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웹컬처/생각+

〈너의 이름은.〉 - 가만히 있기를 거부함으로, 세카이계를 떠나다 ②

(ⓒ2016 『君の名は。』製作委員会)


오픈 엔딩, 그리고 재생산

다음으로 신경쓰이는 부분은 한국에서 진행한 GV에서 '엔딩에 대해 pixiv를 참조하라'고 발언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발언이다. 마침 [ 해당 메가토크를 촬영한 영상 ]이 있으니, 공식적으로 발언을 인용하고자 한다.

Q. (38:06) 어, 정말 영화 정말 잘 봤습니다. 제가 그, 개봉날 국내 인사에 있었던 그 영화, 그 때 봤었는데요, 사실 그 날 봤을 때 아무 마음의 준비[가] 없어서, 딱 보고나서 대개 해피엔딩이 있지만, 뭔가 마음이 대개 씁쓸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오늘 다시 한 번 봤을 때, 마음의 준비가 있어서, 그 해피엔딩[이] 조금 더, 조금 더 해피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있지만, 그래도 전에 그 무대인사하셨을 때, 그 아마도 나중에 3년 후에 다른 작품 하실 때, 어 '미츠하[하]고 타키, 어 한 장면이 나올 수도 있다'고 하셨는데요, (울먹거리며) 제가 정말 그 지금, 대개, 그 두 사람의 미래가 너무 궁금해서, 조금만 이야기해 주실 수 있는 지 … 감사하겠습니다.

A. (39:01) いや、そうですね。 二人の未来は、その、日本の同人誌、とか書いて******ますね。(관객 웃음) (同人誌とですね、二次ソースで,その、ファンが書いて*みたく漫画です。) あの、pixivでいう、サイトがありますね、pixiv。 その日本のサイトなんですけど、pixivに行けば、その漫画を*楽しめます。(폭소) あの、『君の名は。』のラストシーンで、二人が普通の本当***,普通の男性と女性として出会ったシーンなんです。 え、超能力もないし。え、お互いのこと、なんとなく知っている気がするけど、でも初対面のはわけですね。ですから、一回では、あれは、みなさん自身のわけです。あそこから先を見ていたたき、観客の方々が其々の物語りだと思います。あの、ですのでね。あの、面倒くさいんじゃないんですけれど、(웃음) みなさんが其々にイメージじていたたけば、と思います。

이야, 그렇네요. 두 사람의 미래는, 그, 일본어 동인지 등에 써져 **** 있습니다. (동인지라는 건, 이차 소스로 팬들이 그려서 보여주는 만화입니다.) 그, 픽시브라고 하는, 사이트가 있어요, 픽시브. 그런 일본 사이트가 있습니다만, 픽시브에 가면 그런 만화를 즐길 수 있습니다. 이 
〈너의 이름은.〉의 마지막 신에서, 두 사람은 평범한 ***, 평범한 남성과 여성으로서 만났다는 [상황의] 신입니다. 초능력도 없고요. 서로에 대해서는 무엇인가 알고 있는 느낌이 들지만, 그렇지만 첫 대면인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그것은, 여러분 자신의 역할입니다. 저쪽(pixiv)에서 먼저 본 것이고요, 관객 여러분들이 각자의 이야기[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귀찮은 것은 아니긴 합니다만, 여러분들이 각각의 이미지를 만들어주셨으면, 하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질문과 답변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의외로 생각보다 깊다. 그냥 웃고 넘길 일이 아니다. 여기서 질의자와 답변자인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입장 차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질의자는 이 질문에서 신카이 마코토를 〈너의 이름은.〉의 이야기에 대한 유일한 권한을 소유한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질의자는 신카이 감독이 가지고 있는 비밀을 드러내줌으로서 알지 못하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감성적으로 해소해 주기를 요청하고 있다. 그러나 신카이 감독은 그 권한을 갑작스럽게 최종적으로 관객에게 넘긴다. 여기까지는 일단 괜찮아 보인다. '이야기 이후의 해석은 관객의 자유입니다'라면서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기를 요청하는 것은 다른 창작자들도 종종 보이는 행동이다. 그러나 신카이 감독이 픽시브를 지정하는 상황에서부터 기존의 관행은 완전히 깨진다.

