 확산성 밀리언 아서(이하 한밀아)의 바람이 뜨겁다. 한밀아는 2012년 12월 20일 서비스를 시작한 이후 최근 몇 주간 전체 한국 앱스토어에서 유료화 기준 매출 1위를 차지하고, 구글플레이에서도 6위를 기록하고 총 50만 다운로드 이상을 기록할 정도로 많은 사용자들이 해당 게임에 가입해 플레이를 하고 있다. 특히 10대-20대 남자를 중심으로 하는 트위터 'TL 문화' 사용자들의 상당수가 모두 가입해서 이 게임을 즐기는 현상이 목격되고, 트레이드 카드 게임에는 관심이 없던 여성층이나 4,50대 일반인들도 한밀아를 즐길 정도이며, 네이버 액토즈소프트 주주게시판에는 자신이 수백만원을 털어서 뽑기에 전부 투자했다는 소리가 들려오니 게임의 위력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최근 한밀아에 대한 소비자들의 관심이 떨어지고 있는 현상이 곳곳에서 관측되고 있다. 트위터에는 어느새 한밀아를 시작했던 사람들이 계속되는 서버 점검과 이에 따른 보상의 부족함으로 한밀아를 떠나 일본어판(이하 일밀아)에 가입해서 게임 활동을 이어간다는 사람들도 쉽게 목격되고 있다. 물론 이들이 일밀아로 전환가입해서 활동하고 있을 뿐, 어쨌든 확산성 밀리언 아서(이하 확밀아) 라는 콘텐츠에는 만족하고 있음에는 이들이 확밀아라는 콘텐츠 내용 자체에는 크게 만족하고 있다는 것을 실증한다. 그렇다면 왜 지금 확밀아를 하는 한국인들은 퀄리티도 떨어지고, 이미 플레이를 선점한 일본인들에게 그 세력이 밀릴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일밀아로 이동하는 것일까?

   분명히 한밀아는 일밀아의 뛰어난 콘텐츠 내용을 더 발전시키고, 한국에 맞는 추가 콘텐츠도 개발해서 제공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고, 이는 앱스토어 다운 1등이라는 급격한 유저수 증가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한밀아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사용자들은 그럼 콘텐츠 자체에 만족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러한 만족도가 떨어지게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에는, 사실 콘텐츠의 특성과 관련된 또 다른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확밀아는 AP(액션 포인트)/BP(배틀 포인트)와 시간을 연동해 탐색과 요정과의 전쟁을 통해 카드를 얻어 카드의 스킬을 육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레벨을 높여 AP/BP를 추가 확보해 다른 사람들과의 싸움에서 이겨 '1인의 아서'가 되는 것을 최종 목표로 하는 게임이다. 따라서 시간에 맞추어서 탐색을 하거나 배틀을 하여 카드의 스킬을 높여야 하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에, 확밀아는 24시간 어디서나 모바일로 접속 가능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특성과 그에 따른 유저의 필요를 지니고 있다.

