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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콘텐츠/소리들

Innocent Eyes, 개신교적으로 분석하기


들어가며

 ... 랄까 장난 같아 보입니다만 나름 진지한 분석물입니다. 그러므로 낚시글이 전혀 아닙니다.

  이 글은 Sid-Sound의 첫 오프라인 앨범인 Innocent Eyes(2007)의 주제곡이자 앨범과 동명인 Innocent Eyes를 개신교인인 필자가 저의 개신교인적인 관점에서 가사를 새롭게 해석해 본 것입니다. 이 해석 내용은 일반적인 해석 의도와 전혀 다른 것이며, 따라서 다른 사람에게 반감을 살 수 있는 내용이 존재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혹시 저작권과 관련해서 이견이 있을 수 있어서 이 부분에 대해서도 말씀드립니다. Innocent Eyes의 저작권자인 Sid-Sound[현 (주)이노센트 미디어]에도 이러한 시도를 하겠다는 언급을 관련자를 통하여 전달드렸고(이 과정에서 구두로 2차저작물의 생성을 허락받았습니다), 1차저작권을 존중한다면(아니, 그것과 상관없이) 그 위에 2차저작권을 세우는 것은 대한민국 저작권법에 의하면 전혀 불법이 아닙니다. 또한, 저는 1차저작물의 내용을 변경한 적이 없으며, 단지 이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고 있음을 통해 새로운 해석을 창출한 것임을 뿐임을 분명히 합니다.


본문 : 가사와 그 해석

서론 : 전반적인 주제

 "솔로몬의 아가라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 왕이 나를 그의 방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아 1:1-2,4a)

 
Innocent Eyes를 여러번 듣게 되면서 생각났던 부분들은 사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였다. 흔히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알아가는' 것으로 많이 표현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존재를 알아가는 것은 동시에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 중 우리에게 가장 크게 다가오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은 예수님께서 '온 율법과 선지자중의 강령'이라고 표현하시기도 했고 (마 22:37~40),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에서도 하나님의 성품을 딱 한마디로 표현한 말이기도 하다 (요일 4:8b). 사실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수없이 말하고 또다시 말하더라도 형언하거나 설명할 수조차 없는 부분이다(찬 404(304) 3절). 어쩌면 천국에 가서도 계속해서 언급해야 할 부분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Innocent eyes는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가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지, 그리고 그 만남 이후에 우리의 삶이 어떻게 바뀌는지에 대한 insight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좋은 노래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 나는, 이 텍스트 안에서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마음, 그리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자 하는 우리의 마음을 다루고자 한다.

 Innocent Eyes는 그러나 진한 사랑 고백은 아니다. 그 사랑의 대상이 하나님을 의도한 것도 아니었고, 하지만 조금씩 다가가려는 모습이다. 물론 마지막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 다가서지 못하는 죄된 인간의 습성일런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찬양이 아니다. 하지만 이 글에서 내가 시도하려는 것은, 오히려 이 짧은 텍스트에서 가지고 있을지도 모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마음, 그리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자 하는(호 6:1),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요일 4:8) 우리의 마음이다.


언젠가 그리운 하늘 아래서


 창세기에 명시되어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다 (창 1:1), 특별히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드시기로 하고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다. 이들은 하나님에게서 에덴 동산에 있는 과실을 먹을 수 있도록 배려되었다. 하지만 사단의 꼬임 떄문에 하와는 하나님께서 먹지말라고 하신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었고, 하와는 또다시 아담에게 이를 먹였다, 그리고 이들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고, 그들은 죄인이 되어 이 땅에 살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후손인 우리는 죄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의식의 여부를 떠나서) 부족한 하나님의 사랑을 찾고자 노력한다. 즉, 모든 인간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귀속본능이 존재한다. 
 따라서, 이 글에서 화자(앞으로 '나'로 대칭함)는 '그리운 하늘'이라는 말을 통해 하나님을 찾고 있는 우리를 형상화하고 있다.

