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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이름은.〉 - 가만히 있기를 거부함으로, 세카이계를 떠나다 ①


(ⓒ2016 『君の名は。』製作委員会)


국내 일본 아니메 상영기록 경신. 예스24 주간 베스트셀러 1위 차지. 최근 몇년 동안 상영된 수많은 일본 애니메이션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높은 성적이다. 그리고 이 영화가 끼친 사회적 영향에 대해서는 좀 더 시간을 두며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이 글에서는 이 영화의 내부적인 면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다른 관객들과 달리, 영화를 보면서 인상에 남은 두가지 점이 있었다. 첫째로, 〈너의 이름은.〉과 가장 비슷한 엔딩이 나온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둘째로 엔딩 크레딧에서 유난히도 크게 표시된 일본 문부과학성 예술문화진흥기금 마크. 이외에도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한국에서 '엔딩에 대해서는 pixiv에서 찾아보라'고 한 말 또한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세 가지를 소재로 지금부터의 이야기를 풀어나고자 한다. 개인적으로는 스포일러의 존재를 크게 신경쓰고 있지 않으므로, 이 글에서는 영화 안이나 다른 작품에서의 이야기를 직접 언급하고 있음에 유의하기 바란다. 

<운명에의 거부> - 그리고 "가만히 있으라"

   첫째로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세계를 멸망하고자 하는 스즈미야 하루히의 움직임을 쿈이 막음으로서 현실을 존속시킨다는 애니메이션 엔딩은, 〈너의 이름은.〉과 참 비슷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극중에서 일어난 움직임은 다르다. 쿈의 '구원'은 철저히 다른 사람들에 의한 도움을 받아서 이루어진다. 미래에서 온 미쿠루가 힌트를 주고, 유키가 접속해서 상기시켜줘서야 쿈은 스즈미야 하루히에 의한 세계파괴라는 문제를 해결한다. 하지만 〈너의 이름은.〉에서는 그러한 찾기가 자발적으로 일어난다. 타키는 이토모리가 사라져 미츠하가 사라진 '1차 현실'을 돌파하기 위해, 스스로 이토모리를 연구하고, 미츠하의 모습으로 있을 때 방문했던 '저승'으로 이동해 다시 미츠하가 되어 현실을 바꾸는, 과거로의 자격시련을 차례차례로 통과한다. 행동자의 적극성이 부여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토모리(糸森)에 대형 유성이 충돌하고, 그 와중에 더 많은 분들이 희생될 위험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더 많은 분들이 살아남게 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유성이 떨어지지 않는 지점인 이토모리고등학교로 향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미츠하와 친구들이 일으킨 사건이 이 작품의 클라이맥스에 위치한 일련의 변전소 폭파를 통한 '저항'이다. 미츠하는 이를 통해 미래에서의 요청에 응답하고, 미래에 일어날 일을 타츠키와 미츠하라는 관계를 대가로 치환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변전소 폭파와 가짜 방송 그 자체는 범죄행동이다. 그러나 이러한 범죄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더 많은 사람이 죽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와 달리 사건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미츠하의 아버지인 정장과 정의 직원들은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당연히 이러한 범죄행위를 차단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들은 미츠하 패거리를 한 명씩 한 명씩 잡아간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이토모리의 주민들이 살아나는가, 살아나지 않는가'를 생각하면 이들의 '작은' 범죄행위는 오히려 큰 재앙을 막기 위한 구출활동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미츠하는 저항하고, 결과적으로 아버지를 설득했기기에 마을을 살렸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때로는 미친것 같아 보이더라도 저항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사실을, 신카이 감독은 아마 그런 사실을 거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해당 사실을 보여주고자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에 대해 참고할만한 언급이 있다. 신카이 감독은 그의 2차 방한 중 이뤄진 SBS 나이트라인(SBS, 2017)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분명히 세월호와의 연계성을 인정하고 있다.