   한밀아는 2012년 12월 20일 서비스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한 달포가 지난 지금까지 있었던 서비스 점검의 수는 100회 가량이 될 것으로 추측되며, 이러한 서비스점검에는 단기 서버점검 이외에도 몇 시간에 이르는 장기 서버점검 등이 포함되었다. 이를 들어 어떤 트위터러는 아서 3대 유파의 3대명검이 '긴급점검, 임시점검, 정기점검'(여기에 연장점검을 포함하는 유저도 있다)이라면서 점검을 밥 먹듯이 하는 한밀아측을 비판하였다. 이러한 점검 문제에 대해 서버에 접속하는 사용자는 점점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버가 제때 제때 증설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라는 것이 한밀아 서버 다운현상에 대한 정설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한밀아 측에서는 '서버 증설을 하겠다' '죄송하다'라는 말 이외에는 사용자들에게 정확한 서버 문제에 대한 대책이나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점검의 세기에 비해 그에 따르는 보상이 일밀아에 비해 지나치게 낮은 점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 트위터러에 의하면 일밀아의 경우에는 20분 서버 다운에도 불구하고 가챠 티켓이 다섯 장이 나왔다'면서 한밀아가 그에 비해 지나치게 낮은 보상을 하는 것을 비판하기도 한다. 심지어 일부 트위터러들은 '점검을 자주하면 가챠 티켓이 자주 나온다'면서 기쁨이 섞인 조롱을 하기까지 한다. 우리나라의 서버 사정과 일본의 게임서버 사정을 그대로 연동하여 보는 것은 일부 무리가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일본보다도 더 뛰어난 한국의 인터넷 및 서버 운영 사정을 볼 때, 이러한 모습은 한국인들에게 있어서는 절대적으로 봐줄 수 없는 사정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인 유저들은 당연히 서버 운영도 제대로 못해 정상적인 성장의 가능성이 적고, 그에 따른 서버 보상도 적절하지 않다고 느끼는 한밀아보다는, 언어의 장벽이 있기는 하지만 시스템이 어렵지 않아 참가도 가능하고, 한밀아보다도 유료 결제를 위한 가격이 높게 나오지도 않아 꺼리낄 것도 없는 일밀아 쪽을 선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한밀아 사건은 한밀아 같은 단순한 하나의 게임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전반적인 온라인 게임 콘텐츠에서 빚어지는 통상적인 모습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사용자들의 욕구 충족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게임 플랫폼을 변경했다가 해당 프로그램이 몰락한 경우는 한밀아 이외에도 한국 인터넷 초기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서 2000년 개발되어 수많은 사용자들을 모은 소프트맥스사의 포립(4leaf)은 주사위의 잔영과 채팅 시스템으로 많은 사용자들의 참여를 불러일으켜 성공적인 프로그램 운영을 이끌어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에 소프트맥스 측에서 포립과 연동할 예정이었던 테일즈위버가 브라우저 내에서의 연동이 불가능한 방식으로 제작되게 되는 등의 사정으로 2003년 당시 프로그램의 기반이었던 전용 브라우저 프로그램과 그 서버(이를 브라우저 포립이라고 한다)를 폐쇄하고 웹 기반(웹포립)으로 전환하였다. 사용자들은 브라우저 포립보다 재미도 없으면서 내용도 없는 웹포립을 쓰지 않기 시작했고, 결국 해당 서비스는 1년도 되지않아 유저들이 방문하지 않는 사이트가 되었으며, 결국 2009년에 소프트맥스사는 서비스를 종료하게 된다. 소프트맥스의 이러한 결과는 유저 경험(User eXperience)를 무시하고 단순히 콘텐츠가 좋으면 사용자들이 따라올 것이라는 회사 측의 가설이 옳지 않다는 분명한 사실을 알려준다. 특히 소프트맥스는 이후에도 웹포립을 브라우저포립으로 환원하면 사용자들의 재참여를 이끌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련의 자존심에 의해 이를 거부함에 따라 전민희 작가가 만들어놓은 세밀한 설정과 그에서 비롯될 수 있는 고차원의 환상적인 경험을 전부 폐기해야 하는 사정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상황이 빈발하게 발생하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을 본다면, 사용자들의 유저 경험과 여기에서 나오는 게임 운영사를 위한 제안이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이를 듣지 않는 대한민국 거의 대부분의 게임 개발 회사의 고질적인 습관과도 연관성이 깊다. 실제로 2002년 당시 <피시플레이어>의 온라인 게임 전문 내부 소책자였던 <온플레이어> 등을 보면, 당시 리니지의 개선에 대한 다양한 소비자들의 제안이 매달 2건씩 실렸던 것들을 확인할 수 있지만, 이러한 공표된 의견에 대해서 당시 NC Soft측이 이러한 제안을 기반으로 어떠한 개선을 실행하였다던가, 기타 의견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였다는 것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상황들은 다양한 직업등의 제공을 통해 환타지 라이프를 제공한다고 처음에 사용자들에게 떠벌였던 넥슨의 마비노기가 처음에 음악, 아르바이트 등의 다양한 활동을 통한 부분들에 대한 업데이트는 등한시하고 모험과 던전, 전투 등만을 중심으로 업데이트를 진행하면서 전투를 선호하지 않는, 특히 음악 쪽의 사용자들을 몰아냈던 것 또한 이러한 고질병이 나타난 충분한 근거가 된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후속 기고 내지 연재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설명해 나가도록 하겠지만, 현재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한밀아 최대의 위기는 한밀아 자신이 만들어낸 셈이다. 한밀아가 이러한 문제점을 깨닫고 유저성 확충을 통해 다시 한밀아의 성장을 정상궤도로 돌려놓을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저자, 아니 일개 확밀아 유저의 바람이기도 하다.