   이 대화에서 신카이 감독이 지정한 pixiv는 다양한 동인 창작 사이트 중에서 가장 생각하기 쉬운 대표명사 역할을 한다. 그리고 동인이나 코스어 등의 만화-애니메이션 동호인들은 자신이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위해 텍스트를 깨뜨리고, 텍스트의 벽에서 캐릭터를 구해와 자신이 가진 미디어를 통해 새롭게 배치하는데 익숙한 사람들, 다시 말해 디지털 리터러시에 능숙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신카이 감독은 이렇게 선언하는 셈이다. "이제 이 이야기의 전개를 그들에게 맡길 수 있다. 그들이 만들어주는 각각의 이야기가 이 영화의 세계관을 넓게 만들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다르다. 수많은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현상은, 저작물의 해체다. 즉 다시 말해 상상을 통해 생겨나는 새로운 이미지는 기존 이미지가 구축해 온 동일적인 세계관을 파괴해 나간다. 기존의 의미가 새로운 의미와 결합하면서 기존 텍스트가 전혀 의도한 적이 없던 부수효과(side effect)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래의 창작물을 보도록 하자.

    이 그림은 한 눈에 봐도 알 수 있듯이, 〈너의 이름은.〉의 미래를 상상한 그림이긴 하다. 그러나 이 그림이 가지고 있는 함축은 신카이 감독이 구축해온 〈너의 이름은.〉 세계관과 차이가 많다. 우선 미츠하와 동생 요츠바는 한국어를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 미츠하와 요츠바는 한국어로 대화하고 있으며, ○스타그램에 한국식 태그를 능숙하게 붙이기도 한다. 당연히 세계관과 맞지 않는다. 다음으로, 스트로베리 블라썸 푸라푸치노는 정확하게 한국 스타벅스를 시점으로 2016년에 도입된 것으로, 일본 내 정식 명칭은 '사쿠라 블라썸 & 스트로베리 프라푸치노'다. 일단 오리지널 기간 상으로는 시점이 맞기는 하다. 그러나 세계관 상으로 해당 시점이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우선 그림의 내재된 이야기를 통해 판단해 볼 때, 이 창작물에서 암시하는 (아마도 타키와의) 재회가 이뤄지는 것은 2021년의 시점이다. 해당 시점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 엄밀히 말해 2021년 일본 스타벅스 사쿠라 프로모션 기간에 해당 프라푸치노가 발매될 지 알 수 없다. 더군다나 이 그림을 창작한 창작자가 만든 재생산물들과 같이 놓고 판단하면 사정이 더 복잡해진다. 해당 창작자는 해당 인스타그램이 미츠하가 아직 고등학생으로 있던 2013년에 토쿄에서 해당 사진을 저작한 것으로 설정한 것으로 보이는데, 미츠하는 작품 속에서 2013년경 타키와 스쳐 만난적이 있을 뿐, 구체적으로 많은 시간을 들여 만난 사실은 없다. 결국 이 재생산된 그림은 〈너의 이름은.〉의 세계관과 들어맞지 않거나, 세계관을 파괴하는 작품에 속한다.

   이외에도 그림러들에 의해 생산된 다양한 〈너의 이름은.〉의 재생산물들이 신카이 감독이 언급한 픽시브 이외의 다양한 사이트에 올라와 있다. 그런데 해당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사진들에는 타키와 미츠하가 만나 대화하는 것을 통해 이토모리 유성 사건 이후 벌어진 일을 깨닫고 다시 기억을 되찾는다는 해석을 바탕으로 그려진 작품들이 꽤 많다. 즉 타키와 미츠하가 첫 대면일 뿐이고, 과거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위치를 되찾을 가능성이 적다고 암시하는 신카이 감독의 해석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는 해석이다.

