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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95개 조항 500주년 기념문



95개 조항 500주년 기념문


전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수를 믿는 이에게 “회개하라!”, 즉 “전향하라!” 하신 것은, 믿는 이들의 삶을 온전히 바꿔 하나님 나라를 하늘과 땅에서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소망이다(마 4:17). 회개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다른 사람과 동일하게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죽어주셨으므로 나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마 28:19) 심령을 새롭게 함으로(엡 4:23) 성령님 안에서 주님의 제자가 됨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 참여한다는 진리를 믿는 가운데서만 이뤄질 수 있다. 그러므로 회개는 이 진리를 믿는 자에게 주어지지, 이 진리에 무엇을 더하여 믿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들은 복음에 우파 이데올로기를 더해 사회적 개혁 성향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가르치고, 그런 이들을 교회에서 몰아내고 있다.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문제가 아닌 교회 내부의 정치적 이슈로 가나안 성도가 되어 교회를 떠날 때, 교회의 지도자들은 오히려 현재의 상황이 그리스도를 믿은 데서 발생하는 당연한 ‘고난’인 것처럼 가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더욱 위기에 올리고 있는 한국교회를 돌아보며, 개인의 입장에서 한국교회의 문제점과 대안을 제시함이 마땅한 줄로 알아, 이와 같이 기념문을 기록해 둔다.


무엇이 문제인가

이세벨의 영 : 보수 이데올로기
  구원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초청을 받아들여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유일한 구속자이자 주로 고백하는 모든 이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러한 기회가 일부 사람들에게만 주어진다고 믿는 것은 성경에 위배되는 것이며, 이를 유도하는 공동체 또한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를 자처하는 한국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보수 이데올로기를 믿는 것처럼 보이는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한국교회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보수 이데올로기를 옹호해 왔으며, 때로는 일반인이 보기에도 비인륜적인 결정에도 거리낌 없이 지지해 왔다. 예를 들어 4‧3 제주항쟁에서 당시 한국교회 청년들로 구성된 서북청년단은 멸공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무고한 양민을 공산주의자로 조작하는 가해자의 최전선에 섰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교회의 죄를 사과하는 개교회나 교단 차원의 목소리는 지금까지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다.

  더군다나 최근 10여 년 동안 교회 강단은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하고 노무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 등의 자유주의자들을 종북좌파로 호칭하는 목소리로 가득했다. 이뢰자계 집단과 함께 하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다. 많은 교회 내 청장년들이 교회에서 울려퍼지는 소리에 시험당해 교회를 떠나갔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잃어버린 양들이 쉽게 전도만 하면 돌아오리라는 착각 속에 빠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보수 이데올로기가 내재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교회 내 권위자가 목회할 수 없을 정도로 치명적인 자신의 죄악을 드러내는 것을 막아준다는 데 있다. 성경적 근거로는 이미 출교되거나 치리되어야 할 사람이 다른 사람이 양심의 가책을 받아 죄를 드러냈을 때 그 사람을 오히려 회중에서 쫓아내 자신의 자리를 모면하는 사례가 이미 한 두 번이 아니고, 이미 교회 치리체계와 사법체계마저도 이들을 자정하는데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지난 촛불혁명에서 한국교회의 대다수는 분명한 상황 속에 침묵하거나 도리어 분명한 잘못을 한 박근혜를 교회의 이름으로 변명함으로서 자신의 한계를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다음 세대’의 절대다수가 진보‧중도 성향을 가지고 자유당에 반대하고 있지만, 교회에서는 계속해서 극우 이데올로기를 지지하는 교회 구성원들만이 교회의 주축이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교회에서 멀어진다. 매우 심각한 문제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개정)라는 말씀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대다수 회중은 진보적 성향을 가지고, 세상문화와 익숙한 사람들이 구원받아 하나님의 회중에 들어갈 수 없다는 보이지 않는 편견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말씀은 분명히 사도 바울의 다음 선언과 배치되는 것이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9, 개정)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늘나라의 문을 닫기 때문이다. 너희는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마 23:13, 새번역) 우리는 바리새파를 지적하며 그들과 멀리 되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하늘나라의 문을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게서 닫아두고자 하는 존재는 아닌지 깊이 돌아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인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반대되는 입장을 가진 사람이라도 우리의 이웃이라고 지적하신다(눅 10:36-37). 마찬가지로 내 공동체, 내 가족만이 아닌 나와 반대되는 입장을 가진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할 줄 알아야 우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얻을 것이다(마 5:9). 그러므로 교회에 들어오는 모든 이가 하나님의 사랑을 교회 공동체 안에서 느낄 수 있도록 교회 공동체를 운영하고, 혹시라도 누구라도 소외시켜 하나님 앞에서 책받지 않도록(마 18:10) 한국교회는 지금부터라도 궁리해야 할 것이다.