따스한 구름 감싸안으며 잠들 때

  인간에게 특별히 하나님은 많은 은혜를 허락하셨다. 즉 지구에서 살 수 있도록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고, 또한 이들이 살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창조하여 부여하신 것인데(cf. 마 5:45), 이를 신학적인 용어로 일반은총, 또는 일반 은혜(Common grace)라고 한다. 반면,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 주는 특별한 은혜가 있다. 그것은 더이상 종의 영을 받지 않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특권(롬 8:45)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마귀와 영적 전쟁을 할 수 있는 특권(cf. 엡 6:10~1)이다. 이를 특별 은혜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나'는 아직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한 안타까운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모르는 새에 하나님의 그 은총을 누리고 있다. 여기에서 '따스한 구름'이라는 말이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하고 있다. 이 구름을 감싸안으며 잠드는 행동은, 화자가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있음을 알려준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애절한 속삭임

 그런데 '나'는 갑자기 애절한 속삭임을 듣게 된다. 이전에는 깨닫지 못했던 소리이다. 발견하고 싶어도 발견할 수 없었던, 아니 발견하고자 하는 마음도 없었던 소리이다.
 이것이 성령님께서 그 사람의 심령속에 역사하시는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전에는 들을 수 없었던, 성령님께서 탄식하시는 그 소리(롬 8:23)이다. 이전에 '나'는 그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 소리가 있는지 조차, 어디에 그것이 있는지 조차도 생각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속삭임은 이전부터 존재해 왔고, 그곳에 존재했다. '나'의 마음에서 울부짖고 있는 소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보고싶어 알고싶어 슬픔의 이유를

 그렇기 때문에 소리를 들은 '나'는 그 소리에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생각하게 된다. 누가 울고 있는 것일까? 왜 울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나'는 아직 어디에선가 그런 소리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그 소리가 왜 있는 것인지를 발견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바깥에서의 성령님의 말씀은 단호하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계 3:2))
 어쨌든 그것은 되어질 일이고, 아직 '나'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처음본 듯한 낯선 거리에서 / 슬픈눈을 한 그대가 나를 바라봐

 이윽고 '나'는 어느 장소 ('낯선 거리')에서 '그대'를 만나게 된다. 이 두개의 장소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단순히 어떤 낮선 장소에서 운명적인 상대를 만나는 것일까? 그 '그대'에 예수님을 대입해보자. 놀랍게도 해석은 너무나도 위대하시지만, 하나님의 예정으로 십자가에 달리게 된, 예루살렘 거리에서 십자가를 지다못해 여러차례 쓰러지게 된 한 서른 된 남자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슬픈 눈을 가지고 있었고, 십자가를 지고, 온 몸이 그의 피로 칠해져 있었다. 너무 고통스러운 가운데 걸어가던 중, 그는 '나'와 눈빛을 마주치게 된다. 그때 '나'는 어떠한 생각이 들었을까?
 그러나, 다음 부분과의 말을 고려할 때, 이러한 해석 이외에도 또 하나의 해석이 가능할 것 같다. 그것은 천국에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역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까 염려하시며 노심초사하시는 예수님과 그 옆에서 탄식하시며 구하시는 성령님의 모습이다. 그 모습이 왜곡되어서 '나'에게는 정말 낮선, 존재하지 않는, 마치 판타지 소설의 수도, 혹은 도시에서 볼 수 있는 곳에서 울고 있는 '그대'로 비취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다음 가사에서의 '그대'와 '나'의 반응이다.

가르쳐줘 꼭 끌어안는 그대 품 속을

 갑자기 '나'는 그대에 대해서 많은 호감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대'의 품 속을 갈망하게 된다. 그리고 그대에게 그 '품 속'을 가르쳐주기를 원하고 있다. 이것은 상상할 수 없는 전향이다. 이전의 해석과 연계하게 된다면, 갑자기 예수님에 대해 마음이 끌리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그 사랑의 품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사단과 세상의 공격으로 인해 그러한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씨 뿌리는 비유를 생각하라).
 그러나 이 가사의 시점에서 분명히, '나'는 그러하고 있다. 나중에 이 부분이 복선으로 작용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것은 기본적으로는 성령님의 감화로 인해 발생하는 마음의 돌이킴을 의미한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하나님의 감화에 기뻐하며, 하나님께 더욱 나가고 싶은, 그리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더 이해하고,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존재하고 싶은 마음을 일으키고 있다(불. 發心).