한국에 대해서는, 2014년, 마침 그 영화를 만들고 있을 때, 제가 크게 인상을 받았던 것이, 세월호 사고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 때에, 제가, 그 보도를 보고, 정말로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이, 침몰하는 배 안에서 "움직이지 말고 그 장소에서, 대기해 주세요"라는 안내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이, 정말로 아팠네요. '그 방송을 듣고 그 앞에 머물렀던 사람들이 있었다, 실제다'라는 것이어서, '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고 만 걸까'라고 [반응했습니다]. 역시 그 일은, 그렇게 될수 밖에 없었다고 제 안에서 남아 있어서… (저자 번역)

韓国といえば、2014年、ちょうどこの映画を作っているときに、僕がすごく印象ーに残っているのは、セウォル号の事故があったと思うんですね。あのときに、僕が、あの報道見ていって、とっても大きいなショックを受けているのは、沈む船の中で、『動かずにその場で、待機してぐださい』というアナウンスがあったと聞いたんですね。それが、とっても痛ましいこと、だしい、「その放送聞いてその前にとどまった人たちがいった、実際だ」ということなので、「え、どうしてこのことが起きてしまうんだろう」と、あの、やっぱりそのことは、そのできことはずと自分の中で残っていって…

(ⓒ2017 SBS)


   많은 분들이 아시겠다시피, 세월호 참사는 촛불혁명과 함께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이 정부의 정책을 인지하는 방식을 뒤흔들었다. 특히 2014년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이후 가장 이슈가 되었던 키워드가 '가만히 있으라'다. '가만히 있으라'는 분명히 탈출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서도 정부나 권력자가 명령했을 때 그것을 지키는 것을 통해 자신에게 손해가 올 수 있다는, 오래된 두려움을 구체화했다. 그런 의미에서 사건 이후 용혜원씨에 의해 '가만히 있으라' 행진이 발생한 것이나, 신카이 감독이 이코모리 사건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을 담은 것은 우연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권력들에 의해 부당하게 살해된 세월호에서 희생된 304명에 대한 적극적인 반응이라고 할 것이다.

   그래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이 작품은 한국의 지난 몇년동안 '혼이 비정상'이었던 역사와, 그리고 그 역사를 바꿔낸 저항과 맞물려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준다. 과연 저항은 어디까지 합법적으로 허용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결과적으로 사람을 살리는 활동까지 처벌하는 법률은 항상 올바르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우리는(그리고 최소한 나는) 한비자의 법치 이야기를 들으면서 왠지 모를 분노의 감정을 느낀다. 법률로 정해진 일이더라도 법률이 잘못됐다면 저항해 해당 법률을 폐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도덕과 사상들을 읽으며 롤스가 이야기한 기회의 균형이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동시에 로크의 저항권에 동감을 느낀다.

   우리는 국사를 읽으면서도 분노를 느낀다. 임진왜란 이후 세법이 흐트러지면서 나타난 결과인 무거운 세금은 법률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었고, 수많은 양민이 고통받았지만 교정된 일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동학 혁명에 대해, 아암도 소작항쟁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4·19 / 5·18 민주항쟁에 자부심을 느낀다. 그리고 그 저항의 결과물 중 하나로서 나타난 것이 이번 촛불혁명이다. 신카이 감독의 이번 작품이 한국에서 큰 영향을 불러일으킨 동력에는, 이러한 저항에 대한 정당성을 이 영화가 부여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이게 나라냐〉에 맞춰 추운 한겨울에 광화문 길을 걸었던 우리의 기억은, 〈너의 이름은.〉과 함께 조화돼 그 당시 일어나고 있던 카이로스적 변화를 순응하고 긍정하게 만든다.