이 글은 잉여잉여한 한국의 '오덕'들을 위한 국내유일의 [ 대한민국 대표 덕후 언론, 오덕의 소리 ] 에 게제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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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08 22:27

현재의 하위문화는 어떻게 불려야 하는가?


1. 문제제기

   한국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하위문화라고 번역되어 불리거나, 서브컬쳐라고 음역되는, 영국의 Subculture라는 단어는 영국의 특수한 계급적인 전통에 그 근원이 있다. Subculture라고 하는 단어가 영미에서 대수롭지 않게 정착하게 된 가장 큰 이유에는, 내가 생각하기에는 아무래도 영국 사회가 지금도 계급적인 사회이기 때문이다. 영국은 지방과 계층에 따라 엑센트가 다르며, 또한 옥스퍼드 영어를 정확하게 구사하는 것이 높은 계급의 인증이 되기도 할 정도로 언어와 행동, 그리고 라이프스타일의 여부 자체가 일련의 사회 생활을 결정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그리고 문화연구가 시작되려고 하고 했던 당시 50~60년대의 영국 사회는 미국의 매커시즘에서도 드러나듯이 제2차 전쟁 이후로 리비스주의로 대표되는 기존의 굳건한 문화-사회적 기준이 뽑히기 시작하고 있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아직까지도 사회적인 기존의 기준이 일상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기존의 리비스주의를 넘어 새로운 문화연구를 구축해 나가고자 하는 영국의 연구자들(특히 현대문화연구센터 CCS) 사이에서는 이러한 일반적인 문화와 대항하여 존재하고 있는 하위층 청소년-청년 계층의 문화를 그대로 연구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 다른 일반 문화에 비해서 낮은 것으로 평가되는 문화라는 뜻의 Subculture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이 그닥 어색하지는 않았고, 이 붙여진 이름에 대해서 연구자나 다른 사람들의 어떤 이의가 제기된 적도 없었다.

   문제는 현대 한국에서 이 단어를 그대로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으며, 이러한 문화가 만화-애니계 문화로 대표되는 청소년-청년 주도의 문화를 호칭하는 단어로 쓰이고 있다는데 있다.1) 한국의 상황에서, 특히 3자적인 입장에서 이러한 문화들이 하위문화로 불리는 것은 어떤 면에 있어서는 당연할지 모른다. 이 문화에 붙어서 활동하는 예술가라던가 연구자는 찾아볼 수 없으며(아니, 이제 막 태동하려고 하고 있으며), 또한 다른 문화들에 비해 '일반인'들에 의해 비하되는 모습 또한 쉽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체, 또는 여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지식인층들에 있어서 이 단어를 이 문화들에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자신들의 문화가 다른 문화 양태들에 비해 '하위'라는 것을 인정하기도 어렵거니와, 이러한 주체적인 입장에서 '우리의 문화(들)'을 이러한 단어로 정의하는 것 자체가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또한 앞으로 '하위문화'의 체계화가 지속화될 것이고 확산 될 것이 분명한 이상(예를 들어서 철도동호문화는 그러한 전반적인 준비가 다 갖추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하위문화라는 단어를 그대로 쓰는 것은 앞으로 문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

   본 논고의 문제는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본 논고에서는 1) 현재 만화-애니계 문화를 중심으로 확산하고 있는 새로운 문화들을 하위문화라고 호칭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새로운 단어를 찾아야 하는가? 2) 그렇다면 새로운 호칭을 찾아야 하는 당위성은 무엇인가?  3) 그렇다면 새로운 호칭으로 칭하여질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인가? 라는 세 가지의 포인트를 가지고 논지를 전개해 나가고자 한다.