 (반면 '그대'의 입장에서 지금 '나'는 어떻게 비취고 있을까? 두가지 경우일 것이다. 첫번쨰는 '그대'가 '나'를 잘 알고 있는 경우. 이 경우에 '그대'는 결론적으로 신적인 존재, 즉 예수님이나 하나님 같은 존재이다. 두번째의 경우는 전혀 모르고 있는 경우이다. 이 경우 '나'가 보이고 있는 반응은 '그대'에게는 짝사랑 같은 것일 것이다. 두가지 해석 모두 다 개신교적인 해석에 도움이 될 수 있다. 특히 후자의 경우 다시 인간의 본성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보다 깊은 해석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나중에 별도의 문서로 시도하기로 하고, 지금은 전자의 해석을 우선적으로 채택하도록 한다.)

희미하게 적셔버린 눈물의 이유를

 그리고 그 하나님과의 대면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그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표상될 수 있는 '눈물'의 이유를 찾고자 한다. 그러한 이유를 알고자 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우리의 본능과 함께 성령님의 탄식이 하나되어 생겨나는 새로운 고도의 욕구이다.
 그렇다면 '눈물'의 의미는 무엇일까? 십자가의 눈물? 성령님의 탄식?(롬 8:26) 그런데 그 두가지의 가능성 모두 결론적으로는 하나이지 않았던가. 하나님의 인간을 사랑하시는 마음. 그러나 인간이 아담의 죄로 인하여 에덴에서 쫒겨나 발생한 모든 일들.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인간을 수도 없이 죽이셔야 했을 때의 슬픔들, 지금도 아직도 예수를 부인하고, 예수 믿는 사람을 조롱하고, 멸시하고, 부인하고, 때리고, 죽이고, 그리고 상처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만지고 싶지만 깊게 들어가지 못하는 사정, 또는 막고 중재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 이 모든 것이 응측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어쨌든 아직 '나'는 이를 알고 있지 못하지만, 이제 인식하게 되었다. 이것은 놀라운 하나님을 앎(호 6:3)에 대한 갈망의 진전이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기억에 스민 그 파동에

 그리고 여기에 하나님께서는 또 한가지의 역사를 '나'에게 보이신다. 그 중의 하나는 '기억'이다. 성령님의 가장 큰 능력이자 역할 중 하나가 '기억나게 하시는 성령님'이다(요 14:26). 그럼 성령님은 나에게 무엇을 기억나게 하시는 것일까.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아마 '행복했던 순간'일 것이다. 세상으로 나가 방황하기 전에 교회에서 행복하게 누렸었던 기억이 있는 사람에게 그 때를 기억나게 하실 수 있다. 또는 자신이 이전에 함께 있었을 때 행복했던 기억을 기억나게 하실 수도 있다. 그러나 성령님을 제한하지 말자. 예수님은 정말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멋진 일들을 보이시기 때문이다. 가능성은 무한하다.
 어쨌든 기억은 자신의 마음을 울리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정말 그 때가 그리웠는데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무언가 슬픈 마음이 터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눈물이 흘러나올 것이다. 그리고 울려진 마음에는 성령님의 파동이 남는다. 마음은 생명의 근원이기도 하다(잠 4:23).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여 메말라 가는, 사마리아 여인같은 마음에, 강도 만난자 같은 마음에, 진정한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이 찾아오신다, 그리고 그 터치는, 이윽고 잊을 수 없는 울림이 되어 그에게. 그녀에게 다가온다.