   그러나 현재의 한국과 일본 법률 체계는 선의의 의도를 가지고 있고, 자신을 지켜야 해 어떤 행동을 위반했다고 하더라도 타이트한 법률의 조항을 위반했다면 그 사람을 교도소에 들어가도록 만든다. 실제로 엔딩에서 미츠하가 멀쩡하게 회사를 다니는 일은 제대로 따져보면 현대 일본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을법한 일이다. 일본의 정상적 시스템 아래서라면 미츠하와 동료들의 법률 위반은 이미 법률에 의해 처벌받아, 미츠하와 동료들은 교도소 생활을 거치고 나와서 정상적인 회사 채용이 거절받는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을 터이다.

   그러므로 신카이 감독이 나타낸 이야기의 반대선상에는 노조 혐오와 기업 자유 옹호, 그리고 법치를 통한 국격상승(?)을 강조한 한국의 극우정당들이 있다. 이들이 옹호하는 구 체계는 기업의 극대 이득 창출, 탈법적 노조 파괴, 최저임금 인상 반대, 친기업적 용어 왜곡 등 '개·돼지'들을 육성하고 가짜 민주주의를 활성화시키기 위한 것들로 가득차 있었으며, 외부 환경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표면적 변화만을 부르짖으며 대기업만을 위한 성장을 꾀했다. 그들은 그 결과로 그들이 위한다고 주장하는 국민들의 삶이 철저히 망가지든, 원전이 터져서 사람이 죽든, 급격한 원수 유입으로 지진이 나 수많은 사람이 다치든지에 대해서는 상관해오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들의 저항을 좌빨·용공·공산주의로 몰아가 분쇄하는 것이 대한민국을 살리기 위한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선전하고 있다. 일본도 많은 부분 비슷할 것이다. 이에 대해 '이것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한국과 일본의 많은 관객이 적극적으로 수신했다는 것은, 다시 말해, 이 모순적인 망국병에 대해 사람들이 더이상 '쇼하지 마라, 속지 않는다'(윤민석, 2016)라는 반응을 내보낼 수 있는 일련의 공통적인 문화자본을 수신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문화자본이 발출(發出)되었느냐, 그렇지 않냐의 차이만이 존재할 뿐이다.

'언령신앙'과 '무스비' 

그런데, 왜 이런 위험한(?) 작품을 일본 정부는 굳이 문제삼지 않는걸까? 게다가 유난히 까다로운 법률 및 규칙 파악에 빠른 일본 행정부가 단순히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네임 밸류나, 대기업의 지원을 받아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작품을 그냥 긍정적으로 파악할 리가 없다. 앞서 소개했듯이 이 작품은 '문부과학성 예술문화진흥기금'을 받아 제작됐다. 정부가 봤을 때도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근거에는 정부 정책, 특히 일본 문화를 발산하는데 긍정적인 요소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필자는 그 요소가 이 작품에 강하게 투영되어 있는 일본의 전통 문화라고 본다.

   첫번째 요소는 언령(言靈)신앙이다. 말에 힘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신도 신앙에서 유래된 이 신앙은 사람이 내뱉는 말을 통해 미래의 일을 좌우한다는 믿음을 나태나고 있다(이케가미 아키라, 2001). 또한 동시에, 그 속에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나타난 바가 있듯이, 이름을 바꾸는 행동이 사람의 존재나 의미 등을 바꾼다는 - 한국에서와 동일한 - 믿음 또한 깃들어 있다. 〈너의 이름은.〉에서도 이름의 존재가 결과적으로는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된다. 타키와 미츠하는 서로의 이름을 안다는 것을 전제로 다시 만날 수 있었으나, 두번째 만남을 통해 서로의 이름을 잊는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이름값'이 재앙의 결과를 바꾸는 대가로서 지불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두 사람의 이름을 둘러싼 인식 변화의 근거는 분명히 일본 전통 문화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두번째 요소는 애초의 이야기의 배경이 된 신사의 신화다. 이번 이야기에서 극중의 바탕이 된 것은 이토모리 산의 성역에 보존되어 있던 한 가지 옛 기록, 즉 과거에 운석이 도달했던 이토모리에 다시 동일하게 운석이 도달한다는 신화였고, 그 신화는 분명히 애니메이션에서 두번에 걸쳐서 재현되었다. 그리고 이야기 진행에 도움이 되었던 입으로 만든 술도, 해당 신사의 전통에 따라 미츠하의 몸으로 타키가 술을 만들고, 죽은 미츠하에게 돌아가기 위해 타키가 금기를 깨고 신사에 들어가 술을 마신다는 이야기 요소로 이어진다. 