   그런데 신카이 감독은 이러한 시도들을 긍정한다. 자신이 미래를 정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그들의 이야기들을 찾고 탐색할 것을 권한다. 저자는 여기에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로 신카이 감독이 소위 디지털 리터러시를 포함해 관객이 적극적으로 텍스트를 재해석,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작품의 세계관이나 저작권 질서를 벗어난 2차창작 또한 긍정가능한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해석이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동인 전통, 즉 작품 바깥의 이야기를 만화나 글, 코스프레 연기 등의 형태로 만들어내는 콘텐츠 수용자들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이 지난 수십여 년 동안 정착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일본은 최근 TPP 협상 과정에서 강력한 저작권 규정을 도입하는데 동의하면서도, 동인지 등의 2차창작물에 대해서는 저작권 단속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조치를 취하게 됐다. 물론 현재 동인지와 코스옷 시장 규모가 한 해에 1300억 엔이 넘고 있는(야노경제연구소, 2017) 문화 시장으로 정착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지만, 재생산 문화 또한 문화콘텐츠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활동이고, 이 또한 일본의 국부 증강에 기여하고 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라는 점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둘째로, 신카이 감독은 자신의 창작이 완료된 이후 자신을 다른 해석자와 다른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같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바르트가 이야기하듯이 '저자의 죽음'이나 창작자의 무기력함을 의미하는 행동은 아니다. 정확히 이야기해서, 그는 그가 마친 이야기를 굳이 이어가려고 하지 않고, 끝난 이야기는 끝난 이야기대로 관객의 보다 더 적극적인 해석에 맡기고, 자신은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나간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든 작가를 쥐어짜서라도 이야기를 늘리는 일본 만가-라노베-아니메 업계의 통상적인 전법은 쓸모가 없어진다. 이것이 신카이 감독이 아니메계에서 스튜디오 지브리의 후예로 오해되는 이유이기도 하다(물론 두 창작자 사이에 직접적인 연계성이 없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한 설명이다). 

  정리해보자. 신카이 감독은 오픈 엔딩을 만들고 관객들에게 재생산을 권장한다. 그가 저작권자의 입장이 아닌 창작자의 입장 속에 강하게 서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던 간에, 〈너의 이름은.〉을 통한 신카이 감독의 인식은 일본 저작권 산업 관계자의 입장 변화 또한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아직 일본 저작권 관계자, 특히 회사들의 2차저작권 인식은 매우 심각한 수준에 있으며, 자유로운 사용자의 재생산을 막는 쪽에 치중해 있다고 볼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를 시점으로 일본의 문화콘텐츠 회사들도 인식개선을 통해 2차창작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을 가지기를 기대해 본다.

정리 : 신카이 감독이 세카이계를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너의 이름은.〉에서 신카이 감독이 이 작품을 통해 세카이계와의 분리를 확실히 선언했다고 볼 수 있는 이유를 찾아보고, 이 작품에 대한 평가를 해보려고 한다.