2. 대한민국의 '하위문화' 연구 : 영미권 하위문화 연구와의 차이점

   영미권의 하위문화연구가 현재의 하위문화연구와 비교했을 때 드러나는 가장 큰 차이점이 있다면, 그 것은 바로 청년이 어떻게 사회 안에서 투사되고 있는지에 있다. 이런 차이는 영국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다음의 인용문의 상황이 현재의 한국사회의 담론에서 수긍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곧바로 들어난다.

 우리 사회에서 청년은 그 존재가 하나의 문제가 될 때, 아니 그보다는 그 존재가 하나의 문제로 간주될 때만 현존한다. … 청년은 영역에서 이탈함으로써 이상하게 옷을 입음으로써, 예식들에 저항함으로써, 병과 유리창과 머리를 깨버림으로써, 감시를 혼란시킴으로써, 경찰과 대치함으로써, 도전을 쟁점화 함으로써, 이상한 자세를 취함으로써 자신들의 존재를 느끼게 된다. 그들이 이러한 전략들을 취할 때, … 그들은 체포되고 법정 앞으로 소환된다. 그들은 심문을 받고 인터뷰를 당하고 사진찍히고, 훈계를 받고, 훈육 당하고, 강금당하고, 갈채를 받고, 처벌당하고, 비난받고, 모방당하고, 관심의 대상이 된다.2)


   우리 사회에서의 청소년이라면 모를지라도3), 20대로 들어오면 사정은 달라진다.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서의 공식적인 20대의 이미지는, 스펙, 취직, 인턴, 컵밥, 고시원 등의 일자리 지향적인 단어들로 가득 차 있고, 그러한 의미에서 반항하는 청년이라는 이미지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아니, 이전에는 있었다. 운동권이라는 형태로. 하지만 수능을 통한 대학교 입시와 회사 입사, 그리고 돈을 벌지 않으면 사회에서 살아나갈 수 없는 한국의 상황 상, 더 이상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현재의 사회체제에서 반항하는 것 자체가 미래의 불확실성으로 전이되고, 과거와는 달리 모두가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사회가 되다 보니, 그냥 놀고 먹는 학생들 또한 많이 줄어버리게 되었다. 그것이 현재의 학우에 의한 '운동권' 운동의 거부가 발생하게 된 큰 이유일 것이다. 여기에서 한국의 '하위문화'가 기존의 하위문화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차이가 드러난다.

   이만큼의 차이가 나지는 않지만, 현재의 '하위문화' 연구가 기존의 하위문화와 차이가 나는 이유 또한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로. 사회분위기상 슬럼 내지 갱, 즉 조폭이 생길 수 있는 상황이 없다. 이와 유사하게, 청소년이나 청년들이 같이 모여서 뭔가 숙덕거리거나 무엇인가의 장을 만들어버릴 수 있는 장소 또한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적인 공간을 통한 청소년-청년 계층 간의 커뮤니케이션이 줄어버리게 될 수 밖에 없다. 둘째로, PC통신이나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사이버 공간이라는 대체제가 생겼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직접 만나지 않고도 이제 서로 좋아하는 것을 나눌 수 있고, 대화를 나누고, 친구가 될 수 있게 되었다.. 굳이 부산에만 있는 모임을 가지 못하더라도 서울에서 부산 모임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알수 있고, 서울에 직접 가지 않더라도 먼 외국에서 한국에 스카이프 등을 이용해 화상통화로 행사에 참여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컴퓨터 중심의 라이프스타일을 만들어 냈고, 본질적으로는 컴퓨터를 필요로 하지 않았던 '하위문화'들이 인터넷 커뮤니티에 적극적으로 수용되게 되는 요인이 되었다. 하위문화처럼 실제 모여 집단을 형성하지 않아도 실질적인 집단을 형성할 수 있게 된 것이다(김현지 외 2004).