이단과 반지성주의, 가스라이팅 : 질문의 금지
  한국교회에서 또 다른 문제로 대두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이성과 감성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무관한 것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현재의 세태다.

  구약성경에서 예언자들과 선지자들은 당시의 세태에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해 왔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과 억울한 자, 눌림 받는 빛이 없는 자들의 현실을 무시하고 향락과 낭비로 삶을 살아온 당시 지도자들의 부정의와 우상숭배를 고발했으며,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올바른 통치를 위한 회개를 부르짖었다. 예수님도 이러한 선지자들의 영성을 본받아 성전 앞 장사판을 두 번이나 뒤엎으시고, 그 당시 하나님을 섬긴다고 자부하고 있던 바리새인들에게 매우 심각하게 화를 선포하시며 그들과 싸우기를 두려워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질문하지 못할 정도로(마 22:46) 뛰어난 지식과 지혜를 갖춘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셨다.

  이런 예수님을 따라 교회들마다 차이는 있지만, 그리스도인, 특히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성경과 성전, 이성을 하나님을 믿고 이해하는 주요 판단기준이라고 받아들인다(감리회 교리와 장정, 1편 2장 2절). 그러나 실제 한국교회에서 일정 ‘선’을 넘어가는 믿음과 교회에 대한 개인의 이성적 질문과 논의는 금단의 영역에 속하며, 교회 구성원들은 아무리 많은 지식과 지혜가 있더라도 선을 넘는 질문을 하지 않은 채 엄격한 선 안에서 살 것을 요구받는다. 이러한 반지성주의는 이단이 성행하는 현재 세태와 겹쳐 생각할 때 한국교회가 이단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지 자문하게 만든다.

  이단 사이비 종교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권위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과 교리에 대한 의문의 금지다. 신천지던, 하나님의 교회건, 여호와의 증인이건 사이비 이단 집단의 지도부는 자신들의 교리에 대한 자그마한 비판이더라도 받아들이지 못하며 이러한 비판과 의문이 어느 수준 이상에 이를 경우 지도부의 구성원이라도 아낌없이 내쫓는다. ‘판을 깨자는 거냐?’(이만희)라는 질문이 그 의미를 잘 설명해준다. 교리에 대한 의문과 문제점에 대해 하나라도 받아들인다면 그들의 교리는 한 순간에 멸망해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믿음이 그들보다 못한가? 그렇지 않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현대 사회인들 뿐만이 아니라 믿는이들의 질문에 능히 대답하지 못함으로서 이단과의 차이점을 능히 설명해버리지 못하고 있다. 한국교회에서 기독교 변증은 교회 전도를 위해 필요한 특수한 기술이 되었을 뿐이며, 세상의 전문 지식은 교회의 체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배설물’(빌 3:8)내지 적그리스도의 무기로 취급당하며, 신학은 목회자를 양성하고 전도를 돕기 위한 일종의 기술이 되어 버렸다. 그리스도인 개개인이 마땅히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갖는 질문은 교회 성도들끼리도 서로 들추어내기 어려운, 대나무숲의 메아리가 되었을 뿐이다.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하는 한국교회의 부끄러운 매커니즘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가스라이팅이다. 위키백과에서는 가스라이팅을 ‘지속적 부정, 상황 조작, 모순화와 거짓말을 통해, 타인이나 특정 집단 구성원들에게 의심의 싹을 심어, 그들이 자신이 가진 기억, 감각, 신념, 그리고 분별력에 대해 의심하도록 해 그 사람을 정신적으로 황폐화시키고 그 사람을 파국으로 몰아가는 조작 형태’라고 정의하고 있다(영어+한국어에서 정리). 