   이와 관련해 세카이계에 대해 정리한 〈세카이계란 무엇인가〉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마에지마(2016:115)는 세카이계를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영향을 받아 1990년대 후반부터 제로연대에 만들어진, … 오타쿠 문화와 친화성이 높은 요소나 장르 코드를 작품 내에 도입한, 젊은이(특히 남성)의 자의식을 묘사한 작품군'으로 표현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니시오 이신의 작품이나 최종병기 그녀〈너의 목소리〉가 해당 계열의 작품으로 여겨지지만, 이러한 관점들을 비판해 나가며 마에지마씨는 어떻게 세카이계라는 '하나의 거대한 유령'이 일본 아니메계 전체를 뒤집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 설명해 나간다. (개인적으로는 신카이 감독의 처녀작인 〈너의 목소리〉가 세카이계의 주요 작품으로 인지되는 데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점에서 비판적인 입장이지만, 어쨌던 이러한 분석 틀을 받아들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 놓칠 수 없는 지적이 있다. 첫째로 에바 이후 세카이계의 형성과정에 대한 언급이다. 마에지마는 에반게리온 이후의 아니메, 더 나아가 아니메 수용자층으로 여겨졌던 '오타쿠'의 변화가 코베 대지진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라고 언급한다. 마에지마는 1994년 당시를 '한신 아와지 대지진과 옴진리교 사건[으로] …대도시가 괴멸적으로 파괴되었고, 토쿄가 큰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그 날이나 그 다음 날에도 일상은 계속되었다.'고 회상하면서, 설명하고 있던 최종병기 그녀〉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정치적, 군사적 리얼리티를 완전히 배제함으로서 오히려 10대, 20대가 피부로 체감할 수 있는 리얼리티를 획득'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ibid.,:76). 즉 비현실과 현실이 공존하던 한신 아와지 대지진 당시의 사회를 1년 후 에바가 포착해 애니메이션 형태로 내보내 당시 일본 구성원들이 가지고 있는 비현실적인 상황 속에서의 자아적 문제와 공명하면서 사회적 기반을 바탕으로 히트를 치는 데 성공했고(Ibid.,:79), 이후 그 포착의 결과가 다른 작품들로 퍼져나갔다는 설명이다.

   둘째로 사실 이 당시 전개되고 있던 남성향의 주요 장르인 '모에'와 '세카이계'가 사실은 동일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지적이다(ibid.,:101-102). 여기에서 마에지마는 1994년 대변혁과 에바 이후로 '애니메이션 이야기 바깥'에 몰입해 있던 과거의 오타쿠들과 달리, '작품을 자신의 내면으로 끌어당기'는(ibid.,) 다시 말해, 콘텐츠 속으로 들어가 콘텐츠의 등장인물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거대한 흐름이 생겼다는 점을 상기한다. 다시 말해, 현실에서 동떨어지는 경험을 그 당시의 사람들이 많이 했기 때문에, 그 충격을 어떻게라도 이겨나가고 있었고, 그 중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작품의 서사를 통해 현실을 이겨나가고자 하는 노력을 이어갔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카이 마코토가 〈너의 이름은.〉을 만들게 된 동기는 세카이계에서 만연하고 있던 자의식적인 서술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신카이 마코토가 한국에서 했던 또다른 발언을 재조명하고 싶다.

(11:46)今回の映画は、 その日本の東宝と、大きな映画会社と一生にあったので、「商業的な要請からハッピーエンド作なさった」んじゃないか、という心配されることがありますね。あの、でも、実際はそうではないんです。あの脚本は何度も何度も書き直して生きましたが、そこに悲しいエンディングは一度もありませんでした。そうですね。2011年に日本で大きな地震が起きた、ですね。あの時から、日本社会、僕を含めて、あの日本人は少し変わってしまったと思います。東京を含めて、え、自分の街が、もしかしたら明日、いつか、なくなってしまうかもしれない。そういう気持ちを常に、その気持が常に、心の中にあり得るなったんですね。そういう時に、映画を作るのであれば、そのときに映画を見てもらうものであれば、諦めずに、何かを諦める、何かをお消える話がなくて、いつまでも諦めずに、何かを元に戻す、強く、生きることをつかむような映画が必要なんじゃないかと思いました。(13:21)