   셋째로, 한국 내에서의 '하위문화'가 지창하는 범위가 많이 달라지게 되었다. 한국의 하위문화 연구 초기에는 학교나 조직 안에서 직책과 직급에 따라 어떠한 식의 하위문화가 형성이 되는가(강윤정 1994), 또는 진짜로 일탈공간인 술집에서 중고등학생이 어떻게 날나리 짓을 하면서 노는가 등의 연구(김경아 2007)가 있어왔지만, 이러한 연구들은 하위문화라는 개념이 팬덤과 결합되어 연구되기 시작하면서 큰 차이를 보이기 시작한다. 특히 1998년에 있었던 강진숙의 록키호러 픽쳐쇼 수용에 대한 연구(강진숙 1998)와 조대현의 당시 PC통신 말기의 애니메이션 팬덤에 대한 연구(조대현 1998), 이 두 편은 한국에서의 하위문화 개념이 기존의 지역사회 조직과의 연계성을 '탈피'하고 새로운 문화들과 결합하는 시점이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실제로 이 논문들 이후부터에야 코스프레나 만화-애니메이션 팬덤 등 다양한 '하위문화'적 연구들이 많이 등장하기 시작하게 된다.

   이러한 점을 정리해 보면, 과거의 이데올로기 중심적인 문화연구 트랜드가 깨지면서, 더군다나 청소년의 반항적인 모습이 (물론 지속적으로 표출되기는 하지만) 수능-대학이라는 주요 흐름에 의거해 사라지면서, 청소년-청년 문화의 이해로 인한 하위문화라는 단어가 사용될 필요가 사라지자, 이 단어를 다양한 비주류문화적 팬덤과 결부시키는 방식으로 현재의 '하위문화'라는 새로운 개념이 생겨난 셈이다. 물론 현재의 '하위문화'가 기존의 하위문화와의 연관성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기초적인 연관성 자체는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이 분화된 새 개념과 동등한 것이 아니듯이, 현재의 '하위문화'를 새롭게 명명할 수 있는 그 무엇이 필요해진 시점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아니, 현재 우리가 '하위문화'라고 호칭하고 있는 것들이 사실은 하위문화와 관련성이 적은 새로운 문화 분류라는 가설도 배제할 수만은 없다. 실제로 엘리프(2012)는 '하위문화'의 목록들로 "만화·애니메이션계 팬덤(코스, 오타쿠, 동인, 보컬로이드 등), 구관인형, 게임, 마술, 게시판, 비툴 커뮤니티, 춤추기, 매드무비, 플래시몹, 위키, 인공어, TRPG, 트위터 등의 다양한 범위"를 상정하고 있다. 이외에도 철도 동호문화나 기타 문화들도 '하위문화'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단어가 하위문화라는 단어 하나로 수렴되어 연구되어 온 만큼, 지금의 대한민국 학계에서는까지의 하위문화 개념에 혼선이 빚어져 온 것이다. 이러한 혼선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하위문화라는 단어로 어중간하게 연구되어 온 하위문화와 '하위문화'들을 분리하고, '하위문화'에 새로운 개념 이름을 제공하는 것이 시급한 상황이다.