  문제는 한국교회 내 가스라이팅이 복음과 관계없는 비본질적인 영역에서 쓰인다는 데 있다. 한때 한국교회 내에서 컴퓨터 공학을 ‘사탄의 학문’으로 부르거나, 드럼을 ‘마귀의 악기’로 부르던 때가 있었다. 물론 지금도 밴드 형태의 경배와 찬양을 하나님과 동떨어진 것으로 주장하는 이단들이나 극우주의자들이 존재한다. 이와 같이 최근에도 가치중립적인 도구들이 ‘문화’나 ‘사탄의 도구’라는 이름으로 하나님과 반대되는 것으로 호출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며, 이는 해당 문화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을 믿음에서 끌어내리거나 이중 믿음을 가지도록 하는 결과를 낳는다.

  특히 이러한 결과가 복음의 진리와 섞여 있는 데에서 발생한다는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한국교회가 강조하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 오직 내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가운데 사는 것이라’(개정)라고 고백한다. ‘예수와 함께 내가 죽고, 예수와 함께 내가 사는’ 자아의 죽음은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 자아의 죽음은 내 교회만, 내 공동체만, 내 교리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고, 동시에 교회라는 몸 전체를 위해 부르심 받았다(엡 1:23).

  복음에 있어서 비본질을 분별하는 현재의 기준은 우리의 양심 속에 있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만일 남자에게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부끄러움이 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고전 11:13)라고 분명히 말씀한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그 본성을 통해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아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고, 남자에게 긴 머리가 있어도 부끄럽지 않다는 것을 명확히 알아 예배에서 미사포를 쓰지 않는다. 머리에 대한 판단이 본성이 아닌 문화와 사회 규범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임을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사회와 문화적 차이를 배려하신 말씀의 성육신을 통해 지금도 우리에게 일하고 계신다. 

  우리는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 되는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를 추구한다(엡 4:13). 그러나 아는 것이 믿는 것에 분명히 배치되는데도 계속해서 아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과, 비본질적인 믿음을 구실로 아는 것을 지나치게 제약하는 것 모두 올바르지 않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은 자아에 대한 가스라이팅이 아닌, 자신이 가진 것으로 이웃과 세상, 그리고 교회를 섬길 때 이루어진다.

  한국교회에서 다양한 질문과 비판이 금지되는 현상은 참 선지자이시자 문제제기자의 삶을 살아 보이신 예수님의 모습, 이성과 감성을 결합해 지성적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통해 우리에게 학문과 문화를 발전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 우리의 이성적 판단과 편견을 언제라도 뛰어넘는 명령을 하실 수 있는 바람 같은 성령님의 역사를 제약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거부하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과도한 헌신 : 세상과의 분리, 계량화, 사랑의 소멸
  한편, 이러한 한국교회의 반지성주의나 가스라이팅은, 과도한 헌신이 있기에 가능하다.

  한국교회는 과도한 헌신을 요구하는 교회이다. 한국교회에서 믿음이 좋은 여부는 그 사람의 삶에서의 열매가 아닌 교회 예배 출석여부로 판가름난다. 한국교회에서 충성되이 헌신한다고 판단되는 성도는 주일 새벽 일찍이 일어나 주일 새벽 예배 이후 본예배를 드리며 봉사에 나서고, 오후에는 오후 예배 후 노방전도에 나서고, 저녁에는 저녁예배를 드리고 나서야 한숨 돌리며 집에 들어가 쉴 수 있다. 물론 교회에 따라 매일 새벽예배나 저녁예배, 수요예배나 금요예배가 기본인 교회가 많으며, 토요일에도 예배를 준비하기 위해 교회로 출근하는 이들이 많다. 그런데 이것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할 수 있는가?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로 세상 구성원들과 분리됨을 통해 세상을 품을 수 있는 능력을 손상당한다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와 자주 볼수록 세상 사람들과의 접촉 기회는 줄어든다. 당연히 세상과 공감할 기회 또한 줄어든다. 따라서 여호와께 성결한다는 이유로 최종 명령인 영혼구원을 위한 접촉과 모색에는 소홀해진다. 이러한 세상과의 분리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키우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영혼 구원과 다음세대 양성이라는 당면 과제와는 거리를 둘 수 밖에 없다. 더군다나 구원받아야 하는 성도들이 교회의 모습을 보고 교회와 거리를 두는 것은 당연해 재론할 것도 없다.