이번 영화에는, 일본의 토-호-라고, 큰 영화회사와 함께 한 것이어서, '상업적으로 요구를 받아 해피엔딩을 만들게 됐다'는 것은 아닐까, 라고 걱정해주시는 분들이 있으시네요. 그래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각본은 여러 번 계속해서 다시 쓰여져 왔습니다만, 그 [변화과정]에 슬픈 엔딩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렇네요. 2011년에 일본에서 큰 지진이 일어났네요. 그 때부터, 일본사회[와] -저를 포함한- 일본인은 조금씩 변할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을 포함해, 자신의 마을이, 어쩌면 내일, 언제라도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런 마음이 항상, 마음 속에 남게 됐다는 것이네요. 이런 때에, 영화를 만드는 것이라면, 이런 때에 영화를 봐주신다는 것이라면, 포기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포기하[거나], 무엇인가를 지운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언제까지나 포기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원래대로 돌려서, 강하게, 살아나가는 것을 감싸나가는 듯한 영화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위의 서술, 그리고 세월호 관련 서술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신카이 감독이 〈너의 이름은.〉의 이야기와 주제의식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붙잡은 것은 동일본 대지진과 세월호 참사라는, 있을 수는 없었고 있어서도 안되는 참사였다. 다시 말해, 동일본 대지진에서는 두려운 현실에 대한 공감과 대처의지를, 그리고 세월호에서는 현실을 극복하지 못하도록 막는 장애에 대한 도전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한편, 앞서 마에지마씨가 세카이계의 형성에 코-베 대지진이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점을 서술한 바 있다. 그런데 코-베 대지진의 충격이 그것을 겪은 일본 국민들의 내면을 담고, 그 속으로 들어가도록 하는 작품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면, 동일본대지진을 겪으면서 피해를 겪은 일본인들이 내면 세계 바깥에서 이뤄지는 일들에 교감하는 결과를 일으켰다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다시 말해 코-베 대지진의 충격으로 세카이계가 시작됐다면, 동일본대지진의 충격은 세카이계를 넘어선 새로운 시도들을 불러일으켰다고 읽어볼 수 있을 것 같다.

   더 나아가, 신카이 감독이 밝힌 동일본대지진에 의한 관점의 변경은, 사실은 세카이계라는 세계관을 떠나, 다른 사람들과 공감하고 저항하는 방법을 찾아나가기 위한 하나의 노력이 되지 않나 하는 생각 또한 가져볼 수 있다. 초기작으로 호평을 받은 〈너의 목소리〉와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에서 빠져 있지 않고 등장하는 장소가 바로 정부기관이다. 물론 이러한 전통이 남성향 SF계 아니메에서 포괄적으로 나타났던 현상이기도 하다. 지브리라는 가시적인 반례를 제외하면, 대다수의 일본의 남성향 아니메는 오랫동안 정부와 군이라는 '나와 먼 곳'에 대한 이야기를 펴내며 정부에 대한 환상이나 비판을 담아왔다. 그러나 동시에, 정부 기관 자체는 보통의 '내'가 접근할 수 없는, '나'와 멀리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신카이 감독은 정부 기관이라는 것에서 눈을 돌려 일상의 삶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너의 이름은.〉을 시점으로 신카이 마코토의 시선은 지방정부라는, '내'가 접근할 수 있고 대화할 수 있는 존재로 초점이 옮겨진다. 다시 말해, 지방정부가 나의 삶에 어떠한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대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두 가지 관점을 같이 종합해 보면, 신카이 감독의 작품들은 멀리 있는 곳에서 가까이 있는 곳으로 초점이 옮겨왔다고 볼 수 있다. 시선이 멀리 있기에 보지 못하는 주변의 사례가 시간이 지나옴에 따라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로 변화한다. 내가 닿을 수 없는 중앙의 계서적(hierarchic) 움직임에서 내가 닿을 수 있는 로컬리티의 움직임 속으로. 이런 변화가 서서히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면, 신카이 감독이 2000년대 이후 형성된 치유계-일상계 애니메이션의 흐름과 접촉, 집중하면서 자신의 서사에 변화를 일으켰다고 가정할 수 있을 것 같다(물론 개인의 속마음을 알 수는 없으므로 가설에 불과하다).