3. 새로운 명명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 그렇다면 새로운 명명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 몇가지 가능한 제안들과 몇 가지 주변에서 들은 제안들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1) 오타쿠문화 Otaku culture
   가장 간단한 대책일 수 있다. 현재 하위문화니 하고 떠드는 것들의 대부분이 여기에 속하니 말이다. 하지만 가장 현재 하위문화라는 단어의 대안으로 쓰여서는 안되는 단어이기도 하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오타쿠는 그 본 뜻과는 상관없이 '일본 문화를 좋아하는 비정상적인 인간'을 묘사하는데 쓰여지고 있으므로, 이 단어를 대안으로 쓰는 것이야 말로 대한민국의 '하위문화'들에 관심이 없다는 이야기나, 또는 현재의 '하위문화'들이 모두 오타쿠문화의 일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문화들을 오타쿠문화로 통합하고자 하는 무리한 시도의 일부분일 것이다.

   2) 현대문화 Neoteric culture - 신문화/네오컬쳐 Neoculture
   먼저 현대문화는 미즈하시 나요코(@wetchan)에 의해 제기된 대안이다. '하위문화'의 대부분이 과거의 '고급 문화'와는 달리 새로이 만들어진 문화이기 때문에 시대적인 차이를 고려해서 현대문화라고 부를 수 있다는 제안이다. 그러나 이 제안등은 현재 '하위문화'로 분류할 수 있는 마술 등이 근대부터 시작되는 문화라는 점에서 공박당할수 있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유래에서 그 기준을 삼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특징인 비대중성에서 추출한다면 이 설명은 유효한 것이 된다. 마찬가지로 엘리프는 2009년에 네오컬쳐라는 단어를 내부적으로 구상한 적이 있었다. 신문화 개념에서는 과거의 지역-오프공간에 묶여 있는 구문화(?)와 반대되어 인터넷을 통한 비지역성-가상성을 바탕으로 번영을 누리고 있는 문화들, 즉 '하위문화'들이 그 대상이 된다.

   2a) 현실문화 Reality culture
   현실에서 통용되는 문화라는 의미에서 이 개념을 채택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있으나, 이 경우 모든 문화가 현실적이지 않느냐는 비판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 대안 또한 폐기되는 것이 마땅하다.

   3) 주변문화 Vicinity culture
  Gunplug가 제안한 대안이다. 기존의 상-하위적 위치에서 벗어나 수평적인 문화로 '하위문화'들을 인식하고, 이를 바탕으로 중심문화가 언제라도 주변으로 밀려나고, 주변에 있는 문화가 다시 중심으로 들어올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한다는 개념에서라면 좋은 개념으로 파악된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중심부(수도권)-주변부(지방)의 대립을 생각해보면 그러한 제안이 언제까지나 적용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4) 동호문화 / 팬덤문화 Fandom culture
   서로 무엇인가를 좋아한다는 의미에서 적용할 수 있는 대안이다. 이 단어에서는 자발적으로 일련의 커뮤니티-집단을 구성하여 활동하는 대부분의 '하위문화'들의 특성을 그대로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좋아하기 때문에 성립되지 않는 소문화들도 '하위문화'에는 포함될 수 있다는 점이 이 단어의 단점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5) 소문화 Small culture
   '하위문화'들이 다른 문화들에 비해 작은 문화이기는 하지만 그 문화의 가치가 다른 주류문화나 대중문화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뜻으로 쓰일 수 있는 단어이다. 하지만 이 단어의 경우 지역문화와의 변별성을 잃을 수 있는 단점이 있으므로 그 의미 해석에 있어서 주의할 필요가 있다. 또한 집단문화연구에서 사용하고 있는 하위문화나 스포츠학/여가학에서 사용하는 하위문화를 설명하는 단어로 전차될 수 있음도 주의할 필요가 있다.

   6) 잉여문화 Surplus culture
   마지막으로, 최근 대두되고 있는 잉여라는 말을 이 문화들을 서술하는 단어로 사용할 수 있을 가능성을 제기해 본다. 오타쿠보다는 더 비하적이지도 않고, 현대 누리꾼 문화를 효율적으로 함축해내는 대안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에 비해 이 단어가 한국에서만 통용되고 있다는 점과, '하위문화'의 범위보다 잉여문화의 범위가 더 넓어질 수 있다는 점이 이 단어를 채택하기 어려워지는 하나의 단점이기도 하다.