조심스럽게 숨겨둔 마음 그대에게 향했어

 그리하여 '나'는 이제 예수님께 다가가기 시작한다. 상처받고 메말라 있었던 마음이다. 하지만 세상의 풍조에 밀려, 종과 같이, 아니 거짓 아비의 아들로, 종의 영을 가지고 살아야 했기에, 결코 말할 수도 없었고, 표출할 수 없었던 마음이다. 그 마음을 이제 조심스럽게 예수님께 내놓기 시작한다. 꺼내놓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공개하는 폭은 점점 더 커져 나갈것이다. 예수님이 받고 그것을 치유하실 수 있다는 것을 '내'가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가사의 시점에서는 앞으로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웃음지어줘 언제나 지켜봐줘

 이제 1절을 마치고 후렴이다. 1절의 다가가는 모습들, 망설이던 모습들이 드디어 행동으로 옮겨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 중요한 고백들을 내놓기 시작한다.
 후렴의 첫 가사는 두가지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 즉 임마누엘(마 1:23)이시자 엘 엘로이의 하나님(나를 살피시는 하나님, 감찰하시는 하나님 : 창 16:13)이신 하나님이 항상 '나'를 지켜보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그분에게 자신의 삶을 내어드리는 것에 '나'가 동의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삶을 드리는 순종이며,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하나의 이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렇기에 곁에서, 가까이에서 나를 지켜보아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있다(롬 1:16, 막 8:38 & 눅 9:26). 그리고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다 (웨스턴민스터 소교리문답 #1).

그대의 온기 그대의 하늘 / 영원히 간직할수 있도록

 두번째 가사는, 또한 하나님을 마음속에 더욱 간직하고자 하는 '나'의 의지를 보여준다. 즉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직시함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을 마음에 새기고 (신 6:6, 렘 31:33)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와 실천을 보이게 된다. 그러나 연약한 육신이고 계속해서 죄를 짓기 쉽기에 우리는 성령님의 의지가 필요하게 되고, 이를 계속해서 remind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도 간직할 수 있도록, '그대'가 항상 옆에 있어주기를 원한다. 이것이 선지 에녹이나 할수 있을 것 같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요체이다.

의미없는 대화라도 익숙하진 않아도

 그러나 우리는 (다시 한 번) 연약한 존재이다. 따라서 아직 죄가 있으므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어렵다. 그나마 복음시대가 되어 이나마 나아진 것이지, 이 전에는 솔직히 소와 양을 잡는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지 않았던가? 지성소에 접근만 해도 죽을 수 밖에 없었던. 하나님을 보는 것이 죽음이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 비하면 우리는 너무나도 복을 받은 존재이다. 하지만 역시 우리도 하나님께 다가가기 어렵다.
 기도를 한다고는 하지만 맨날 비는 내용이 기복신앙적인 이야기니 속 깊은 이야기를 하나님께 털어놓기는 쉽지 않다. 경건생활도 하기 어렵다. Sunday christian이라는 말이 왜 생겼는가.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묵상하고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포기하기 쉽다. 이 가사는 이와 같은 우리의 연약함을 조명하고 있다.

그 목소리가 그 눈동자가 가장 좋으니까

 하지만 연약하고, 성장하지 못한 사람이라도, 어린 아이라도 예수님이 좋다고 당연하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가슴 깊이는 아닐지라도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나'도 '그대'가 끌려진다. 아직 그 깊이는 깊지 않다. 하지만 그는 끌려지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있다. 좋아하고 있다. 그래서 그 목소리와 그 눈동자를 가장 좋아하는 것이다. Just that is(그것 뿐이다).

지금은 단지 그걸로 좋아

 네. 고로 제발 '나'를 과소평가하지 말자. 하나님꼐 나가가는 것을 그만 둔다고 비난하지 말자. 우리도 항상 하나님꼐 나아간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진정으로 자신을 깨부스며 나아간 적이, 열정으로 하나님꼐 예배드린 적이, 눈물 흘리면서 기도한 적이 얼마나 되는가? 아마 항상 그래야 한다면 그리스도인이 될 사람은 한명도 없을 것이다. 항상 열정적이어야 하는, 신앙생활을 가질 수 없는 것은 우리가 더욱 잘 안다.
 He's changing me라는 노래를 알 것이다. 그 말 그대로이다. '날마다 주의 형상대로 변화되'어 가고 있는 우리이다. 그렇기에 너무 많이 바라지 말자. 너무 많은 은사. 너무 많은 은혜. '이방인들이나 구하는 것'을 구하지 말자. 단지 지금 상황에 만족하는 삶을 살자.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고, 내가 원하(고자 하)는 나의 삶에 대한 계획이다.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다해도

