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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콘텐츠

문화 - 상품 - 소비, 그리고 유교


본 글은 ignition님의 아래의 트윗을 보고 제 의견을 적은 것으로서, 내용이 상당히 깁니다. 또한 이 글은 3개월 가량 만에 제대로 쓰는 첫 글로서, 이 글부터는 올포스트에 송고되고 있지 않음 또한 알려드립니다.

대중들이 상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매체의 흐름에 편승해서 '오타쿠' 라는 사회의 일부 문화를 부정적 대상으로 치부하는것과, 소프트웨어든 음악이든 책이든 죄다 불법으로 내려받아 보는게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는 대중의식과는 일맥 상통하는 부분이 있으리라.
그들에게는 애정을 가지고 물건에 돈을 써본적도 없고, 무형의 음원은 그저 MP3 라는 컴퓨터상의 파일일뿐이고, 보고서 울고 웃을 수 있는 책은 그저 JPEG의 형태를 지닌 것이기에 이해를 못하는것이리라. 
자신의 사비를 털어서 책한권, 음반 한장, 하다못해 게임소프트웨어 하나라도 사보지 않은자가 과연 누구를 욕하려하는가.
막말로 오타쿠 문화가 '더럽고 추잡스러운 행위'라고 한다면, 그러한 오타쿠들로 인해서 돌아가는 사회의 모습은 무엇인가. 그들로 인해서 그림그리는 자들이 입에 풀칠하고, 제본소가 활발히 돌아가며, 디스크 정제소가 철야를 하고...

-  @ignitionDK 님 (86789980118192129 이하)

   1. 이 글을 살펴보면, 처음에는 내용이 전반적으로 공감이 간다. 아무리 국내에 유통되지 않는 콘텐츠의 희귀성을 해결하기 위해서 콘텐츠를 다운을 받을 수 밖에 없다고 해도 그 행동이 분명히 콘텐츠를 그대로 생산하고 소비하는 행위에 있어서 필요한 대가지불을 유보하기 위한 행동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대가지불이 없는 행동은 결국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할 것이고, 범법자로 우리가 살 수 밖에 없게 되는 이유가 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건 기독교적인 논리에서나, 유교적인 입장에서나, 자본주의적 입장에서도 용인될 수 없는 일이다. 단지 사람들의 행동을 완벽히 단속할 수 없고, 단속할 경우 국익을 지나치게 해치게 되어 생산 차질이 발생될 것이 예상되기 때문에 국가에서 처벌을 하지 못하는 것 뿐이다. 일단 원칙상으로는 그렇다. 그래서 이러한 생산을 그나마 실제로 돈을 주면서 구매하는 오타쿠가 사실은 대가지불을 완전히 하지 않는 일반인보다 낫다- 라는 것이 본 트윗들의 주장이고, 그 주장을 실제 검토했을 때도 이는 사실임이 드러날 것이다. 원론적으로는 말이다.