4. 마치며

   본 논고의 목적은 하위문화라는 단어에 대한 대안을 결정하자라는 제안을 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대안들이 있는데 다른 연구자들이나 해당 하위문화의 일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논의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이 논고를 쓰게 되었다. 어차피 새로운 단어는 제안과 논의를 통해서 그러한 단어를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기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순간에서야 비로소 시작된다(즉, 소쉬르가 제안한 언어적 사회성이 적용되는 관점). 이러한 관점에서, 연구자는 '현대문화' 내지 '신문화'를 현재의 '하위문화'를 대체하는 단어로 사용하고, 조직이나 스포츠에서 대두되는 하위문화는 소문화로 대체하는 것을 제안함과 동시에 이를 지지하지만, 또 다른 단어나 대안이 있다면 이러한 제안들을 수집하는 것을 통해 앞으로 새로운 개념이 학계와 '하위문화'계에서 통용되기를 바란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하위문화'라는 단어로는 우리의 '하위문화'라는 단어를 담아낼 수 없다는 것이며, 따라서 이를 변화시키기 위한 연구자들과 학자들, 그리고 사용자들의 공통적인 동의가 하루 속히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주석
1) 이 후로 영국 문화연구에 의해 제시된 개념은 하위문화로, 한국에서 변형되어 새로이 적용되고 있다고 판단되는 개념은 '하위문화'로 다르게 표기한다.
2) 이동연(1998:98-99). Hebdige(1982-3)의 번역.
3) 청소년의 경우 대부분의 학생들이 창의력을 말살하고 국가경쟁력을 약화시키는 대입-수능 중심의 학교 체제에 순응하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매스컴에서 학교폭력이나 엽기 범죄, 기타 폭주족 등을 통하여 그들은 언제나 통제불가능한 존재이므로 부모와 정부의 통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기사가 쏟아진다. 심지어 합리적인 그들의 반응도 단순 보도되어 지나가거나, 무시되기 일쑤다. 이러한 사례로 강인식(2007)을 참조하라. 

참고문헌
· 강윤정(1994) 『업무특성에 따른 조직내 하위문화의 차이 및 영향분석』, 단국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 강인식(2007), "폭주족은 안 없어져요", 중앙일보, 2007년 8월 14일. [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2840041 ]
· 강진숙(1998) 「팬덤(Fandom)문화의 생산과 아비투스 &#8211; 한국 록키호러픽쳐쇼 팬클럽 <더블 픽쳐스>의 생산 활동 분석 -」, 『言論硏究』 7호, 중앙대학교 언론연구소. pp. 91-105.
· 김경아(1997) 『소비공간을 통해 본 청소년 하위문화 硏究 : 대구지역 여자 고등학생을 중심으로』, 계명대학교 여성학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 김현지, 박동숙(2004) 「온라인 팬덤 - 접근성의 강화에 따른 팬들의 새로운 즐기기 방식」, 『미디어, 젠더 & 문화』 2호, 한국여성커뮤니케이션협회. pp.41-69.
· 엘리프(2012). 한국 하위문화의 공간 변용 현상 연구: 놀이-창조 공간 개념을 중심으로,
· 이동연 편집(1998), 『하위문화는 저항하는가』, 문화과학사.
· 조대현(1998) 『애니메이션 팬덤(fandom) 연구 -애니메이션 텍스트와 문화실천의 즐거움을 중심으로-』, 서강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 Baldwin et al(2008), 『문화코드,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한울 아카데미. - Introducing Cultural Studies, Pearson Education ltd., Revised 1st, 2004 의 번역.
· Dick Hebdige(1982-3), Posing... Threats, Striking... Poses: Youth, Surveillance, and Display, Substance,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Vol 11. no. 4 ~ Vol 12. no. 1. pp.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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