 그러나 그러한 만남은 더이상 이어지지 못하고,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곳을 떠나야 했다. 그리고 다시 그대를 만날 수없게 되었다.
 여기에 대해서 두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그러한 상황이 마치 하나의 꿈같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 된 것으로서, 이러한 만남은 단지 환상으로서 '나'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즉 예수님을 만났지만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두번째로는, '나'가 정말 '그대'와의 만남을 통해 사명을 받고 보내심을 받은 것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이 내용은 왜인지 찬송가 442(499)장 "저 장미꽃 위의 이슬" 3절을 기억나게 한다.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나 하나,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참고로 처음에는 나도 전자의 해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진행을 하는 과정에서 후자의 관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여기에 대한 최종 판단은 독자의 상상과 판단에 맡긴다. 그러나 일단 진행을 위해 전자의 관점에서 나머지 가사를 인식해 보자.
 이제 예수님과 만나는 기억은 사라졌다. 그리고 '나'의 기억에서 잊혀졌을 지도모르겠다. 어쩌면 정말 나도 인지하지 못한 무의식 속에서 일어난 것일 수도, 순간적인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아직 하나님을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하나님께 다가갈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알게 되었다 - 그러한 사실이 있었다는 것을.

상냥한 바람 모든걸 간직할테니

 그러나, 설령 전자와 같이 되었다고 해도, 실망하지는 말자. 그것은 그와 '그대'와 만났던 기억은 그에게 남아 있어서, 그를 결코 떠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항상 같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바람'은 성령님에 대한 매개체로 해석될 수 있다 (요 3:8, 그리고 다시 한 번 요 14:26.)

결코 사라지지 않을 작은 메아리가 / 기억속의 꿈을 향해 같이가 줄테니

 위 가사도 나와 같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성령님을 상기하게 한다. 그리고 '기억속의 꿈'을 통해, '나'가 예수님에 의해 예수님을 더욱 더 알고 신뢰하도록, 그리고 마침내 의인의 종말인 천국으로의 길, 즉 신앙생활에 부르심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메아리'는 사라질래야 사라질 수 없으며, 오늘도 나와 함께, 여러분들과 함께 같이 계시기 때문이다. (히 13:8)
 하지만 그 메아리가 작기 때문에, 우리는 세밀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왕상 19:12). 그러나 그 하나님의 음성은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왜냐하면 어제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며, 이후에도 계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계 4:8).

더이상 낯설지 않은 추억이 잠긴 거리에서

 그러기 때문에 내가 있는 자리는 더이상 낯설지 않게 되었다. 자신이 하나님과 만났던 그 자리가 자신에게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야곱이 하나님을 만났던 벧엘(창 28:10~22)과도 유사한 작용을 한다. 자신이 하나님을 만났던 자리가 다시 그를 하나님의 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즉, '낮선 거리'가 이제는 떠나고 싶지 않은, 떠났다가도 다시 돌아오고 싶어지는 '추억이 잠긴 거리'가 되는 것이다.

조심스럽게 숨겨둔 미래 함께 이루는거야

 그리고 그는 이제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는다. 열방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가운데 이루시기 원하시는 그 미래를,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쉽게 인정하지 못할 미래를 위해 같이 나아가기로 작정한다. 그리고 그렇게 나아가자고 동시에 '그대'에게 마음 속으로 외치고 있다. 비록 그 미래가 조심스럽게 숨겨두어야 할 것인지는 몰라도, 꿈꿀 수 있는 것은 이제 '나'가 내면에 있어서 많은 변화를 가지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언제나 웃음지어줘 언제나 지켜봐줘

 위의 내용과 동일하다.

희망을 향한 낯선 길에서 쓰러지지 않을 수 있도록

 그래서 우리는 그 하나님의 나라를 ('희망') 향하여 달려간다. 열방을 향하여 달려나가기 원하므로 그 길은 낮선 길이 될 수 밖에 없다. 아골 골짝 빈들이 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 곳에서 쓰러지지 않을 수 있도록 받쳐주시는 성령님을 '나'는 지금 이 시간에 구하고 있다.