   2. 그러나 단순히 이 글을 간단하게 수긍하고 넘어갈 수 없게 하는 문제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주류 문화 바깥의 만화-애니메이션 계 팬들, 또는 마니아들을 단순히 '오타쿠'라고 부르면서, 그러면서 일반적이지 않은 모든 행동에 (심지어 주류 대중문화 안에 있는 아이돌 팬들에게도, 자조적이든, 아니면 외부 강압적이든 간에) 비정상이라는 인식을 심고 이를 언술과 헤게모니-이데올로기 차원에서 '무심코' '의도적으로' 부추기는 사회의 대중들, 그리고 둘째는 이러한 사회적 인식을 강화하는 유교-모더니즘적 이데올로기 : 또는 상류층의 이데올로기이다.
   과연 '모든 다른 것은 이상한 것'이라는 우리나라-일본의 특이한 현상은 어디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을까. 일본의 매일 출근에 야근이라는 독특한 회사문화도, 우리나라의 어쩔 수 없이 참여해야 하는 야근 - 회식 현상도, 자신과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을 놀리는 - 그리고 왕따/은따 하는 모습도, 사실은 두 가지 근원에서 그 근원이 유래한다.
   하나는 공동체 안에 있어야 편안하다는 - 그리고 그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서' 부과되는 규칙과 제약들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제약은 사실 조선 후기부터 시작된 보수-수구화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그 것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향약이 아닐까. 공동체가 필요하니 사람들을 모아서 공동체를 구성한다. 그리고 그 공동체가 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향약이 구성되고 이러한 향약 바깥에서 마을 사람들이 행동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이러한 향약이 확장되면서 사실은 유교가 가지고 있는 장점인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상 단점인 문제가 여기에서 도래되는데, 바로 그것은 소수 몇몇 권력을 가진 사람에 의하여 다른 사람이 통제를 받는, 독재-또는 과두정 형태이다. 사실 통치에 의해 이루어지는 평화는 - 모두에 의해 완전히 합의되어 질 때 - 제일 좋다. 하지만 그 결과에서 보듯이 이러한 독재 과두정 형태는 결국 우리 조선을 망쳤고,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망쳤으며, 지금도 애국세력이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의 미래를 망치려고 하고 있다.
    둘째로는 이익을 내야 한다는 자본주의 또는 모더니즘으로 인해 불거진, 목표를 성취하고 반드시 달성해야 한다는 이름 하의 비가시적인 폭력이다. 이익을 달성하기 위해 공동체의 구성원이 부품처럼 사용당해도 되고, 그들이 피해를 보더라도, 그리고 사람들의 인권이 침해당해도 되며, 이러한 결과로 인해 얻을 긍정적인 결과는 공동체의 후손들 개개인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 이것이 자본주의가 우리 사회에 가져다 준 엄청난 영향이다. 물론, 나는 이러한 폭력에 대한 대안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공산주의도 자본주의에서의 탈출을 말하면서 동일한 죄악을 지었고, 역시 서민들에게 동일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요덕수용소와 같은 북한의 인민에 대한 분류와 학대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죄악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똥이 덜 묻었다고 더 묻은 사람을 비난할 수 없듯이, 민주주의를 가장한 한국의 자본주의 중심의 사회 체계는 분명히 수정되어야 한다.
    이 두 가지 문제는 '오타쿠 문제'의 중심에도 여전히 적용된다. 만화-애니메이션계 문화와 그 문화를 향유하고 있는 유저들 또한 이 두가지 기준에 의해 판단을 당한다. 기존의 사회에서 용인되기 어려운 행동과 주장을 하고, 생각을 하고, 그것을 출판해서 생산하기까지 하니 기존의 사회 문화규범을 파괴하므로 이상하고, 생산을 위하여 소비할 시간을 자신의 취미를 위해 덧없이 사용하고, 재화를 헛된 곳에 사용하니 비생산적인 행동이다. 따라서 사회 규범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 자체가 일반인들에게 있어서 이상하게 보이는 것 자체가 당연하다.