  또한 개인의 개성이 존중되지 않은 빡빡한 스케줄을 따라갈 수 있는 이는 많지 않다. 따라서 한국교회에서는 스케줄을 따라잡을 수 있는지의 여부에 따라 능력자와 비능력자가 갈린다. 교회에 충성봉사하면서도 사회에서 많은 돈을 벌며 교회에 많은 재정을 버는 사람은 하나님께 복 받은 성도로서 칭찬받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은 교회 구석에서 평신도이자 직분자로서 순종하기를 요구받는다. 이러한 교회 내 차이두기는 많은 지적에서 나타나듯이 사도 야고보의 간곡한 지적을 ‘씹어먹는’ 행동이기도 하다(약 2:2-).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교회에 참여하는 것이지, 교회에서의 인정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특히 이러한 헌신은 출석부나 헌금 현황 등을 통해 너무나 쉽게 계량화된다. 우리는 성령님을 통해 교회에서 얻어지는 열매가 어느새 교회 출석 횟수나 헌금 액수, 십일조 여부로 치환되는 매우 슬픈 시대를 살고 있다. 성령의 열매는 분명히 사랑과 희락과 화평, 오래참음, 자비와 양선, 충성, 온유와 절제인데(갈 5:22-23), 교회의 열매는 전도수, 교회 봉사 직분의 수 등 계측 가능한 헌신의 양으로만 측정된다. 교회의 직분부터 시작해서 성전헌금, 목적헌금에 헌금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다. 물론 자발적인 헌신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지만, 가스라이팅과 분위기 조성을 통한 강제적인 헌신은 교회 구성원들의 삶을 파괴하고 상처만 남길 뿐이다.

  이러한 과도한 헌신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분리할 뿐만이 아니라, 분명히 동일한 구원받은 이를 나누어 차별하는 비성경적인 행동이다. 이러한 행동의 결과, 한국교회에서 사랑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개인이 빡빡한 교회 스케줄 속을 따라가다 보니 영혼이 메말라가고, 공동체 속에서 사랑이 없어 셀 조직이 제대로 돌아가지 못한다. 한국교회에서 많은 구성원들과 구도자들이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얻지 못해 교회를 떠나가는 현상은 이제 가나안 성도라는 이름으로 구체화됐다. 길을 잃은 양들이 교회를 떠나가는 사이 교회는 변화의 요구를 분명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지나친 반 가톨릭주의와 반 은사주의
  한편 종교개혁 500주년은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의 큰 차이점을 드러내고 있다. 세계교회는 가톨릭과 개신교, 성공회가 서로 대화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어떻게라도 회복해보고자 노력하는데, 한국교회는 이를 벌리고자 노력하고 있다.

  우리는 지나친 반가톨릭주의를 가진 KJVism 등의 잘못된 교리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한국교회가 반가톨릭주의를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가톨릭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규정의 근본적인 이면에는 가톨릭에 대한 올바른 비판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더 많은 편견과 선입견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가령 전례에 보다 더 기반한 예배를 드리는 성공회와 루터회는 분명한 개신교 분류에 들어감에도 불구하고 주교가 있고, 성찬례가 중심이 된다는 점에서 한국 개신교인들이 백안시하는 면이 없잖아 있다. 

  이러한 오해는 분명히 한국교회에 의해 지정된 이단(예를 들어 KJVism과 다락방)들에 의해 보다 더 강화되었고, 일부 목회자들과 신도들은 이런 오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한국교회의 결집을 위해 외부의 적을 만들고자 하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이런 의미에서 지난 2013년 있었던 WCC 총회에 보수 개신교인들이 적극적으로 반대한 것은 이단과 손을 잡은 행위로서, 분명히 지혜롭지 못한 한국교회의 수치다.

  에큐메니컬 운동은 예수님께서 성찬례를 제정하신 직후 예수님의 죽으시기 전 하신 기도에 근거되어 있다(요 17:21-22).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교회들이 자신의 다양성을 통해 함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노력은 적극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물론 가톨릭교회의 잘못에 대한 비판과 성전에 대한 비판적인 수용은 적극적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러나 교황 프란치스코와 같은 지도자들을 마귀의 수장으로 그리거나 그들을 구원받아야 할 존재로 여기는 행위는 시정되어야 하며, 우리는 그들이 자신의 잘못과 오류를 인정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으로 돌아오도록 기도해야 한다. 아울러 이들 교회들의 지도자들 또한 이그러지기는 했으나 하나님이 허락하신 교회 공동체를 목회하는 목회자로서 인정되어야 한다.