   물론 작중의 이야기는 전부 픽션이지만, 신화의 재현이 이뤄진다는 이야기를 통해 일본의 정신을 떠받들고 있는 신도의 신뢰성이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물론 최근의 전형적인 TVA들에서 새해맞이 신사참배(初詣)가 자주 나오는 것을 보면 분명히 신사나 신도가 권위를 내세우는 것을 벗어나 일상생활의 일부분으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신사와 신도가 미디어를 통해 신뢰할만한 지혜로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 여러번 노출될 때, 일본국민 뿐만이 아니라, 애니메이션을 시청하는 (우리나라를 포함한) 해외의 사람들에게도 (역사적 사실과 무관하게) 일본문화를 친숙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물론 이로 인해 이어지는 역사왜곡의 가능성은 언제나 대비해야 할 것이다).

   셋째 요소로는 무스비(結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무스비 또한 이 애니에서 의외로 여러번 나오는 서사장치 중 하나다. 특히 신카이 감독은 結び가 '이어짐'과 '매듭', '끝맺음'이라는 서로 다른 의미를 활용해 극중에서의 타키와 미츠하의 관계를 시각화한다. 애니메이션 중간에 나오는 타키와 미츠하의 첫 만남은, 미츠하가 타키에게 긴 머리줄을 전달해주는 장면으로 상징된다. 타키가 받은 매듭은, 미츠하와 타키와의 상호신체교환이 일어나도록 하는 매개체가 되어준다. 또한 해당 매듭은 타키가 미트하를 발견하고 이동해, 타키와 미츠하의 재회를 이끌어주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한다. 이렇게 일본 전통의 '머리 묶는 줄'을 통해 신카이 감독은 타키와 미츠하 사이의 '매듭'을 시각화해 설명한다. 신카이 감독은 이를 통해 일본어-일본 문화에 대한 호감도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일본 전통문화는 이 작품을 이끄는 중요지점마다 나온다. 애니메이션 속에 딱 한번 나오는 수업 시간에, 굳이 '다소가레'(たそがれ)의 용법을 배우는 시간이 있다. 일본한자로는 '황혼'(黃昏)으로 전사되고, '저녁놀'로 번역되는 이 단어가 (만엽집을 구체적으로 적시하지는 않지만) 원래부터 '誰そ彼(너는 누구여)'에서 나온 말이라는 수업은 예상 그대로 떡밥이 되어 타키와 미츠하가 바뀐 몸을 가지고 만나는 지점에서 활용된다. 이 만남은 미츠하와 타키가 변화된 세계로 돌아가는 기회가 됨과 동시에, 변화된 세계를 고정하는 기회가 된다.

   이와 같이, 〈너의 이름은.〉은 이전 작품과 달리 일본문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이러한 활용 결과는 문부과학성 예술문화지원기금의 수령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결과가 신카이 감독의 네임 밸류에 의한 것이라고 판단하기는 힘들다. 신카이 감독이 지원을 받기 위해 이야기 속에 의도적으로 붙인 것일 수도 있고, 일본국 정부의 쿨재팬 정책에 맞춰 이야기를 조정한 것일 수도 있다. 이 외의 추측 중에서 신카이 감독이 가지고 있는 본심(本音)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와 관련된 정황적 판단은 뒷부분에 일부나마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70203 작성 시작, 180129 1부 공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