   3.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을 뒤집어주는 한가지 명제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문화콘텐츠의 발전'이라는 명목이다. 문화콘텐츠의 중심에는 사실 드라마나 다큐멘터리, 영화(중에서 실험적이지 않은 것)를 제외하고는 모두 100% 그 기존의 문화를 뒤집고 흔들어야 성립할 수 있다는 이상한 명제가 성립한다. 요즈음 뜨는 성공한 애니메이션 치고 비생산적이지 않고 소비적이지 않고서는 성공하지 못한다. 이성적인 문화콘텐츠는 이제 성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 따라서 감성을 자극해야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이 점차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로 확산되어가고 있다.
   그러므로, 현재의 문화콘텐츠 생산자들의 논리가 기존의 유교-모더니즘적 이데올로기에 합산되면서, 미래의 국가 성장을 위해서 비합리적인 소비를 촉진시키고 확대해 나가야 한다는 이상한 결론이 성립된다. 따라서 현재의 한국사회에서 각 개인들은 생산적 기계인간과 소비적 유저라는 쉽게 조화될 수 없는 선상에서 방황하거나 갈등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고민을 갈등시키는 이유중 하나를 더 추가하자면 생산적 기계인간으로서 사람이 살면서 발생하는 부작용들을 젊은 세대들이 보고 자라나면서 절대로 '나는 생산적 기계인간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돈이라는 우리의 '천적'을 제외하면, 소비적 유저가 되기가 더 쉽고 편리하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사회의 지금의 아노미 상태는 사실 과거와 미래의 교차 - 과거의 사람들이 원했던 미래가 가져오는 '부작용'을 수용하는 상태일런지도 모른다.
   따라서 사실 매니아들은 자신들이 소비해야 하는 이유를 알고 있다. 문화를 즐김으로서 자신들이 원하는 욕구를  충족시킴과 함께 그들이 쓰는 소비를 통해 그 문화가 발전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히 일본 문화를 소비하기는 하지만  일본에게 돈을 주면서 문화를 소비할 수 없다'는 민족주의적인 이데올로기가 숨어있는 애니메이션 소비의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국산 만화나 애니메이션 - 그리고 동인지에 대해서는 기꺼이 돈을 지불하는 매니아들의 선택을 일반인들은 이상하게 여길 수 있으면서도, 앞으로는 쉽게 비판할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저급한 문화자본의 구축을 위한) 문화 소비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비생산성에 대한 비판은 앞으로 줄어들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앞으로 현재의 세대가 나이가 높아질 수록 더욱 감소할 것이며, 보다 더 수용적이 될 것이다. 물론 심리적인 장벽이 계속해서 허물어지지 않을 가능성은 일본에서 보듯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러한 위험성이 문화 소비의 감소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세대의 흐름 - 그리고 그에 따라 이루어질 국가의 사상적-사회적 변화 때문에 분명해 보인다.

   4. 문제는 문화 산업-소비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 근본성인 소유성, 그리고 박탈성에 있다. 이러한 문화적 소비가 이루어지는 배경에는 자신이 그 물품을 가져야 한다는 욕망과 함께 희소 물품을 자신이 쟁취해야 한다는 마음을 불러 일으키는 명품적 마케팅이 있다. 이 명품적 마케팅은 상품을 팔기 위해 사람들이 많은 돈을 쓰고서라도 제품을 구매하게 하고, 그 제품을 간발의 차로 구하지 못한 사람들, 또는 그러한 구매 능력이 없어서 구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들이 결국 다른 차선의 것이라도 구하려고 노력 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동시에 문화 상품이라는 주류이탈적인 문화가 동시에 가지고 있는 이 소유성에 대한 아이러니 또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 문제를 극단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이러한 문화 산업-소비를 완전히 폐하는 것. 또 하나는 이러한 문화 산업-소비의 공동 소비를 촉진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정부에서 완전히 문화 산업 소비를 공공재로 전환하거나, 시민의 세금을 재배분해 보조금을 주어 문화산업 소비에 따르는 상대적 비용을 감소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셋 다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은 적다. 첫번째의 경우는 오히려 금지의 결과가 그러하듯이 음성적인 재소비를 촉진시킬 것이고, 두번째의 경우는 공동의 소유 또는 순환적 사용에 공감하는 사람들만 이러한 움직임에 참여할 것이라는 한계, 그리고 이러한 소유를 불가능하게 하려는 문화 상품 자체의 특성, 그리고 문화 생산 기업의 반항이 움직임을 어렵게 할 것이다. 마지막의 경우는 시민들의 가시적 부담을 줄여주고 합법적인 대가 지불을 통한 문화 소비 확대를 불러일으키며, 기업들도 어느정도 만족시킬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동시에 세금이 늘어날 것이고, 따라서 조삼모사적 대안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올 수 밖에 없다.
   결국, 문화적 소비에 대한 완벽한 대안은 없다. 그렇다면 차선적 대안이 나와야 할 것인데, 이 또한 쉽지 않을 것이고, '주류적 시선'과 더불어 문화적 소비를 방해하는 요소는 상존하여 소비자들을 줄이고자 할 것이다. 결국 문화산업의 발전은, 그리고 다양한 하위문화의 발전은, 이 모순들을 어떻게 해결해나가는지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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