  한편 은사주의에 대한 편견과 차별 또한 언급할 필요가 있다. 물론 소위 신사도주의 교회 중에서 극우 이데올로기와 결합된 교회가 적잖이 있으나, 교회에서 성령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교회에 대해서 일부 장로교회들이 (큰믿음교회와 같은 분명한 예외를 제외하고) 무조건적으로 이단으로 규정하는 행위는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특히 이러한 공격들은 감리회나 하나님의 성회와 같이 그리스도의 온전한 교회를 이루어온 정상적 한국교회를 공격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 왔으며, 성령 하나님의 분명한 역사를 부정하는 행위다. 분명히 존재하는 신유와 방언 등의 은사는 한국교회 내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가는 도구로서 인정되어야 한다.

과도한 권위와 이중잣대
  마지막으로 교회의 뿌리 깊은 이중잣대 문제도 짧게나마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밖에 없다. 교회 밖의 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심각하게 짚고 문제삼는 교회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추문에 대해서는 ‘은혜스럽지 못하다’며 매우 낮은 치리를 삼고 오히려 그들을 교회 속으로 다시 들여 교회 공동체에 흠집을 더하는 것은 매우 흔한일이 됐다.

  이러한 결과가 발생하는 이유는 목회자에 대한 과도한 권위와 연관되어 있다. 굳이 만인제사장론이니 현대의 목회자에 대한 다수의 비판을 이 자리에서 언급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평신도 또한 말씀을 해석할 수 있고, 그들 또한 교회를 위한 사역자로서 활동할 수 있을 가능성을 제약하는 현재의 한국교회 체계는 재고되어야 한다. 이미 장로권사호칭제 등의 대안이 실시되고 있다. 그러나 ‘부제’ 직분을 ‘집사’로 낮춰 평신도 직분자의 권위를 낮추고, 안수집사, 안수장로제도를 통해 교회에 여러개의 벽을 세우는 행위는 바람직하지 않다.


무엇이 바뀌어야 하는가

  한국교회에서 비판자들을 억누르는 주요 논리중 하나로 ‘대안 없는 비판’을 지적하는 이가 많다. 이제 위의 문제점들만을 제기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 대안을 제시함으로 한국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데 있어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해 몇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선교적 교회의 확대
  각 교회의 부르심이 있기에, 대형교회의 과도한 헌신이 무조건 틀렸다고 주장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하지 않고지 한다. 그러나 10년 이내 주류를 이룰 ‘다음세대’가 해당 교회에 들어가 쉽게 적응할 가능성은 지속적으로 적어지고 있으며, 이미 교회를 갔다 떠나간 다수의 젊은이들은 교회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교회를 적대시하고 있다. 안티개독교 주의자들이나 적극적 무신론자, 또는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 신도들에게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이제 중단되어야 한다. 

  젊은이들과 가나안 성도들을 대상으로, 그들이 교회에 가는 것을 막는 많은 헌신과 수치적 평가가 필요하지 않은, 쉼과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전파할 수 있도록 돕는 새로운 교회 공동체들이 많이 생겨날 필요가 있다. 이미 이를 위해 움직이는 사역자들을 위해 한국교회는 지지와 함께 새로운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전례의 회복
  오늘날 한국교회의 예배는 말씀전례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다. 말씀의 중요성을 거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19세기에나 생긴 매우 특수한 예배 양식을 현대에도 적용함으로서 발생하는 문제라는 사실이 감안되어야 한다. 

  기존 전례양식이 어느 정도는 회복되어야 하며, 아울러 성찬례의 회복이 시급하다. 특히 그리스도가 친히 정하신 성찬이 예배시간에서 점점 외면당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볼 수 없다. 이러한 문제는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찬양예배에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개신교회는 말씀 시간의 최소 1/4이라도 성찬 시간에 투자해야 하며, 공동성서정과(RCL)의 사용 또한 촉진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초대교회의 유산인 시간전례의 적용 또한 시도되어야 한다. 물론 시간전례가 QT 운동과 배치되는 측면이 있고, 복잡한 면이 없잖아 있다. 그러나 현재 기감에서 공식 매일기도서를 출판했고, 성공회 또한 시간전례를 적극 이용하고 있다. QT와 시간전례를 결합한 새로운 교회 공동체적 접근 또한 바람직하다.