빛나는 하늘을 향해 잠든 날개를 깨워

 하나님의 나라 ('빛나는 하늘')을 향해 이제 달려가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았던 날개까지 벌려 달려가고 싶다고 한다(행 20:24). 우리는 하나님께 창조받은 존재이다. 따라서 우리가 낼 수 있는 최대의 힘을 내는 것도, 그리고 자신의 능력과 지식도 모두 예수님께 있다. 그리고 그 '날개'(잠재의식에 숨겨져 있는 위대한 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를 '깨우'는 것은 하나님의 허락하신 섭리 안에 있는 일이다.

다시 한걸음 미래를 향해 다가가는 거야

 그러기에 작은 발걸음 하나의 중요성이 있는 것이다. 작은 발걸음 하나하나는 변화를 주지 않지만, 작은 발걸음들이 누적되었을 때 행로와 방향은 크게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는 명심보감 계선편의 "一日行善, 福雖未至, 禍自遠矣. 一日行惡, 禍雖未至, 福自遠矣."을 생각나게 한다.

슬픈 순간들 소중한 기억들 이젠 절대로 잊지않아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함께 한 시간은 내가 아닌 사람은 누구도 겪지 못할 시간이다. 하나님과 함께 지냈던 고난도, 슬픔도, 기억도, 환한 웃음도, 편안한 시간도, 고통의 시간도 모두 주님이 있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러한 시간들을 기억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사실들을 기억하는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 삶속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존재하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맡겨드리는 것이다. 더군다나 성령님의 역할 중 하나가 '기억나게 하시는 성령님'이라는 사실을 추가하여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기억하는 것은 중요한 역할을 점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 장빈 간사님의 [ 기기천 시리즈 ], ⓑ 그리고 할 일이 딥다 없다면 [ dnatree ]를 참조하기 바란다. 참고로 후자는 몰몬교(예수그리스도 후기성도교회) 교도 사이트다. 믿음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흔들릴 가능성이 높으므로 보지 않기를 추천하지만, 믿음이 바로 잡혀있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기록하는 것에 있어서는 이 사이트를 넘어설 곳이 아무곳도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간주
(언제나 웃음지어줘 언제나 웃음지어줘
 언제나 웃음 제나 웃음 제나 웃음지어줘
 언제나 웃음지어줘 줘줘줘줘줘줘줘줘줘줘줘줘줘줘)

 작곡자는 간주에서도 노래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 물론 이것이 녹음된 것이 아니라 편집된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간주의 노래에서 작곡자가 편집을 통해 의도하는 것은 무엇인가? '언제나 웃음 지어줘'라는 하나의 말이다. 왜 강조하게 되었는가? 언제나 웃음지어주면서 맞아주는 누구. 같이 있어줄 누군가를 찾기 위하여 의도하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군가'를 찾지 못하는 우리는, 그 영적인 욕구를 누군가 채워줄 것을 기대하면서 돌아다닌다. 하지만 가끔씩 일시적인 충족을 얻을 뿐, 완전한 충족은 얻지 못한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진정한 충족은 예수님만을 통해서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후렴 1, 후렴 2
(언제나 웃음지어줘 언제나 지켜봐줘
희망을 향한 낯선 길에서 쓰러지지 않을수 있도록
언제나 웃음지어줘 언제나 지켜봐줘
그대의 온기 그대의 하늘 영원히 간직할수 있도록)

 이제 노래의 끝부분이다. 세세한 내용도 여기에서 봤고, 강조에 대해서도 윗 단락에서 논했으므로 패스.

더이상 망설임 없이 껴안아 주고싶어

  그런데 위 후렴 1,2 에서 생각하지 못했던 충격적인 말로 이 노래의 피날레가 이루어지게 된다. 망설임 없이 나의 '사랑'을 껴안아 주고 싶다는 것이다. 물론 누구도 하나님을 예수님을 껴안을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가 천국에 올라가게 되었을 때, 우리는 껴안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을 누구보다 더욱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 것이 무엇보다 이 노래가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하지만, 동시에 두번째 해석이 존재한다. 아직 예수님을 알지 못하지만, 그분을 껴안고 싶다는 점에서, 아바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하고 떠돌면서, '껴안아 주고 싶은 사람'을 찾아다니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갈망은 아직도 가지고 있다. 결국은 죄 가운데서 빠져서 헤메는 사람의 깊은 심정을 대변해주는 것일런지도 모르겠다.