   물론 이러한 변화의 근본에 위험이라는 요소가 있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사실 이 영화의 메인 이벤트가 되고 있는 운성충돌이라는 재앙은 동일본 대지진의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라는 재앙의 변주에 가깝다.신카이 감독이 위에서 말했듯이, 언제라도 생명을 잃는 자연재해가 나타날 수 있고, 그 자연재해의 적절한 대처가 국가(세월호)와 자본(토쿄전력)에 의해 저지될 수 있다는 위험성이 이러한 심리적인 변화에 근본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보는 것이 편할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 자체는 세계관의 변화의 방아쇠가 되었을 뿐, 그 변화의 명확한 동력인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다. 

결론 :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이야기를 맺을 때가 왔다. 지금까지 〈너의 이름은.〉을 명확하게는 개인적인 관점에서 여러가지 키워드를 가지고 분석해 봤다. 이외에도 〈너의 이름은.〉을 해석할 수 있는 다양한 연구 방법론이 있고, 실제로 해당 방법론들을 사용해 적용한 연구들이 2017년 한해 국내에서 다수 발표 된 바가 있다(전윤경, 2017; 양원석 외, 2017 등). 그러나 〈너의 이름은.〉를 기존의 세카이계 논의틀로 읽을 수 없으며, 오히려 〈너의 이름은.〉은 신카이 감독의 의 탈세카이계 움직임을 잘 드러내주고 있으며, 이러한 변화를 영화 전반적인 내용을 통해 엿볼 수 있었다는 것이 필자의 결론이다.

   〈너의 이름은.〉은 그동안의 애니메이션이 현실과 떨어져 수용자를 작품 안으로 파고들도록 만들어온 현상을 벗어나고자 한 일상계 아니메와 콘텐츠관광이라는 영향을 받아들인, 현실을 반영하는 애니메이션이자, 현실참여적인 의사를 나타낸 작품이다. 물론 이러한 의사의 표현에는 일본 정부나 제작자 등의 다양한 권력을 통한 간섭이 있었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간섭을 잘 묶어내 제작자가 여러 통로를 통해 현실반영적 의견을 나타낼 수 있을 정도로 수용자, 미디어 환경이 변해준 것이 〈너의 이름은.〉의 성공 비결이지 않았겠느냐고 생각해 본다.

   아울러 한국사회가 〈너의 이름은.〉에 대해 뜨거운 반응을 보인 이유도 한국사회가 신카이 감독이 제기하고 있는 사회적인 문제들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너의 이름은.〉이 2017년 촛불혁명 시기에 굳이 한국 사회에서 300만 명을 훌쩍 뛰어넘는 히트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렇기에 〈너의 이름은.〉의 성공은 단순한 '히트'가 아니라, 사회적 변혁을 바라고 있던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데 성공한 것에서 가능한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피조물의 해방을 바라는(롬 8:21) 갈망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계 22:20) (170203 시작, 180214 완료)


참고문헌
마에지마 사토시(2016), 세카이계란 무엇인가 - 에반게리온 이후 오타쿠문화의 역사, 워크라이프. 원전: 前島賢(2014), セカイ系とは何か, 星海社.
윤민석(2016), 이게 나라냐ㅅㅂ. 디지탈레코드, 2016. 11. 24. 
이케가미 아키라(2001), 일본어를 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에게, 디자인하우스. 원전: 池上彰(2000), 日本語の'大疑問', 講談社.
야노경제연구소(2017), '오타쿠' 시장에 관한 조사를 실시(2017년), 2017. 12. 15. 
양원석, 권희주(2017), 신카이 마코토의 ‘세카이계' 연구 『너의 이름은』을 중심으로, 일본연구(고려대 글로벌일본연구원), 28호. p. 238-258.
전윤경(2017), 질 들뢰즈의 ‘되기’의 사유로 본 <너의 이름은> -‘몸 바꾸기’의 의미를 중심으로-, 문화콘텐츠연구(건국대 글로컬문화전략연구소),11호. p. 7-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