장애인 신자에 대한 차별 철폐
  최근 장애인 신자수가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일반 교회 회중에 참여하는 장애인 신자는 많지 않으며, 감각장애인의 경우 청각장애인교회나 시각장애인교회 등으로 내몰리고 있는 실정이다. 발달장애인신자 또한 대형교회의 경우 ‘사랑부’라는 명목으로 정식 예배에 대한 접근권을 제약받고 있다. 그러나 이들을 그들만의 교회 공동체로 몰아내는 행위는 성경적 근거가 없는 폭력이다. 따라서 장애인의 의사 없이 장애인들만으로 구성된 별도 교회나 회중을 만들어 같은 진리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는 행위는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

  또한 한국교회들은 시설 운영에 앞장서 장애인들을 사회에서 분리하고, 그들의 자유를 제약하는 것에 대해 어떠한 양심적 가책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지속적으로 장애인들에게 폭력 피해를 주며, 자립성을 없애는 장애인 수용 시설과 복지관을 즉각 폐쇄하고 장애인들이 지역사회에서 자립하는데 앞장서 그들도 하나님이 명하신 십일조와 선교, 구제, 감사헌금을 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죄의 차이를 두지 말라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을 모욕하는 죄가 아닌 죄 중에서 어떤 하나가 다른 것들에 비해 더 심각하다고 말하신 적이 없다(마 12:31-2, 눅 12:10). 또한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려는 바리새인들에게 자신이 가진 죄들이 간음한 죄보다 크지 않다는 사실을 상기하셨다(요 8:1-).

  따라서 북한 인권과 이슬람 등에 대해 강조하면서, 그와 비슷하거나 더 심각한 이단, 내부 비리와 성추행, 인권침해, 교회정치적 문제를 경히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다. 어떤 한 죄에 대해서 두둔하고, 다른 죄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말고, 모든 죄에 대해서 사랑으로 품고 회개를 촉진하던가, 모든 문제에 대해서 단호하게 정죄하던가 하라. 예수님께서는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 5:37, 개정)이라고 이미 말씀하신 바가 있다.

교회의 유익과 하나님의 뜻
  최근 들어 교회의 우파 이데올로기적 유익(?)을 위해서라면 이단이나 정치 세력과도 교회가 협력하는 모습이 다수 발견된다. 앞서 말한 2013년 반 WCC 캠페인에는 한국교회에서 이단으로 판정받은 KJV 교회들과 다락방 교회가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 한국교회 구성원들이 그들과 함께 함으로 교회의 이단 판정을 불분명하게 만들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명령이 다른 유익에 우선할 수 없다. 벨리알과 예수가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고후 6:15)을 아는 사람들이, 교회의 유익(?)을 위해 심지어 일간베스트와 함께 행동하는 것은 교회에서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총회 구조의 개편
  무엇보다도 한국교회를 병들게 만든 제일 근원은 성직자와 장로만이 교회들을 다스리는 데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총회구조이다. 한국교회는 민주주의적 원칙에 의해 의사를 처리하면서, 정작 민주주의적 원칙의 근본인 대의민주주의에는 귀를 막고 있다. 현재 교회들이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말씀을 듣지 않고 이것이 누구나 순종할 수 있도록 입증되지 않는 한, 총회나 시노드 등의 참여권이 젊은이, 여성, 장애인을 포함한 다양한 교회 구성원의 대표들에게 개방되는 것이 마땅하다.

  이를 입증하는 많은 성경의 사례가 있다. 욥기에서 하나님은 엘리후를 들어 욥과 세 친구들보다 나은 지혜를 드러내게 하셨다.(욥 32~37). 예수님은 안식일에 눈먼 이를 고치시고 나서, 눈먼 이를 바리새인들의 궤변을 논박하는 도구로 사용하셨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따라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 공의회에 참여해 의견을 제시했다.

  한국교회는 이제 총대원의 대상에 평신도 대표를 추가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여성 총대(연회원)의 충분한 수가 보장되어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특히 청년‧청소년 대표를 다수 총대로 선정해 그들이 총회 표결에 참여하게 한다면, 그들의 목소리를 드러낼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총회의 공정성 또한 기할 수 있을 것이다. 연소함에도 불구하고 교회 감독(주교)으로 일한 디모데나 어릴 때부터 쓰임받은 다윗과 다니엘의 이야기는 청소년 비전을 위해 자주 언급되면서, 왜 그들이 교회에 대해 품고 있는 생각은 들으려고 하지 않는가?