그 목소리가 그 눈동자가 가장 좋으니까

 패스.

지금은 단지 그걸로 괜찮아

  이제 노래의 마지막 단락이다. 그런데 이 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상당히 고뇌에 빠지게 되는 구문이다. 그 이유는, ① '그걸로 괜찮아'에서의 '그것'이 정확히 어떠한 상태인가, ② '나'의 입장과 위치는 미래지향적인가, 아니면 현재보수적인가, 라는 사실을 정확히 구별해낼 수 없는 데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이 해석의 난점은 우리가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다 해도' 구문부터 가지고 있던 전자와 후자의 큰 갭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는 일단 전자를 따르기로 했으니 다시 전자의 관점에서 돌아가서 보도록 하자.
 그런데, 그렇게 된다고 해도 위의 두가지 질문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거'ㅅ이라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인가? 하나님과 멀리하고 있는 상태 그대로 인가? 아니면 다가가고자 하는 상태인가? 아니면 그냥 방황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냥 일시적으로 상황을 봉합하고자 하는 것인가? 나의 입장은 그래서 이 상황을 해결하고자 하는건가? 아니면 외면하는건가? 아니면 어쩔줄 물라하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독자 여러분들께 맡긴다.
 (개인적인 전자의 입장에서의 답은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으나 다가가지는 못하는 보수적인 상황'이다.)

추억은 이제 영원히 있어

  마지막 문장에서 '나'는 가장 중요한 발언을 남기게 된다. 마치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정확하게 깨달은 사람처럼, 비록 내가 주님을 알고 있지 않을지라도, 주님이 나를 보호하심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했던, 삶의 모든 순간들이 영원히 주님께 있음을 '나'가 느끼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므로, 우리가 했던 모든 말과 행동, 그리고 생각 모두가 예수님께 있으며(시 139, 특별히 :1~4) 그곳에서 다시 경험할 수 있음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하나님은 존재하고 계시고, 우리는 그분의 특별한 준비에 의하여 창조되었고, 그 삶과 행동 모두가 하나님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에 의해서도 거절될 수 없는 것임을, 이 마지막 구절은 잘 지적해내고 있다.

결론

 그러므로, 이 노래는 드러나지 않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경륜, 그리고 모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작자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이 직선적으로 표현되거나, 정확하게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이 곡 자체가 그러한 의도를 가지지 않았고, 따라서 많은 경우에서 보는 것과 같이, 진리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에서 일시적인 진리를 찾아낼 수 있지만, 그 진리가 진리로서 비그리스도인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낮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분석을 통하여 우리는
    1) 진리를 감안하고 쓰여지지 않는 글에서도 충분히 진리가 발견될 수 있고,
    2) 그 진리가 충분히 설명되었을 때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는 두가지 관점의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 또한 우리는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그리고 경륜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다루었다. 그것으로 하나님께 감사하자. 그리고 하나님이 이 글을 통하여 어떠한 이들에게 하나님을 더욱 계시하여 주실 것에 대하여 기대하자.

2008. earpile de arsle.

후기
 
  블로그 포스팅 상 쓰는데 가장 김을 들였고 (2008년 2월부터 시작했으니 10개월을 달렸군요. 구상은 2007년부터 하고 있었습니다만..), 그만큼 노력한 글입니다. 드디어 이글이 끝나 세상에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퇴고를 할 짬도 나지 않고 이렇게 올렸으니, 당연히 처음에 썼을 때와 지금의 논조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혹시 이 글에 대해서 자세하게 코멘트 해주실 분이 있다면 환영할 일입니다. 또는 내용에 있어서 궁금한 사항이 있다던가, 토론등의 feedback이 있으셔도 환영합니다. 수정사항도 환영합니다. 다만 문제가 있을 사항은 알아서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젠 그만 발행해야죠. 글쓰느라 지겨웠..()