사회참여와 에큐메니컬 운동, 국제 교류의 회복
  마지막으로 한국교회는 그동안 사회참여와 교회의 진보 세력에 대한 홀대를 즉각 중단하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균형을 잡아야 한다. 교회 공동체에 진보세력이 들어오는 것을 막는 다양한 장벽이 철거되어야 할 뿐만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잘못이었던 반에큐메니컬 흐름을 회개해야 한다.

  광복 후 한국교회는 수백 개의 교단으로 쪼개졌다. 이 사상 유례가 없는 교회 분리에 에큐메니컬 운동을 반대하는 세력이 주축이 되었다는 점은 한국교회의 수치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하나님과 반대되는 육체의 일로 ‘당지음과 분열’을 언급하고(갈 5:20), 육체의 일을 저지른 자들이 하나님의 유업을 얻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분열은 참된 복음을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포장되어 왔다. 우리의 회칠한 무덤을 허물고, 에큐메니컬 운동에 앞서야 한다.

  특히 이 부분에 대해서는 감리회의 잘못이 매우 크다. 지난 10년 동안 감리회는 신앙의 유산이자 신앙고백인 사회신경을 교인들에게 가르치지 않고, 교권 싸움에 앞장서며 사회와 거리를 두어 왔다. 존 웨슬리 신부(목사)는 당시 성공회가 방기하고 있던 사회적 책임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겼기에, 자신의 전도구를 벗어나 거리로 나가 그들을 위한 사역을 전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감리회는 그동안 사회운동에 대한 장로‧성결‧침례교의 우파적 이해를 그대로 수용해 왔다. 결국 사회실천과 봉사는 사회복지 분야로 축소되고, 사회를 보다 더 나은 노력으로 바꾸려는 움직임들은 평가절하돼, 가톨릭의 사회교리보다 못한 수준으로 전락했다.

  특히 기감은 광복이래 곧바로 에큐메니컬에 참여해, 에큐메니컬 운동에서 한번도 나가본 적이 없다. 그런데 최근 일부 본부급 평신도 단체들마저 WCC 탈퇴를 주창한 것은 감리회의 수치다. 이러한 억지춘향식 주장은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 오히려 감리회는 웨슬리안 전통과 알미니안 전통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교회 내의 진보적 기독교 이해를 가지고 있는 교역자들과 평신도들이 하나님 나라와 이 땅과 세계를 일해 일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국제적 교류가 보다 더 확장되어야 한다. 선교를 위한 교단간 교류나 특정 대형교단간의 뻔한 교류보다는, 도움이 필요한 세계의 교회와 선교단체를 위해 손을 뻗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선교는 이제 그 지역 주민들에게 상처를 주는 지경에 이르렀다. 개별 교단 선교부는 한국교회의 복사판을 전 세계에 만드는 것이 선교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것을 인식하고, 각자의 문화와 사회에 맞는 성육신화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가 무엇인지 고민하고 실천해 나가야 할 것이다. 1984년 서약한 10만 선교사를 다 내보내지 못할 것이 뻔하다면 제대로 된 선교라도 하자.


마지막으로
오늘의 글이 금과옥조인 것이 아니며, 개인의 제안일 뿐이 아니고, 더군다나 다른 이들에게 밟힐 소금처럼 평가될 것이라는 것은 이미 각오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기를 위해, 모든 이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한국교회에는 개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거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루터가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라고 지적했던 것처럼. 한국 교회는 이제 새로운 개혁의 길을 걸으며 하나님을 모든 사람에게 전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얻은 새 생명과 기쁨은 더 이상 더 많은 한국인에게 전달될 수 없고, 우리는 썩은 소금이 되어 한국 사회의 새로운 차별의 대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세대에게 그 책임을 더 이상 떠넘기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회개하고 우리 자신을 새롭게 하자. 우리가 돌이키지 않는 한, 우리에게 남아있는 시간은 더 이상 많지 않다. 하나님의 재림과 달란트를 낭비한 자에게 내려지는 형벌만 더욱 가까워질 것이다.


2017. 10. 31.
종교개혁 제 500주년을 맞아 아픔과 감사를 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